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80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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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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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Jo0RGBwm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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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회심 이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 바오로 사도의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서,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양대 기둥 가운데 하나요,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난 그였지만, 평생토록 한없는 겸손의 덕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이상 잘난 체 하거나 허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교계 구조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공동체 내에서 끝자리에 두고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틈만 나면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죄인들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제 강한 비바람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을 쓸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당 쓰는 일은 한 번 하고 끝낼 일이 아니로구나. 낙엽이 쌓일 때 마다, 틈나는 대로 쓸고 또 쓸어줘야 되는구나."
우리가 지난 시절 저지른 심각한 잘못, 그리고 일상적으로 짓는 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참회했다고, 한번 고백성사 봤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틈날 때 마다, 참회하고 또 고백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기회 닿는 대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허물과 흑역사를 솔직히 고백하셨습니다. 때로 너무 부끄럽고 참담해 감추고도 싶으셨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자신의 수치스런 지난날을 고백하며, 끝도 없이 성찰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티모테오 1서에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티모테오 1서 1장 15~16절)
오늘 루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 폭풍우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가장 좋은 비결 역시 바오로 사도가 지니고 계셨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유형의 죄인들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 속에 파묻혀 살아가지만 손톱만큼의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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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JEXZDjmr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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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라고 믿건 당신의 믿음은 옳다>
오늘 복음은 ‘본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릴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습니다. 본성이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을 내어놓고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따라서 마음, 곧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키려 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라시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셨으니 그것을 실천하자.”라는 식의 가르침은 신자들을 금방 무너질 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 곧 본성은 오직 ‘믿음’으로만 변화됩니다.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셋 있는데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인이 늑대라 믿으면 사람이면서도 늑대의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까치도 자기가 개라고 믿으면 개처럼 짖어댑니다. 사람이라도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개의 소리를 내며 마치 먹을 것을 빼앗길 것처럼 자녀들을 학교에 못 가게 방안에 가둡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자신의 본성대로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본성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본성끼리여야만 완전한 친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자격 미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더라도 그 열등하다고 믿는 수준만큼밖에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본인이 늑대라고 믿는 사람과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친교와 사랑이 이뤄지겠습니까?
“이방에 들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보이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한 벽장에 들면서 그렇게 많은 방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부인 일단 타세요.”
보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다 내 열등감의 희생양이 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작은 것에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상처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만날 때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은 나도 저 사람에게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만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그 관계는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여학생이 입사 지원서를 냈는데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지원한 분야는 회계업무부서였는데 회사는 경력자를 선호하는데 그녀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회 초년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입사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면접이라도 치를 수 있게 꼭 기회를 달라.”라고 사정했고 면접관은 그녀의 적극적인 의욕을 높이 샀습니다. 결국, 그녀는 필기시험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인사경리 부서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사경리부서의 책임자는 입사시험 성적이 뛰어난 그녀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으나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회사 규정상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인사경리 부서 역시 경력 사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면접을 보러 온 여학생에게 그는 예의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화로 연락을 드리지요.”
분위기가 냉담해진 것을 알아차린 여학생은 갑자기 1달러를 꺼내어 면접관에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좋으니 꼭 제게 연락해 주세요.”
