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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장목면 장목 중학교 2학년 시절 뒷줄-양정열,김황수,앞에 양방수. 1956년
장목 월광사진관 한재운 고숙부님께서 촬영하였는데 60년이 지났서도 사진이 변치 않은 이유는 인화 후에 하이보에서 세척을 한 다음 수세를 오랬동안 잘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그대로이다. 당시만 해도 기념 촬영은 추석이나 설날 아니면 기념촬영을 할수가 없었다. 이 사진도 친구 셋이서 장목에 가서 기념으로 남기자고 촬영한 사진이다.
우리가 장목중학교를 다닐때만해도 교실은 현재 면사무소 자리에 낡은 건물에 조그마한 운동장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 겨울에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 점심때는 그 위에 도시락을 엊어 따듯하게 데어먹었던 추억이 남아 있고 중1일때는 모기휴 선생님이 중2학년때는 김기태 선생님께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영국식 발음에 콩그리식 영어 발음으로 배웠다. 필자는 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김기태 은사님의 도움으로 하청 고등학교를 월반하였다.
장목 중학교 다닐때 아침 조회시간에 訓話(훈화)를 전교생들이 듣는 장면. 男女共學이였고, 필자의 추억으로는 양우암 농협조합장님께서 감찰부장(그후 기율부장이라 칭했다.)으로 완장을 차고, 학생들을 인솔하시던 추억이 떠오르고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율천 구대영 형님이 대대장을 하면서 아침 조회때 구령하던 생각이 난다. 1952년 3월 24일 제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1956년 7월 15일에 양종식 선생님께서 장목중학교 총동창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시던 생각이 떠 오른다. 60년의 세월이 지났다.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 했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 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진, 건물이 이 건물로 동구의 객사 건물이였다.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主幹者(주간자)라고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설명 하자면 1656년 효종 7년 丙申(병신)년에는 長木陳(장목진)으로 설치하여 別將(별장) 武官(무관) 종9품이 다스리다가 1712년 肅宗(숙종) 19년에 長木鎭(장목진)으로 昇格(승격)하여 別將(별장)으로 武官(무관)인 從三品(종삼품)인 僉節制使(첨절제사)로 하여금 守備(수비)케 했다는 記錄(기록)은 平素(평소)에 親分(친분)이 두텁던 長木(장목) 海東醫院(해동의원) 金鍾碩(김종석) 院長(원장)께서 鄕土史(향토사)에 관심이 많아 長木面(장목면) 文化財推進委員會(문화재추진위원회) 委員長職(위원장직)을 맡아 1980년 1월 14일에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委員會(문화재위원회)에서 地方有形文化財(지방유형문화재) 제 189호로 指定(지정)을 받아 1981년 12월 18일 午前(오전) 10시에 國庫(국고)의 支援(지원: support) 으로 客舍(객사) 上梁式(상량식)을 擧行(거행) 하면서 舊客舍(구객사) 上樑文(상량문)을 發見(발견)하였다면서 주신 客舍上樑文(객사상량문)에 記錄(기록)한 내용이 위와 같다.
이 건물 좌측은 교무실이였고, 우측 교실은 필자가 공부하던 중학교 1학년 교실이였다. 이 교실에서 김 영삼 선배님께서 최년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후배인 저희들 교실에서 1시간 의정할동을 하기까지 장목국민학교를 다닐때의 추억담을 들려 주시던 교실이다. 피난민 양학관 교장 대리 교감 선생님께서 한문을 가르쳤다.
이 건물은 필자가 장목중학교 2학년 다닐때의 교실 전경이다.
(8). 장목진(長木陣) 객사(客舍)에 관한 역사(歷史)
2003년 10월 7일(화) 2009년 8월 7일 재 편집
慶南新聞(경남신문:제13939호) 1991년 3월 4일 월요일 신문을 보고...
人脈(인맥) <96>의 題字(제자)에 金永坤(김영곤)에 李月洙(이월수) 記者(기자)가 쓴 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 人脈(인맥)에 나오는 長木陳(장목진) 客舍(객사) 沿革(연혁: history)은 遺憾(유감: regret)이다.
첫째 이야기. 현 長木鎭(장목진) 객사는 1592년 正月(정월) 宣祖(선조25)년 長木鎭營(장목진영) 客舍(객사)로 건립하여 海防(해방)의 정사와 平和(평화)의 祈禱( 기도)를 올렸다는 傳說(전설)은 千不當萬不當(천부당만부당: absolute injustice) 한 이야기다.
둘째 이야기.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 때에는 巨濟(거제) 玉浦(옥포) 海戰(해전)과 漆川(칠천) 海戰(해전)을 위하여 이 客舍(객사)에서 李忠武公(이충무공)과 李英男(이영남) 장군이 戰略(전략)을 熟議(숙의: deliberate conference)한곳 이라는 것은 성급한 이야기며 想像(상상)이다. 지나치면 論難(논란)의 대상이 된다. 문헌(文獻)에도 없는 틀린 이야기다.
玉浦海戰(옥포해전)은 1592壬辰(임진)년 5월 7일에 일어나 倭船(왜선) 30여척을 격파 하였고, 이해 5월 12일은 古縣城(고현성)이 함락되어 巨濟島(거제도) 섬 전체가 外寇(외구)의 소굴로 변해 버렸다. 漆川海戰(칠천해전)은 1597년 丁酉(정유)년 7월 15일에 일어나 元均(원균)이 島津忠豊(도진충풍:시마즈)에게 패하여 陸地 (육지)로 도망가다가 죽은곳 이기도 하다.
셋째이야기. 1785년 正祖(정조:9)년에 行別將(행별장) 어해장군 李珍國(이진국)이 重建(중건)하다는 대목에서 行別將(행별장) 御海將軍(어해장군)이 아닌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李珍國(이진국)이다. 어해장군이란 상상한 벼슬이다.
1991년 3월 4일 발행한 慶南(경남) 新聞(신문) 內容(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慶南新聞(경남신문:제 13939 호)1991년3월4일월요일신문내용을아래에옮긴다....
巨濟島(거제도)중에서도 海面(해면)에 접한 길이가 제일 길고 提石峰(제석봉)을 主峰(주봉)으로 하여 이어진 連峰(연봉)은 남쪽 大錦山(대금산)을 중심으로 한 外浦(외포) 矢方(시방) 大錦(대금) 栗川里(율천리)를 품고, 있는듯 이어진 곳이 바로 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 利水島(이수도)와 猪島(저도) 無人島(무인도) 등 8개섬이 자리한 곳곳의 해면은 아침햇살이 떠 오를때면 東海(동해)는 금빛으로 부터, 은빛으로 변하여 水平線(수평선)이 연출되고, 西海(서해) 鎭海灣(진해만)은 잔잔한 호수의 은빛 바다가 노을 빛을 받아, 다시 금빛으로 변하는 황금빛 바다를 볼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외포(外浦) 앞 바다의 달섬, 大錦(대금), 矢方(시방) 앞의 利水島(이수도)와 흰여, 冠浦(관포)의 鷄島(계도: 닭섬 혹은 달섬이라 부른다), 柳湖(유호) 앞의 猪島(저도) 와 舊永(구영), 黃浦(황포)앞의 점도, 長木(장목) 앞의 마아섬, 梅洞(매동) 앞의 漆川島(칠천도)등 섬과 섬의 연결이 수 놓은 것 같아 새삼 조물주의 조화와 신비에 경탄, 외경스럽기만 하는 이곳 長木面(장목면)의 생김새는 육지가 바다로 뻗어 가다가 우뚝 멈추기도 하고, 움푹 들어가기도 하는 凹凸(요철)의 地穀(지곡)으로 거제도의 중심에 길게 뻗어져 있다.
長木灣(장목만)의 생김이 깊숙이 들어간 門(문) 처럼 생겼다하여 高麗(고려) 제 8대 顯宗(현종) 3년 1012년에 長門浦(장문포)라 일컬어지기도 했는데, 長木面(장목면)의 長久(장구: permanence)한 歷史(역사)는 巨濟島(거제도)의 歷史(역사)와 그 榮辱(영욕)을 같이 한다.
1470년 成宗(성종) 원년에는 巨濟(거제) 제 7진의 하나인 長木陳(장목진)을 設置(설치)하고 客舍(객사:지방 유형 문화재 제 189호)를 건립, 別長(별장)을 두어 군사 정치를 하였다.
현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는 1592년 정월(선조 25년) 장목진장이 진영객사로 건립하여 海防(해방)의 政事(정사)와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巨濟(거제) 玉浦海戰(옥포해전)과 漆川海戰(칠천해전)을 위하여 이 客舍(객사)에서 李忠武公(이충무공:이순신 장군)과 李英男(이영남) 將軍(장군)이 戰略(전략)을 熟議(숙의)한 곳이기도 하다.
1785년 正祖(정조) 9년 行別將(행별장) 禦海將軍(어해장군) 李珍國(이진국)이 重建(중건)하고 1802년 증수하였다.
<<註(주) : 禦侮將軍(어모장군)을 御海將軍(어해장군)으로 誤記(오기) 하고 있다 >>
이곳 長木(장목)은 栗川城(율천성), 大錦山城(대금산성), 軍港浦(군항포), 永登倭城(영등왜성), 軍威城(군위성)등이 있어 지리적으로 日本(일본)인들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곳으로 보인다.
歷史的(역사적) 人物(인물)로는 長木面(장목면) 궁농리 水宮祀(수궁사)에 제향하고 있는 五峰(오봉) 潘仲慶(반중경)이 있다. 1574년 선조 7년 2월 7일 岐城君(기성군) 海旅齋(해려재) 文範公(문범공) 반부의 후손으로 태어나 임진왜란때 古縣城(고현성) 전투에 參劃(참획: join the planning) 하였다가 城(성)이 함락되므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의 막하로 가 兄(형)인 仲仁(중인)과 같이 水戰(수전)에 참여, 군사모의에 획찬하다가 1595년 宣祖(선조) 乙未(을미) 5월 2일에 海戰中(해전중) 장렬한 戰死(전사)를 하였고, 그의 우국순사한 그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선무원종 1등 功臣(공신)으로 기록 되고 訓練院(훈련원) 副正(부정)에 晋州判官( 진주판관)을 겸해 받았고, 그 뒤에 兵曹判書(병조판서)를 받았다.
뚜렷한 역사적 인물은 밝혀진 것은 없고, 烈行者(열행자)로 栗川里(율천리)에 있는 孝烈婦(효열부) 旌門(정문)의 具命順(구명순)이 있다. 姜斗璜(강두황)의 妻(처)로 어렸을 때부터 90의 할머니에게 날마다 朝夕(조석)으로 문안을 드리고 부모를 극진히 섬겼는데 姜氏(강씨) 가문에 출가한 후에는 시부모를 공경하고 부군을 잘 받들었다.
