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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묵상글 들 ( 연중 제4간 목요일. - 떠남과 머묾.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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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떠남과 머묾
연중 4주 목요일-2020
오늘 복음에 비춰볼 때 인생을 참 잘못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도 하시고 머물라고도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떠나서 가라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하러 가서는 한 집에 머물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줄 알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지 못하고 역마살이 낀 사람 마냥 떠나려고 합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있던 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고,
떠나는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바뀌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 또는 굴종이고
기꺼이 할 때만 순종이라고 할 때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특히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이 지금 머무는 곳보다 다 나은 곳이기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그곳으로 보내시는 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뒤집어 얘기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지로 밀어 넣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시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땅으로 보내시는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는
한 수녀님의 파견 미사를 제가 주례하기 때문인데
그곳에 가면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해도
그곳이 나에게는 더 나은 미래이고 행복이라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길을 더 힘차게 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새로운 길을 흔들림 없이 가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누누이 하는 얘기지만 사랑할 때에야 고통스러워도 그 길이 행복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행복하기에 그 길을 열정적으로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지요.
오늘 저는 길 묵상을 마치면서 다윗의 마지막 길을 묵상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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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 다.”(6,12-13)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심은 선포에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6,13)고 그 중거를 들러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제자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 곧 증거가 바로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로 증거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임과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그들이 파견 받고 가서 한 일, 곧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고 말합니다.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길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내셨습니다.
저를 뽑아 부르시어, 당신의 권한과 말씀을 심어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여행 보따리도 전대도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께만 의탁하는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의 말씀이 전부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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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여행을 위해 짐을 챙길 때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다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8-9). 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처음 할 때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여행을 자주 하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할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길 희망합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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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전환기의 특징과 직무윤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사도 훈련을 시키고자 여러 지방으로 파견하시며 당신께서 하시던 직무를 위임하시는 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공생활의 초기인데도 일찌감치 제자들을 열두 명이나 불러서 사도 훈련을 시키신 후에 둘씩 짝지어 지방으로 파견해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만 살고 일하는 체험을 시키셨습니다. 이때 파견되어 지켜야 할 수칙을 제시하셨는데, 이는 당신이 살고 일하던 원칙과 방식이었으며 처음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즉, 가난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되, 그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어 주고 병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빈의 생활양식을 기본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되 사회악에 맞서고 공동선에 투신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직과 복음선포의 선교활동이 경제적으로 청빈해야 함을 뜻하는 것인 한편, 그렇게만 해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넉넉하게 제자들을 맞아들이고 도와줄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얼마간 활동하면서도 또 다른 제자들을 예순 명이나 더 모아서 두 번째 파견 때에는 모두 일흔 두명의 제자들을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하고 왕성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루카 10,1-12). 말하자면 열두 제자들이 첫 번째 파견활동의 성과로 성소자를 다섯 배나 더 늘린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대를 이어 지속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당신은 돌아가시고 나서도 초대교회가 세워져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 세계에서 세상 끝 날까지 지속적으로 선포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는 직무전환기의 이 파견윤리와 수칙의 배경이 될 만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40년 동안 왕위에 앉아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면서 국권을 튼튼히 한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사도가 된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사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때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고, 또 미갈에게서 낳은 아들 압살롬의 이유있는 반란도 겪었던 다윗인지라 왕위를 내정해 놓은 왕자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일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고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흔히 직무가 다음 세대와 후계자들에게 넘어가는 전환기는 자칫하면 직무가 단절되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는 특별한 윤리와 이에 따른 수칙도 필요합니다.
다윗의 치세에 이스라엘 왕국은 강성해졌습니다. 비록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무죄한 부하까지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 후에는 죄를 뉘우치고 더욱 조심하여 임금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 내치에서 안정을 이루었고 주변 민족들을 물리쳐서 외치에서도 국력을 크게 키워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말년의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너의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야 한다”는, 다분히 자기반성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덕분에 후계자 솔로몬은 하느님께 청해 받은 지혜로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더욱 부강한 나라로 번영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국가를 잘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 치세에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한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알게 해 주는 다윗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
야훼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
주께서는 그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로, 내 마음이 쏠리게 하셨나이다
다른 나라 신들을 붙좇는 자는, 저희들 고생을 더할 따름이오나 ―
나만은 그들처럼 피의 전제를 아니 올리리이다,
신들의 이름을 입에 아니 올리리이다.
