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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규 목사
I. 평화에 목마른 사람들
각 나라 사람들의 인사법은 그 민족의 살아온 삶을 보여줍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침에 만날 때마다 "Good Morning!"이라고 인사합니다. 말 그대로 '좋은 아침'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진지) 드셨습니까?" 아니면 "밤새 별고 없으셨는지요?"하고 인사합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배고픔과 전쟁에 시달렸는지 잘 알려주는 인사법입니다. 그래서 아침 굶지 않고 잘 먹었으면 그것이 제일 감사하고 제일 큰 관심거리인 것입니다. 전쟁과 같은 어려움 당하지 않고 간밤을 잘 잤으면 그것 역시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평화'라는 뜻이지요. 얼마나 전쟁에 숱하게 시달렸으면 '평화'라는 말이 인사법이 되었을까요.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땅' 개념입니다. 이스라엘은 운명적으로 좁은 땅덩어리를 갖고 생겨났습니다. 거기다가 주변 국가들 역시 땅이 넉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전적(好戰的)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과 종교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땅을 뺏고 빼앗기는 전쟁을 끝없이 반복했습니다. 전쟁으로 날이 새고 전쟁으로 해가 지는 역사가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외침에 시달리다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했던 것이 바로 '샬롬,' '평화'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이스라엘은 테러와 전쟁의 위협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와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중동 지역 전체가 화약고입니다. 이라크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소원하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일 것입니다. 전쟁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들은 제발 좀 죽음과 고통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한 개인과 한 가정이 가장 소원하는 제목이 있다면 이 역시 평화일 것입니다. 한 집안에 우환이 찾아오면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겪게됩니다. 가족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중병에 걸리면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대로 고생을 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식구들의 마음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쓰립니다.
비단 질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위기들 때문에 한 가정이 쑥밭이 되는 경우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이럴 때마다 사람들이 제일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좀 못살아도,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해도, 그저 평화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이와 같은 평화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진정한 평화가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평화는 일시적입니다. 잠깐의 위로와 평안을 줄뿐 시간이 지나면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미국에 왜 왔습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까? 자녀교육을 한번 잘 시켜 보겠다든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좀더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이민 왔습니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좀 평화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는 생각에서 다들 미국에 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이라크에 가서 살겠다고 이민을 가려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불안한 나라에 이민 가려고 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쟁이 다 끝난 다음 그 나라가 평화스러운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이민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미국에 왔다고 해서 지금 평화스럽습니까? 어떤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이 분은 제일 먼저 나성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진을 만났습니다. 지진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살림살이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이 분들은 당장 짐을 싸들고 플로리다 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 살아야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이 가족은 플로리다 가운데에서도 바다가 멋지게 내려다보이는 해안 경계선의 언덕 위에 있는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사 간 그 해에 허리케인이 불어닥쳤습니다. 이번에는 허리케인이 그 멋진 집을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크게 낙담한 이 분들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역이 없나하고 찾다가 오클라호마를 생각해냈습니다. 오클라호마는 지진 피해도 거의 없고 또 바다를 끼고 있지 않으니 허리케인과 같은 태풍으로부터도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클라호마로 가서 몇 년 동안 잘 지내다가 이번에는 토네이도가 불어와서 집이 또 한 차례 파괴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평화롭게 잘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은 지진 때문에, 또 한번은 허리케인 때문에, 그리고 또 한번은 토네이도 때문에 그토록 소원했던 평화가 순식간에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 분은 평생 동안 세 차례의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오늘 혹시 여러분들이 이 분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보이는 것에 평화를 찾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평화는 전쟁이 잠깐 그친 상태의 평화가 아닙니다. 경제적인 궁핍이 사라진 상태의 평화도 아닙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몸이 아픈 분이 나아서 찾아오는 평화도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평화는 다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오직 영혼 깊은 곳에서 찾아오는 영속적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 14: 2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찾아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잠시 돌아가 봅시다. 본문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특히 메시아가 탄생함으로서 새로운 나라가 일어설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형제인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주전 722년 경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수도인 사마리아가 함락이 된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왕국 유다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준 희망의 예언이 본문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도래하는 날이 오면 큰 빛과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메시아가 오시는 날 죄와 죽음의 암흑 세계가 물러가고 광명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메시아가 오실 때 또 한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은 즐거움이라는 것 아닙니까?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 나라가 찾아올 때의 기쁨은 농부가 추수할 때의 기쁨과 같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눌 때 느끼는 기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메시아는 어떤 분입니까?
