[경제 전망]
입체분석
 
한국경제, IMF보다 더 두려운
'R의 공포(리세션, 경기침체)'에 얼어붙나
 
■ IMF 금융위기나 베네수엘라式 인플레보다 저성장 지속 위기감 높아
■ 美·中 무역 분쟁에 휘둘리는 한국 산업 구조, 환율 불확실성도 고조
■ 정부는 예산으로 내수 촉진 유도…국가 재정 건전성 깨진다는 우려도
■ 화폐가치 하락, 수출 부진, 부동산 시장 불안, 일자리 부족 등 첩첩산중
저금리 시대에 안전자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시는 폭락하고, 환율은 급등하는 등 한국 경제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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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 경제는 어디에 서 있는가.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복합적 악재로 발생하는 경제위기)의 초입인가, 서서히 스며드는 ‘R(Recession, 경기후퇴)의 공포’에 질식돼 가는 것인가. 극적으로 턴 어라운드(Turn around, 실적개선)를 해내는 저력을 보여 줄까. 가장 두려운 지점은 악재 그 자체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 은행 등 그 어디도 내 재산을 확실히 지켜 준다고 담보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현기증 나는 한국 경제의 변동성
악재는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2019년 여름, 한국 경제는 연일 출렁였다. 7월 18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p 낮췄다. 1.75%에서 1.50%로 내렸다. 시중에 풀려 있는 돈이 1100조원 이상이다. 부동산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추가 금리 인하까지 시사했다. 저금리와 저성장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7월 25일: 한국은행은 ‘2분기(2019년 4~6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분기 대비 1.1%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장은 호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분기 +0.1%p를 기록한 민간 부문 성장률이 -0.2%p로 후퇴했다. 반면 1분기 -0.6%p였던 정부 부문은 +1.3%p로 전환됐다. 재정지출에 기댄 ‘인위적’ 숫자라 할 수 있다. 7월 31일: 수출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2분기(4~6월) 실적을 공개했다. 매출 56조1300억원, 영업이익 6조6000억원. 1년 전 2분기 대비 영업이익이 55.6% 줄었다. 반도체 부문은 70.7%, IT와 모바일 부문은 41.6%씩 영업이익이 꺾였다. 7월 31일: 경제가 잘나가는데도 미국이 금리를 0.25%p 내렸다. 2008년 12월 이후 10년 7개월만의 금리 인하였다. 달러 가치를 전략적으로 떨어뜨린다는 메시지다. 2020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른 나라 사정 봐주지 않고)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글로벌 저금리 시대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8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수출이 8개월째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7월 수출액은 1년 전 7월에 비해 11% 줄어든 461억3600만 달러였다. 반도체, 석유화학 등 우리 주력 수출품이 부진했다. 최대시장인 중국(-16.3%)으로의 수출 감소가 두드러졌다. 8월 2일: 일본이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 수교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다. 8월 5일: 한국 증시에 ‘검은 월요일’이 닥쳤다. 일본 수출 규제와 미·중 무역·통화 전쟁이 얹혔다. 이날 하루만 총 49조2000억원(코스피 33조5000억, 코스닥 15조7000억)이 증발했다. 코스닥(569.79)은 4년 7개월 만에 최저치로 하락했다. 코스피도 2000선이 붕괴(1946.98)됐다. 환율은 달러 당 1200원을 돌파(1215.3원)했다. 8월 12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발표를 강행했다. 규제로 집값을 잡겠다는 노선을 선명히 했다. 8월 15일: 미국 다우지수가 하루 만에 800.49p 빠졌다. 2007년 이후 최초로 2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10년 만기 국채 금리보다 높아진 ‘역전 현상’이 빚은 여파였다. ‘미국마저 저성장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시장의 우려가 패닉(panic)으로 발전했다. 16일 미국 소비지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돼 일단 진정됐지만 불씨는 남았다.
8월 7일 명동 은행회관에서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가 열렸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왼쪽부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홍남기 경제부총리,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모였다. |
현상 01. 글로벌 저금리 시대
망하진 않는다. 화폐가치가 하락할 뿐이다.