주님은 나의 기업, 내 잔의 몫이시니, 내 제비는 오로지 당신께 있나이다
측량줄 내려져서 좋은 땅이 내 몫이니, 내 기업 흐벅지게 마음에 드나이다
깨달음을 내게 주신 야훼님을 기리오니, 밤에도 이 마음이 나를 일깨우나이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히 쉬오리니
내 영혼을 지옥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썩도록 당신 성도를 아니 버려 두시리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당신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 16,1-11).
이렇게 다윗은 죄를 저지른 후에 깊이 뉘우치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길에서 더욱 거룩하게 살고자 몇 배 더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직무 전환기의 윤리는 직무를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실하셨고, 그 비결을 파견윤리와 수칙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청빈의 생활양식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기, 그리고 사회악에 맞서며 공동선에 투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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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8년, 69세의 어떤 네덜란드인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한 것이 화제입니다. 서류상의 나이를 고쳐 달라는 소송이었습니다. 자기 신체 나이는 훨씬 젊은데 서류상의 나이가 많아서 일과 연애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별것이 다 소송 거리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젊었을 때는 나이 들기를 원하고 늙어서는 젊어지길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즉, 남의 떡이 늘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지금의 나를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지금 현재 최고의 ‘나’를 살고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젊음은 젊은 대로, 늙음은 늙은 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사는 최고의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서류상의 나이를 고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최고의 ‘나’를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에 우리는 늘 걱정합니다. 나이를 들어 걱정하고, 돈이 없어 걱정하고, 출세하지 못해 걱정하고, 부모와 자식 걱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 밖의 많은 걱정이 지금의 ‘나’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늘 지금의 자리에서 최고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살지 않은 ‘나’의 의지 때문에 주님의 선물을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하지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어도 옷은 두 벌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짧게 여행해도 챙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주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 하게 하는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제자들이 걱정되지 않으실까요?
사실은 걱정을 없애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빵, 여행 보따리, 그리고 돈을 가져가다가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강도를 만나 뺏기지 않겠냐는 걱정 자체를 없애는 말씀이었습니다. 대신 오로지 하느님 일만 생각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놀라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왕도 자기 죽음을 걱정하는 솔로몬 왕에게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1열왕 2,2)라고 말하지요.
세상의 걱정보다 하느님의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가지고 있으면 걱정이 계속되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면 걱정보다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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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에 환상을 갖지 말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랑하는 방법입니다(고든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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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3일 사제 가장 낮은 곳으로’를 보았습니다. 72시간 동안 수원교구의 사제서품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하는 신학생들, 서품자들의 피정하는 모습, 서품식 당일의 모습, 새 사제들의 부모님,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하는 새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성탄에 방영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유튜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댓글을 보니 개신교 신자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사제로서 주님을 따라 충실하게 사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라는 새 사제의 말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사제를 얻었다.’라는 부모님의 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가족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비대면 시대에 좋은 영상은 선교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기획했던 ‘사제’라는 다큐멘터리도 100만 명이 넘게 보았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다큐멘터리 3일 가장 낮은 곳으로나 다큐멘터리 사제’를 한 번 보시면 어떨까요?
지난 1월 28일에는 서울대교구의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오기 전에 교구의 성소국장으로 5년 동안 서품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서품 대상자들이 교구장님과 면담할 때 배석하였습니다.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서품자들이 교구장님 앞에서 ‘순명서약, 독신서약,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서류를 준비하였습니다. 본당에 주차권을 보냈고, 서품식 예절 안내문을 제작했습니다. 체육관에서 하였기 때문에 제단을 제작하였습니다. 1월 한 달은 서품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새 사제들의 첫 강복을 받는 것으로 서품식은 마무리 됩니다. 부족한 제가 주어진 소임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한 직원들과 차장 신부님 그리고 서품식 준비에 기꺼이 시간을 내 준 성소후원회 봉사자들과 신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지금은 교구장이 되신 정순택 주교님의 서품식을 준비하였습니다. 2014년이었습니다. 2014년 3월에 교황님의 방한이 결정되었습니다. 8월에 방한하기로 하였기에 준비기간은 5개월이었습니다. 8월은 더운 계절인데 광화문에서 있었던 시복식 미사 때는 적당히 구름이 있어서 무덥지 않았습니다. 순교 복자들의 전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는데 돌아보면 보람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새 사제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고, 후배들이 계속 사제서품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새 사제들의 행동과 사명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새 사제들의 사명입니다. 이는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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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삶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가 되게 하소서.”
