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 욘 포세 / 박경희 / 문학동네
누군가의 삶을 여는 것과 닫는 것에 대한 노래라고 할까?
한 사람의 인생이 아버지의 읊조림과, 한 여인의 비명을 배경음악으로 삼고 시작한다. 그 고통은 차마 딸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정작 태어나는 사람, 본인에게는 어떠한 수사도 요구할 수 없다. 그의 인생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으니, 말로 표현할 내용이 없으므로 너무 당연하다. 주인공은 등장했으나, 이야기를 가지지 못한 주인공! 그 아침은 그렇게 생각이 넘치고 고통스러우나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고 예비되고 그려진다. 다 계획이 있다.
이 아이는 요한네스라고 부를 거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올라이가 말한다.
그래, 요한네스라고 부르자, 마르타가 말한다
그리고 마르타는 눈을 떠 하염없이 그들을, 올라이와 늙은 안나를, 바라본다
그래요 좋은 이름이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르기 괜찮고, 그녀가 말한다
제 말이 그 말이예요, 올라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어부가 될 거예요, 제 아비처럼요, 올라이가 말한다
그래오 그래야지요, 산파 안나가말한다
네 그럼요, 올라기가 말한다 26~27
삶을 닫는 과정은 다르다. 나의 삶이 닫히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닫는 과정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삶과 (삶이 아닌) 죽음은 함께 공존할 수 없으므로 죽은 자(아니 죽을 자)의 생각에 의지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닫는 과정이 죽은 자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살아있는 자의 것인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하지 않다. 그게 중요한 것일까? 아침의 시작을 정의할 수 없듯 저녁의 시작도 정의할 수 없다.
이제 자네도 죽었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뒀어, 그가 말한다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여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라네, 자네를 데려오려고 말이야, 그가 말한다
그러면 게망은 뭐하러 걷어올렸나, 요하네스가 묻는다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들은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돌아 무성한 서쪽 만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난 자네가 보이는걸, 요한네스가 말한다
몸을 잠시 되돌려받았어, 자네를 데려올 수 있도록, 페테르가 말한다
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거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니,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130~131
살아있다는 것은 말을 할 수 있고, 살아있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이고, 한기가 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135
삶을, 인간의 삶을, 자연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이,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특정할 수 있는 그런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작가는 아침과 저녁 그리고 삶과 죽음을 통해 그 근간을 이루는 것에 대한 질문을 아침과 저녁에 던진다.
신은 세상을 훌륭하게 창조했으며 전지전능하다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항상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굳게 믿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 다는 것,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신은 존재한다,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을 뿐, 신은 모든 사람안에 존재한다, 그 무렵, 예수가 지상으로 내려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 사이에서 살게 된 후로, 멀리 있으며 결코 전능하지 않은 신과 결코 전능하지 않은 개별 인간들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은 주관하고,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 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신은 홀로 이 세상과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16~17
그리고 페티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134
신은 나이고 당신이고 모든 것이다. 그래야 신이 전지전능한 것이고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그건 왜인가.
신이 나와 함께 한다고 하자. 나의 호흡을 주관하고 내 생각을 이끌고 나의 갈 바를 예비한다고 하자. 그럼, 그 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것이고 그 신이 나를 떠난다면 그는 무소불위의 신이 아니게 되므로 떠날 수 없으니, 신과 나는 동일 인격체가 된다. 나에게서 바로 옆의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자. 그럼 그도 신이다. 인간 세상에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내가 아는 기독교 최고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의 의미가 조금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더불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도.
나는 이 소설이 참 반가웠다. 소설이기 앞서, 나는 울라이의 생각에서, 요한네스의 궁금증에서, 그리고 페테르의 설명에서, 누군가 나와 동일한 고민을 했다는 것이 고마웠다. 이승우의 소설 세계에서, 늘 틀에 박힌 질문이 아닌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지금의 그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족적에 신학대학이란 흔적을 발견하곤 위로를 받았다면, 기독 문화를 바탕에 둔 서구 작가인 (그의 개인적인 배경은 알지 못하지만) 욘 포세의 물음과 생각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반가웠다. 그의 세계가 이승우의 세계처럼 궁금하지만, 지구촌 어디엔가 또 다른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기회가 닿으면 [멜랑꼬리아]와 이 책을 만났듯 다른 만남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