면접관은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라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는 여학생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전화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아까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는 합격하지 못하면 전화하지 않겠다는 말이잖아요.” 면접관은 점차 호기심이 발동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의 어떤 점이 귀사의 채용 기준에 부적합한지 알려주시면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그럼 아까 내게 준 이 1달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회사 규정상 불합격자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화 요금을 따로 드린 거예요. 그러니 떨어졌더라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면접관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습니다. “1달러를 돌려주겠어요. 당신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채용하기로 했거든요.” 여학생은 단돈 1달러와 재치 있는 행동으로 인생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출처: 『좋은 생각이 행복을 부른다』, 커쥔, 프라임]
이렇듯 자신이 만나는 무엇과 관계를 맺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지 맙시다. 그 마음 없애주기 위해 성체 성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체를 영한 우리는 그리스도라 믿고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레베카와 같은 사제들입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고,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내가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썩은 사과가 맺혔습니다. 이는 내가 주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믿음입니다. 계속 썩은 열매만 맺는 그 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하느님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좋은 열매입니다. 그래야 내가 잘리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한 뒤 여러분 안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나는 예수다!” 그러면 여러분은 응답하십시오. “아멘!” 이것이 하느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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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6,43-49 :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 놓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지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신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예를 들어주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고 하셨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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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이란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랑』, 59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공허하며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행동으로 보일 때, 그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느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비판하기도 하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며, 치유의 은사를 받아 다른 이에게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우리는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곳간에 선한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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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음도 진화하는가?’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진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화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감정, 이성,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도, 식물들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동물도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음도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학자들은 감정에는 6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기쁨, 분노, 두려움, 혐오, 슬픔, 고통’의 감정입니다. 동양에서도 ‘4단7정’을 이야기합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4단입니다. ‘희노애구애오욕’이 칠정입니다. 4단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마음입니다. 7정은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의 감정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주변의 상황에 적응하면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모르면 용감하겠지만 일찍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혐오를 모르면 위생상태가 안 좋아져서 감염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고통을 모르면 상처 나고, 부러질 수 있다고 합니다. 늘 기쁘면 잘못을 성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생마는 잘 달리지만 길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생마를 길들일 수 있다면 능히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와 도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힙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잔의 겉은 잘 닦지만, 잔의 속은 잘 닦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이성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비이성적인 삶을 살았던 인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서도 우리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경험합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는 200개가 넘는 횟집이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가장 저렴하면서 가장 신선한 가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2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당히 둘러보고 또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회를 사먹습니다. 15,000원 짜리 책을 사는 대신 30분 걸어가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만, 30,000,000원이 넘는 차를 사면서 15,000원을 아끼려고 30분을 걸어가지는 않습니다. 사랑하고 결혼할 때도 그렇습니다. 결혼해도 좋은 이유와 결혼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따지면서 결혼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성적이지 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죽은 이에게 맡기고 지금 당장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 오후에 일한 사람, 저녁에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공감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픔을 느끼면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는 ‘페르몬’이 있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공감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녀사냥, 매카시즘, 왕따’는 대표적인 잘못된 공감의 사례입니다. 예수님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며 공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바라바를 풀어주시오.’라고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공감능력이 없다고 너무 자책할 것도 없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너무 서운해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누가 여러분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시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처럼 열정이 식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는 지면 다음날 또 뜨기 마련입니다. 수평선은 돌면 다시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삶의 지평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지평에 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 주십니다. 선한 마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풍랑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집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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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우리는 왜 한결같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긋이, 묵묵히, 한결같이, 변함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요? 금방 뜨겁다가 왜 금방 식어버리는 걸까요? 머리로는 아는데 우리의 감정은 왜 이리도 자주 폭풍속에 휘말리는 걸까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한결 같은 사랑의 마음과 자신의 내어 주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항구히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사랑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수 없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으면 기초 없이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미운 사람이 생기고,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항구하게 사랑하기조차 힘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의 실천이 왜 이리도 힘든 걸까요? 아침에는 목숨이라도 내어 줄 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겁다 가도, 저녁에 무심코 한 말 한마디에 토라져 10년 전 잘못까지 끄집어 내어 분노로 악을 쓰며 달려 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고 외로운 날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참된 사랑을 위해 제가 여러 차례 “기대치를 낮추어라, 자신의 사랑에 보상을 바라지 마라,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라, 영적으로 성장해라, 예수님의 방식의 사랑을 배워라, 자기 수양을 해라, 기도해라” 등등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하나되어 “사랑의 존재”가 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항구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자기 자신에게 먼저 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해라”라고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고,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자신 "만" 사랑하는 이는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다른 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과 주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합니다. 조금만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면 쉽게 토라지거나 모진 말로 공격을 합니다. 혹은 의기소침해져서 자기 비관에 빠지거나 관심을 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과장된 사랑의 표현을 해서 자신과 상대방을 갉아먹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며 늘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힘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도 소유하러 들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모두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자존감이 낮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이들을 부르는 병이 있습니다. 왕자병 혹은 공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현실적인 기준에서 사랑합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평가 절하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도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비병(?)에 걸린 거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상대방은 언제 토라질지 모르는 그 사람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거짓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비록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먼저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행복을 바라시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우월, 이기심, 위선, 포장 등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거나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기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기 비움, 이타심, 자기 희생, 자기 객관화 등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 자신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랑을 하는 것이 진정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이 깨어나게 되고, 십자가를 짊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과 하나되어 우리가 더 큰 사랑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중심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집어 삼켜 나도 너도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어 구원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열등 의식 속에서 자신의 처지에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태도나 말에 짜증을 부리고 공격을 하고 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은 좀 더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사랑의 실천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 두십시오. 예수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데 왜 나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과대 포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까요?