부군이 병이 들었을 때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天地神明(천지신명)께 간구했으나 세상을 떠나자, 先山(선산)에 안장한 다음 식음을 전폐하고 9일만에 부군의 뒤를 따라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長木(장목) 矢方里(시방리)에 후손이 살고있는 昌原黃氏(창원황씨) 希世(희세)의 딸 黃再今(황재금)도 남편과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시 아버지 병구환의 공덕을 하늘도 알아 완치되게 했다.
1926년 공부자 탄강일에 募聖公會(모성공회)에서 찬양문이 수교되었고, 1981년 이 갸륵한 기록비를 건립하였다. 1911년 4월 6일 이곳 長木面(장목면)의 初代面長(초대면장)은 金濟熙(김제희)로 金章鎰(김장일), 金正杓(김정표), 金基玉(김기옥), 金允祚(김윤조), 全玉善(전옥선), 金鍾瓚(김종찬), 金兌坤(김태곤), 金仁祚(김인조), 全道敏(전도민), 金鍾琯(김종관), 宋學受(송학수), 徐金斗(서금두), 金鳳龍(김봉용), 宋學俊(송학준), 金顯沂(김현기), 金桂午(김계오), 金淇坤(김기곤), 朴錫燁(박석엽), 으로 이어져 현재는 21대 金三炅(김삼경)씨가 맡아 오고 있다.
姓氏(성씨)는 昌原黃氏(창원황씨), 金海金氏(김해김씨), 晋陽河氏(진양하씨), 達成徐氏(달성서씨), 晋陽姜氏(진양강씨), 靈山辛氏(영산신씨), 恩津宋氏(은진송씨), 草溪鄭氏(초계정씨), 綾城具氏(능성구씨), 등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곳이다.
<< 註(주) : 南原梁氏(남원양씨)와 漆原尹氏(칠원윤씨)도 있고, 慶州金氏(경주김씨), 慶州李氏(경주이씨), 巨濟潘氏(거제반씨) 密陽朴氏(밀양박씨) 金寧金氏(금령김씨) 咸安趙氏(함안조씨)도 있다.>>
작고한 人物(인물)중에는 前(전) 慶南道敎育監(경남도교육감)을 지내던중 작고한 李水東(이수동)씨, 前(전) 水産廳(수산청) 局長(국장)으로, 고려遠洋(원양) 專務( 전무)를 지내고 한성기업 副社長(부사장)으로 在職中(재직중) 작고한 梁正德(양정덕)씨, 등이 이곳 출신들이었고, 現存(현존) 人物(인물)로는 前(전) 道議員(도의원) 民選(민선)을 지냈고, 長木中學校(장목중학교) 理事長(이사장) 이였던, 金鍾瓚(김종찬)씨, 前(전) 제 1.2지구 잠수기수협조합장과 장목농협장을 지냈고, 장목번영회 회장인 河銀澤(하은택)씨, 서예가로 前(전) 장목 국민학교 교장이였던 菊井(국정) 金顯奉(김현봉)씨가 있다.
政界(정계)로는 민장당 代表(대표) 최고위원 金永三(김영삼1927년-2015년11월 22일 0시 22분 逝去)씨, 민자당 경남도당 위원장, 대통령 당선. 金奉祚(김봉조)씨, 민주당 원내 총무 金正吉(김정길)씨가 이곳 출신, 金永三(김영삼) 최고의원은 51년 장택상 총리 비서로 政界(정계)에 발을 디딘이래 54 년 3대 민의원, 60년 5대민의원, 6.7.8.9.10.13대 國會議員(국회의원)을 지낸 거물, 84년 민주협 공동의장도 지냈고,신민당 총재, 상임고문, 통일민주당 총재, 대통령후보등 파란많은 정치일선의 길을 걸어온 정치인이다. 68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 총재특별보좌역을 지내다 84년 창당 발기인으로 민추협 중앙운영위원에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 됐던, 金奉祚(김봉조)씨는 88년 13대 국회의원에도 당선. 민자당 경남도지부장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金正吉(김정길)씨는 70년 부산대 총 학생회장을 지냈고, 졸업후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내다 한동안 중앙노트 사업사 대표 삼성철강 대표로 있었고, 84년 민추협 운영위원, 85년 부산에서 민한당으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 87년 민주당 정책심의부의장, 이듬해 13대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원내 수석부총무로 활동하고 있는 이곳 출신. 법조계 인사로는 제 22대 검찰총장을 지낸 金淇春(김기춘: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씨가 長木面(장목면) 矢方里(시방리)가 고향, 마산중, 경남고, 서울대 법대로 진학한 수재로 법대 3학년 재학중인 60년 10월 제 12회 고시사법과에 합격,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법무부 법무실 검찰국, 인권과장, 중정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다가 79년 2월 대통령 법률비서관으로 부임했다가 80년 4월 검사장을 거쳐, 법무연수원 검찰연수부장, 연수원 원장직을 거쳐 檢察總長(검찰총장)에 까지 올랐던 법조계의 거물, 부산지방 법원 李世炯(이세형) 판사도, 이곳이며, 서울 지검 동부지청 형사1부장 潘憲秀(반헌수) 검사도 장목면 송진포리 출신, 67년 제 8회 사시에 합격, 법무관직에서 제대, 72년 사울지검 인천지청 검사로 법조계에 진출했던 潘憲秀(반 헌수) 검사는 그 동안 대검지검 서산지청, 부산지검, 서울, 강릉, 순천지청 부장검사, 전주지청장, 대정, 의정부, 인천지검 부장검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계는 서울대 농대 교수 潘性紈(반성환)씨도 송진포리가 고향. 서울대 농대 대학원 농업경제학과를 나와 美國(미국) 미시간대학 콜로라도 대학, 미네소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획득한 학구파인 潘(반)교수는 노업경제학회, 경제정책협의회, 농협중앙회, 농촌진흥원, 축협중앙회, 양곡유통위원회 의원장등 우리나라 농촌경제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해온 농업통, 시인이며, 동아대 국문과 교수인 朴喆石(박철석)씨, 공군대학 全秀漢(전수한) 교수, 제주대, 黃正泰(황정태) 교수, 부산 동의대 구우영 교수도 있다.
보사부 의료보험국 보헙급여과장을 거쳐 보사부 식약청 본부장, 인천지방 식약청장, 부산지방 식약청장. 보사부 보건국장을 지낸 梁明生(양명생)씨, 前(전) 충무시 부시장 徐榮七(서영칠)씨, 수산청 포황검역소장 河大九(하대구)씨, 거제군 내무과장 朴聲汶(박성문)씨, 충무시 어촌지도 소장 河日根(하일근)씨,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감,경정,총경을 승진, 의령경찰서장, 경남 지방청 보안과장,사천 경찰서장, 거창 경찰서장, 마산 중부경찰서장으로 정년 퇴임한 黃相權(황상권)씨, 장목단위 농협장 孔良官(공양관)씨, 장목우체국장 黃菊富(황국부)씨가 이곳, 부산 한얼정신 신경과 병원장 이수정씨, 장목중학교 교장 金淇台(김기태)씨, 부산용호국민학교 교장 金宗安(김종안)씨, 대금국민학교 교장 金東漢(김동한)씨, 외포중학교 교장 李學用(이학용)씨, 前(전) 거제 수협 조합장 金瀚允(김한윤)씨, 거제 평통 위원장 鄭南植(정남식)씨, 前(전) 고려원양 상무이사 李元載(이원재)씨, 군정자문의원 김석봉씨, 前(전) 선경금속(株(주) 대표이사로 있다가 지금은 흥국주유소 대표인 河良坤(하양곤)씨, 동영프로덕션 대표로 미국에 이주한 후 (사)미주방송인협회/여의도클럽/USA:총무국장 梁芳秀(양방수)씨, 서울증권 徐根九(서근구) 부장등이 長木面(장목면) 출신이다.
以上(이상) 新聞(신문) 內容(내용)이지만 아래 人物(인물)도 더 있다.
지난 17여년 동안 金永三(김영삼)씨는 대통령을 지냈고, 金淇春(김기춘)씨는 現在(현재) 國會議員(국회의원)이며, 冠浦里(관포리) 梁氏(양씨) 家門(가문)에서 세분의 博士(박사)가 誕生(탄생)하였는데 梁明生(양명생)씨는 보건복지부 보건국장을 역임하고, 대한병원협회 경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1994년 2월. 大邱(대구) 한의대학교(구.경산대학교) 대학원에서 保健學(보건학) 博士學位(박사학위)를 받았고, 梁鍾植(양종식)씨의 女息(여식)인 梁會正(양회정)양은 1998년 12월 17일 釜山(부산) 大學校(대학교) 大學院(대학원) 生物學科(생물학과)에서 理學(리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양우암(梁又岩)씨의 장남 양진생(梁珍生)이도 2008년도에 부산 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冠浦里(관포리) 金氏(김씨) 가문에서 김황수(金晃守)씨의 여식(女息)인 큰딸 金恩敬(김은경)양은 大田(대전)에 있는 한국 과학기술원에서 분자생물 박사학위를 셋째 딸 金 美靜(김 미정)양은 光州(광주)과학기술원에서 신소재 공학 박사학위를 받아 長木面(장목면) 출신의 榮譽(영예)를 더 하고 있다.
또 潛水機水協(잠수기수협) 제 1,2지구 組合長(조합장)을 지냈고, 전 장목농협장을 지낸 梁又岩( 양우암)씨도 관포 출신이다. 全斗煥(전두환) 정권때 전국개인택시 운송사업조합장를 지내다가 미국을 건너와 뉴욕에서 평통자문 의원과 한인회 부회장을 지낸 金政一(김정일)씨도 장목면 冠浦里(관포리) 출신이다. 또한 前(전) 蔚山(울산) 江南敎育廳(강남교육청 ) 敎育長(교육장)을 지내고, 2000년 5월에 韓國敎育者(한국교육자) 大賞(대상)을 받으신 尹正文(윤정문)씨도 長木面(장목면) 矢方里(시방리) 出身(출신)이다. 또 해양수산부 황수철 부이사관, 보험지점장을거쳐 손해사정인으로 명성을 날리는 황 수길이도 頭毛里(두모리) 출신이다.
