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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미워하십니다
출 20: 4-6
1.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4-5상)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초,중,고등학교 등 공공기관에 단군상을 건립하고 있습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현재까지 1단계로 360개의 단군상의 건립되었고 제2단계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고 합니다.
단군상 건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하나의 설화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기록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한권은 고려 제17대왕인 인종(仁宗)때 왕의 지시로 편찬된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정치적 흥망과 변천을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데 김부식의 책임 하에 11명의 학자들이 기록을 한 것입니다(1145년간).
또 하나의 책은 삼국사기가 쓰여진 후 약150여년 후인 고려 25대왕인 충렬왕 때 일연이라는 중이 혼자서 쓴 삼국유사라는 책입니다. 삼국사기가 왕명에 따라 사가들에 쓰여진 것인데 비해 삼국유사는 연대적으로도 그것보다 훨씬 늦게 쓰여졌지만 중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구성이 어설프고 문장 또한 잡박합니다(雜駁 - 이것 저것 뒤 섞여서 통일이 없음 - 범우사 사르비아문고판을 번역한 번역자의 표현). 그래서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역사의 정사(正史)로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만 언급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정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야사에 근거를 둔 이야기입니다(야사라는 말은 민간에서 주변의 여러 가지 사사로운 이야기를 담아 쓴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괴상한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앞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둘러서 복희(伏羲)를 낳았고, 용이 여등(女登)과 교접해서 염제(炎帝)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 하나를 삼키고 설(楔)을 낳았고, 강원(姜嫄)은 어떤 사람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를 낳았다. 용이 큰 못에서 교접해서 패공(沛公)을 낳았다. 그렇다면 삼국(즉 고구려, 신라, 백제)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 - 신기하고 이상한)한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삼국유사에 보면 삼국의 시조가 이런 식으로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고구려의 주몽도 알에서 나왔고, 신라의 박혁거세도 알에서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원래 여섯 개의 촌이 있었는데 일연은 그들에 대해서 쓰다가 '위 글들을 상고해 보면, 이 6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신라의 4대왕 탈해는 용왕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면 이런 모든 이야기도 다 사실로 받아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더 나아가서 현재 단군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들 뿐 아니라 거기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옛날 이야기 같은 학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부산 부암초등학교에 건립된 단군상 밑에 붙은 글을 적어 왔는데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B.C. 7197년 중원 대륙 천산에 안파견 한인(환인 桓因) 천제께서 하늘로부터 천부삼인을 받아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으니 국호는 한국(환국)이다. 한국의 마지막 임금이신 지리위 한인 천제께서 B.C. 3898년 태자(거발한)에게 천부삼인과 천부경을 하사하시니 이를 받아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천산에서 삼위 태백산 기슭으로 옮겨 신시를 세우고 국호를 배달이라 선포하셨다. 18대 거불단 한음(환음) 천황께서는 웅족의 왕녀를 황후로 맞아들여 태자를 낳으니 한배검(왕검) 단군이시라. 한배검께서는 38세 되던 B.C. 2333년에 수도를 아사달(오늘날의 백두산 기슭)로 옮겨 조선(단군조선 = 고조선)을 세우셨다'
삼국유사도 야사지만 단군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쓴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에 근거를 둔 이야기인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내용도 해괴망측하지만 사용된 단어들도 전혀 뜻을 모를 그런 말들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초,중,고등학교 등 공공 기관에 건립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렇게 단군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특정종교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이 단체는 단학서원이라는 세력이 만든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단군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종교단체입니다. 조금전에 읽어드린 단군상 밑에 적어 놓은 글귀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곳을 참배하는 모든 사람들이......'했습니다. 참배라는 말은 신에게 배려 즉 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단군상을 만들어 자기들이 집회를 갖는 장소에 세운다면 그것은 안타깝기는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관여할 바가 못됩니다. 절에다가 부처상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단군상 그것도 참배하게 하기 위해서 세우는 상을 초,중,고등학교 등 공공기관에 세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반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군상건립은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성경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 만드는 것을 금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상과 마리아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서 머리를 숙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세계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는 칼빈의 신앙을 거의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칼빈인데도 지금은 칼빈의 묘가 어느 것인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칼빈이 죽기 전에 자기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했고 그 유언을 따라 비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혹시라도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아야 될 영광을 차지하는 우상이 될까봐 염려했기 때문에 자신의 묘에 비석까지도 못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대해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질투하십니다(5하-)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당신을 가리키셔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 외에도 아주 여러 곳에서 거듭 거듭 당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질투라는 말은 천한 용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용어를 당신에게 적용시키시면서까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호소하셨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질투하리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곳에서 당신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곧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으로 무엇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골3:5). 하나님이 제일이 되어야 하는데 욕심 때문에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성공이라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내일 월요일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좀 쉬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주일을 범한다면 그 중요한 일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 예배를 빼먹고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또 성적이라는 것이, 성공이라는 것이 이미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상들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도 미워하셨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힘센 나라들을 의지하는 것도 미워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애굽과 행음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을 앗수르와 행음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이나 병거나 군대의 숫자가 많은 것을 의지하는 것도 똑같이 미워하셨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했다가 하나님께 큰 징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인구 조사 자체가 나빳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나에게는 이 만큼의 군대가 있다' 하는 마음으로 조사를 했고, 사람들의 수가 많은 것을 의지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미워하셨던 것입니다.
