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 신년 제3강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말씀 / 디모데전서 4:1-16
요절 / 디모데전서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성도로서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면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먼저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 앞으로 나타날 시련들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디모데전서 앞에서 교회를 가리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딤전3:15). 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더불어 교회는 세상에 대해 진리를 세워가고 나타내는 터전입니다. 이런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의 가르침이 내면에 잠복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교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다른 사람들을 미혹해 함께 교회를 떠나갑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성찬에도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이고 서로 의지했던 사람들이고 정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함께 한 연수가 얼마인데 이런 그들이 어느 순간 이단 사상으로 교회를 발칵 뒤집어놓고 사람들을 데리고 떠난다면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이단 사상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바울은 두 개의 구체적 이단 사상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당시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운 지침들이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대개 거룩, 경건 등 이런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바울 당시 어떤 사람들이 결혼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음식물을 가리켜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거룩이고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 거룩하고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하면 경건하다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욕을 통해 성결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은 문제가 많은 것이었습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더러운 육체의 정욕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결혼은 세상에 더러움을 만들어가는 제도였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에는 유대 율법주의를 따르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어떤 고기는 먹어도 되고 어떤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또 어떤 음식은 먹어도 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경건하지 못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깨끗하다 더럽다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조금도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대해 사람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존재 이유가 있고 다 선하고 다 옳고 다 깨끗하기에 구분하여 빼야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금욕을 해야겠으면 더러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금욕이 필요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금욕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면 그 때 금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욕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결혼하고 육식이든 채식이든 어느 것이든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금욕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복음 정신을 흐리는 심각한 이단 문제가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율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구원을, 또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외면하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이들은 믿음에서 떠나 금욕과 고행 같은 가르침들을 어느새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으로 거룩해지고, 금욕과 고행에 열심을 내는 나를 하나님이 경건하게 보시고 성결하게 보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게 됩니다. 이것이 당시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물론 결은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이단 사상들이 지역 사회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 있었는데 이*희를 따르는 신*지에서 경남 지역을 담당하는 안*레 지파 구성원으로부터 최근에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요지는 “목사님, 진짜 말씀이 있는 신*지로 와 보십시오”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요즘 뉴스를 핫하게 달구는 문*명과 한*자 총재의 통*교도 마찬가지로 이단 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경상대 남문 쪽에는 여신도들을 성폭행한 것으로 유명한 정*석의 J*S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이단 사상을 분별하고 철저히 경계해야겠습니다. 그런 가르침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경건하고 성결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거룩해진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깊이 영접하고 기도하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지 결혼하고 안 하고 이것이 거룩의 척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가 거룩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의지적 행위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는 것도 모두 죄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거룩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 대신 피 흘려 주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또 기도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올바른 진짜 복음으로 형제자매들을 깨우치는 삶을 살다 보면 바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갑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양육 받게 되고 내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교회 내에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디모데 자신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여기 ‘육체의 연단’은 금욕을 말합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금욕에도 약간의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거룩함이 없다면 이런 것들은 단지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체의 단련이 나의 죄악 된 본성을 결코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단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여기 ‘망령되다’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허탄하다’라는 것은 낡은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이단 사상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는 신화적 미신적 이야기입니다. 또 결혼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논쟁이 신앙에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고기를 먹고 싶으면 먹는 것이고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인 것이지 그것이 신앙에 무슨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마음과 눈을 어디로 돌려야 합니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이 무엇일까요? 경건은 헬라어 ‘유세베이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마음,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소중히 생각할 때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 하나님 앞에서 최상의 상태,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어 하는 이런 마음입니다. 경건을 짧게 말하면 ‘거룩’,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성품, 또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데 연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연단’이 무엇입니까? 연단은 연습하는 것입니다. 반복 숙달하여 몸에 배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일 운동해서 하루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경건이 우리 몸에 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꾸준히 운동하는 것,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는 것,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운동하면 살도 빠지고 육체가 단련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성과가 눈에 확 띄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내가 경건한가 생각해 봤을 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지금까지 기도하고 말씀 보는 삶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왔다고 하지만 이런 삶이 뭘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게 할까요? 