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40/0913] 반세기만에 복원된 ‘우리집 사랑방’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1970년대 내내 국가적으로 벌였던 ‘새마을운동’은 ‘before농촌’과 ‘after농촌’의 터닝포인트(변곡점變曲點)가 된 획기적인 운동이었다. 경지 정리, 농로 신설 및 확장, 지붕 개량, 천연퇴비 생산…, ‘수농업手農業’에서 초창기이긴 하지만‘기계화 영농營農’이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다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참 많이도 변했다. 성과가 큰 만큼 ‘농촌의 사회적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던 새마을운동이 이 아침에 떠오른 것은 우리집 사랑방 때문이다.
마을마다 으레 있던‘동네 사랑방’이 언제 없어졌을까? 이장님은 “잘은 모르지만 새마을운동 시작된 이후가 아닐까? 농한기 술추렴이나 놀음도 없어지는 등, 그때부터 농촌 정서가 엄청 바뀌었어. 발전의 뒤안길에는 그늘도 있잖아. 넉넉한 인심들이 사라지면서 그만큼 각박해지고 삭막해지지 않았을까?” “글쎄요. 그랬을까요? 사랑방이 없어진 것도 그때부터인 것은 것같아요”
그렇다. 문제는 ‘사랑방’이다. 농촌의, 동네의‘소통의 마당’이었던 사랑방이 언제부터 없어진 것이다. 겨우내 동네 어른들 대여섯 분이 저녁밥만 먹으면 사랑방에 모여 얘기꽃도 피우며 정보도 교환하고, 일(짚신도 삼고, 새끼도 꼬고, 덕석(짚방석)과 가마니도 짜고, 민화투도 치고, 바둑도 뒤던)도 같이 하던 우리집 사랑채의 방.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때였다. 군불을 어찌나 세게 땠던지 아랫목은 장판이 시커멓게 탔던 사랑방, 지금도 기억난다. 어머니는 고구마를 삶아 싱건지(동치미와 함께 갖다드리라며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사각 성냥통만한 봉초뭉치에서 마른 담뱃잎을 꺼내 신문지에 말아 피우던 골초어른들은 우리 아버지만 남기고 다 어디로 갔을까?
담배냄새가 쩔어 들어가기만 해도 골치가 띵했던 사랑방에서 나는 11살(국민핵교 4학년) 겨울방학때 바둑을 ‘순식간’에 배워버린 ‘신동神童’이 되었다. 아버지 친구들이 두는 바둑을 어깨너머로 한 열흘 들여다본 후, 동네에서 가장 잘 두는 어른에게 척허니 도전장을 내밀었겠다! 그것도 접바둑으로 바둑알을 깔지 않고 막(호선) 두자고 했으니. 아버지는 신이 나셔서 나를 데리고 이웃마을 사랑방 마실을 다녔다. 어디든 가는 족족 판판이 이겨대는 나는 우쭐우쭐, 몇 급이나 되었을까. 10급쯤? 5학년때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전주로 유학을 갔다. 조훈현처럼 천재기사(이창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가 되리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독선생’을 모셔놓고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웠다. 과외는 ‘바둑교실’이 유일했다. 한 달에 3만원이었다던가. 쬐깐 놈이 무릎을 꿇고 두 시간도 넘게 바둑을 배우니 남들 보기에도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 바둑 정석 몇 백개를 외우고, 그 변화의 수를 배우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마다 급수가 올라가 열 달만에 아마 1급이 되어, 선생님과 호선互先으로‘맞짱’을 뛸 정도가 됐으니. 전주에서도 나를 덮어먹을 자가 없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기고만장했을 것인가. 당시 기원棋院의 기료棋料가 25원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 기원이나 가면 대개 3급쯤 되는 원장님이 반기며 돈도 받지 않고 지도대국을 부탁했으니. 흐흐. 이유야 어찌됐든,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프로기사의 꿈을 접은 나는 불효자이다.
그 사랑방을 반세기만에 내가 복원했다. 요즘말로 하면 ‘게스트룸’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사랑방에는 ‘비만 오면’ 모이는 멤버가 다섯 명이나 있다. ‘6학년 중반’이어도 ‘청년’으로 취급되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동네에서 이게 어딘가? 술도 같이 한잔 마시고, 쩜백고스톱도 친다. ‘국민오락’ 고스톱은 절대 노름이 아닌 놀음이니 오해하지 마시라. 물론 푼돈이더라도 돈 잃고 속 좋은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왕년의 사랑방처럼 농사정보도 적극적으로 교환한다. 음식도 나눠 먹는다. 울진에 다녀왔다며 마른오징어 한 축을 내놓은 형님도, 복숭아 땄다고 한 소쿠리 가져온 이장님도, 안주거리를 대는 자치동갑 친구도 있다. 이게 사는 맛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른바 소통의 채널, 소통의 마당이 된 것이다.
사랑방 복원은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올 여름은 역대 가장 긴 장마였다. 그 덕분에 고스톱은 실컷 쳤다. 이제 사랑방 앞에 ‘툇마루’도 놓을 생각이다. 겨우내 툇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할 참이다. 그곳에서 골마리를 까고 이를 잡아 손톱으로 찍찍 눌러죽이며,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낄낄거리던 그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당시로는 장수長壽했다는 아버지 친구들인 그 어른들이 생각해보면 환갑을 넘긴 60년대였다. 헐,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따로 없다.
첫댓글 그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바둑을 잘두어 기억하는 머리가 그토록 좋을까?
참 세세히 기억도 잘한다.
나역시 소싯적 ㅎ 15년 전까지는 술을 많아 마셨는데
그때 같이 술마시던 어르신들 그것도 안주를 사탕하나 소금힌톨 찍어먹던 어르신들은
모두 콩 팔러 먼저 떠나가셨다.
그래서 술은 안주없이 마시면 독약이라고 알고있다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