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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
아련한 밀애의 공간을 엿보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행복한가요? 간경병을 앓던 영수(황정민 분)에게는 공기 좋고 깨끗한 요양지가 절실했다. 하지만, 클럽을 운영하며 흥청망청 삶을 탕진하던 남자에게 시골만큼 불편하고 끔찍스러운 건 없다. 양주 대신 막걸리, 과일 안주 대신 라면 한 그릇에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니.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누구보다 두려워 보였다. 영화는 그렇게 영수가 오지 중의 오지, 전북 장수로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여전히 남아있는 그들의 보금자리, 하동마을
서울에서 차로 4시간 거리. <행복>을 품은 전북 장수군이 자리한다. 영화에서 느낀 감수성을 맛보고 싶은 이라면 영수의 행적을 고스란히 따라가 보도록 하자.
역시 풍문대로 이곳은 오지 중의 오지라 불리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섬처럼 비밀스레 자리한 마을에 홀로 초대된 기분이다. 평지를 채우는 건 푸른 상추밭과 재잘대는 개울가, 작은 이정표와 느릿한 경운기뿐이다. 그 흔한 기념 간판과 낙서, 연예인들의 사인 한 장이 없다.
나뭇가지의 수런거림과 외지인을 향해 짖어대는 ‘상근이’의 목청만 적막을 메울 뿐. 그래서 ‘행복’의 흔적은 도리어 배가 된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은희(임수정)의 가는 기침 소리가 섞이고, 먼지 폴폴 날리는 버스 뒷자락엔 영수가 슈퍼 평상에 앉아 라면 한 그릇을 몰래 비워내고 있을 것 같다.
사실, 은희네 집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안내 간판 하나가 없으니 자칫 고만고만한 마을 사이에서 헤맬지도 지도 모를 일이다. 네비게이터의 낭랑한 음성 안내가 “목적지 근방에 도착 했습니다”를 연신 내뱉을 무렵 나 역시 은희네 집을 찾지 못해 동화교에 멈춰 섰다. 영화 도입부, 영수가 희망의 집을 찾아 버스로 건너던 다리다.
차에서 내려 주섬주섬 지도를 펴 들 때였을까. 호미를 어깨에 맨 마을 주민들이 낯선 손님을 향해 다가선다. “뭐 볼게 있다고 여기꺼정 왔댜?” “영화 촬영지 찾아 왔어요.” 아~거그? 우리 집 바로 옆이여. 퍼뜩 따라와~” 중년의 농부는 진흙 묻은 호미괭이를 뒷좌석에 툭툭 던져놓고는 조금 전 우리가 지나쳤던 하동마을 어귀로 안내한다.
장수군 번암면 하동마을. 이정표를 지나 오른쪽으로 내다본 곳에 그제야 은희와 영수의 집이 보인다. 검붉은 상추밭 위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집은 천주교 공소를 운영하는 이안나 할머니의 빈집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그 앞으로 차 한대 간신히 지날만한 도로가 있는데, 세간 살림을 가득 싣고 희망의 집을 나오던 이삿짐 트럭이 바로 이 즈음에 머물렀다. 2006년 가을, 촬영이 끝나며 인적이 끊긴 빈집에는 무성한 들풀만이 마당 앞을 어지럽히고 있다.
영수의 팔짱을 끼고 폴짝 폴짝 신나게 이곳을 뛰어다녔을 은희의 마음을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굴곡이 주변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쓰게 만든다. 온기가 사라진 빈집이지만, 여전히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서울 간 뒤 소식이 끊긴 영수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은희의 애달픈 마음처럼 졸졸졸 고장 난 수도꼭지로 가만히 손을 가져가본다.
“너, 천천히 밥 먹는 거 지겹지 않니?”라며 이별을 고하던 영수와 그런 애인 앞에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던 은희. 모두가 이 공간에서 행복하고자 했을 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남은 빈집은 두 주인공의 행복한 추억 보다는 쓸쓸하고 외로웠던 은희의 이미지를 닮았다. 처마 아래 서서 늘 영수를 기다렸던 은희의 심정은 마당에 서서 마을 어귀를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수를 보내기로 결심한 은희가 죽을 만큼 괴로워하던 길, 집 왼편으로 난 오르막길은 바로 그들의 행복이 파기되는 장면을 암시하던 공간이다. 바닥 위로 마른 나뭇가지들이 나뒹구는 조그만 길 위로 그녀는 터질 듯한 심장을 안고 곤두박질친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 백 번 죽음을 맛보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왼쪽 심장을 안고 바닥에 쓰러진 은희의 눈 위로 서늘한 겨울 하늘이 보인다. 나도 따라 봄빛을 머금은 그곳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랬다.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과 하동 슈퍼까지 한 눈에 내다보이는 장소. 애당초 이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든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하동마을은 두 주인공에게 온전한 감정 이입을 안겨주는 더없는 장소다. 영화가 먼저였을까 공간이 먼저였을까. 길을 따라 다시 마을 어귀까지 되돌다보면 ‘행복’이란 무얼까, 하는 질문들이 내 안에서 새어 나온다. 한 걸음, 두 걸음 영화와 공간을 비교하는 과정 속에 동화마을에서의 아침이 흐른다.