날마다 즐겨 바치는 제 평생 소원 둘을 요약한 윗 두 기도문입니다. 성인들이 이렇게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주인공 다윗이 그러하고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제1독서는 사무엘 상하권이 끝나고 오늘부터는 열왕기 상권의 시작입니다.
파란만장했더 다윗의 삶이 죽음으로 끝납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다윗의 진인사대천명의 삶과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언젠가 맞이할 자명한 현실의 죽음입니다. 새삼 베네딕도 성인의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삶이 참 좋은 죽음의 준비가 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임종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 아들에게 준 유언이자 임종어입니다. 이 말마디 안에 다윗의 평생 삶이 모두 닮겨 있습니다. 비록 대죄를 지었지만 처절한 회개와 보속은 물론 최선을 다해 철저히 하느님을 섬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하느님의 충실한 종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혔고,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으니, 이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다윗이 왕권을 튼튼해 해 준 덕분입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자치 수도원의 기반을 마련한 후 훌륭한 후임자에게 위임한 셈이니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고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원장직의 책임은 떠났어도 무한 책임감을 느껴 퇴임후의 삶에 각별히 유의하게 됩니다.
이제 숙제는 솔로몬에게 주어졌고 모든 책임은 그에게 달렸으나 불행히도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한결같이 끝까지 수행하지 못했고 그 인생은 실패로 끝났음을 봅니다. 아마도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삶과 죽음의 교훈을 충분히 보고 배우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둘을 일컬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다윗) ‘부패한 성인은 없다’(솔로몬)고 갈파했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신신당부하듯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파견에 앞서 삶의 필수 지침을 주시며 명령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본질적 삶의 핵심 원리들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 삶의 반영입니다. 다윗의 유언이 다윗 삶의 반영이었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 삶의 지침은 당신 삶의 반영임을 봅니다. 참으로 얼마나 잘 보고 배워 실천에 옮겼는지는 제자들마다 다 달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을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혼자가 아닌 도반과 함께 철저히 최소한의 단순하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집착의 이탈의 삶으로 온전히 주님을 드러내면서, 주님의 능력으로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하되 민폐는 최소화 하면서 사명 수행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소유의 삶이 가능했던 것은 곳곳에서 착한 사람들의 환대가 받쳐 주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좌우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주님께 파견 받은 존재로서 이런 주님의 무소유, 무집착의 ‘존재의 삶’, 자유롭고 홀가분한 ‘초연한 삶’이겠습니다. 이래야 복음 선포의 본질적 삶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에 만족하며 회개의 선포와 마귀의 축출, 병자의 치유라는 본질적 사명에 충실했던 제자들의 치열한 삶이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참으로 안팎으로 끊임없이 비워 하루하루 최소한의 소유에 만족하면서 복음 선포의 본질적 삶에 전념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 자체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회개의 선포에 앞서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선포에 자연스럽게 뒤 따르는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온갖 어둠의 마귀 세력들을 일소하시고, 영육의 병을 치유하시며, 당신의 힘으로 충전시킨후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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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내리신 이 명령은 꽤 가혹한 요구로 들립니다.
험한 지형을 걷기 위한 신발과 맹수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지팡이를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식량은 물론이고 숙박에 필요한 돈,
심지어 여벌의 옷도 지녀서는 안 됩니다.
나름대로 필수적인 준비물들인데도 말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파견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주어진다는 사실, 곧 제자들의 선교 임무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체험합니다.
그들이 먹을 빵을 손수 하늘에서 내려 주셨고,
마실 물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들이 해진 적이 없고,
너희 발에 신은 신들이 떨어진 적이 없다”(신명 29,4).