그리고 진정한 나의 행복을 바란다면 더 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나의 자존심, 나의 이기심, 나의 선입견과 편견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상처 난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위로의 은총을 구하며 새롭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반석 위에 사랑의 집을 짓는 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의 욕망을 버리고, 더 큰 사랑을 위해 지금의 아집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꾸고 특히 기도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돌보며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초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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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천경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현대인이라 불릴 수 없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그 하나는 운전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른바 현대인들의 필수라 일컫는 운전 면허증을, 그것도 제 이름 석자와 얼굴이 올라있는 그 국가 공인 면허증을 저는 아직도 손에 쥐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몇 번에 걸친 면허 시험에 연거푸 낙방의 고배를 마신 데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 무슨 대단한 다짐과 각오가 있어 면허증을 취득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자면 단지 저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제 몸에 덩그러니 붙어사는 이 게으름 때문에 육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고 싶은 곳, 그리고 가야할 곳은 많으니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일말의 노력쯤은 해 보았습니다. 한 너 댓 달 전이었지요. 온 몸 가득 기생하고 있는 게으름과 싸우고 싸운 끝에 성당에서 가장 가깝고 싸고 편하며 거기다 최단 시일 내에 면허증을 딸 수 있다는 모 학원에 부푼 마음으로 등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 한 이 삼일 동안은 정말 착실한 모범 학원생으로 살았지요. 학원 강사가 가르쳐준 대로, 화면에 나오는 가상현실을 눈여겨보며 착실히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루 이틀 지나니까 별로 어려운 게 없습디다.
뭐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아서 안전벨트 맨 다음, 브레이크와 클러치 패달을 밟은 채 핸드 브레이크를 내린 후, 시동을 걸어서 천천히 클러치를 때면 출발합니다.
그 다음은 가속 패달과 기아 변속 때에 사용하는 클러치 패달을 적절히 밟으면 되는 것이고, 멈출 때는 브레이크 패달 등등, 그 외의 것도 머리로 곰곰 생각하고 생각하니 누워서 떡 먹기 정도였습니다.
제 머리 속에 그려지고 컴퓨터로 나오는 가상현실에서 저는 완벽한 운전수였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머리를 가득채운 착각과 더불어 오는 것이었는지 며칠 뒤 제 동기 신부의 놀라운 예언대로, 저는 그 학원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게으름은 여전히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삶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온 몸에 새겨지고 또 새겨지는 일일 것입니다.