한국 정책연구소 이사장(전 거제경찰서장)으로 제 18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고 제 19대 재선에 당선하고, 제 20대 국회의원에 진출한 김 한표 국회의원과, 서울 양천구 신월 2동 한양 중앙교회 담임 목사로 전 대우조선 노조위원장을 지내고 국회의원에 낙마힌 양 동생이도 장목면 관포 출신이다. 또한 이외에도 장목면 출신이 더 있다고 筆者(필자)는 본다.
경남 거제시 국회의원 무소속 7번 김한표입니다 ... - YouTube
正史(정사)에 記錄(기록) 하기를 1592년 4월 14일에 釜山(부산)이 함락 되고, 5월 12일에는 巨濟(거제) 古縣城(고현성)이 陷落(함락: falling). 되고, 이해 5월 29 일에는 泗川(사천) 앞 바다에서 倭船(왜선) 12척을 擊破(격파)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負傷(부상) 당하고, 巨濟島(거제도)는 이미 倭賊(왜적)이 모두 점거한 상태인데 1592년 임진년에 長木陳(장목진) 客舍(객사)에서 언제 李英男(이영남) 將軍(장군)과 전략을 숙의할 여유가 있었을까 ? 그런 文獻(문헌)은 없다. 傳說(전설)이 있다는 무분별한 主張(주장)은 歷史(역사)를 歪曲(왜곡) 할 素地(소지)가 있다.
1592년 壬辰(임진)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의 歷史的(역사적) 상항을 考察(고찰: consideration)해 볼 필요가 있다.
1592년 임진년 4월 14일 少西行長(소서행장:고니시)을 선봉으로 제 1군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釜山(부산)에 上陸(상륙)하여 密陽(밀양), 大邱(대구), 尙州(상주), 聞慶(문경)을 거쳐 忠州(충주)에 이르고, 加藤淸正(가등청정:가또오)이 이끈 제 2 군은 蔚山(울산), 永川(영천)을 거쳐 忠州(충주)에서 제 1군과 합세하여 서울로 進軍(진군)하는 한편 黑田長政(흑전장정:구로다)의 제 3군은 金海(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北上(북상)하고, 九鬼嘉隆(구귀가륭:구끼)과 藤堂高虎(등당고호:도오도오)가 거느린 9천여명의 水軍(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케 하여 일곱해(7년)에 걸친 歷史上(역사상) 가장 처참한 난리로 倭賊(왜적)이 侵略(침략)했다는 급보를 들은 朝廷(조정)에서는 申砬(신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李鎰(이일)을 巡邊使(순변사)로 삼아 倭賊(왜적)의 進路(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李鎰(이일)은 尙州(상주)에서 크게 패하고, 申砬(신립)은 忠州(충주) 彈琴臺(탄금대)에서 패하여 죽었다.
申砬(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上下人心(상하인심)을 크게 동요 시키고, 宣祖(선조)는 朝廷(조정)의 모든 신하들과 平壤(평양)으로 蒙塵(몽진: flight from the imperial)하지 않을수 없는 급박한 상항에 처했다.
한편 李舜臣(이순신:1545인종1년-1598선조31)將軍(장군)은 宣祖(선조:9년)31살의 나이로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權知訓練院奉事(권지훈련원봉사:종팔품관)로 처음 官職(관직)에 나섰으며, 1586년 宣祖(선조:19년)에 司僕侍主簿[(사복시주부:종6품 郎官(낭관)]가 되고, ,鉢浦萬戶(발포만호)를 거쳐, 1586년 선조 19년에 造山萬戶(조산만호:정사품관)겸 鹿屯島(녹둔도) 屯田事宜(둔전사의)가 되었을 때, 國防(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兵力(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으나, 節度使(절도사) 李鎰(이일)에 의하여 거절 되었다.
그해 가을 경흥부사 李慶祿(이경록)이 군사를 이끌고, 鹿屯島(녹둔도)를 와서 추수할때에 楸島(추도)에 있던 胡人(호인)들이 侵入(침입)하여 이에 戍將(수장) 吳享(오향), 林景藩(임경번)은 화살에 맞아 죽고, 많은 良民(양민)을 虐殺(학살)하자, 府使(부사) 李慶祿(이경록)과 李舜臣(이순신)이 賊(적)을 막아 내고,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은 홀로 捕虜(포로) 60여명을 奪還(탈환: recapture)하였는데도, 節度使(절도사:종이품관) 李鎰(이일)은 府使(부사) 李慶祿(이경록)과 오히려, 그 피해의 책임을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에게 돌리고, 그를 獄(옥)에 가두고 死刑(사형)에 처할 것을 上疏(상소)하였으나, 그의 無罪(무죄)가 判明(판명)되어 解任(해임)으로 그쳤었다.
그후 全羅道(전라도) 巡察使(순찰사) 李珖(이광)에게 拔擢(발탁: selection)되어 全羅道(전라도) 助防將(조방장). 宣傳官(선전관)등이 되고, 1589년 宣祖(선조:22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柳成龍(유성용)에게 추천되어, 高沙里僉使(고사리첨사)로 昇進(승진: promotion), 이어 折衝將軍(절충장군)으로 滿浦僉使(만포첨사), 珍島郡守(진도군수)등을 지냈다.
1591년 辛卯(신묘)년에 46세의 나이로 全羅左道水軍節度使(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이품관)로 임명되어 任地(임지)인 順天府(순천부)의 營地(영지)에 부임하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이에 대비키 위해 창안한 龜船(구선:거북선)을 제작하기 시작 하는 한편 장비를 갖추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심혈을 기울렸다.
亂中日記(난중일기)에 의하면 여수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進水(진수)한 것은 1592년 3월 27일이며, 이에 장치한 地字砲(지자포), 玄字砲(현자포)를 試射(시사)하여 거북선이 實戰用(실전용)으로 完成(완성)되기는 倭侵(왜침) 전전날인 4월 21일이였다 한다.
實戰(실전)에는 5월 29일 泗川洋海戰(사천양해전)이 처음이였다. 이러한 상항에 처했던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李英男(이영남) 將軍(장군)과 전략을 熟議(숙의)했다는 傳說(전설)은 定設(정설)이 아니라고 筆者(필자)는 판단한다. 李英男 (이영남) 將軍(장군)은 그때 巨濟(거제) 玉浦萬戶(옥포만호)로 있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元均(원균)을 도와 倭賊(왜적)을 방어 했다.
한편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元均(원균)은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造山萬戶(조산만호)로 있을 때 邊方(변방)의 藩湖(번호)를 토벌한 功(공)으로 富寧府使(부령부사)를 거쳐, 1592년 宣祖(선조:25년)에 慶尙右水使(경상우수사)가 되었는데, 이해 4월에 倭賊(왜적)이 侵入(침입)하자 겁이나서 逃亡(도망)하려다가 李雲龍(이운용)등의 권고로 全羅左水使(전라좌수사)로 있던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救援(구원)을 얻어, 倭賊(왜적)을 처부수고, 王(왕)의 표창을 받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였다.
1594년 宣祖(선조:27)년에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元均(원균)이 그 麾下(휘하: troops under one's command)에 있게 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명령에 불복하매, 朝廷(조정)에서는 1595년 宣祖(선조:25)년에 忠淸兵使(충청병사)에 전임 시켰다.
그 후 이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元均(원균)의 일파와 일본의 이간책으로 1596년 (선조29년) 2월에 서울에 압송하여 고문끝에 사형을 받게 된것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下獄(하옥)하게 되고, 元均(원균)이 統制使(통제사)가 되었으나, 酒色(주색: wine and woman)에 빠지고 軍務(군무)에 태만하다가, 1597년 倭賊(왜적)이 再侵(재침)한 丁酉再亂(정유재란)때에 패전하여 우리 海軍(해군)이 全滅(전멸)되고, 元均(원균)도 陸路(육로)로 逃亡(도망) 가다가 잡혀 죽으니, 이것을 漆川海戰(칠천해전)이라 한다.
朝廷(조정)에서는 이에 당황하여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을 재 기용하는 羞恥(수치: shame)스러운 歷史(역사)가 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巨濟島(거제도)의 古縣城(고현성)은 함락되고 불타버려 1664년 18대 顯宗(현종:5) 甲辰(갑진)년에 官廳(관청)을 復建(복건)하면서 李東耉(이동구) 巨濟(거제) 縣令(현령)이 巨濟面(거제면)으로 縣(현)을 옮겼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간의 戰爭(전쟁)으로 倭賊(왜적)의 소굴로 변한 長木(장목), 軍港浦(군항포) 甑城(증성:시루성=지금의 농바우)을 위시하여 舊永(구영)등은 사람들이 扶支(부지)할수 없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 P> 1656년 17대 孝宗(효종: 7) 丙申(병신)년에 統制使(통제사) 柳赫然(유혁연)이 王(왕)의 命(명)을 받고, 巨濟島(거제도)의 地形(지형)과 民心(민심)을 살피고, 狀啓(장계)를 올려 지금의 長木(장목)에 長門浦陳(장문포진)을 세워 처음에는 武官(무관) 從九品(종구품)인 別將(별장)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고, 戰船(전선) 1척, 兵船(병선) 1척 伺候船(사후선) 1척을 두었다.
그 후에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 했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 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主幹者(주간자)라고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 기록하고 있다.
다시 설명 하자면 1656년 효종 7년 丙申(병신)년에는 長木陳(장목진)으로 설치하여 別將(별장) 武官(무관) 종9품이 다스리다가 1712년 肅宗(숙종) 19년에 長木鎭(장목진)으로 昇格(승격)하여 別將(별장)으로 武官(무관)인 從三品(종삼품)인 僉節制使(첨절제사)로 하여금 守備(수비)케 했다는 記錄(기록)은 平素(평소)에 親分(친분)이 두텁던 長木(장목) 海東醫院(해동의원) 金鍾碩(김종석) 院長(원장)께서 鄕土史(향토사)에 관심이 많아 長木面(장목면) 文化財推進委員會(문화재추진위원회) 委員長職(위원장직)을 맡아 1980년 1월 14일에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委員會(문화재위원회)에서 地方有形文化財(지방유형문화재) 제 189호로 指定(지정)을 받아 1981년 12월 18일 午前(오전) 10시에 國庫(국고)의 支援(지원: support) 으로 客舍(객사) 上梁式(상량식)을 擧行(거행) 하면서 舊客舍(구객사) 上樑文(상량문)을 發見(발견)하였다면서 주신 客舍上樑文(객사상량문)에 記錄(기록)한 내용이 위와 같다.
아래 잘못 기록한 내용이다.