예수님 제자들의 여정도 이와 비슷하게 자급자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옛 제자들의 선교 여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도 하느님의 보살핌은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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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두 벌을 껴입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풍습은 손님에게 친절히 접대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던 것이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마르9,37) 이것이 지금 사목을 하고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복된 삶으로, 생활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이기주의의 바람막이가 아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만 의탁하며 이 순간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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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 12)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진실된 삶이
청빈의 시작이며
회개의 본질입니다.
제자의 길이란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길을 기꺼이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기존의 틀을
버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떠나가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영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것의 시작인
회개를 선포합니다.
제자들은
삶다운 삶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임을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삶의 길이
버림과 떠남
회개임을 믿습니다.
참된 길은
회개임을
역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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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주신 것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임무’를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을 아주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지만,
믿음 없는 사람이 사용하는 예수님의 이름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성수, 루르드 샘물 등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없이 그런 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즉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런 물건 자체에 무슨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사용하는 것은
미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임무’를 주신 것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일을 하라는 과제를 주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사랑 실천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은, 복음 선포는 ‘증언’이고,
증언은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효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마태 18,16).
또 서로 돕고 의지하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지시는,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 라는 지시이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시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 (루카 22,35)”
‘빈손’으로 떠났는데도 부족한 것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오복음을 보면,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0,10).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셔서 제자들을 보살피실 수도 있고(사도 12,7-10),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사도 16,14-15).
어떻든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항상 보살펴주셨다는 증언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제나 항상 보살펴주신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은 바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 비결입니다.
더 간단하게 줄이면, ‘믿음’이 비결입니다.)
<‘빈손’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대해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지시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이고, 그 진리 자체가 곧 생생한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은 신앙과 생활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10)”
여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이라는 말씀은,
“너희를 받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집이 있으면”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보면 거부당하고 배척당하는 일을 자주 겪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그 호의와 친절을 ‘받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 호의와 친절을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믿고,
겸손하게,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대접이 좀 초라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호의와 친절을 ‘요구’하면 안 되고, ‘무시’해도 안 됩니다.
11절의 ‘증거’ 라는 말은, ‘심판 때에 사용되는 증거’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먼지처럼 털려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인데,
바로 그 ‘먼지’가 심판 때에 그 사람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언제, 어디서 활동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도로 뽑히고 나서 얼마 뒤에
갈릴래아 지역의 유대인들 마을에서 활동했을 것입니다(마태 10,5-6).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활동은,
성령강림 후에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할 때를 대비한 일종의 ‘실습’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선포하는 활동은 아니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마태 10,7).”
라고 선포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고, 그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이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는(루카 22,3)
아무 힘없이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도,
그 권한을 받은 사람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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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난으로 선포되는 복음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3,14-15)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6,7). 곧 제자들의 소명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자유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팡이와 돌이나 사막의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신발은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물질이 아닌 하느님을, 소유가 아닌 가난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토록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신 까닭은 복음선포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자비와 생명과 해방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를 빌미로 세상 권력과 재물로 나 자신을 선전하거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쇠외시킨다면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머물지 않고, 이미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여 복음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세상 모든 것에서 떠나 온전히 자유롭고 가난한 상태가 되어 그분과 일치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하느님을 채우기 위한 빈그릇이며 하느님의 힘이 샘솟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복음 선포에 불린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현세의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거절당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6,11). 내 뜻과 애착, 고집과 이기심을 철저히 버리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오신 가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꿋꿋이 전해야 합니다.
나의 일상의 삶과 세상이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각자 있는 자리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어주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기대어 인간의 힘이나 돈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선교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큰 착각입니다. 애착을 지니고 있는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는 길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래로 나를 내몰지만 하느님 때문에 더불어 행복한 축제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마저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가난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가난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역사상 부유하고 세상 권력과 타협하는 교회,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멀리 한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음을 상기할 때입니다.
