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영혜 집은 시실 골에서 국민은행 온천지점 옆 단독주택으로, 또 동래 식물원 앞 2층 양옥을 마지막으로
온천장 시대를 마감하고
괘법동으로 이사했다.
家勢가 기울기 시작했다.
영혜가 학업을 중단하고 부산
내려가겠다고 한다
나도 학교생활에 재미가 없었고 하일동에서 휘경동으로 이사해 ㅇㅇ대 친구들과 자취했는데
이 애들과는 달리
내 학교 내 학과 동료들에게 느끼는
빈부 격차에 대한 위화감이 내 자신이 조금 내려놓고 인내를 가지고 보지 못하고
그들과 매사에 감정적으로 부딪혔기에 나는 몹시 힘들었다.
그때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왔고, 진로를 재 설정하기 위해 부모를 만나야 했다.
우리는 만나 헤어질 때 다음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둔다.
" 주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였지만"
동소문로 위에 있던 성북천을 건너는 다리인 "삼선교 주변에 있던 대지 다방 " 에서 만났다
올림머리를 한 앳 땐 여종업원이
다가왔다.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맛있게 드세요" 라고 하며 커피 잔을 내려 놓는 순간 아가씨 얼굴이 냉수에 이 부러진 듯한 표정이다
영혜도 당황한다. 서로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 내가 궁금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영혜가 "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반 했든 ' 방ㅇㅇ ' 다 " 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 다방에서 참으로 귀한 사람을 만났다.
둘은 마주 앉아 " 너 전학 올 때 예쁜 얼굴 그대로다 " 라고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같다
영혜는 마포구 서교동에 외삼촌 댁에 있었고
나는 강동구 하일동 큰 고모 집에 있었다.
그당시 하일동은 너른 벌판 언덕 위에
허물어진 담조차 없는 시골집들로 된 마을이 군데군데 보이는 농촌마을이었다.
그나마 내가 사는 집은 합판으로 짜진 문짝을 밀고 나오면 폭 2m도 안되는 골목길에 물기 축축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리적으로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한강을 이르러
만나는 첫 지역으로 경치는 좋았다
집에 있기에 지루해 삼선교까지 걸은 적도 있었다
용산역 발 부산행 20시 비둘기호 열차를 함께 탔다 .
이 열차는 출발 시간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도착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요금이 800원으로 기억된다
나는 기회가 이때다 싶었다.
내가 내 마음을 이야기 하고 영혜의 반응을 신중하게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 열차가 여차장 있던 시절 아침 등교버스보다 더 상인과 손님들로 붐비는 시장통 같이 부산스럽다
다행히 출발 역에서 탓기에 앉아서 간다마는 마주보고 있는 좌석 사이까지 승객이 밀려 들어왔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타는 사람 , 내리는 사람 , 채소 장수, 과일장수 ,
검표원 , 양말장수 , 웬 넥타이 장수까지 도떼기시장이다.
딱! 동래남부선 새벽차가 정차한
부전역이다.
뿌옇게 흐려진 차창 옆자리에 영혜를 앉혔지만 중간에 서 있는 사람에 , 자리를 찾거나, 지나다니는
역무원까지 막아 내느라
중앙에 앉은 내 몸이 영혜 몸에 밀착해 그것도 신경쓰여서
피로해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여야 튼 영혜를 우리 집 안 사람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나만의 내면에 매몰되면, 상대를 보는 눈이 떨어져서 실수하고 헛된 노력을 하게 된다
"사람과 산은 멀리서 보는 게 낫다"
나도 부모에게 " 이런 애를 사귀고 있다" 라고 할 자료가 필요했다
양정 로터리 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같이 갈려고 했든 영혜를 집에 보낸 후
바로 영혜의 모교인 동래여자고등학교를 찾아갔다
명륜초교 재학 시 엄마가 동래시장 2층에서 옷 수선 가게를 할 때 자주 들락거려 교정은 눈에 익었다.
현재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가 있다
무슨 인연이 있었든지 누나가 운영하는 동래평생교육원에서
화장실 청소를 위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내성초교에 가서 학생을 데려와야 했다
그때도 이 아파트 주변을 바라보며
철거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부산상업고등학교도 마찬가지여겠지만
校舍만로도 매우 귀중한 근대 문화 유산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봤다
" 71 년도 졸업생 곽영혜 학생의 생활기록부 발급해 주시겠습니까 "
담당 선생께서는
" 열람은 가능하다" 라고 한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지금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학년 석차는 물론 품행 면에서도 나무랄데 없었고 지능지수는 상당히 높았다.
이런 애가 가난한 집안에 형제 자매가 5남 2녀에다
설상가상으로 한 부모를 두었건만 성격 마저도 지랄같이 제 각각인 인간들이 모여 사는 조그마한 집구석에서
"견뎌 낼 수 있을까" ,
"착한 애 고생시키는 것 아닐까 " 라고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온천장 술집 아가씨 상대로 온천시장 옆 노상에 재봉틀 한 대 놓고 옷 수선을 하고 있을 때
영혜와 함께 둘러 본 후 집까지 배웅 해주고 돌아가는데
식물원 앞에서 장인 될 분을 만났다.
처음 본 사이였는데 서로가 서로를 알아 봤다.
아니 우리 둘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군 아닌가 ! 영혜 만나러 왔나"
삼거리에 있는 가계 집으로 앞서서 들어간다.
맥주를 한잔하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 자주 놀러 오게 "
나도 금강공원에 자주 놀러 왔으니
" 장인 될 사람과 인연이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