(1) 參考文獻(참고문헌)
다음은 隆熙(융희 2년: 1908년 純宗(순종) 2년) 本(본)인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제 27권 156페이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永登浦城(영등포성) = 지금의 舊永(구영)의 城(성)동북쪽 70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68尺(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안에 시내가 1곳 있다. 1623癸亥(계해)년 仁祖(인조) 元年(원년)에 見乃梁(견내량) 서쪽으로 옮겼다. 지금은 페성이다. 永登浦城(영등포성)에는 備局謄錄(비국등록)에는 倭城(왜성)이 있다 하였다. 舊長木浦城(구장목포성)도 備局謄錄(비국등록)에는 倭城(왜성)이 있다 하였다.
(2) 參考文獻(참고문헌): 壬辰倭亂(임진왜란) 중의 戰鬪(전투: 1592-1598)
戰鬪(전투)에 參加(참가)한 倭將(왜장)의 이름
少西行長(소서행장) =고니시 -黑田長政(흑전장정) =구로다 - 小早川隆景(소조천륭경) =고바야가와 脇坂安治(협판안치) =와끼자끼-九鬼嘉隆(구귀가륭) =구끼 - 加藤淸正(가등청정) =가또오 島津忠豊(도진충풍) =시마즈 -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우끼다- 毛利秀元(모리수원) =모오리
年月日 戰鬪地 朝鮮將軍 倭兵將軍 備考
년월일 전투지 조선장군 왜병장군 비고
1592년 宣祖(선조) 25년 壬辰(임진)년
4월14일 釜山(부산) 鄭撥(정발) 少西行長 부산함락, 鄭撥(정 발)戰死(전사)
4월15일 東萊(동래) 宋象賢(송상현) 少西行長 동래함락, 宋象賢(송상현)전사
4월19일 金海(김해) 徐禮元(서예원) 黑田長政 金海城(김해성) 陷落 (함락)
4월24일 尙州(상주) 李鎰(이일) 少西行長 李鎰(이일), 敗走( 패주)
4월26일 彈琴臺(탄금대) 申砬(신립) 少西行長 申砬(신립), 戰死(전 사)
5월 7일 玉浦(옥포)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30척 擊破(격파)
5월 8일 赤珍浦(적진포)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11척 擊破(격파)
5월18일 楊州(양주) 申恪(신각) 壬辰倭亂(임진왜란)의 첫승리
5월18일 臨津江(임진강) 金命元(김명원) 金命元(김명원) 패함.
5월22일 驪江(여강) 元豪(원호) 倭兵(왜병) 50여명을 죽임
5월29일 泗川(사천) 李舜臣(이순신) 왜선12척, 격파, 이순신 負傷(부상)
6월 2일 唐浦(당포)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20척 擊破(격파)
6월 5일 唐項浦(당항포)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26척 擊破(격파)
6월 5일 龍仁(용인) 李洸(이광) 삼도의 근왕병이 패함
6월 7일 栗浦(율포)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1척 擊破(격파)
6월18일 平壤(평양) 尹斗壽(윤두수) 少西行長 平壤(평양) 陷落(함락)
7월 8일 熊峙(웅치) 李福男(이복남) 少早川隆景 倭兵(왜병) 勝利(승리)
7월 8일 梨峙(이치) 權慄(권율) 倭軍(왜군)을 擊破(격파)
7월 8일 閑山島(한산도) 李舜臣(이순신) 脇坂安治 倭船(왜선) 73척 擊破(격파)
7월 9일 錦山(금산) 高敬命(고경명) 高敬命(고경명) 戰死(전사)
7월10일 安骨浦(안골포) 李舜臣(이순신) 九鬼嘉隆 倭船(왜선) 40척 擊破(격파)
7월17일 平壤(평양) 祖承訓(조승훈) 祖承訓(조승훈) 敗走(패주)
7월18일 海汀倉(해정창) 韓克諴(한극함) 加藤淸正 倭兵(왜병)의 勝利( 승리)
7월27일 永川(영천) 權應秀(권응수) 永川(영천) 收復(수복)
8월 1일 平壤(평양) 金命元(김명원) 倭兵(왜병)에게 패함
8월 1일 淸州(청주) 趙憲(조헌). 靈圭(영규) 淸州(청주) 收復(수복)
9월 1일 釜山(부산) 李舜臣(이순신) 왜병의 해상활동 제지시킴
9월 2일 延安城(연안성) 李廷馣(이정암) 黑田長政 倭兵(왜병)을 물리침
9월 7일 慶州(경주) 朴晋(박진) 慶州(경주) 收復(수복)
10월 6일 晋州(진주) 金時敏(김시민) 晋州城(진주성)을 지킴
1593년 宣祖(선조) 26년 계사년(癸巳年)
1월 8일 平壤(평양) 李如松(이여송) 平壤(평양) 奪還(탈환)
1월27일 碧蹄館(벽제관) 李如松(이여송) 倭兵(왜병)에게 패함
2월12일 幸州(행주) 權慄(권율) 幸州山城(행주산성)을 지킴
2월18일 晋州(진주) 金千鎰(김천일) 진주함락, 金千鎰(김천일)전사
1597년 宣祖(선조) 30년 丁酉(정유)년
7월15일 漆川(칠천) 元均(원균) 島津忠豊 倭兵(왜병)에게 패함
8월16일 南原(남원) 楊元(양원) 宇喜多秀家(우끼다) 南原城(남원성) 陷落(함락)
8월17일 黃石山城(황석산성) 郭逡(곽준) 加藤淸正(가또오) 黃石山城(황석산성)함락
9월 7일 素沙(소사) 解生(해생) 양등산(楊登山) 毛利秀元(모오리) 黑田長政(구로다)
倭兵(왜병) 敗走(패주)
9월15일 鳴粱(명량) 李舜臣(이순신) 倭船(왜선) 30여척 擊破(격파)
1598년 宣祖(선조) 31년 戊戌(무술)년
1월 島山城(도산성) 麻貴(마귀) 麻貴(마귀) 敗走(패주)
11월18일 露粱(노량) 李舜臣(이순신) 少西行長 이순신(李舜臣) 戰死(전사), 왜군철수
(3) 參考文獻(참고문헌)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 亂中日記(난중일기)
李 舜臣(이 순신) 將軍(장군) 亂中日記(난중일기)에 丙申年 正月(병신년 1월) 丁酉年(정유 년) 9월에는 영등포 萬戶(만호)가 趙 繼宗(조 계종)으로 기록하고, 1592년 당시 舊 地圖(구 지도)에 지금의 冠浦와(관포) 新村(신촌) 일대는 蘇秦浦(소진포)로 기록했고 亂中日記(난중일기)에 1593[계사년 이순신 장군 나이 49세]년 2월 10일 乙未日(을미일) 日記(일기)를 보면 "아침엔 흐리었으나 늦게 맑았다.
오전 6시 쯤에 배를 띄워 바로 熊川(웅천) 熊浦(웅포)에 이르니 적선들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는데 2번이나 꾀어내어 보았으나 진작부터 우리 해군을 겁내는 터라 나올 듯이 도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어서 끝내 잡아 무찌르지 못하니 통분하다. 오후 10시쯤에 도로 永登浦(영등포: 지금의 구영)뒤 蘇秦浦(소진포)에 이르러 배를 메고 밤을 지냈다"하였고 11일(丙申日:병신일)에도 蘇秦浦(소진포)에 머물었고 12일(丁酉日:정유일)에는 熊川(웅천)과 熊浦(웅포)적을 섬멸치 못하고, 초 저녁에 漆川島(칠천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李 殷相 譯(이 은상 역) 李 忠武公(이충무공) 全書(전서)에 24일 (정미일) 식후부터 큰 바람이 불어 치더니 저녁까지 그치지 아니하였다. 저녁에 永登(영등)정찰부대가 와서 아뢰되 "적선 5백여척이 23일 밤중에 蘇秦浦(소진포-거제군 장목면 송진포리)로 합하여 들어 갔는데 그 선봉은 漆川梁(칠천량)에 이르렀다"고 했다.
밤에 大錦山(대금산) 정찰 부대가 와서 보고하는것도 마찬가지다. 실제 李殷相(이은상) 선생은 거제가 고향이 아니고 현장을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문헌상으로만 연구한 학자다. 그러나 실제 칠천량에서 지금의 松鎭浦(송진포)앞 바다를 500여척이 줄을 이었다면 설득력이 없다. 너무 공간이 적다. 지금의 松眞浦(송진포)가 蘇秦浦(소진포)에서 由來(유래)된 듯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의 松眞浦(송진개)와 蘇秦浦(소진개)는 다르다고 본다. 그 이유로 "한국 지명 총람"에서 "松眞浦(송진개)"는 "참소나무"가 울창하게 많은 "갯가"라는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순신 장군 난중일기에 永登浦(영등포) 뒤에 있는 蘇秦浦(소진포)에 모든 戰船(전선)을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고 했는데 당시 長木(장목)과 舊永(구영)과 모든곳은 이미 왜군의 소굴 이였으므로 지금의 송진포는 적의 소굴로서 이 狹小(협소)한 敵陣所(적진소)인 松眞(송진) 개안에 아군의 배를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는 것은 三尺童子(삼척동자)도 이해 할수 없는 일로서 全滅(전멸)을 면치 못할 아주 위험한 일이므로 상항 판단에 아둔한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아니라고 본다.
李 殷相(이 은상) 선생의 李 忠武公(이 충무공) 全書(전서)에 밝힌 자료를 보면 倭軍(왜군)의 航路(항로)는 漆川島(칠천도) 앞 바다를 해서 송진포 앞 바다를 해서 舊永(구영)앞 바다를 거의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松鎭浦(송진포) 해안에서 我軍(아군)의 배를 碇泊(정박)하고 밤을 지샌다는것은 常識的(상식적)으로 理解(이해) 할수 없다. 李 殷相(이 은상) 선생이 밝힌 資料(자료)에는 지금의 松眞浦(송진포)를 松津浦(송진포)로 誤記(오기)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 할수있다
"津"(진)이라는 槪念(개념)은 강이나 내가 좁은 바다목에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의미한다. 소진포는 오히려 지금의 冠浦(관포)나 農所(농소) 宮農(궁농)쪽이라고 볼수 있다.
모든 古地圖(고 지도)나 現 地圖(현지도)를 보면 蘇秦浦(소진포)라는 地名(지명) 을 확실하게 기술하지 못하고 지금의 新村(신촌)과 松鎭浦(송진포) 農所(농소) 宮農(궁농)일대와 심지어는 冠浦(관포) 등밑에 까지 蘇秦浦(소진포)라고 표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確實(확실)한 곳을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蘇秦浦(소진포)라는 지명은 이 순신 장군 난중 일기에만 거론하고 있고 어떤 文獻(문헌)에도 거제도에 있는 蘇秦浦(소진포)라는 地名(지명)은 찾아 볼수 없다. 사실 한글 학회가 지은 "한국지명총람"도 부분적으로 틀리게 고증한 부분이 많다. 그 이유는 현지를 답사한 확실한 考證(고증)이 아니고 文獻(문헌)을 통해서 考證(고증)을 했기 때문이다. 실례를 들자면 冠浦里(관포리)와 頭毛里(두모리)의 사이의 고개를 國立(국립) 地圖(지도) 製作所(제작소)에서도 고개 이름이 "각개"라고 표기 했는데 그것은 "갓개"라는 뜻을 모르므로 해서 생긴 기록이다. "각개재"가 아니고, "갓개재"가 맞다..
