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여덟 번째 - 2)
(광양시∼삼천포, 2023년 10월 28일∼29일)
瓦也 정유순
금남면(金南面)은 북쪽에 금오산(金鰲山, 849m), 중앙부에 연대봉(蓮臺峰, 447m) 등 구릉성 산지가 곳곳에 분포한다. 남으로 남해대교에 의해 남해도(南海島)와 연결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참깨·무·배추 등의 생산과 경사지의 산양·소 사육이 활발하다. 수산물 어획량도 많은 편이다. 교통은 남해~원주 간 제19호 국도가 면의 북서쪽을 지나고, 노량리(露梁里)를 중심으로 지방도가 연결되어 있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연대봉>
남해도(南海島)는 남쪽 바다에 자리 잡아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지형상의 모형으로 보면 언뜻 나비 같은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우리 몸의 신장(腎臟) 같이도 보인다. 행정구역상 창선도를 포함하여 1읍 7면으로 편제되고, 경남에서 거제도 다음으로 크다. 조선전기 문신 정이오(鄭以吾, 1347~1434)는 ‘남해현은 바다 한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 거제와 함께 솔밭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 되는 일이 적지 아니하나 왜국과 가까워 침입이 잦았다’고 썼다.
<남해도 지도>
남해라는 땅 이름은 신라 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군청소재지인 남해(南海)도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세종 때 문신 권맹손(權孟孫)은 시에서 ‘자라 등에 구름 트이니 삼신산이 가깝고, 바람은 고래 같은 물결을 받아 올려 만 리에 아득하다’고 했다. 김조(金銚)는 시에서 ‘조수 소리는 치우쳐서 나그네를 놀라게 하는데, 신기루는 벌써 물가에 생겼네.’라고 했는데, 이는 바닷물이 움직이는 실상을 말하고 있다.
<남해대교와 남해도>
남해는 임진왜란의 격전지인 관계로 이충무공과 관련된 역사 유적지가 많다. 남해대교의 휴게소가 있는 노량에는 충렬사(忠烈祠)가 있어, 팽나무 고목과 함께 주요한 문화재가 되고 있다. 고현면의 관음포(觀音浦)에는 충무공의 전몰 유적지가 남아있고, 인접한 차면리에는 산닥나무의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어, 남해대교와 상주·미조해수욕장은 주요한 관광자원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의 이충무공상>
남해대교(南海大橋)는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노량리(露梁里)와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노량리를 잇는 국내 최초의 현수교(懸垂橋)다. 길이 660 m, 너비 12 m, 높이 52 m로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6월 22일 준공되었다. 남해도가 육지와 연결되어,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지역과 남해도 전체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남해 노량해협은 통영·여수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이충무공의 전적지인 동시에 전사한 곳이다.
<남해대교>
남해도(南海島)는 노량해협(露梁海峽)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불과 600m 정도 떨어져 산업·경제·교통·운송 면에서 고립상태에 있었고, 또한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서 다리를 놓기에는 당시 기술로는 매우 어려웠던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기술협력으로 이 다리는 강상형(鋼箱桁)으로 보강된 현수교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의 소통이 쉬워져 국내 관광객 및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해대교>
남해대교에서 서쪽으로 약600m 떨어진 곳에는 노량대교가 있다. 노량대교(露梁大橋)는 국도 19호선의 교통량 급증과 대형화로 인한 교통 혼잡의 해소와 기존 남해대교의 노후화에 따른 대체교량으로, 2009년 착공하여 2018년 9월 13일 완공됐다. 이 교량은 국내의 독자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력이 적용된 세계 최초의 3차원 케이블 경사주탑 단경간 현수교다. 그리고 수질오염이 발생될 수 있는 해상 기초 공사를 배제하여 시공하였다.
<노량해협과 노량대교>
발길은 남해대교를 건너 충렬사로 향하는데 이상한 기념비 하나가 눈에 띤다. <국회의원 금암최치환선생유적비(國會議員 錦巖崔致煥先生遺蹟碑)>다. 최치환(1922∼1987)은 1943년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를 마치고, 경무부 작전과장(총경)으로 1948년 제주 4·3사건을 진압하였다. 1950년부터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장과 경무과장으로 재직하였다. 치안국 경무과장에 재직 중인 1954년 공비토벌에 대한 공으로 미국자유훈장을 수여받았다.