오늘도 세상 것으로부터 떠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자 되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풍요로운 축제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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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주님 자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무리하는 다윗왕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이 슬프면서도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의 일생은 대하소설 10권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흥미진진했으며 부침과 요동을 거듭했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제압하던 미소년 시절, 주군 사울 왕의 총애를 받던 시절, 반대로 그의 시기와 질투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기던 시절, 마침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착좌하던 시절, 견고한 왕권을 확립하며 승승장구하던 시절, 그러나 한순간의 유혹을 못 이겨내고 죄를 범한 후, 충신 우리야를 사지로 보내는 중죄를 저지르던 시절...그의 생애는 참으로 드라마틱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묵상하다 보면 ‘인간 별것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 하늘을 찌르던 권세를 누렸을뿐더러,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던 그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우리와 비슷한 인간, 나약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다윗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으로 칭송받습니다. 다윗이란 세례명을 지니고 있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성인(聖人) 가운데서도 특별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온화했고 성실했으며, 권위를 인정할 줄 알고 자신의 할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앙심은 어린 시절부터 출중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님의 성궤를 다윗성에 안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 펄럭이는 야전 막사 휘장 가운데 모신 주님의 궤가 마음에 걸리자 그는 주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 드리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다윗은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살려준 친구 요나단의 우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자 왕자처럼 살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다윗이었지만 그 역시 평생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입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해준다 해도 징역 20년 감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둘 중 한 가지 죄만 저질러도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토록 신앙심 깊고 충실하던 다윗이 되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는 늘 승승장구했습니다. 나가는 전쟁마다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장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은 심란한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후방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의 환호하고 군사들은 충성심을 보이자 잔뜩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주님 두려운 줄 몰랐습니다. 휘하 부하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선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는 술과 고기, 향락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이런 다윗을 그냥 두실 리 만무합니다.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그를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다윗 인생의 부침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갔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강한 믿음 안에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 한방이라고 잠시 자만하는 순간, 순식간에 죄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욱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는 우리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주님 자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다윗이 보여준 ‘솔직하고도 즉각적인 회개’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 사무엘 12장 13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다윗,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다윗, 주님 자비와 인간의 비참 속에서 오랜 방황을 거듭하던 다윗이 마침내 임종 직전에 도달했는데, 그가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남긴 유언은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크게 복잡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 안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정해주신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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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봉사자를 자르지 못하는 사제가 결단력 있는 사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의 한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제자들은 성직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목하고 싶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10)
만약 사제가 한 성당에 발령받아 갔다면 그 사람을 맞이하는 집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함께 사목하는 협조자들로 보입니다.
수녀님이 될 수도 있고 사목회 위원, 단체 봉사자들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제가 협조자들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됩니다.
봉사자가 잘못하는데도 사제가 가만히 놔둬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래도 그게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가리옷 유다를 당신 봉사자로 그대로 두셨습니다.
왜 한 번 뽑은 봉사자를 끝까지 책임져야 할까요? 봉사자를 자르면 사제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잃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아버지입니다. 봉사자는 어머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어머니를 함부로 대한다면, 심지어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신자들은 그 사제를 아버지로 대할 수 있을까요?
그냥 직장 상사처럼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전하는 복음이 모순에 부딪히게 됩니다.
복음은 하느님 안에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인데, 실제 모습은 직장 상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KBS ‘안녕하세요’에 부모님이 너무 싸워서 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특별한 사연은 아니고 우리 가정의 보통 자주 싸우는 집의 경우입니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딸은 아빠가 술 때문에 엄마와 싸우니까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각서까지 쓰게 했습니다.
아빠는 그저 밖에서의 삶이 쉽지 않아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는 것인데도 아이들은 큰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저도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니고 저도 일을 하거든요. 돌아와서는 집안일도 하고 애들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는 술 좀 적당히 마시라는 이야기만 하는데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술을 먹든 안 먹든 자꾸 이렇게 못생겨서 어디에 내놓겠냐는 둥 외모 지적을 합니다.
딸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취중 진담이라고 하면서. 또 잘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면 땅끝까지 저를 무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외모 지적을 왜 하느냐는 말에 남편이 말합니다. “아니, 아내가 돼지같이 살찌면 안 좋잖아요.”
아빠는 집에서 무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엄마를 갈아치울 수 있다는 느낌을 자녀에게 줍니다.
자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를 언제든 칼로 칠 수 있는 아빠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크게 될까요?
초등학교 3학년 둘째 딸도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빠요. 술 취해서 머리 때리고 못생겼다고 하고. 엄마가 가슴을 치며 ‘숨 좀 쉬자. 안 그러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해요.