그 이유는 갓개라는 뜻은 冠浦[관포:冠 字의 뜻은 머리에 쓰는 갓을 말함이요, 浦字는 강가나 물가 라는 뜻에서 나온"개"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라는 이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한글 학회에서 만든 "한국 지명 총람"에서도 보면 관포리의 마을 이름을 猪浦里(저포리)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는 "용호지골"를 "용의집골"이라 표기하고 관포 서쪽에 있는 "용은"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함. 이라고 설명했는데, 당시 한글 학회에서 현지 답사를 했다면 답사자에게 설명해준 里長(리장)이나 마을 대표자가 설명을 충분이 해주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용호지골"은 옜날에 어느 시대인지 밝힐수 없지만 口傳(구전)에 의하면 龍虎(용호)라는 사람이 이 골짜기에 살았는데 龍虎之谷(용호지골)은 "용호네"가 살고 있는 "골짜 기"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용호지골"이라고 항상 불렀다.
이 순신 장군께서 蘇秦浦(소진포)가 지금의 舊永(구영)뒤라고 하신 것을 지도를 펼쳐 놓고 잘 살펴 보면 꼭 지금의 송진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지금의 冠浦(관포)나 등밑에 배를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고 보는 것이 더욱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아무튼 관포리의 지명이 있기전 에 이 주위가 "蘇秦浦(소진포)"라는 지명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熊川 安骨里(웅천 안골리)城(성)은 임란(1592년)때, 일본군이 만든 성이다. 또한 1593(계사)년 6월 24일 丁未(정미)일의 기록에도 왜선 500여척이 23일 밤중에 소진포로 합하여 들어갔는데 그 선봉은 칠천량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기에서 500여척이 줄을 이었다면 지금의 송진포에서 칠천량 까지는 너무 거리가 짧다고 본다. 필히 관포에서 유호 앞바다를 지나 구영 앞바다로해서 칠천량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밤에 大金山(대금산) 정찰 부대가 와서 보고하는 것도 역시 舊永(구영) 정찰부대와 같다고 했다. 대금산에서 내려다보면 관포리 앞바다는 물론이고 장목 송진포 구영 앞 바다와 칠천도 앞 바다가 한눈에 볼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의 소진포는 어떠했는가? 1593(계사)년 음력 2월 10일 乙未(을미)일과 11일 丙申(병신)일에 소진포에서 배를 매고 밤을 지냈으며 20일 乙巳(을사)일에는 敵(적)과 交戰(교전)했던 기록을 자세히 쓰고 날이 저물기전에 소진포에 돌아와 물을 길러가고 밤을 지냈는데 이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忠淸水使(충청수사) 순천이 1마리 잡아 보냈다고 기록했고, 22일 丁未(정미)일에는 熊川(웅천)에 이르러 齊浦(제포)의 적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아군의 손실을 통분해 하며 경상도 수사 때문으로 원망을 돌리고 이날 밤도 돛을 달고 소진포에서 잤고 23일에도 잤고 24일 아침에 칠천량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忠淸水使(충청수사) 순천이 東西(동서)로 달아나는 사슴중에 한 마리를 잡았다는 대목에서도 구영과 송진 농바우등은 이미 왜군의 적진인데 어찌 사슴 사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1594(갑오) 년 3월 4일 유호 앞 바다 猪島(저도)에서 왜선 1척을 불태웠다고 했고 甲午(갑오)년 9월 29일, 10월 8일까지의 기록을 보면 거제도 장목 일대는 완전히 적의 소굴로 변함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왜선 500여척중에 100여척이라도 장목개안에 모두 정박 할수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장목개안과 송진개안과 군안개에다 배치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594(甲午:갑오)년, 9월 29일,日記(일기)에 배를 띄워 장문포[註(주):대금산은 大金山(대금산)으로 長門浦(장문포)는 長門浦(장문포)와 場門浦(장문포)로 번갈아 기록하고 있다] 앞 바다를 돌입하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고 樓閣(누각)을 높이 짓고 양쪽 봉우리에는 壁壘(벽루)를 쌓고 있으면서 도무지 나와서 抗戰(항전)하러 들지 아니했다고 했고, 10월 6일 기록에는 長門浦(장문포) 賊(적)의 소굴에 牌文(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日本(일본)이 明(명)나라와 和親(화친)을 의논하는 터이라 싸울 것이 없다"하고 왜놈 1명이 칠천산 기슭으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昆陽(곤양)군수가 불러서 배에 싣고 물어보니 그것은 영등포(지금의 구영)의 왜적 이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장목과 송진포 구영 일대는 완전히 왜구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장목 앞 바다를 돌입하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고 누각을 높이 짓고 양쪽 봉우리에는 벽루를 쌓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의 농바우산과 건너 왜성의 봉우리를 말할 수 있다.
지금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성곽터와 기왓장 등이 농바우 뒷산과 시루성(甑城)에 남아있고 軍港浦(군항포)뒤에 倭城(왜성)이 있으며 군항포도 당시 倭寇船( 왜구선)이 碇泊(정박)한데서 由來(유래)된 지명으로 본다.
장문포에 진을 친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은 9일 동안 지금의 장목과 구영 앞 바다를 왕래 하면서 싸웠다는 기록이 자세히 있는데 元均(원균)이, 이 순신 장군을 모함함에 장문포에 있는 적을 나아가서 맞아 치지 않았다 하여 정치적으로 우세한 당시 西人(서인)들이 이 순신 장군을 서울(漢陽)로 압송하여 감금하고 후에 白衣從軍(백의종군)케한 悲運(비운)의 장소가 바로 오늘날의 장목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원균은 가덕도 해전에서 참패하고 1597(정유재란)년 7월 16일 새벽 칠천도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육지로 탈주하다가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순신 장군을 다시 기용하는데 正史(정사)에는 이 싸움을 漆川海戰(칠천해전)이라한다.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백성의 생활은 처참하였으며 특히 거제도는 사람들이 扶支(부지)할수 없도록 폐허가 되었는데 1656( 17대 효종 7)년 병신년에 統制使 (통제사) 柳 赫然(유 혁연)이 임금의 命(명)을 받고 거제도의 地形(지형)과 民心(민심)을 살핀 나머지 狀啓(장계)를 올려 陳(진)을 創設(창설)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舊邑誌(구읍지)에 기록 하고 있다.
1964년 3월 15일에 卞光永(변광영) 거제군수가 발행한 거제군지에는 長木(장목)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高麗朝(고려조) 河淸部曲(하청부곡)에 속한 長門浦(장문포)라 칭했다.
이조 14대 선조왕시대 鎭(진)을 설치하고 別長(별장)을 두고 軍政(군정)을 하다가 단기 4288년(서기1955년) 鎭(진)을 廢止(폐지)하고, 장목면을 창설하여 면장이 서정하였다. 단기 4247년 (서기 1914년) 하청면 일부와 외포면을 倂合(병합)하여 면 사무소를 장목에 두었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邑誌(읍지)에도 서기 1592년 宣祖(선조) 25년 壬辰(임진)년에 長門浦(장문포)에 陳(진)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찿아 볼수가 없다. 世宗(세종) 莊憲大王(장헌대왕) 實錄(실록) 地理志(지리지) 제 150권 211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巨濟縣(거제현)은 本來(본래: originally)바다 가운데 섬인데, 新羅(신라) 文武王 (문무왕)이 처음으로 裳郡(상군)을 설치 하였다. 景德王(경덕왕)이 巨濟郡(거제군)으로 고쳤으며, 高麗(고려) 顯宗(현종9) 戊午年(무오년:1018)에 縣令官(현령관)을 두었는데, 1271년[元宗(원종) 12년 辛未[신미:元(원)나라 至元(지원) 18년]에 倭賊(왜적)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居昌(거창) 加祚縣(가조현)에 僑居(교거) 하였다.
本朝(본조) 太宗(태종) 甲午(갑오:1414)년에 居昌(거창)에 합하여 이름을 濟昌縣(제창현)으로 하였다가, 乙未(을미:1415)년에 다시 쪼개어 居昌縣(거창현)을 만들고, 今上(금상: 세종) 4년 壬寅(임인:1422)년 에 다시 舊島(구도)로 돌아 가게하여 4품 이상을 知縣事(지현사)로 충당하였다.
鵝洲縣(아주현)은 本來(본래) 巨老縣(거로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지금의 이름 으로 고쳤고, 松邊縣(송변현)은 景德王(경덕왕)이 南垂(남수)로 이름을 고쳐서, 모두 巨濟郡(거제군) 任內(임내)로 삼았는데 두현의 人物(인물)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 直村(직촌)을 삼았다, 鎭山(진산)은 國師堂山(국사당산)이다. 현 동쪽에 있는데, 水軍處置使(수군처치사 )가 제사를지낸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玉浦(옥포)에 이르기 25리, 서쪽으로 見乃梁(견내량)에 이르기 31리, 남쪽으로 谷串(곡곶)이에 이르기 35리, 북쪽으로 永登浦(영등포)에 이르기 45리 이다.
金海(김해) 邑誌(읍지)에 기록 하기를 金海鎭(김해진) 金海都護府(김해도호부) 世宗朝(세종조) 置鎭(치진) 鎭管府(진관부) 昌原(창원) 巨濟(거제)라는 기록은 있다.
結論(결론)
1979년 12월 29일 地方有形文化財(지방유형문화재) 第一八九號(제일팔구호)로 지정 받아 1981년에 復元(복원)할때에 長木鎭客舍(장목진객사) 御宇上樑文(어우상량문) 抄譯文(초역문)이 나왔는데 그 抄譯文(초역문)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粤昔 壬辰之歲 創設鎭陣 相宅建宇 地理不吉 丁酉乙卯 更且再基 地又不安 御宇且頹>>
<<월석 임진지세 창설진진 상택건우 지리불길 정유을묘 갱차재기 지우불안 어우차퇴>> - 옛날 임진년에 진을 창설했는데, 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정유년 을묘에 또 다시 터를 잡았으나, 지리가 불안하여, 지은 집은 또 무너졌다. - 이하 생략.-
이 기록을 보고쓴 上樑記(상량기)가 지금의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에 걸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1981년 辛酉(신유)년 12월 8일 오전 10시에 上樑(상량)을 하면서 上樑記(상량기) 에 기록하기를, <<일찍 壬辰倭患(임진왜환)의 機微(기미)가 있었을 때 이곳 別鎭(별진)을 設置(설치)하였고, 亂後(난후)에 當分間(당분간) 荒廢(황폐)하였으나 다시 鎭營(진영)이 復舊(복구)되고, 이하 생략>>>
위 글을 보고 또 쓴 글이 1983년에 내고장 傳統(전통)이라는 巨濟郡誌(거제군지) 다.
