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타오른 유정의 사랑
박 종 숙
김유정 문학촌 기념관을 들어서면 왼쪽 벽에 커다란 사진이 하나 붙어있다. 쪽진 머리에 치마 저고리를 입은 약간 촌스런 여인이 있는데 그 분이 김유정 선생의 첫사랑 박록주씨라고 한다. 춘천의 문인들은 흘러간 유행가 가사처럼 유정의 사랑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어왔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으니 그저 불꽃을 피우다가 말았겠거니 늘 그렇게 건성으로 듣고 반은 흘렸다.
그런데 올봄 김유정 추모 행사와 곁들여진 단막극 <유정의 사랑>을 보면서 내 귀를 의심했다. 남녀 두 사람이 출연하여 당시의 주인공 대역을 맡아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연출했는데 내가 평소 그렇게 흘려버렸던 예사로운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혈서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던 죽을 만치 절실했던 사랑 이야기는 며칠간 내 가슴에 의혹의 지문을 남겼다.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유정은 왜 하필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를 선택했을까. 그 시절 박록주 씨는 연예계를 주름잡던 판소리의 명창이어서 한껏 유세를 떨치던 위치에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쏙 빼닮은 여인이 목욕탕에서 나오는 걸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박록주씨는 내가 보기에 그렇게 미인도 아니고 세련된 품위를 지닌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혼인할 사람이 있는 걸 알면서도 유정은 무엇 때문에 집요하게 매달렸는지 그녀의 매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아니 그건 축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끓어오르는 열정이 마른 갈잎을 태울 때 그 마음이 벽에 부딪힌다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당연하리라. 이성과 감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은 무조건 이유 불문이라지 않던가. 소유하고 싶고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을 더해 측은지심까지 발동하면 그건 운명의 장난일 수 밖에 없다.
사랑은 장애도 뛰어 넘는다.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는 힘은 나이도 직업도 품위도 종교도 무너뜨린다. 새파란 청년이 어머니 같은 여인을 사랑하고 국적이 다른 남녀가 국경을 넘나들며 사랑하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 속에 성직을 파계하는 사랑도 있다, 늦은 인생에 꽃피는 사랑 이야기는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사랑의 이름으로 숭고한 꽃을 피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무튼 사랑의 위대함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우주의 신비를 간직한 채 수시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세상엔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허위, 가식, 폭력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도 애정 문제로 살인을 하고 끊임없이 상대를 괴롭히며 스토킹을 일삼는 사람들을 볼 때 유정 역시 박록주를 찾아가 협박하고 심지어는 결혼할 상대까지 포기하라고 윽박지른다. 상식 밖 철부지 행태를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젊은 혈기를 불태웠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하다.
불행하게도 유정에겐 애정 결핍증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여읜 어머니를 항시 그리워하며 어머니 사진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는 유독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과 집착증을 가지고 있어서 박록주를 찾아가 애원하고 울부짖으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상대는 반응이 없다. 오히려 당신은 학생 신분이니 공부에나 전념하라는 충고를 받고 폭력적일 만큼 절박하게 애걸한다. 폐를 앓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선물을 준비하고 혈서를 써서 찾아갈 정도이니 처절하기까지 하다.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얻는 것도 아닌데 이처럼 허울 좋은 사랑에 목을 맸다면 신들림의 절규나 다름없지 않은가.
만약 박록주와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유정은 그 많은 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친구 안회남은 박록주와의 사랑이 결렬되자 문학에 집념할 것을 권한다. 그는 1935년 소낙비로 등단을 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과 4년 사이 소설 30편, 수필을 14편 발표하였다. 신들림 속에 원고를 쓰고 죽어가는 생명을 일으키려 진력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열기는 원고를 메우는 일에 불붙어 갈급한 영혼을 채웠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가 온다는 것은 선택받은 일이다.
그럴 때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열정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어쩌면 실패한 사랑이라 해도 열화같이 뜨거웠던 감정을 느끼게 해준 상대로 하여 존재감을 깨우쳤다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박록주씨가 자살미수에 그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이 유정이란 걸 생각하면 그만큼 절실했기에 생떼를 쓰긴 했지만 끝내는 절조를 지키고 예의를 지켰을 것이라 믿는다.
세월이 흘러 유정의 사랑을 안타깝게 여긴 후배 문인들은 그가 세상 떠난지 85주기가 되는 해 박록주 씨의 수제자를 초청하여 판소리 연가를 들었다. 당시 해소되지 못한 유정의 마음이 후배 문인들의 가슴에 한 점 안타까움으로 남아있었다면 또 바람처럼 떠도는 유정의 영혼이 어디엔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면 모두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