자장면과 영화관 데이트, 번암시장
첩첩산중에 자리한 영수와 은희에게 시골 장터는 더 없이 근사한 데이트 장소였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시골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떠난 두 사람. 그들에게 장터는 놀이동산보다 더 한 기쁨이요 행복이다.
원지지 마을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자리한 ‘번암시장’은 영수와 은희가 사랑을 확인한 장소다. 여느 5일장처럼 엿장수와 뻥튀기 트럭, 트로트 메들리와 생필품 도구들이 길바닥에 늘어설 것 같지만, 장터는 생각보다 소담하며 정갈하다. 농협과 이발소, 단란주점과 호프집이 각각 하나씩 늘어선 시장 통에는 영수와 은희가 자장면을 먹던 ‘자매반점’이 반갑게 자리한다. 촬영은 식당 내부가 아닌 야외 평상에서 이루어졌다. 4~5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평상에 나란히 앉은 영수과 은희. 왼손잡이 영수가 게걸스레 자장면을 먹는데 반해 은희는 입만 댄 뒤 곧 젓가락질을 멈춘다.
“이집 자장면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설정이었는데 기분 안 나쁘셨어요?”라고 묻자, 주인아주머니는 수줍게 웃으며 답한다. “영화는… 그냥 영환디요 뭐.” 이 집의 자장 소스는 달달한 춘장이 아닌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함께 주문한 탕수육은 그 튀김이 바삭하고 기름지지 않아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영수와 은희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평상에 마주 앉아 먹는 자장면 한 그릇은 생각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울 터. 장수군 번암면의 패밀리레스토랑, 자매반점으로 때가 되자 이장님도 검정 에쿠우스를 끌고, 동네 일꾼들도 한 가득 차를 타고 모두모두 밀려온다. 그야말로 장수사람들에게는 명동 한 복판처럼 흥겨운 공간이다.
그리고 은희의 마지막 모습, 장수보건의료원
번암시장에서 식사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20분 거리의 ‘장수보건의료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투병하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병원은 여행지로서 그리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니지만, 장수보건의료원은 좀 다르다. 주차장에 차를 받치고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공기가 옷 속까지 스며든다.
한들한들 나부끼는 바람을 쫒아가자니 병동 뒤편으로 물을 가득 머금은 논이 보인다. 한창 모내기 철을 맞아 논에 물을 대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푸른 들판 위로 고인 물은 마치 거울처럼 한 낮에도 눈부시게 빛난다. 파란 의자에 앉아 가만가만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세상 이처럼 공기 좋고 예쁜 풍경을 지닌 병원도 없지 싶다.
그렇게 잠시, 바람을 쐬고 마음을 가다듬으면 비로소 은희의 병실을 엿볼 마음의 준비가 든다. 조심스레 누르는 엘리베이터의 층계 버튼. 맨 꼭대기층 504호는 은희가 마지막 숨을 거둔 병실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맞은편 의자에 앉은 할머니 한분과 눈이 마주친다. 웃으며 목례를 마치자 이번에는 라디오에서 나긋한 창 소리가 불경처럼 흘러나온다. 그렇게 가정집 같은 병실 복도를 따라 걸으면 낡고 비루한 모습의 영수가 된다. 몸은 병들고 허리는 굽은 채로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던, 그 누구보다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던 그 겨울의 영수.
6개의 침대가 가지런히 놓인 504호는 입원환자 없는 텅 빈 모습이었다. 참 다행이다. 누군가 아파하는 이, 아팠으나 이제는 평화를 얻은 이 할 것 없이 모두모두 떠난 병실. 그래서 누구도 아파하는 자가 없는 고요함. 그 가운데 은희가 누워있던 침대 하나가 마치 그녀의 몸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자리한다. 그러고 보면 “나 죽을 때 영수씨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던 은희의 소원은 다행히 이루어졌다.
생에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어쩌면 자학으로 자신을 망친 그보다 아름다운 기억만 안고 떠난 그녀가 아니었을까. 그런 자문들이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영수의 병이 나아갈 즈음 찾아온 옛 애인, 엄밀히 말하면 그 둘의 동화 같은 사랑에 ‘휴대폰’이라는 시간성이 개입되면서 장수는 문명화된다.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자식 낳고 농사지으며 살 듯 변화된 영수에게 도시의 문명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곁에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파랑새’ 같은 것
◇ 가는 방법
서울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장수IC를 빠져나온다.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 방면으로 20분 정도 들어가면 번암면이 나온다. 약 4시간 소요. 번암면에서 영화 촬영지를 돌아보는 일은 간단하다. 작은 마을 간판에만 집중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번암면을 중심으로 하동마을, 동화교, 원지지마을이 차로 5분 거리에 모여 있으며 그로부터 번암시장까지는 차로 10여분 거리. 장수보건의료원은 차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다.
그 밖의 정보 장수군청 홈페이지(www.jangsu.go.kr)를 통해 숙박 및 더 다양한 주변 소식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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