슬퍼요.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 적이 많아요.
싫고 무서워요.”
이 집에서 아빠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고 자녀들에게 언제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고 자녀들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안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일단 결혼했다면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맡겨준 사람이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끔은 사제는 권위적이어야 한다고 여기며 봉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결단력 있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신자들에게 보기도 안 좋고 결단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단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 집에 들어가 그 한 집에서 머물 줄 아는 사람이 결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단력으로 이런 행동도 보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가족은 ‘피’로 구성됩니다.
당연히 하느님 가족의 피와 같은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가족일 수 없지 않습니까?
가족에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없는 가족은 없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위하는 사람은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가차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혼기가 차서 주위에서 맞선을 보라는 청이 많았습니다. 몇 번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그녀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나이가 되자 괜찮다고 여겨지는 남자와 사귀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사귀다 보니 가끔 폭력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자가 무릎 꿇고 사정하는 바람에 남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엔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남자의 성격이 드러났습니다.
아기를 안아주지도 않고 아내를 본 척도 안 했습니다.
아내는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예상했다는 듯이 이미 아내 명의로 되어있는 집을 팔아버린 상태였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에게 양육비 한 푼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사례입니다.
위 자매는 헤어지자는 말을 자주 하고 이혼하자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일까요?
진짜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오히려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집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부임했을 때 이미 사목회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 주임 신부님이 새롭게 구성해 놓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그분들은 단체로 일괄사표를 내며 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그대로 재임명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해 놓으신 것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정말 열심히 사목을 도와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언제든 나를 자를 수 있는 칼을 들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받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봉사자는 그 사람이 가리옷 유다처럼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냅니다.
한 집을 선택하여 머물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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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4 주간 목요일-묵상과 기도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합니다. 하느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라. 모세 법에 기록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한다. 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의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 다른 것을 가져가지 마라. 가난한 차림과 행차하라.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서 머물라. 받아들이지 않거든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 제자들은 회개를 전하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다. 1열왕 2,1-4.10-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마르 6,7-13
실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였습니다. 파견하실, 때 기쁜 소식을 위해서 파견하실 때 두가지의 '파견 덕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부여, 또 하나는 가난함의 떠남, 그 행차였습니다. 이 '더러운 영들과 가난함 두가지는 '믿음과 겸손'으로 통합니다. 오직 주 예수님의 은총에 따라 그분의 힘과 능력으로 말씀의 일꾼으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물질적 여유나 풍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함과 그 겸손에서, 오직 주님의 힘과 권능에 의지하여 복음 전할 때, 그 안에서 주님께서 몸소 일하시고, 그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주님의 힘과 은총에 힘입은 파견은 물질적 소외와 빈곤을 넘어서며, 주님의 말씀의 은혜에 따라 부족함없이 말씀의 일꾼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냈으며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의 일꾼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힘과 능력으로 믿고 가난과 겸손으로 파견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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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3. 연중 제4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열왕2,1-4.10-12)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3)
열왕기 상권 2장 3-4절까지는 솔로몬이 사나이답게 굳건한 기개를 가지고 신정(神政) 왕국의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대하여 행해야 할 일들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명령을'로 번역된 '미쉬메레트'(mishimereth)는 '책임'(일)(민수1,53), '임무'(민수3,7)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본문처럼 '지키다'라는 뜻의 동사 '샤마르'(shamar)와 함께 쓰여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복무', '직무', '임무'나 '책임'을 수행하였음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레위8,35; 민수1,53; 3,7; 8,25.26).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네 주 하느님의 직무를 지켜라'이다.
이것은 임금의 직분이 사제나 레위인의 직분처럼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직이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왕직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본질로 하는 다른 나라들의 왕직과는 다르게 하느님께 대한 책임 수행을 일차적 직무로 하여, 임금으로서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일이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본문에 나오는 유언을 앞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다윗이 솔로몬에게 교훈한 이스라엘의 왕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비결은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모세 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에서 '지켜라'는 말은 '리쉬모르'(lishimor; to keep)인데, '파수꾼이 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본래 사제나 레위인들의 임무와 관련된 표현인데(레위8,35; 18,30), 다윗은 지금 주님을 대리하는 통치자로 세워지는 솔로몬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정(神政)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임무이다.