주가가 급락하고 환율이 치솟으면, 조건반사적으로 제2의 IMF나 베네수엘라 괴담이 활보한다. 8월 초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채권시장도 예·적금처럼 만기가 길수록 이자가 올라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의 3년 만기 국고채 금리(8월 7일 시점 기준 1.155%)는 1년 만기(1.26%)보다 낮았다. 장보형 KEB하나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경제가 위험했다면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튀어야 했다”며 “성장력 약화에 (투자자들의) 초점이 쏠린 결과”라고 진단했다. 3년 이상 장기 국고채 금리가 낮은 것은 곧 ‘한국 경제가 급격히 추락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시장(외국인 포함)의 시각을 반영한다. 수익률이 1.155%임에도 국고채를 구입한 투자자들은 ‘3년 후 시점에 한국의 금리가 1.155%보다 아래일 것’이라고 베팅한 셈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갈수록 금리를 더 낮출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측한 것이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금리가 낮아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미래의 불황을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금리 시대의 지속은 곧 저성장의 지속을 뜻한다.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은행은 계속적 금리 인하를 예고하고 있다. 시중에 돈을 풀어서(양적완화)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경기부양)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저금리 기조는 글로벌 대세이기도 하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 이어 뉴질랜드, 인도 등이 가세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금리 인하가 임박했다. 중국도 미국의 관세장벽에 맞서려면 완화적 통화정책 채택이 유력하다. 이런 물결을 수출의존 경제국인 한국이 거스를 수 없다. 한국의 고민은 추가로 금리를 낮춰 봤자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데 있다. 익명의 금융계 전문가는 “정부가 시장에 돈을 퍼부어도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말했다.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체 내에서 피가 안 만들어지는데 외부에서 수혈만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돈이 돌아서 부가가치를 생성하는 순환 시스템에 중대한 오류가 잠복해 있다는 적신호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 시중은행에 줘 봤자 돈을 빌려 갈 데가 없다. 가계는 주택담보 대출 규제에 막혀 있다. 대기업은 사내유보금을 비축했는데 굳이 필요가 없다. 어려운 기업에는 (돈을 떼일까 봐) 은행이 빌려 줄 수가 없다. (돈이 돌지 않는데) 국가 재정(2019년 470조원, 2020년 최대 530조원 예상)을 풀어 봤자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대한민국 전체 근로자 2800만 명 중 20%인 600만 자영업자의 장사가 안 되니까 내수 소비가 안 되는 것이다. 정부가 복지에 꽂는 돈보다 이쪽에서의 감소가 훨씬 크다.” 또 하나 저금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위협은 자산으로서의 화폐가치 하락이다. 체감물가와 별개로 통계로 나타나는 소비자물가는 안정적이다. 이 차원이 아니라 원화를 주식, 부동산과 같은 하나의 자산으로 여길 때 가치하락은 극명해진다. 이를테면 불과 몇 년 전 10억원으로 구입할 수 있었던 강남 집을 지금은 20억원을 써야 하는 현실이 그렇다. 단순히 집값이 2배 올랐다고 보면 착시일 수 있다. 자산으로서 원화 가치가 부동산 가치보다 하락했다고 봐야 저금리 시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현상 02. 미·중 무역전쟁과 환율
제2의 IMF 사태보다 ‘트럼프 리스크’가 위협적
8월 13일 달러당 원 환율은 1222.20원이었다. 3년 5개월 만의 최고치였다. 금리를 낮추면 수반되는 위험이 환율 상승이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가치가 떨어지는 원화를 팔고, 달러로 환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제 불능으로 흘러가면 우리 외환 보유고가 고갈될 수 있다. IMF도 그렇게 온 것이었다. 다시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고자 금리를 올리면 부동산이 폭락하고, 대출자들은 줄파산하는 악몽이 펼쳐진다. 이미 한 번 겪어 봤기에 우리 정부와 국민은 그 고통을 안다. 이후 우리 정부는 4000억 달러 이상의 외환을 비축해 놨다. 캐나다·호주·스위스·UAE·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중국 등과 통화 스와프(맞교환)도 맺었다. 이 중 캐나다와는 한도와 만기가 없는 협정을 체결했다. 한때 700억 달러의 스와프를 약속했던 일본과는 2015년으로 계약이 종료됐다. 대신 중국과 560억 달러 규모의 스와프를 2020년 10월까지 해 놨다. 