운전이라는 것도 아무리 머리로 헤아리고 여러 기술을 배워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 몸에 베이지 않고서는, 말하자면 그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흐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머리로만 배워 익히고 새겨 두었습니다. 여러 듣고 익힌 좋은 말씀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농을 걸 때도 머리 속에 외워둔 성서 구절을 인용하기까지 하면서도 정작 몸만은 전혀 관계없는 것인 양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래서 생각으로만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무거워진 머리로 해서 그 몸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실로 작은 움직임들이 몸에 쌓이고 쌓여 튼튼한 삶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아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몸으로 드러나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한 생애는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지은 하느님의 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살, 곧 삶이 되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는 못다 이룬 운전 면허증의 꿈을 다시금 꾸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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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 등 나쁜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됩니다. 그때 우리는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따르지 않기에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탐스러운 포도송이 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좋은 생각들과 지향들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고 있는지는 우리가 하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려는 행위와 지향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의 보물들로 간직됩니다. 기도와 성사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나아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육의 행실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등입니다.(갈라 5,19-21 참조)
우리 안에 어떠한 열매들이 달리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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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 제2의 본성>
누구든 “사람은 본디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어떠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사람은 선천적으로(a priori)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선설(性善說)을 따르는 것이고,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악설(性惡說)을 따르는 셈이 될 것이다.
문제는 태어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 선인으로 살고, 악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선하게 태어난 인간이 악인이 되고, 악하게 태어난 인간이 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의 경우 무엇이 된다는 것은 학습과 체득에 의하여 후천적으로(a posteriori) 형성되는 성품을 말한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40-?)는 ‘되어가는’ 과정에서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본성에서 유출되는 ‘됨’을 주장하였다.
이 두 철학자의 깊은 진리를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합하여 주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13세기 스콜라철학은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입장을 취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산상설교에 비해 짧게나마 루카가 보도하는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와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가르침은 각각 알아듣기 쉬운 예화, 즉 나무와 열매, 그리고 창고의 비유와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제시된다. 이 가르침으로 루카복음의 평지설교는 일단락된다. 마태오복음도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7,21-27)로 산상설교를 끝맺고 있다.
오늘 복음의 전반적인 구조는 ‘본성->행위->말’의 전개과정을 따르고 있다. 이는 본성에서 행위가 유출된다는 뜻으로서, 본성은 행위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행위와 말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행위와 말의 일치를 예수께서는 요구하신다.
이는 ‘말->행동->본성’의 역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써 말과 행위는 서로 다를 수 있는바, 말을 듣고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하던 그 행위는 결국 본성을 밝혀주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행위는 본성을 따르고, 본성은 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자.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 - 나쁜 나무’와 ‘선한 마음의 창고 - 악한 마음의 창고’의 비유를 통하여 본성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다.
여기서 창고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결국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행동, 즉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셈이다.(45절)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속담이 원론적으로 틀린 데는 없지만 어쩐지 김새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본성과 행위의 관계가 이렇다면 너무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한 본성에 의해 평생 선인으로 살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악한 본성에 의해 평생 악인으로 산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다.
이는 억울하다 못해 절망적이지 않는가? 아무도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구별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억울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예수께 있어서 사람의 본성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악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선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중요한 것은 행동이고, 나아가 행동과 말의 일치다.
누구든 말과 행동의 일치를 도모한다면 악한 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를 좋은 성품으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당장은 악한 본성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48절)
그러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맨땅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49절) 예수님의 가르침(평지설교)을 따르고 실행하는 훈련은 결국 더 나은 성품, 즉 제2의 본성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탓하고 주저앉아 더 선한 제2의 본성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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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좋은 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 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를, 오늘 <복음>은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곧 ‘말’과 ‘행실’ 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루카 6,43-45)
그러니 ‘첫 번째 열매’는 우선 입으로 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어떤 말들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의 곳간이며, ‘말’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말은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향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두 번째 열매’는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행’이야말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그러니, 우리 역시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며,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일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가?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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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
주님!
제 삶이 화려한 꽃보다, 알찬 열매가 되게 하소서!
곱게 치장하기보다, 꾸밈없는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속이 꽉 찬 열매가 되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열매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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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무는 모두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6,44)
<나는 어떤 나무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첫째는 '믿고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지 못한 죄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미사에 참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미사를 참례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의 정의'이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요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생각한 죄와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6,46)
'나는 어떤 나무인가?'
'선한 마음'을 지닌 나무인가?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나무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인가?
'악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인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나무인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나무인가?