여기서 '규정'(huqqa; 후크카; statute; decree)은 법의 세부 규정을, '계명'(mitswah; 미츠와; command; commandment)은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사항들을, '법규'(mishipat; 미쉬파트; law; judgement)는 징벌이 내포되어 있는 객관적인 법의 판결들과 조례들을, 그리고 '증언'(eduth; 에두트; testimony; requirement)은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이 용어들은 각기 다른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용어들은 유사한 어휘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강조하는 증언법적인 표현으로서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한다(신명5,31; 8,11; 시편119).
그리고 원문에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3인칭 대명사가 붙어 잇어서 '그분의 규정, 그분의 계명, 그분의 법규, 그분의 증언'으로 되어 있으며, 이 모두가 다 그분의 것 즉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이 하느님이 어떠하심을 가장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을 바로 섬기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게 하며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그분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다윗이 말하는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바로 '모세 법'이다.
'법', '율법'에 해당하는 '토라'(thorah)는 일차적으로 '교훈',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이었다.
이 '토라'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 모든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참으로 인생의 안전한 길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축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신명8장).
과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의 성공 여부는 하느님의 '토라'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성공와 실패 여부도 솔로몬의 '토라'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모세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순종과 불순종의 길을 제시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했듯이(신명30,15-20) 다윗도 동일한 선택의 길을 솔로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네가 ~ 성공할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제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 솔로몬에게 내리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성공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타스킬'(thaskil; you may prosper)은 '사칼'(sakal)의 사역형으로서 '번성하다', '형통하다', '성공하다'(2열왕18,7)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동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무조건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고난 혹은 시련 다음에 오는 궁극적 성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성공은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순종에 따른 축복이며(신명28,1-14; 여호1,7.8; 루카10,28), 모든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축복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고통을 감수한 아브라함(히브11,17), 정결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감옥에 가야 했던 요셉(창세39,7-20),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기름부음 받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1사무26,9-10)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던 다윗 등 모두가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이러한 궁극적 성공을 경험했던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원문은 '에트 콜 아셰르 타아세'(eth kol asher thaase; in all you do)인데, 직역하면 '네가 행하는 모든 것' 이다. 그리고 '하든지'에 해당하는 '타아세'(thaase)의 원형 '아사'(asa)는 '행하다', '실행하다'는 뜻 뿐만 아니라 '만들다', '(재산을)얻다', '(열매를)맺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재산을 얻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 삶의 전영역에서의 활동, 범죄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어디로 가든지'
원문은 '웨에트 콜 아셰르 티프네 샴'(weeth kol asher thipneh sham; and wherever you go)이다.
여기서 '가든지'에 해당하는 '티프네'(thipneh)는 '돌이키다', '떠나다', '나오다'는 뜻을 가진 '파나'(panah)의 미완료형이다.
그리고 부사 '샴'(sham)은 새성경에서 번역은 안되었지만 '거기서'(there)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 '티프네'(thipneh)와 '샴'(sham)이 본문처럼 함께 사용되면 '거기를 향해 돌이키다', '거기를 지향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고 네가 돌이켜서 지향하는 모든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네가 무엇을 하든지'와 더불어 삶의 모든 행위와 인생의 방향 등 삶 전체를 가리키는 증언적 표현으로써,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내 안으로 둘어와 하늘을 밀어내게 하면 안된다.
(마르6,7-13)
7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무시당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 권한을 주셨다. 복음을 선포할 때 각오하라는 의미셨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알아봐 주기(대접, 대우)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둘씩 짝지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그 둘이 아닌 선이 악을 덮어 용서로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늘의 진리, 그 하나를 위해 하나(짝)로 보내신 것이다. 세상(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생각(지혜)이 뱀의 거짓말을 먹은 더러운 영들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대속, 그 구원(생명)의 진리, 그 말씀으로 더러운 영(말)을 쫓아내라고 보내신 것이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어둠에 하늘의 빛을 비추라고 보내신 것이다.