<국회의원 금암 최치환유적비>
1956년 서울특별시 경찰국장을, 1958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비서관을 시작으로 공보처장과 제5대, 제7∼8대, 제10대.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구지역 사수 공훈으로 태극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 등 23개 훈장을 수여받았고 죽어서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의 활동상과 제주4·3사건 진압 당시 무고한 양민을 희생되게 하지 아니 하였나 한번 따져 볼 일이다.
<금암 최치환 - 넨이버캡쳐>
그리고 충렬사 입구에는 김구 비석이 있다. 자암 김구(自唵, 金絿, 1488∼153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07년 생원과 진사에 모두 장원 급제해 시관을 놀라게 했고, 151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고 1515년 부수찬, 1519년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1519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으로 유배당했다가 다시 남해에 안치되었다. 글체가 뛰어나 안평대군·양사언·한석봉과 함께 조선 4대 서예가 중 한 명이다.
<지암 김구 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충렬사는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대첩에서 순국하자, 처음 이곳에 유해를 안치하였다가 충남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로 이장하였고, 현재 이곳에는 가분묘만 남아 있다. 이순신이 순국한 지 35년 뒤인 1633년(인조 11) 초사(草舍)와 비를 세워 치제추모(致祭追慕)하였고, 1658년(효종 9) 사당을 건립하고 비도 다시 세웠으며, 1662년(현종 3)에는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충렬사 외삼문>
<충렬사>
이 사당은 사적(1973년 6월)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약12,089㎡이다. 안에는 사당·재실(齋室)·비각(碑閣) 각 1동,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비(碑) 4기(基), 가분묘(假墳墓) 등이 있다. 1661년(현종 2)과 1899년(광무 5)에 중수하였다. 1661년 중수한 사유를 기록한 송시열(宋時烈)의 비문이 있다. 사당을 세울 당시에는 옆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화방사(花芳寺)의 승려 10여 명과 승장(僧將) 1명이 교대로 수직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남해충렬사 앞 해변에는 거북선이 있다. 이곳에 있는 거북선은 1591년에 건조한 돌격용 전선으로 이충무공전서와 옛 선박의 관련 기록을 참고로 하여 전문가 16명의 고증을 받아 1980년 1월 해군공창에서 복원하여 해군사관학교에서 전시 관리하던 것을 1999년 12월에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거북선전시관 내부에서는 현자총통, 활 등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는 물론, 거북선의 구조를 직접 볼 수 있어 기존의 전시관과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실물 크기의 거북선>
<거북선 안의 선장방>
다음 발길은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이락사다. 이락사(李落祠)는 충무공이 순국한 후 1832년(순조 32) 8대손 이항권(李恒權)이 제단을 설치하고, 비와 각을 세웠다. 경내에는 〈대성운해, 大星殞海 : 큰 별이 바다에 지다〉라고 쓴 묘비각(廟碑閣)과 순조 때 홍석주(洪奭周)가 세운 유허비, 그리고 1973년 건립한 사적비가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노량해역은 정유재란 최후의 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충무공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이락사 출입문>
<이락사(대성운해)>
이락사 입구에는 “前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라고 쓰인 충무공의 유언비가 있다. 마지막 노량해전 뱃머리에서 독전하던 중 갑자기 날아든 총탄을 맞고 전사하는 순간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결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말이다. 만약에 오늘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언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사 제목을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 하도록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로 하지 않았을까?
<이순신장군 유언비(전방급 신물언아사)>
이락사에서 나와 남해관음포로 향한다. 관음포(觀音浦)는 남해군의 북쪽 고현면 차면리 바닷가로 툭 불거져 나온 포구로, 이락포(李落浦)로 불린다.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禑王) 때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다. 지명유래는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관음의 포구였기에 관음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음포 안내도>
https://blog.naver.com/waya555/223259672116
첫댓글 등제감사합니다.
1598년(선조31)-이충무공별세; 남해노량대첩
{내가죽어도 죽었다고 말하지말라)는말속에는 가신님의 애국에대한충심이들어있다.
본인이 남해를찾았을때는 그앞바다에 인공어망이가득히차있었는데
그바다에 이충무공께서 잠들어계시다니 다시한번[편히잠드소서]을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