4절 ? 앞에 보면 '너를 위하여'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제일의 목표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섭섭해 하시는 방법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마음 속에 우상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제일 사랑하고, 무엇을 가장 많이 의지하십니까? 하나님보다 더 위하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3.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십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 말은 다시말하면 하나님 이 외의 어떤 것도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과 직장과 공부와 성공이 우선이 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루고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입니까? 애인입니까?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인생을 낭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많이 가진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다고 천국에 못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또 세상의 것 더 갖는다고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 살아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져도 그것 때문에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없다가 있으면 얼마 동안은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복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성공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도 정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면서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는 자를 절대로 부끄럽지 않게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거듭 거듭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에 대해서 눈 멀고 귀 멀고, 하나님께 대해서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주님을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여겼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눈멀고 귀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고 행복하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있는 여러분 모두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핏값을 주고 산 그런 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어떤 환난과 유혹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붙들고 살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제일로 삼고 살으셔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만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이 두 번째가 되고 세 번째가 되게 하면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 섭섭해 하시면 지금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도 철저한 실패요,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 성공은 화가 될 뿐임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바른 예배의 삶
출 20: 4-6
전국의 대다수의 학교에 가면 단군신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조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습니다. 단군 신상을 제거하는 문제로 약간의 소란이 일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거방법에 있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단군신상에 대처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들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단군을 하나의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의 신사참배문제와도 동일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황국주의를 표방하는 일본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우리 민족을 괴롭힌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신사를 참배하며 그를 통하여 하나된 일본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신사를 신으로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국가의례일 뿐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를 확인하면 바로 그 자체가 신을 섬기는 것이고 우상숭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구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나가보면 과거 수많은 통치자들은 곳곳에 자신의 상을 세워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절을 하라고 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따르도록 유도하기도 하였습니다(터키에서 본 로마시대의 황제상). 지금도 북한에는 곳곳에 김일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북한 사람들의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를 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살리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주장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동상만 보아도 그곳에 실제로 그 대상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황제의 신상 앞에서는 황제를 향한 예의를 표하게 됩니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로 믿고 따르도록 모든 곳에 그들의 신상을 세우거나 심지어는 사진이라도 걸어두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황제에게나 우리가 섬겨야 할 분에게 배신하면 안되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합니다.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
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언제나 눈으로 보면서 예배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보다 적극적이고 은혜가 충만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근사한 모양(우상)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것을 향하여 절하고, 빌고, 찬양하면 얼마나 속 시원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면 더욱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모든 우상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이 둘째 계명은 우상이나 형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을 금하는 예배의 바른 방법,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의 바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둘째 계명은 다른 신의 우상이나 형상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우상에 절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 어떠한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우상의 형상으로 만들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방인들의 종교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위에 있던 모든 족속들에게는 신의 우상과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 신의 모양은 하늘에 있는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애굽신은 햇빛의 모양으로, 또 다른 애굽신은 새의 모양으로 섬겨졌습니다. 블레셋신 바알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다곤은 물고기 모양 즉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모양을 가지고 섬김 받았습니다. 이처럼 신의 우상들은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하여 자신을 섬겨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거짓 형식들을 금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형상을 곳곳에 세워 놓는 이유는 실제로 그가 늘 그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 허수아비) 그래서 전국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거대한 신상을 세워놓고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형상으로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 안 계신데 계신 것처럼 이상스런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면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명령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우상을 갖지 않았습니다. 가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우상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 예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론은 수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출 32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는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사실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명예도 권세도 얻을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우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어느 사람들이 물질이 많습니까? 믿는 사람들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부자가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까? 또한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가 없습니까?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복이라고 한다면 왜 믿는 사람에게 물질을 더 많이 주지 않겠습니까? 재물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사용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재물이 아니라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당장에 어떤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지키실 분이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들이 그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주신 피조물들을 오히려 하나님으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질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5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질투( )라는 단어가 사실상 썩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사실 '질투'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는 과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어사전도 '질투'라는 말을 시새우고 미워함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시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이웃집이 잘 되는 것을 배아파한다든지 이웃집이 행복한 것을 보고 괜히 미워하는 것 뭐 이런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욕심 많은 여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말할 때 하나님도 그런 시샘이 있으신가? 하나님이 뭐 그런 것을 다 가지고 있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질투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는 동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신다는 것일까요?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아세라...바알신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든 신이었습니다.
질투의 하나님...진실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신부인 이스라엘이 순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낱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늘 사용되고(출 34:14, 신:4:24, 수 24:19 등)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남에게 빼앗겼을 때에 일어난 열정"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하고, 우상숭배는 곧 아내의 부정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민을 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은 열심이라는 말로 번역 될 수 있는 말입니다.
몇 군데 성경의 용례를 살펴 볼 수 있는데
먼저 (사 9:7)을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무슨 이야기죠? [참고 사 37:32]
이는 메시야 탄생에 대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이 오랜 후에 일어 날 것이고 힘든 일이지만 기어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에 대한 표현으로 "열심"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비고; 사 26:11)
이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어떤 열심을 내셨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저들이 메시야를 배출하기에 합당한 민족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그런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서 메시야가 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열심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열심" 오늘 본문에서는 질투라고 번역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어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여인이 시새움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샘이 나셔서 질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샘은 나보다 남이 더 잘되는 것 이런 것을 배 아파 하는 것입니다. 또 열등감이 강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열심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길로 우리들이 나가는 것에 대해서 가만히 두고 보실 수 없는 마치 어떤 일이 있어도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하셨던 그 열심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은 질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상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 왜 질투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2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제2계명은 한마디로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하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주실 것이다'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종종 말합니다. 공부하면 무엇줄래요? 심부름하면 이것 주세요? 조건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나의 모든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면서 그 은혜를 바로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상으로 만들지 않아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님은 놀랍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대만이 아니라 천대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복으로 채우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너스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보너스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경배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예수쟁이라는 소리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바른 예수쟁이가 되십시오. 바른 예배를 즉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도록 새 힘을 기대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를 만방에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