시중은행 현역 외환딜러는 “환율 마지노선은 달러당 1250원”이라며 “급등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장보형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미·중 무역분쟁이 커져서 글로벌 경기가 위축되고, 중국 경제가 둔화하면 우리도 원화 약세를 유도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약(弱)달러를 공공연히 선언했다.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때렸다. 이러니 한국의 원화 약세를 방임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의 외환 수급은 건전한 편이다. 환율의 무게중심은 아래쪽인데 대외 불확실성이 커져 올라가는 것이다.” 환율이 낮아지면 수출 가격경쟁력이 올라가는 이점이 생긴다. 일본이 엔고(高)로 가는 상황인지라 더 유리하다. 트럼프는 더 이상 일본의 엔저(底)를 용인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2013년 시작된 아베노믹스(제로금리·양적완화)가 고비에 직면한 것이다. 일본의 수출 제재로 한국 내 반일정서가 비등하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진짜 혈(穴)은 일본보다 미·중 무역·통화 전쟁이다. 한국 원화는 글로벌 경제 위축 시 가장 타격을 받는 화폐로 알려져 있다. 국제경제 동향에 한국이 민감할 수밖에 없다. 미·중 갈등이 확산되고, ‘차이나 리스크’가 현실이 되면 우리 경제에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10년 주기 위기설’이 재연될 수도 있다. 중국은 8월 5일 위안화 가치를 달러당 7위안 아래로 내리는 반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관세폭탄’을 상쇄할 목적이었다. 그러자 미국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다만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예상보다 덜 떨어뜨렸다. 8일 중국인민은행은 1달러당 7.0039위안으로 고시했다. 미국과의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시그널로 시장은 받아들였다. 세계무역기구(WTO) 조사보고서는 ‘글로벌 무역 분쟁이 악화되면 2022년 한국의 실질 GDP는 3.34%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미·중 갈등이 심화할수록 한국 경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힘겹게 되는 구조다.
8월 13일 2020년 예산안 편성 당정협의가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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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03. 530조 超수퍼예산안
국가 재정을 통한 돌파는 언제까지?
수출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국내수요는 어떨까.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은 실질적인 내수 촉진책이다. 문 정부는 2018년 429조원, 2019년 470조원 예산을 편성했다. 최근 5조8300억원의 추가경정 예산을 보탰다. 그리고 2020년 510조~530조원으로 정부 지출을 늘릴 계획이다. 민주당 경제통인 최운열 의원은 “언제까지 정부 주도로 버틸 순 없다”라면서도 “그렇다고 민간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데 정부가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진짜 좋지 않은 성장률 숫자가 나온다”고 어려움을 말했다. 최 의원은 “성장의 불씨를 살리는 것은 정부의 임무다. 확장적 재정정책의 필요성이 커졌다”라고 덧붙였다. 문 정부는 2019년 상반기에만 재정의 65.4%를 지출했다. 그러나 목표했던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관해선 물음표가 붙는 실정이다. 경제가 호전되지 않는 현실에서 기업과 국민에게 세금을 더 걷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노인, 청년, 의료, 육아 등에 관한 복지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정책일 터다. 그러나 구조조정과 노동개혁, 규제완화 같은 성장통을 수반하지 않는 재정지출이고 금리 인하라는데 근원적 환부가 자리한다. 남성일 서강대 교수의 지적이다. “계속 돈만 집어넣어서 될 일이 아니다.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돈을 안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육아수당을 나눠 주면 부모들은 ‘애들 돈인데 어떻게 쓰느냐’며 저축하는 식이다. 아직 위기가 오지도 않았는데 사람과 돈이 한국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불안하니까 부동산(상대적 안전자산)으로 돈이 몰리는 것이다. 더 불안하면 달러, 해외부동산, 해외채권 등 해외 자산으로 가 버린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다.” 자산가들은 강남 부동산, 달러, 엔, 금, 은 같은 소위 ‘안전자산’에 재산을 묻어 놓고 있다. 투자 이득을 보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자산가치의 ‘방어’ 성격이 강하다. 불안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정부가 돈을 무한대로 찍어 낼 수 있다면 어떨까. 인플레이션 부작용만 없다면, 고용을 확대할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도 벌일 수 있고 복지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 사이에서는 MMT(Modern Monetary Theory, 현대화폐이론)가 세를 얻고 있다.