한번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나의 모습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을 모습이라면, 얼른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청합시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구원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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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루카 6,43-49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내 말을 실행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나>
나는
나 아닌 것을
맺지 못한다
나는
나 아닌 것을
내놓지 못한다
그러니
나 아닌 것을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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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산소 운동뿐 아니라 근육운동도 같이 하면서 매일 1시간 이상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관에 들어오면 헬스장에 있는 바벨과 덤벨을 비롯한 각종 운동 기구를 볼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운동해서인지 근육도 꽤 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보고 어떤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십 넘어서 몸짱 되려는 거야? 왜 이렇게 몸이 좋아졌어?” 방송에 나오는 헬스트레이너와 같은 몸매를 가지고 싶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책 많이 보고, 글 열심히 쓰기 위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병원에 입원도 하면서 허리통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요. 허리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영, 자전거 그리고 헬스까지 모두 허리통증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몸짱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근육맨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했던 운동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자기 마음의 안정과 함께 힘차게 이 세상을 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밖에 다른 은총은 여분의 주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은총, 특히 세속적인 욕심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서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들어가는 순간,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나쁜 나무로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행복의 길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끌고서 그 길로 들어가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그 길이 어떤 길인지만을 가르쳐주셨고, 그 실천의 몫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길로 직접 걸어가고 있나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행복의 길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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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삽시다.>
20대에는 대학 졸업과 군 생활, 그리고 곧바로 취업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능력이 되면 결혼까지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30대가 되면 직장 생활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 4~50대가 되면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의 교육 문제가 끝나 가는 시기를 갖게 됩니다.
60대 이후 나와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 저야 신부라서 조금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 주변의 사람을 보면 대부분 이 공식에 맞춰서 살아야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힘든 삶을 사는 사람으로 평가되곤 했습니다.
종종 옛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지금 신나게 사는 친구들은 남처럼 사는 친구가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사는 친구였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노는 데 더 집중했던 친구, 30세에 들어서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친구, 자신이 잘하던 것을 그만두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시작했던 친구….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정답 같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삶을 떳떳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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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터인데…. 동물 애호가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분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콩 나라 팥 나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험담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가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은 매사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논리와 현실의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성당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안에서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을 마음껏 이웃을 향해 봉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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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끊임없는 회개와 말씀의 실행-
“마음의 치유는 경청에서 시작한다.”
깊이 마음에 와닿은 교황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깊이 경청할 때 마음의 치유요 순수라는 이야기입니다. 경청이야말로 영성생활의 시발점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이런 겸손한 경청에서 순종도 뒤따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에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제 노자老子 강의를 들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공자에는 성인聖人이란 말이 안 나오지만 노자에는 성인이란 말이 많이 나오고 성인이 되는 것은 삶의 궁극 목표라는 것입니다. 여기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덕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들을, 자연의 말들을 잘 듣는 경청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할 ‘성聖’ 한자만 봐도 ‘귀’를 뜻하는 ‘이耳’자가 앞에 나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경청은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나 성독 역시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경청의 수련이 참 절실합니다. 지난주 복음의 “에파타!” “열려라”는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정말 열려야 할 것은 마음의 귀입니다.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아무리 육신 귀의 청력이 좋아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순수와 열림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 쏜살같이 빠른 세월입니다. 월요일인가 했더니 벌써 토요일입니다. 매일 같은 일과의 반복이기에 어떤 때는 요일의 구별이 안되어 그날이 그날같습니다. 하루가 영원같고 평생이 하루같다는 느낌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라틴어 두 격언,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지금 여기를 살라’는 ‘카르페 디엠’ 이란 말마디가 요즘 절실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지금 여기를 살 때 저절로 뒤따르는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회개를 통해 살아나는 사랑이요 순수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유동적 실재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의 수행을 통해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라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의 사랑입니다. 순수와 열정은 함께 가며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기본적 자질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사랑을 통한 마음의 순수요 확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산상설교의 끝부분에 속하며 둘로 이뤄져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내용과 ‘주님 말씀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열매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 결국 사람이, 마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통해 그의 마음이, 그가 누구인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100% 순도의 마음도 없고, 100% 선인도, 악인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경청의 수행과 더불어 말씀의 실천이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안이, 마음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 집니다. 무슨 옷을 입어도 어울립니다. 화장이나 성형 수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래서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영원학 현역으로서 치열한 말씀 실천의 분투의 노력이요 수행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어떤 사람과 같은지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바로 우리 정주의 삶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이런 회개를 통한 말씀의 실행이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튼튼한 반석위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정주의 삶을 이뤄준다는 것입니다. 반석 위의 정주의 삶은 완성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의 영성생활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기본에 충실한 삶, 기초를 튼튼히 하는 삶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회개와 경청에 이어 한결같이 깨어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수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다음 말씀의 실행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릴 때입니다. 결국 우리의 영성생활도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의 본질입니다. 사실 공동체든 개인이든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는 경우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새삼 하루하루 회개와 말씀의 실행으로 기본에 충실한 삶, 기초를 튼튼히 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바오로는 자신의 회심의 사건을 다시 고백하면서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합니다.