(1요한2,8) 8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 지팡이만 준비하라 하신다. 지팡이는 牧者의 지팡이, 곧 예수님의 길을 뜻한다.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하라고 하신 명령이다.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 두벌을 껴입지 말라 -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준비한 준비물, 옷과 주님께서 주신 말씀(옷), 그 두 가지를 섞어 이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과 그분의 말씀만 의탁하라 하시는 것이다. 신발 또한 하느님의 신발이다.
(에페6,14-17) 14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진리의 성령으로 허리, 중심을 잡고, 십자가의 의로움을 입고(믿고), 하늘의 평화를 주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믿음의 영도자(완성자)이신 예수님, ‘방패가 되어 주신다’. 고 약속하신 하느님으로(창세15,1 히브12.2참조), 성경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신앙생활, 전교, 기도 등은 헛것이 될 수 있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 머물러라- 돌아다니며 대접 받지마라,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하시는 것,-창조 이전의 먼지.
(창세2,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하느님의 숨이 없는, 죽은 자(먼지)로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씀이시다.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 기름을 부으면 고쳐진다?.- 기름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을 뜻한다.
(레위24,1-4)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올리브(하느님)를 찧어서 짠 순수한 등잔 *기름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여, 늘 등불이 타오르게 하여라. 3 아론에게 말하여,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안 증언 궤의 *휘장 밖에 차려 놓아,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님 앞에 늘 켜 두게 하여라. 이는 너희가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4 그 등불들을 *주님 앞 순금 등잔대 위에 *늘 차려 놓게 하여라.”
= 교회 안에 생명을 주는,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이, 성자 하느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요한1,4.9.12)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빛으로, 먼지(흙)의 존재가 하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흙의 먼지로 죽어있는 이들이 기름으로, 빛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 빛에 더러운 영의 말, 그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영의 말, 심판이 무기력해 진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증인이 성령이시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육의 속죄 제물로 오셔서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신 代贖이다. 그 ‘대속의 피의 새 계약’으로 얻는 하늘의 용서, 생명이다.
그 ‘새 계약의 피가 있는 곳’이 ‘하느님나라’ 라고 알려 주신다.
(히브12,22-24)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 새 계약으로 심판을 받아 완전한 의인이 되는 그 용서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
(루가17,20-21)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제자들에게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구원,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라 하신 것이다. 사탄이 주겠다. 약속한 세상의 재물, 명예, 평화를 위한 길(말), 그 세상이 들어와 하늘의 평화를 밀어내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의 허리와 마음을 잡아 주시어 주님의 길, 말씀을 살아가게 하소서. 하늘의 용서, 평화,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늘 함께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미사의 본기도를 실천하게 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어 실제로 파견하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하신 마태오 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기 활동이 끝나고 후기 갈릴래아 활동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신 이후에 복음 전파와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복음의 봉사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어 복음 전파자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르시어'에 해당되는 '프로스칼레이타이'(proskaleitai; he called to him)의 원형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omai)는 '~을 향하여', 혹은 '~을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로 초대하다' 혹은 '~을 위하여 부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천국 복음의 봉사자로 파견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로 번역된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sent out)의 원형 '아포스텔로'(apostello)는 '~로부터'라는 뜻으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분리되어 보내다'는 문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단어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분리하여 복음 전파의 봉사자로 파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그리스도의 사도를 의미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에 해당하는 '뒤오 뒤오'(dyo dyo; two by two; '둘씩 둘씩')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벙법이기도 하다.
또한 6장 11절에서 등장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증인의 최소 인원을 확보하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둘'은 증인의 수였으며, '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민수35,30; 신명17,6; 마태18,16).
이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전통은 초대 교회 선교 여행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져 갔다(사도15,22).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문맥으로 보아 이 권한(권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령을 내쫓고 거룩함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마귀(악령)의 특징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더러운'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톤'(akatharton; unclean)의 원형 '아카타르토스'(akathar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정결하게 하다', '속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타이로'(kathairo)의 합성어로서 '정결하지 않은', '속죄되지 않은', ' 불순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神性)과 접할 수 없는, 즉 우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뜻한다(사도10,28; 1코린7,14).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쫓아내야 할 '더러운 영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악령(마귀)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악령의 활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하고 더러운 모든 영적 현상과 인간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디두'(edidou; gave)는 원형 '디도미'(didomi)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러한 권한(권세)으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요청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부여받아 사용해야 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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