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 여대생의 큰 사랑 ]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 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습니까.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난 40년 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직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가슴 한 가득 품고 떠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눈망울이 뜨거워지는, 마지막 사랑의 편지입니다. 강영우 박사(1944 ~2012). 중학생 때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눈을 다쳐 시력을 잃었지만 시련을 극복하고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 UN세계장애인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봉사의 삶을 펼친 인물입니다.
강 박사는 24일 미국 버지니아의 자택에서 68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그가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지상에서 울릴 겁니다, 잔잔하면서도 영원하게….
강 박사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곧이어 어머니와 누나마저 잃었습니다. 두 동생과도 뿔뿔이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실명 1년 전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셨지요. 2년을 암흑 속에서 자살의 유혹과 싸웠습니다.
2년 동안 교회에서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1년 동안 점자를 배우다보니 친구들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낭만의 시간을 보낼 때 서울맹학교에서 중1 과정부터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음이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강 박사는 한국걸스카우트 본부의 시각장애인프로그램에 등록하러 간 첫날, 위로 어깨동갑인 부인을 만납니다. 자원봉사를 하던 숙명여대 1학년생이었습니다.
비록 청맹과니*였지만 ‘마지막 편지’에서 쓴 것처럼 ‘마음의 눈’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뚜렷이' 봤습니다. 누나는 온갖 편견과 싸우며 동생을 뒷바라지했습니다. (* 청맹과니 :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나, 실상은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 당달봉사. )
늘 책을 읽어주었고 소풍 때에는 도시락까지 싸줬습니다. 박사는 ‘천사 누나’의 헌신어린 도움 덕분에 연세대에 진학할 수가 있었습니다.
강 박사는 대학교 1학년 때 고마운 누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오누이가 아니라 연인으로 태어나자”며 새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돌밭을 걷는 ‘석(石)’의 시기 10년이 지나면, 돌보다 귀한 ‘은(銀)’의 시기 10년, 은보다 귀한 ‘옥(玉)’의 시기 10년이 올 것”이라며 ‘석은옥’이라는 이름을 선물했습니다. ‘천사’는 자신의 이름 ‘석경숙’ 대신 새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강 박사는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로 유학갈 수가 있었고 부부는 미국에서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갑니다. 강 박사는 장애인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부부의 참사랑은 두 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교육이었습니다. 장남 진석 씨(39)는 아버지처럼 앞 못 보는 사람을 돕기 위해 안과의사가 됐으며,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의 ‘안과 분야 슈퍼닥터’로 선정됐습니다. 차남 진영 씨(35)는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강 박사는 두 아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해보기도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다.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단다”고 썼습니다. 또 강 박사가 지인들에게 e메일로 보낸 ‘감사의 편지’로 교민사회가 감동과 슬픔 속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40여 년 전 두 사람의 순애보가 지금 이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시에도 쉽지 않았겠지요. (왼쪽 사진처럼 예쁜 외동딸이었던) 석은옥 씨의 경우, 가족과 친지의 반대가 없지 않았겠지요? 친구들도 반대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맹인과 결혼하다니 창피하다”며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상황까지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천사'는 친구들이 판사, 의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돼 있을 때 늦깍이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으면서도 활짝 핀 미소 때문에 하객의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강 박사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사랑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이악스러운* 세상,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재력과 외모를 따지지만, ‘바보 같은 사랑’이 ‘큰 사랑’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이야말로 ‘행복한 사랑’이 아닐까요? 평생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이를 감사할 줄 아는 사랑, 아름다운 사랑! 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가슴에서 계속 울립니다. (*이악스러운 : 이익을 위하여 지나치게 아득바득하는 태도가 있는 듯하다)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코메디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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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읽는 감동의 신앙고백
강영우 박사는 1944년 1월16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여 중학교 재학 중 실명한 후 연세대학교 교육학 석사, 미국 피츠버그대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자관보가 되었으며, 2006년 미국 루스벨트재단 선정 127인의 공로자 중 1인이 되었고, 2008년에는 국제로터리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2월 23일 별세했다. <편집자주>