[뉴스위크] 일본판은 7월 23일 ‘금융의 미래인가, 아니면 독약인가’라는 제목으로 MMT를 소개했다. MMT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독자적 통화를 가진 국가라면 정부채무가 아무리 증가해도 채무불이행에 빠지지 않는다’, ‘정부가 채무를 갚아야 할 상황이 생기면, 또 돈을 찍어내면 된다’, ‘국가는 채무(재정적자)를 걱정할 필요 없이 일자리 증가와 복지 강화에 목적을 두고 재정정책을 펴야 마땅하다’, ‘다만 인플레이션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등의 전제 위에 성립한다. 한마디로 MMT는 건전재정이 아니라 재정확대에 방점을 찍는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의 경제참모였던 스테파니 켈턴 뉴욕주립대 교수가 MMT의 설계자로 꼽힌다. MMT 추종자들은 일본의 아베노믹스를 두고 “MMT의 유효성을 실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실제 일본은 국가채무가 GDP의 240%에 달하지만, 돈을 아무리 풀어도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았고, 경제가 완만하게 회복됐다. 그러나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MMT를 “주술경제학”이라고 일축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몰고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계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도 서머스와 같은 의견이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3년부터 일본은행 총재를 맡아 양적완화를 진행한 구로다 하루히코도 정작 MMT에 관해선 “극단적 주장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MMT 비판자들은 ‘빚으로 만든 천국은 없다’고 단언한다. 일시적인 달콤한 유혹에 빠져 적자재정을 남발하다간 베네수엘라처럼 돈이 휴지 조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MMT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에선 정책화하기 어렵다. 다만 큰 정부(국가재정을 통한 민생해결)를 지향하는 진보 진영에서는 흡인력을 가질 수 있다. 그동안 역대 정부는 GDP 대비 적정 국가채무 비율 40%를 지켜 왔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40%가 마지노선이라는 근거가 뭐냐”고 반박하며 재정 확장을 관철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재정 팽창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라며 “이로 인한 부채증가는 미래세대의 부담이다”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김 전 위원장은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수당 등 국가 보조금을 다 합쳐 1100만 명 가까이 수령하고 있다. 명분은 있겠지만 정부의 재정을 이용한 (총선용) 매표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라고 바라봤다.
현상 04. 리디노미네이션
왜 ‘화폐단위 개혁’ 괴담은 수그러들지 않을까?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7월 1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해야 할 이유도 있겠지만 문제점이 너무 크다”라며 “인플레이션 우려, 경제 주체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따져 본다면 경제 활력을 되찾아야 할 시점에서 검토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한다”라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데 동의하는가?”라는 백재현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당장은 안 하겠다는 맥락이지만 정부, 여당은 완전히 불씨를 꺼 놓지 않고 있다. 조장옥 명예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장롱에 숨어 있는 돈을 찾아내겠다는 것”이라고 목적을 풀이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최대 명분은 지하경제를 청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5만원권이 발행에 비해 시중에 적게 유통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통한다. 세탁된 비자금처럼 부정한 돈이 돌지 않고, 어딘가에 잠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화폐단위를 바꾸면 이런 돈을 단번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수 있다. 지상으로 돈을 꺼내 놓든지, 다 잃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 문재인 정부의 ‘정의론’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조 교수는 부작용을 더 우려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 제 역할을 못 할 때나 하는 것이다. 화폐단위가 무슨 문제인가. 박정희 때에도 했는데 실패했다. ‘혁명’을 했는데 개발자금이 없으니까 한 것이었다. 엄청난 돈이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없었다. 디노미네이션은 인플레가 높다든지 그럴 때 하는 것이다. 경제혼란만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약 3달 전, 시중에서 금과 달러의 사재기가 있었다. 리디노미네이션 소문이 진원지였다. 시중에 돈이 계속 풀려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경제 민심이 흉흉할수록 정부 의도와 무관하게 리디노미네이션 괴담은 사그라지지 않을 터다.