“나는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평생 이런 회심의 살아 있는 추억이 바오로를 깨어 있게 했고, 순수하게 했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줬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시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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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 ...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루카 6,47-48)
나아오고, 듣고, 행하는 세 행위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과 연관될 때 존재의 참 모습, 참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는 세상에 널린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 그 때깔 좋고 현란한 허상들을 헤치고 저 깊이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찾아 다가오는 이에게만 열리는 선물입니다.
주님께 나아오고, 그분의 말을 듣고, 들은 바를 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의 방향성과 경청과 실행이 그를 나날이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뿌리를 지탱하는 반석 또한 그가 흔들리지 않게 꽉 붙들어 주지요. 이 반석이 곧 주님이십니다.
그 반석에 뿌리를 둔 영혼은 삶의 어떤 파도가 들이닥쳐도 휩쓸리지 않고 버티어 냅니다. 또 그렇게 존재의 뿌리를 주님께 드리운 이는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양분을 빨아들인 만큼 세상에 좋은 열매를 내놓을 수 있지요.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나는 좋은 나무인가 나쁜 나무인가' 성찰하다 묵상이 자칫 반성과 체념의 기도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요. 이때는 제1독서 안에 드러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5-16)
여전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청대는 수준일지라도, 사도는 그래도 괜찮다고 용기를 줍니다. 첫째가는 죄인이어도, 자신이 바로 그 때문에 구원되었음을 겸손히 믿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1티모 1,16)
반석이신 주님께서 마치 반석과 같은 강도의 인내로 우리를 든든히, 묵묵히, 변함없이 지탱해 주십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는 그분께서 그렇게 기다려 주시니 아직 부족하고 모자라도 섣불리 자책하거나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기초를 둔 이는 이미 주님과 한 몸이니, 세상의 어떤 풍파와 악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습니다. 쉽고 빠르고 효과 있어 보이는 세상의 돈과 권력과 쾌락의 모래톱에 발 들이지 않고, 단단한 반석이신 주님께 나아와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열매로 세상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거룩한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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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cmV1hj-F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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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 43)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이 가을
묻게 된다.
귀를
기울여야 할
주님의
말씀이시다.
말씀의 진리가
실행의 참된
열매가 된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삶이
바로 복음의
참된 삶이다.
복음의 삶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복음의 삶은
좋은 실행의
발자국들로
넘쳐난다.
말씀은
우리에게
열매를
내어주듯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선사한다.
말씀과 함께
이 시간을
견디고
말씀과 함께
이 시련을
통과한다.
말씀과
실행은
나무와
열매같이
이렇게 함께
이어진다.
말씀으로
시작하고
실행으로
완성된다.
말씀의
실행이란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좋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
좋은 나무는
주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실행과 함께
자라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또한
말씀과 함께
자라난다.
말씀을 품은
삶이 말씀을
실행한다.
말씀은
실행을 부르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부른다.
주님께서
자녀들을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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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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