<< 1983년 2월 25일에 박창기 거제군수가 발행하고 동아대학교 교수들이 監修(감수)한 郡誌(군지)>> 159폐이지에 기록하기를 <<1592년 정월(제
14대 선조 25년) 장목별진장이 진영객사로 건립하여 海防(해방)의 政事(정사)와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1592년의 임진왜란때에는 거제 玉浦海戰(옥포해전)과 漆川海戰(칠천해전)을 위하여 이 鎭舍(진사)에서 李忠武公(이충무공)과 李英男(이영남) 장군이 1594년 9월 29일부터 1597년 7월 16일 칠천 해전일 사이에 水軍(수군)의 전략을 숙의한 곳이기도 하다. 1785년(제22대 정조9년) 行別將(행별장) 禦海將軍(어해장군) 李珍國(이진국)이 중건하고,>>라고 역사에 없는 글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禦侮將軍(어모장군)을 御海將軍(어해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1년 3월 4일 慶南新聞(경남신문)에도 이 기록을 보고 誤謬(오류: paralogism) 를 犯(범)하고 있다. 이 部分(부분)의 歷史(역사)는 우리 時代(시대)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提言(제언) 한다.
1592년 壬辰(임진)년에 일어난 壬辰倭亂(임진왜란)은 7년동안에 걸쳐 우리의 江山(강산)은 焦土化(초토화)되어 버렸고, 거기에 희생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數(수)는 日本(일본) 도요쿠니 신사 기록에 따르면 12만 6천 명이나 희생 되었으며, 또한 生捕(생포: a prisoner)되어 끌려간 數(수)도 5만 여명이나 되었으며 전쟁으로 사망한 數(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 아픈 상처가 채 가기도 전에 또 丁卯胡亂(정묘호란:1627)과 丙子胡亂(병자호란:1636)이라는 큰 國亂(국란)이 우리 민족, 우리 겨레에 아픈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겨 주었다. 1616丙辰(병진)년에 後金國(후금국)을 세운 滿洲(만주)의 女眞族(여진족)은 1627丁卯(정묘)년에 丁卯胡亂(정묘호란)을 일으켜 朝鮮(조선)을 아우 나라로 삼고, 1636丙子(병자)년에는 國號(국호)를 淸(청)이라고 고치고, 이를 경축하는 使臣(사신)을 보내줄 것을 朝鮮國(조선국)에 요구 해 왔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淸(청)나라의 太宗(태종)은 그해 12월에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南漢山城(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이듬해 정월에 仁祖(인조)의 항복을 받고, 朝鮮(조선)을 臣下(신하)의 나라로 삼는 한편 昭顯世子(소현세자)를 비롯하여 鳳林大君[봉림대군:후에 孝宗大王(효종대왕)]등을 人質(인질:볼모)로 잡아 갔다.
이래서 昭顯世子(소현세자)는 이후 8년 동안 瀋陽館[심양관:奉天(봉천)에 있음)]에서 괴롭고 쓸쓸한 人質(인질:볼모)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해의 亂離(난리:a war)를 당하는 동안 巨濟(거제)섬의 長木陳(장목진) 設置(설치)는 반세기가 지난 1656년 丙申(병신)년에 17대 孝宗(효종) 7년에 이루게 되었다.
歷史(역사)에 나오는 壬辰(임진)년 해는 다음과 같다.
단기 3685년 서기 1352년 고려 恭愍王(공민왕) 2년 壬辰(임진)년
단기 3745년 서기 1412년 조선 3대 太宗(태종) 12년 壬辰(임진)년
단기 3805년 서기 1472년 조선 9대 成宗(성종) 3년 壬辰(임진)년
단기 3865년 서기 1532년 조선 11대 中宗(중종) 27년 壬辰(임진)년
단기 3925년 서기 1592년 조선 14대 宣祖(선조) 25년 壬辰(임진)년
단기 3985년 서기 1652년 조선 17대 孝宗(효종) 3년 壬辰(임진)년
단기 4045년 서기 1712년 조선 19대 肅宗(숙종) 38년 壬辰(임진)년
단기 4105년 서기 1772년 조선 21대 英祖(영조) 48년 壬辰(임진)년
단기 4165년 서기 1832년 조선 23대 純祖(순조) 32년 壬辰(임진)년
여기에서 附言(부언)하고 싶은 이야기는 朝鮮王朝(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巨濟島(거제도) 歷史(역사)를 정립한 文獻(문헌)중에는 世宗(세종) 莊憲大王(장헌대왕) 實錄(실록) 地理志(지리지)가 있다. 그 文獻(문헌)에 歷史(역사)를 上古(상고)하기를 다음과 같이 定義(정의: definition)를 내리고 있다.
巨濟縣(거제현)은 本來(본래: originally)바다 가운데 섬인데, 新羅(신라) 文武王(문무왕)이 처음으로 裳郡(상군)을 설치 하였고. 景德王(경덕왕)이 巨濟郡(거제군)으로 고쳤다고 기록 하고 있다, 朝鮮王朝(조선왕조) 500년 歷史上(역사상) 어느 巨濟邑誌(거제읍지)에도 巨濟(거제)가 瀆盧國(독로국)이라고 기록한 文獻(문헌)이 없는 것을 보면, 500년 朝鮮王朝(조선왕조)에서도 巨濟(거제)가 瀆盧國(독로국) 이였다. 라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수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나오는 巨濟(거제) 歷史(역사)도 같은 이야기다.
巨濟郡(거제군)은 文武王(문무왕661-680) 初(초)에 裳郡(상군)을 설치한 것이니, 海中(해중)의 섬이다.
景德王(경덕왕)이 이름을 거제로 고쳐 지금도 그대로 인데, 領縣(령현)이 셋이다.
(1) 鵝州縣(아주현)은 본시 巨老縣(거로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鵝州(아주)로 改名(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2) 溟珍縣(명진현)은 본시 買珍伊縣(매진이현)인데, 景德王(경덕왕)이 溟珍(명진)으로 改名(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이다.
邑東(읍동) 三里(삼리) 溟珍浦(명진포)
(3) 南垂縣(남수현)은 본시 松邊縣(송변현)으로 일 컫는다. 邑南州里(읍남주리)
巨濟(거제)라는 이름은 檀紀(단기) 3076년 西紀(서기) 743년 新羅(신라) 제35대 景德王(경덕왕 7) 癸未(계미)년에 大谷城(대곡성)등 14 郡縣(군현)을 설치 할 때에 처음으로 巨濟(거제)라는 이름을 命名(명명)하여 사용해 온지 올해가 꼭 1,260년 生日(생일)을 맞는 해이며, 60甲子(갑자) 癸未(계미)년 21번째를 보내는 뜻깊은 해에 生疎(생소: unfamiliarity)한 독로문화제 보다도 거제문화제로 탈바꿈하여 巨濟(거제)라는 이름을 記念(기념)하는 制定宣布式(제정선포식)을 갖고 巨濟市民(거제시민) 모두에게 巨濟(거제)에 사는 自矜心(자긍심)을 심어주는 행사도 해볼만하다고 提言(제언)한다.
제언자(提言者) 미국에서 양방수(梁芳秀)
長木鎭 客舍 御宇上樑文 抄譯文
地方有形文化財(지방유형문화재) 第 189號
客舍(객사)란 高麗(고려), 李朝(이조)때의 각 고을의 館舍(관사)로 李朝(이조)에서는 殿牌(전패)를 安置(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向闕望拜(향궐망배)를 하는 한편 使臣(사신)의 宿所(숙소)로 사용되었다. 殿牌(전패)란 지방 客舍(객사)에 殿(전)를 새겨 놓고, 그곳 원이나 관원이 拜禮(배례)하던 나무 패(牌). 闕牌(궐패) 또는 遙賀(요하).
2011년11월 發行(발행)한 長木面誌(장목면지) 內容(내용)중
틀린곳을 指摘하고 바로잡는 理由는 面民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1) 상량문에 의하면 임진년 장목 동구에 건립하였던 것을 장목 서구로 옮겼다고 하며, 선조 25년(1592) 정월 장목별진장이 진영의 객사로 건립하여 평화 축원의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을 알수가 없다.고 한것은 객사 상량문을 잘못 읽고 小說(소설)을 썻다.
(2)御宇 上樑文 飜譯을 正確하게 못했다.
粤昔 壬辰之歲 創設鎭陣
월석 임진지세 창설진진 ~ 옛적 임진년에 진을 창설했는데,
相宅建宇 地理不吉
상택건우 지리불길 ~ 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丁酉乙卯 更且再基
정유을묘 갱차재기 ~ 정유년 을묘에 또 다시 터를 잡았으나,
地又不安 御宇且頹
지우불안 어우차퇴 ~ 지리가 불안하여, 지은 집은 또 무너졌다.
今玆 更擇吉地移建
금자 경택길지이건 ~ 이제 다시 吉地(길지)를 선택하여 옮겨 세운집이
巽坐乾向之原
손좌건향지원 ~ 손좌건향이다.
槩哉 天地如坼 東方爲首 ★槩=槪와 同字★
개재 천지여탁 동방위수 ~ 처음 천지가 열때는 동방이 먼저요,
人世之間 國君最上
인세지간 국군최상 ~ 인간이 살고있는 세상은 나라의 국왕이 제일 위다.
盖建國之莫過
개건국지막과 ~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데는 막중한 것은
奚御宇之宏麗
해어우지굉려 ~ 이집이 화려하고 웅장한데 있다.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는 長木鎭(장목진)은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하였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 터를 잡았으나, 또 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 집은 무너지고,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鎭(진)을 創設(창설)하여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長木鎭(장목진)을 守備(수비)케 하였는데, 이때 동구에서 서구로 옮겨 陳(진)을 鎭(진)으로 승격하였다.
壬辰年(임진년)은 1592년 宣祖(선조) 25년 임진년이 아니라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을 말한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과 이영남 장군이 이곳에서 전략을 숙의하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안내문을 보고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
(3)御宇 上樑文 飜譯을 正確하게 못했다.