현상 05. 일본의 무역규제와 수출
고동진 삼성전자 IM부문 사장은 ‘2020년 삼성의 위기’를 경계하고 있다. |
삼성전자, “‘내년은 위기’라는 말, 처음으로 꺼낼 때” 일본은 8월 7일 한국을 수출심사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관보에 공포했다. 다만 시행세칙(포괄허가 취급요령)에 추가 규제 품목을 지정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당장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언제든 한국으로의 수출을 ‘방해’할 수 있다. 이미 7월 4일부터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반도체 소재(고순도 불화수소·포토 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처럼 향후 1100여 개 품목 조달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일본은 8월 8일에야 포토 레지스트에 한해서 수출 허가를 내줬다. 한국을 주요 구매처로 두고 있는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의 사정도 고려한 조치다. 글로벌 경제는 연결이 특징이다. 일본이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를 정밀 타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 회사로부터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공급받는 세계 시장이 좌시하지 않는다. 또 이들 회사에 부품을 공급해 먹고사는 일본 업체들이 우회수출 제안을 먼저 꺼내는 것이 현실이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일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SDI·삼성디스플레이 등 주요 전자·부품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한 회의에서 “긴장은 하되 두려워 말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라고 다짐했다. 삼성은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벨기에에서 6~10개월 치 포토 레지스트 재고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2019년 1분기(6조2333억원)와 2분기(6조6000억원) 실적 발표에서 영업이익이 6조원대를 기록했다. 2018년 1분기(15조6422억원)와 2분기(14조8690억원) 영업이익과 비교하면 반 토막이 난 셈이다. 2018년 3분기(17조5749억원)와 4분기(10조8006억원) 때도 영업이익이 10조원을 넘겼다.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IM 부문)은 “‘내년은 위기’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낼 것 같다”라며 “일본의 수출 규제가 지속된다면, 스마트폰 사업이 3~4개월 후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의도 애널리스트 사이에서는 “과거 2년간 반도체 수퍼사이클을 맞아 삼성의 실적이 지나치게 좋았다”라는 해석도 들린다. 현재의 영업이익 감소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과도하다는 시각이다. 신세돈 교수는 삼성이 창사 이래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고 보는 쪽이다. “하이엔드 기술력을 갖춘 품목의 경쟁력은 이어 갈 것이다. 그러나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입주한 일본 하청업체들의 도전을 받을 것이다. 삼성의 전성시대는 작년을 기점으로 꺾였다. 일본 소니가 쇠락한 길로 갈 수도 있다. 휴대폰은 이미 꺾였고, 메모리 반도체도 5년이면 중국이 따라올 것이다.”
현상 06. 민간 분양가상한제와 집값
민간 분양가상한제가 실시되면 재건축·재개발 위축이 불가피하다. 이미 철거가 진행 중인 강동구 둔촌 주공아파트는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
부동산 정책인가, 부동산 정치인가?