눈에 팍 띄게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별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정말 유익한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도 유익이 있지만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왜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살아서도 유익하고 죽어서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뭐가 그렇게 유익합니까? 살아서는 변화되어 하나님을 닮아가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죽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약속’은 ‘기쁨과 행복을 포함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경건은 우리의 삶이 기쁨의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합니다. 육체의 연단으로 얻는 것은 이 땅에서 끝이지만 경건을 연습해서 얻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까지 영원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바울은 감격하며 외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헌신이 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3:12). 초대교회 때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핍박이 따랐습니다. 전 재산을 잃기도 했고, 사자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픔과 고난이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건을 훈련하는 데에 수고하고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10).” 우리의 소망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금욕하고 결혼 안 하고 채식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경건은 썩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경건에 이르는 훈련들이 무엇일까요? 영성 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에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크게 내적 훈련, 외적 훈련, 집단 훈련으로 나눕니다. 내적 훈련은 묵상, 기도, 금식, 성경 공부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외적 훈련은 홀로 있기와 봉사입니다. 집단 훈련은 예배와 영적 모임과 행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경건 훈련들도 이와 유사합니다. 성경 공부, 소감 쓰기, 일용할 양식, 기도, 봉사, 예배, 수양회 등이 바로 우리의 경건 훈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행하는 삶의 행위, 즉 봉사와 섬김도 경건을 위한 훈련이 됩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드레스케이아)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한 사람들로 자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당시 디모데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면서 생긴 여러 어려움이 자신의 연소함, 즉 자기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는 경건이 문제였습니다. 경건을 여기서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서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디모데의 어린 나이, 에베소 교회의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문제가 아니라 디모데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으로 부단히 훈련하면 그의 가르침에 힘이 실리고 또 교회 안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얼마든지 담대하게 해결하고 이단 사상도 제압하고 얼마든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는 무엇보다 믿음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믿음 없이 낙심하고 드러누워 있다면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정절에서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는 도덕적으로도 성결해야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헌법에서도 목사는 이단 사상을 설교하거나 교회 물질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거나 여자 문제가 있는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젊은 디모데에게 많은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도 철저해야 합니다. 이처럼 구체적 삶 속에서 성도들의 본이 될 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본이 될 때 더욱 존경받고 신뢰받고 성도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의 목자인 디모데에게 특히 무엇에 힘쓰라고 말합니까? 1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바울이 다시 올 때까지 전념하고 있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목자가 일생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디모데가 평생 교회의 지도자로서 전념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듣도록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도 없고 문제지도 없고 더욱이 강의안도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있긴 했지만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기록되었기에 이사야서 한 권만 해도 한 수레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는 예배 때마다 큰 소리로 성경을 읽어주는 것이 중요한 순서였습니다. 읽는 것에 전념하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먼저 성경 말씀 자체가 들려져야 합니다. 성경 본문 자체가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말씀이 말씀하도록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자의 메시지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목자의 가치관과 나름의 해석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치우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가 낭독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성령께서 도우시는 영적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씀 본문 자체를 통해 깨닫고 도전받는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목자는 말씀 그대로를 성경 본문에 충실해서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권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 의미는 ‘옆에서 위로하고 변호하고 조언하며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권하며 섬겼는지 잘 나타납니다. 바울은 겸손과 눈물로 권하며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삼 년 밤낮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권하며 섬기는 삶을 이제 에베소 교회의 목자인 디모데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기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권하는 삶을 목자가 살아갈 때는 오래 참음과 눈물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라는 말은 성경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 공부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 선생으로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양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양들은 어느새 바른 복음 위에서 성장하는 제자가 되어 또 다른 양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는 말씀 선포자와 성경 선생으로서의 은사를 말합니다. 디모데가 나이는 어리지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의 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자기의 이런 중요한 은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교회를 섬길 역량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은사들도 다 중요하지만 특히 말씀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디모데는 말씀 선포자와 성경 선생으로서의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어리고 부족하다고 하지 말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며 본이 되며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양은 목자의 말을 배우기도 하지만 그의 삶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해지려면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합니다(15). 헬라어로 ‘전심전력하라’라는 말은 ‘너의 존재가 그것들 안에 들어가 있어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삶과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삶이 온통 그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모르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어려움들은 있겠지만 디모데가 그렇게 살아가는 한 디모데 자신의 성장과 함께 에베소 교회를 통한 구원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부단히 훈련하고 삶의 본이 되며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므로 작년보다 더 나은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 일들을 감당할 때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들도 구원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16).
여러분!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연단하라’, ‘본이 되라’, ‘전념하라’, ‘전심전력하라’ 이런 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경건에 이르도록 전념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삶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심전력하므로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 나도 살고 양들도 살리는 뜻깊은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