미국의 대학 중 좋은 대학으로 시카고 대학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은 노벨상의 왕국입니다.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습니다. 1929년까지 그곳은 별 볼일 없는 2류 대학이었었는데 로버트 허친스 박사가 총장이 되면서 학생들에게 인생을 걸고 따라가야 할 만한 스승을 만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레이트북 100권을 교양으로 읽어야 졸업이 가능하도록 하고, 그 중에서 학생들이 인생을 바쳐 따를 수 있는 역할 모델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나왔고 결국 노벨상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역할모델이란 멘토링 즉, 스승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도 나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32대 루스벨트 대통령은 26대 프랭클린 대통령을 역할 모델로 삼았습니다. 38살에 대통령후보가 되기까지 승승장구를 했지만 루스벨트는 낙선을 하고 소아마비가 걸려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정치인생은 끝났다고 이야기 할 때 그는 또 하나의 역할모델을 찾았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보기에 자기가 그녀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갖고 있던 한 가지 때문에 자기의 역할모델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3중장애를 가지고 명문 래드클리프칼리지를 졸업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강의 내용을 보지도 듣지도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곳을 졸업하였던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과연 그가 두 다리에 힘을 얻어 서서 강연하는 것이 헬렌 켈러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졸업했던 것보다 더 힘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으며, 그 후 7년 동안 재활치료에 집중하여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루스벨트는 후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돌아 가셨고,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그는 아버지의 역할 모델로 목사이자 변호사였던 위드라 윌슨대통령을 삼았습니다. 고아 출신 후버대통령도 위드라 윌슨을 아버지의 역할모델로 삼고 살았다고 합니다.
교육에서 역할 모델을 찾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저의 역할 모델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모태교인으로 태어났고, 주일학교 다닐 때 내 인생은 고난과 고통이 없는 탄탄대로일 것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3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4살 때 축구공을 눈에 맞아 망막박리가 되어 병원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장님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졸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고쳐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용기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대조동 순복음교회에서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책임지던 누나마저 과로로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을 겪게 하시고 믿음으로 견디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아무 일도 해 주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 강하게 불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해 주셔서 동생들과 같이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한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하였으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질 않았습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한다. 고난과 역경은 기회와 축복이다”
신앙의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 우리 3명은 서로 각자 헤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하나님께서 눈을 안 고쳐주신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눈을 고쳐주셨다면 나는 누나와 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6년 후 제가 연세대학교를 들어갔을 때 두 동생과 만나 다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지금은 동생들을 초청해서 이곳에서 잘 살고 모든 자녀들이 다 잘되는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 축복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1972년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장애인으로서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돈200불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부시 대통령과 우리 둘째 아들의 역사 선생님인 토마스 라이언 선생님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했고, 또 명문가를 이룬 것을 보며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둘째는 이제 28살인데 법학박사로 아주 높은 상원의원의 최연소고문변호사이고 가장 촉망 받는 보좌관에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하나님의 복 주시기 위한 축복의 도구다” 라는 감사로 살기 시작하니까 이 실명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저희 가족 모두가 저의 실명으로 인해 훌륭한 사람들로 자라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저의 아내는 저 때문에 장애교육을 공부해서 그 관련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큰 아들은 나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안과의사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은 나의 연설문 쓰는 것을 도와주다가 글을 잘 쓰게 되었고, 긍휼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실명은 우리 가족들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책을 썼을 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편지로 “당신의 책에는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의 고결한 가치가 들어있는데, 첫째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절망적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졌고, 어려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있었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들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신앙은 가장 감동을 주는 내용이었고, 롬8:28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의 가장 큰 본보기가 되는 케이스다”라고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저절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조건을 찾으시고 어려움을 극복하는데서 영광으로 가는 자양분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합니다. 역할 모델을 가지자.” “고난과 역경은 기회와 축복이다.”
믿음으로 승리하고 고난을 긍정적인 자산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2005년 9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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