역대급 초강력 규제책이 1년 전 9월 13일 나왔다. 그러나 약발은 채 몇 개월을 못 갔다. 대출 규제와 보유세(종합부동산세, 재산세) 인상으로도 좋은 입지에 거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제어되지 않았다. 특히 서울 집에 대한 수요는 충만한데 공급이 따르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공급 확대가 아니라 수요를 억제하는 정책 방향성을 강화했다. 그 ‘끝장판’이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도입이다. 국토교통부는 8월 12일 ‘10월부터 서울·과천·분당 등 전국 31곳 투기과열지구 민간 택지에 짓는 아파트에도 분양가 상한제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면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일반 분양이 이뤄지게 된다. 분양가격이 낮춰진 만큼 기존 조합원들이 부담하게 될 액수가 올라간다. 이에 비해 청약자들은 일반 분양에 당첨되기만 하면, 입지 좋은 아파트를 시세보다 거의 반값에 입주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의 ‘로또’인 것이다. 분양가상한제의 효과를 두고 극과 극의 예상이 맞선다. 정부는 미래의 신축 아파트인 재건축·재개발을 묶어 놓으면 기존 주택 가격도 따라서 잡힐 것이라고 본다. 재건축·재개발이 사실상 스톱되면 수요·공급 불일치가 심화돼 기존 5년 이하 신축과 서울 역세권 구축 가격이 갈수록 올라갈 것이라고 보는 반론도 만만찮다. 청약 당첨을 기대하는 무주택자들이 집을 사지 않고 전·월세로 몰리면 전·월세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규제로 막으려 든다면, 이번에는 세입자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왜곡된다. 이상우 유진투자증권 부동산 애널리스트는 “분양가상 한제는 시장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M2(유동성)도 PIR(연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도 부동산 가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서울 집값이 오르는 이유는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즉 좋은 입지의 쾌적한 집이라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여력을 지닌 실수요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관점이다. 그 실수요자는 꼭 한국 사람이 아니라 교포, 외국인일 수도 있다. 2020년 4월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은 집을 가진 사람의 표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보유세 인상, 세입자끼리의 집 구하기 경쟁을 유도하기에 십상인 전·월세 상한제와 갱신제, 그리고 무주택자의 반발이 극심할 전세 대출 제한은 실효도 장담할 수 없거니와 정치공학적으로도 꺼내기 부담스러운 카드다. 결국 ‘집값을 잡는다’는 임팩트를 강하게 줄 수 있고, 비교적 소수에 속하는 재건축 조합원들을 겨냥해 민간 분양가상한제가 나왔다는 비판론이 나온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이 “문 정부는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부동산 정치를 하고 있다”라고 꼬집은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익명의 경제 전문가는 “수출이 안되면 내수라도 뚫어야 한다. 내수 활성화 대책 가운데 으뜸은 건설경기 부양인데 이 정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주택을 짓지 못하면 건설사들도 힘겹겠지만 해외수주 등 포트폴리오가 다각화돼 있어 그나마 버틸 여력은 있다. 오히려 국내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 직격탄은 건설 노동자들로 향할 개연성이 높다.
내수경제 침체는 결국 소비 시장의 위축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그 원인으로 자영업자들의 폐업을 꼽는다. |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안녕한가?
문 대통령은 8월 13일 국무회의에서 “근거 없는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 과장된 전망으로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여러모로 경제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면서도 “세계적인 신용평가 기관들의 일치된 평가가 보여 주듯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은 튼튼하다”라고 강조했다. 실제 무디스, 피치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신용평가 회사들은 우리 경제의 지난 실적을 가지고 평가할 뿐이지 우리 경제 앞에 놓인 위험은 보지 못한다”라고 반박했다. 유 의원은 “기초체력의 가장 정확한 척도는 잠재성장률인데,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보다 불확실성이 한국 기업의 모멘텀에 부정적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시국에 문 대통령에 관한 여론조사 지지도는 50% 안팎을 기록 중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나쁜 시장이 착한 정부보다 낫다”라고 설파했다. 문재인 정부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메커니즘은 정의와 호환되지 않는다. 2019년 1월 2일 시점과 대비해 8월 14일 코스피 지수는 71.63p, 코스닥 지수는 72.22p가 하락했다. 달러당 환율은 93.7원이 올랐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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