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九死一生) 기사회생(起死回生) 그리고 부활(復活)
말(言語)이 있다면 그 말에 대응하는 실체는 반드시 있습니다.
언어는 있는데 실체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귀신, 유령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귀신 유령이 ‘있다’ ‘없다’ 논란을 벌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다양한 귀신이 존재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강시’라든가 ‘흡혈귀’ ‘좀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데, 이 모든 단어에 부합하는 실체는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언어는 모름지기 이미 있는 실체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 없는 것을 유추하여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먼저가 아니라 실체가 먼저입니다.
영화감독 이창동은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허공에서 스토리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은연중 흩어져 있는 파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작곡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활과 상념 속에 가락으로 흐르는 운율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웹툰이나 에니메이션이 발달하여 수없이 많은 캐릭터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이 역시 허무맹랑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들을 발굴하여 의미를 부여했기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영생(永生)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습니다. ‘영생’이 실재(實在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공중부양 즉 휴거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잣대 앞에서 공중부양을 실현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중부양’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 공중부양이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다 보면 죽을 고비를 한두 번쯤 경험하게 됩니다. 아홉이 모두 죽었지만 홀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구사일생’입니다. 거의 죽은 목숨을 살려내는 일을 ‘기사회생’이라 합니다. 현대과학의 기준에 비추어 완전한 죽음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이라는 단어에 익숙하고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와 회당장의 딸을 살려낸 사건도 기록합니다. 부활의 실재를 보여줍니다. 이 중에서 예수의 부활은 부활의 완전한 실재입니다. 기독교인의 ‘예수 믿음’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리어진 사건은 ‘휴거(携擧 Rapture)의 실재입니다.
예수 부활은 인류가 누리는 최고 행복의 원천입니다.
“해피 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