伏以 獻誠玉殿更修築名
복이 헌성옥전경수축명 ~ 꿇어앉아 업드려 정성을 다하여 옥전을 다시 수축한다.
飛甍雕樑 貫扵靑天之中 三光逼令
비맹조량 관어청천지중 삼광핍령
層楹疊榭枕扵 碧海之頭 五龍淤跡 ★扵=於의 俗字 淤=游★遊놀유는游와 同字★
층영첩사침어 벽해지두 오용유슬
宅神洧步瀛州之岳 天一團邊淸音長短
택신유보영주지악 천일단변청음장단
形局疑憑廣漢之殿 雲千點外奇妙高下 ★憑(기댈빙)★
형국의빙광한지전 운천점외기묘고하~ 충쇄밑에 기둥과 봇장은 옥돌같이 다듬어 높이 세우고 삼광을 빛내고 택신들은 뜰과 정원에 걷는 모습이 마치 영주산 신령 같다. 충충첩첩이 쌓인 집은 벽해의 머리에 섯다. 용다섯마리가 충세밑에 엎드린 형국은 마치 한나라의 광한루 같도다. 뚜렷한 하늘을 살펴 쳐다보면 맑은 음악에 장단이요, 일천 구름이 점점이 높고 낮은 광경은 기묘 하도다.
★1784년 甲辰年(갑진년 正祖 8년) 記錄은 흔적跡적字로 기록했는데,★
★1981년 辛酉年(신유년) 記錄은 무릎膝슬字로 記錄하여 틀린다.★
衆鷺歸江之聲 國泰而民安兮 歌彈高扵太平之年炯月 省逢島之雲歸
중노귀강지성 국태이민안혜 가탄고어태평지년형월 성봉도지운귀
萬峀矗天之色 時和而歲豊兮 萬民擊穰歌扵相和之詩詞 帶瀛洲之日出
만수촉천지색 시화이세풍혜 만민격양가어상화지시사 대영주지일출~ 뭇해오리가 앞강에서 울고 나는 모습과 만첩산이 하늘빛으로 축 높이 뻗었고나 나라가 태평하고 온 국민들은 태평세월 노래 부를때 시하 년풍이 드니 온 국민들은 배불리 먹고 격양가를 부르는 시절이다. 날씨를 살펴보니 봉래섬 구름이요, 가고 오는 영주 햇빛은 구름이 나고 해를 덮고 하도다.
淸溪 叩琴靑柖彈瑟花發玉泉竹帶雲炯月兮稀世之名區 ★兮:어조사혜★
청계 고금청소탄슬화발옥천죽대운형월혜희세지명구~ 거문고를 치고 비파를 타고 꽃도 피었는데, 옥같이 솟은 샘물과 달그림자에 비친 대나무 그늘도 세상에 드물고 구별키 어렵다.
★兮:어조사혜=한문에서, 실질적인 뜻은 없으면서 다른 글자의 보조로만 쓰이는 토★
助味佳鮮楹下紛船 淸襟爽碧風前古寺 ★楹=난간함★
조미가선함하분선 청금상벽풍전고사~ 또 아름다운 것은 난간 아래 뱃머리를 끓으니 상쾌하고 맑은 공기는 옛절 맞이나 같다.
景勝於岳陽之樓 望北天而通月川兮
경승어악양지루 망북천이통월천혜
爽過於醉翁之亭 倚西琅而應納仰方
상과어취옹지정 의서랑이응납앙방
御我堂堂烈士幷出 決氣攁攁英雄雲集
어아당당열사병출 결기양양영웅운집~ 경치를 말하면 중국 악양루보다 낫고, 상쾌할 것을 생각하면, 술에 취한 첨지의 집이로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 달은 은하수(냇물)을 지나가고, 서쪽을 지대보니 동방이 감응하도다. 이집을 상량을 하고나니 열사가 연달아 나오고 국리를 의론할 영웅들이 구름같이 모여 든다.
★1981년 辛酉年(신유년) 長木面誌(장목면지)는 中略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卽以短唱窄爲脩樑
즉이단창착위수량 ~ 즉 집을 위하여 간단한 격말을 썻다.
護樑東
호량동 ~ 집을 보호하는 동쪽을 두고 하는 말한다.
二水淸光滿眼中
이수청광만안중 ~ 두곳에 맑은 빛이 눈 가운데 가득 찬다.
簾捲擧頭軒外看 尘心自濯我陵珉 ★尘=塵의 古字★
염권거두헌외간 진심자탁아능민~ 주름을 걷고 난관밖을 바라보니, 마음 가운데 티끌 하나 없이 잠들수 있드라.
護樑西
호량서~ 집을 보호하는 서쪽을 말한다.
地勢龍盤萬里迴
지세용반만리회~ 지세가 만리나 돌고 돌아 용의 자리로다.
奇岩玉色層層立 白鷗雙雙月浦來
기암옥색층층립 백구쌍쌍월포래~ 기이한 암석이 옥색같이 층층 늘어섰고나, 흰 백구는 쌍쌍이 짝을지어 달뜨는 포구로 날아든다.
護樑南
호량남 ~ 집을 보호하는 남쪽을 말한다.
色泛三淸帝釋岑
색범삼청제석잠 ~ 삼청으로 맑고 깨끗한 제석봉이 있고,
憑欄自桃靈芝蛙 瀑布尌顔意氣淡
빙란자도영지와 폭포주안의기담 ~ 영봉에 귀한 약초도 자생하고 개구리며 산새도 사는것을 볼수 있고, 내리는 폭포수에 뜨거운 기운이 담담 하도다.
護樑北
호량북 ~ 집을 보호하는 북쪽을 말한다.
羣鴈長聲振碧落 ★聲자는 古字로 씀★
군안장성진벽락 ~ 뭇기러기가 장천에 소리 지르며 벽해에 나르는 모습을 볼수있다.
如龍海色楹間翠 点点螺蠉暮靄卓
여용해색영간취 점점라현모애탁 ~ 기둥 사이에 그린 용은 바닷빛과 같이 비친다.
점점이 소라, 고동, 장구벌레 같은 것은 저문날 구름 같드나 !
護樑上
호량상 ~ 집을 보호하는 위쪽을 말한다.
玉露朝奉紫府亨
옥노조봉자부형 ~ 구슬같은 아침 이슬은 자부(紫府:官衙)에서 받아 먹드라.
靈神號追千灾滅 五福人間是殿有
영신호추천재멸 오복인간시전유~ 천지신령님은 천재는 불러 쫓아 낼것이요, 세상 사람들은 이 집에다 五福(오복)을 빌 것이다.
護樑下
호량하 ~ 집을 보호하는 터에서는
萬物皆昌得意和
만물개창득의화 ~ 만물이 모두 창성하고 화목한 뜻을 얻도다.
赳赳舟師淸曉樂 堂前跪壽聖恩賀
규규주사청효락 당전궤수성은하 ~ 굳세고도 굳센 주사들은 청요를 즐기고, 집앞에 꿇어앉아 성은(聖恩)의 만수무강을 비나이다.
伏願 倍樑之後神靈長臨兮 四時充味六螯獻壽兮 九龍歸德
복원 배량지후신령장림혜 사시충미육오헌수혜 구룡귀덕~ 엎드려 소원을 빕니다. 집을 충찬한 뒤에는 神靈(신령)님은 늘 왕림하시여 돌보아 주시고, 육오(六螯)에 만족하사, 오래 오래 보존되는 것은 구룡의 덕인가 하옵니다.
月戶風軒上應八宿之光 金柱玉殿下輸萬福之源
월호풍헌상응팔숙지광 금주옥전하수만복지원 ~ 집의 풍마 우세와 사방 이십팔 숙의 빛에 응할 것이요. 금기둥 구슬같은 집은 만복을 실고 오는 근원이 될 것이다.
★1784년 甲辰年(갑진년 正祖 8년) 記錄(기록)은 風軒(풍헌)으로, 記錄했는데,★
★1981년 辛酉年(신유년) 記錄(기록)은 風幹(풍간)으로 틀리게 記錄하였다.★
(4)御宇 上樑文 飜譯을 正確하게 못하고 中略 (중략)으로 終結한 것은
乾隆 五十年 乙巳 孟春記
건륭 오십년 을사 맹춘기 ~ 건륭 50년.(서기 1785년) 을사년 초봄. 음력 정월.
甲辰 十一月卯時開基
갑진 십일월묘시개기 ~ 서기 1784년 갑진년 11월 묘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
同月 二十日 卯時 立柱
동월 이십일 묘시 립주~ 서기 1784년 甲辰年(갑진년) 11월 20일 卯時(묘시)에 기둥을 세웠다.
行別將 禦侮將軍 李珍國 乙巳 正月 二十日 申時 上樑
행별장 어모장군 이진국 을사 정월 이십일 신시 상량~ 서기 1785년 정조 9년 을사년 정월 20일 신시에 행 별장 어모장군 이진국이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올렸다.
成造都監守門將
성조도감수문장 金胤海(김윤해)
官監判官관감판관 河潤九(하윤구)
色 색 潘潤彩(반윤채) 孫興徠(손흥래)
兵舡將병선장 金胤海(김윤해) ★舡-船의 俗字★
兵房軍官병방군관 金憶守(김억수)
旗牌官기패관 河潤九(하윤구)
兵舡監官병선감관 金應宅(김응택)
禁柖監官금소감관 鄭得表(정득표)
軍器監官군기감관 鄭海龍(정해용)
吏房色이방색 孫興徠(손응래)
文書色문서색 吳季聘(오계빙)
戶房色호방색 高應三(고응삼)
都訓導도훈도 姜孟齊(강맹제) 書鴈(서안)~文書(문서)의 草案(초안)
兵房色병방색 潘潤彩(반윤채)
兵舡色병선색 秋有萬(추유만)
工房色공방색) 金奉昌(김봉창)
★1784년 甲辰年(갑진년 正祖 8년) 記錄(기록)은 工房色인데,★
★1981년 辛酉年(신유년) 記錄(기록)은 工兵色으로 틀리게 記錄하였다.★
承發色승발색 金胃一(김위일)
都片手鬪良도편수투량 黃龍振(황용진) 居本邑(거본읍)
金三泰(김삼태)
李盖南(이개남)
金時東(김시동)
金夢龍(김몽용)
炊飯취반 宋開明(송개명)
成造使令성조사령 鄭取三(정취삼)
冶匠야장 朴仁孫(박인손)
參考(참고)
乾隆 五十年 乙巳 孟春記
건륭 오십년 을사 맹춘기 ~ 건륭 50년.(서기 1785년) 을사년 초봄. 음력 정월에 著述(저술)한 作者(작자)의 意圖(의도)를 벗어나면 文脈(문맥)이 맞지않아 考證(고증)이 될 수가 없다.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은 都訓導(도훈도)의 職分(직분)을 갖고, 活動하시던 姜孟齊公(강맹제공)께서 文書(문서)의 草案(초안)을 잡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을 남겼다.