이사야는 장차 메시아에게서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본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빛이 두루 비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 나라에는 엄청난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메시아는 누구며 어떤 성품을 가진 분입니까?
그 대답이 바로 6-7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제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므로 다같이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謀士)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政事)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여기에 보면 한 아기로 태어날 메시아는 네 가지의 중요한 이름을 갖습니다.
첫째로, '기묘자,' 즉 '모사'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WONDERFUL COUNSELLOR'라고 했습니다. '놀라우신 조언자'라는 뜻이지요.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군왕은 지혜로운 신하들의 조언이 필요한데 메시아는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언이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스스로 지혜가 뛰어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카운슬링을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
영어 성경 NRSV는 'MIGHTY GOD'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장차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메시아 아기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 근본이 동일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단지 지혜뿐만 아니라 그 힘에 있어서도 감히 세상이 따를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 7: 14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아기 예수님 안에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존하시는 아버지,'
영어 성경 NRSV는 'EVERLASTING FATHER'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이름은 두 번째 이름,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메시아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근본이 동일하신 분인 까닭에 영존하십니다. 역사 속에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분이 아닙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우주 만물의 창조로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전 과정을 주장하시는 영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평강의 왕,'
영어 성경 NRSV는 'PRINCE OF PEACE'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저의 설교 중에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말씀은 다 잊어버려도 이 말씀 하나만큼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장차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군왕들이 무력을 통하여 가져다 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PAX ROMANA,' 즉 '로마의 지배로 얻어지는 평화,' 이것은 군사적인 힘으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또 다른 군사 강국이 나타날 경우 쉽게 허물어지는 상대적인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의 왕께서 주시는 평화는 7절 말씀 그대로 세계를 다스림에 있어서 '공평,' 즉 'JUSTICE'와 '정의,' 즉 RIGHTEOUSNESS'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없는 평화로서의 소극적이며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정의와 화목의 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이고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평화인 것입니다. 평강의 왕으로서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공평과 정의가 샘솟을 것입니다!
III. 평강의 왕을 기다리는 마음
여러분,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평강의 왕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실 하늘의 평화를 사모하십시오! 저나 여러분들이나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미국에 왔습니다. 평화를 찾아서 이 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도 흑암과 공포와 죽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흑암과 공포와 죽음이 없는 곳은 평강의 왕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평강의 왕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Florence)의 한 화랑에 가면 아주 독특한 그림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고 합니다. 둘 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무서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에는 성난 파도가 넘실대고 검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무서운 번개와 폭풍우를 내리 꽂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 한 남자가 물에 빠져 필사적인 구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DISTRESS」, 즉 「비탄」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절망과 무기력함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그림은 첫 번째 그림과 마찬가지로 성난 파도와 먹구름,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 등을 똑같이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난 파도 한 가운데 작은 바위 하나가 살며시 솟아 있는데 이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아름다운 꽃과 푸른 풀이 조금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깨어진 바위 틈 한 가운데 비둘기 한 마리가 모진 풍파에 조금도 아랑곳없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PEACE」, 즉 「평화」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평화는 노한 파도와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 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둥지를 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통치하도록 하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를, 우리가 사는 사회를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한 세상에 어떤 풍파가 몰려와도 끄떡없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그치지 않고 온갖 소란이 있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 속에 주 예수께서 주시는 참 평화가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