(4)御宇 上樑文 飜譯을 正確하게 못하고 1981년에 지은 上樑記도 考證을 잘못 했다.
잘못 기록한 상량기를 객사에 모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묻지도 말고 고쳐야 한다. 面民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1981년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記(상량기)
長木(장목)은 元來(원래) 長門浦(장문포)라 稱(칭)하여 앞은 鎭海灣(진해만)에 臨(임)하고, 뒤에는 帝釋峰(제석봉)이 聳立(용립)하여 고요하고 기다란 푸른바다 長木灣(장목만)을 이루니 四方地形(사방지형)이 調和(조화)되어 巨濟北端(거제북단)의 要塞地(요새지)이다. 일찍 壬辰倭患(임진왜환)의 機微(기미)가 있었을 때 이곳 別鎭(별진: ▶이 부분은 고증이 잘못되어 임진왜환의 기미가 있었을 때 이곳 별진을 設置(설치)하였다고 한 것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다는 것으로 推測(추측)하여 지은 글이다.◀)을 설치 하였고, 亂後(난후)에는 당분간 荒廢(황폐)하였으나, 다시 鎭營(진영)이 復舊(복구)되고, (▶이 부분도 황폐하였으나 다시 진영이 복구되었다는 설도 사실이 아니다.◀) 官衙(관아)가 整備(정비) 되니, 客舍(객사) 建物(건물)도 時宜(시의)를 따라, 마련됩니다. 舊(구) 上樑文(상량문)에 乙卯(을묘) 移建說(이건설)과 瓦當(와당)에 康熙 五年(강희 5년:1666년 朝鮮(조선) 제18대왕 顯宗(현종) 7년 丙午年(병오년) 康熙 五十一年(강희 오십일년:1712년 朝鮮(조선) 제19대왕 肅宗(숙종) 38년 壬辰年(임진년) 銘等(명등)이 보임은 이를 立證(립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乙卯(을묘) 移建說(이건설)과 瓦當(와당)에 康熙 五年(강희 5년:1666년 朝鮮(조선) 제18대왕 顯宗(현종) 7년 丙午年(병오년) 康熙 五十一年(강희 오십일년:1712년 朝鮮(조선) 제19대왕 肅宗(숙종) 38년 壬辰年(임진년) 銘等(명등)이 보임은 이를 立證(립증)하는 것이라 하겠다.라는 句節(구절)은 客舍 上樑文을 잘 읽어 보고 살펴 보았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結論을 내리지 않고 않았을 것이다. 文化財 專門委員이신 교수님께서 客舍 上樑文은 읽어 보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잘못 단정을 지어 오늘의 長木鎭 客舍 上樑記가 잘못되었다.◀
▶여기에서 꼭 밝혀야할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의 내용중에 1712년 肅宗(숙종) 19년 壬辰(임진)년에 陳(진)을 創設(창설) 했으나, 地理(지리)가 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乙卯 更且再基 정유을묘 갱차재기~ 정유년 을묘에 또 다시 터를 잡았으나, 地又不安 御宇且頹 지우불안 어우차퇴~ 지리가 불안하여, 지은 집은 또 무너졌다.] 1785년 正祖(정조) 9년 乙巳(을사)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옮겨 세웠는데,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主幹者(주간자)라고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 上樑文(상량문)에 기록하고 있다. ◀
▶이 부분은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李容玹(이용현) 文化財(문화재) 專門委員(전문위원)이 와서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를 調査(조사)하는 過程(과정)에서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의 기와가 嘉靖時代(가정시대)것이라 하여 압전 壬辰年(임진년)이면 1592년일 것이라 하였고,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客舍(객사)에서 戰略(전략)을 論議(논의) 하였다고 한 것은 亂中日記(난중일기)에 長木港(장목항)에서 倭敵(왜적)과 싸운 記錄(기록)이 있다고 하여, 文化財(문화재) 專門委員(전문위원)이 斷定(단정)해 놓은 것입니다라고.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알려 왔기 때문에, 文化財專門委員(문화재전문위원)의 말한마디로 오늘의 장목진 객사의 역사가 잘못 기록 되어지고 있다.◀
現存(현존) 客舍建物(객사건물)은 乾隆(건륭) 50년 乙巳年(을사년) 正祖(정조) 9년[2011년 11월에 發刊(발간)한 長木面誌(장목면지)는 正祖(정조) 5년으로 기록 하고 있는데, 正祖(정조) 9년이 맞다. 正祖(정조) 5년은 1781년 辛丑年(신축년)이다.] 西紀(서기) 1785년 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이곳 巽坐(손좌) 乾向(건향)으로 移建(이건)하였는데, 當時(당시)의 主幹者(주간자)는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李珎國(이진국)임도 舊上樑文(구상량문)에 傳(전)하여 알수있게 되었다.
庚戌國恥後(경술국치후) 西紀(서기) 1914년 甲寅年(갑인년)부터는 本(본) 客舍(객사) 建物(건물)이 面廳舍(면청사)로 사용되여, 西紀(서기) 1953년 까지 繼續(계속)하여 오다가, 面廳舍(면청사) 移轉(이전)과 같이 本(본) 客舍(객사)는 部落民(부락민)에 그 管理(관리)를 委任(위임)하였다. 年年歲深(년년세심)한 古建物(고건물)은 날로 頹落(퇴락)하여 가는데, 部落民(부락민)의 힘으로는 어찌할수 없이 한갓 懷古(회고)의 情(정)과 復元(복원)의 뜻을 품은 체, 袖手傍觀(수수방관)할수 없는 實情(실정)이였다.
[이 글은 長木鎭(장목진) 客舍(객사)에 걸려 있는 上樑記(상량기)에는 垂手傍觀(수수방관)으로 잘못 적고 있다.] 西紀(서기) 1971년 3월 部落(부락) 代表(대표) 金德允(김덕윤), 鄭南植(정남식)은 面長(면장) 金顯沂(김현기)에게 補修(보수)를 建議(건의)하였던바 金面長(김면장)은 이 事實(사실)을 卽時(즉시) 上級官廳(상급관청)에 要請(요청)하였으나, 豫算事情(예산사정)으로 遲延(지연)되여 오던 中(중) 海東病院(해동병원) 金鍾碩(김종석) 院長(원장)이 文化的(문화적) 價値(가치)가 있음을 認定(인정)하고, 이를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保管聽(보관청)인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博物館(박물관)에 調査(조사)를 依賴(의뢰)한 結果(결과)로 西紀(서기) 1980년 1월 14일. 慶尙南道(경상남도) 文化財(문화재) 委員會(위원회)에서 地方(지방) 有形文化財(유형문화재) 제189號(호)로 指定(지정)하게 되었고, 同年(동년) 9月(월) 5日附(일부)로 文公部(문공부)에서 道知事(도지사)에게 補修(보수) 指示(지시)가 下達(하달)되었다는 通報(통보)를 接受(접수)하였다.
西紀(서기) 1981년 11월 2일 巨濟郡廳(거제군청)에서 工事入札(공사입찰)이 있었고, 同年(동년) 8일 着工(착공). 同年(동년) 12월 8일 午前(오전) 10시 盛大(성대)한 上梁式(상량식)을 擧行(거행)하게 되었다. 長木面(장목면) 12,000여 面民(면민)은 本(본) 客舍(객사) 復元(복원)을 爲(위)하여 誠心誠意(성심성의) 努力(노력)하였으며,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總長(총장) 鄭樹鳳(정수봉) 博士(박사), 同(동) 博物館長(박물관장) 丁仲煥(정중환) 博士(박사), 同敎授(동교수) 金東鎬(김동호) 先生(선생), 文化財(문화재) 委員(위원) 李容玹(이용현) 先生(선생), 同(동) 出版部(출판부) 朴善福(박선복) 先生(선생), 巨濟郡(거제군) 公報室(공보실) 李承哲(이승철) 諸位(제위)께서는 本(본) 客舍(객사) 復元(복원)에 絶對的(절대적)으로 協助(협조)해 주신 誠意(성의)에 對(대)하여 感謝(감사)의 禮(예)를 드리는 바이다.
上樑(상량) 後(후)에는 地靈(지영)에 監護(감호)하시고, 海龍歸德(해용귀덕)하시여 길이 保存(보존)되시기 祈願(기원) 하는 바이다. 上樑(상량) 日時(일시) 西紀(서기) 1981년 辛酉年(신유년) 12월 8일 午前(오전) 10時(시) 上樑(상량)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總長(총장) 鄭樹鳳(정수봉) 博士(박사).
慶尙南道(경상남도) 道知事(도지사) 崔鍾鎬(최종호).
慶南文化財(경남문화재) 委員會(위원회) 委員長(위원장) 丁仲煥(정중환) 博士(박사).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敎授(교수) 金東鎬(김동호) 先生(선생).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博物館(박물관) 李容鉉(이용현) 委員(위원)
客舍(객사)에 걸려있는 上樑文(상량문)에는 東亞大學校(동아대학교) 博物館(박물관) 李容鉉(이용현)으로 長木面誌(장목면지)에는 慶南文化財委員(경남문화재위원) 李容玹(이용현)으로 各各(각각) 다르게 記錄(기록)하고 있다.
巨濟郡守(거제군수) 李奉牧(이봉목).
巨濟郡(거제군) 公報室長(공보실장) 金章郁(김장욱).
長木面誌(장목면지)에는 金章旭(김장욱)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長木面長(장목면장) 朴錫燁(박석엽).
長木面(장목면) 文化財(문화재) 復元(복원) 推進委員會(추진위원회) 委員(위원).
委員長(위원장) 金鍾碩(김종석).
副委員長(부위원장) 徐斗元(서두원).
副委員長(부위원장) 孔良萬(공양만).
總務幹事(총무간사) 金顯沂(김현기).
技術監督(기술감독) 鄭相澈(정상철).
工事請負會社(공사청부회사) 大邱東伸建設株式會社(대구동신건설주식회사).
現場監督(현장감독) 金相琪(김상기)
都木手(도목수) 崔全甲(최전갑).
木手(목수) 劉鉉淳(유현순). 金載坤(김재곤).
長木面誌(장목면지)에는 金載坤(김재곤) 木手(목수)를 記錄(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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