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색볼펜 [신용목]
내 필통 속에 삼색볼펜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가
방 속에 필통이 있고 필통 속에 여러개 볼펜이 있다는 것과
하나의 볼펜 속에 세개의 심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하나의 가방 속에 세 개의 필통을 집어넣는 사람의 마음
과 어떻게 다른가
처음 삼색볼펜을 만든 사람도 내게 삼색볼펜을 건넨 사
람도
모르겠지만
길게 줄을 긋는다
세개의 색깔은 서로를 알아보는가,
빨간 돌 다음에 파란 돌을 올려놓는 것처럼 파란 실 끝에
빨간 실을 묶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 끝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라면 차
례차례 등장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하필 비 그친 하늘, 무지개는 어떻게 저 많은 색깔을 한꺼
번에 피워내는가
파란색 볼펜으로 쓴 말들은 아득하게 펼쳐진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흑등고래의 길이 이어지고
파랗게 어두워지는 깊이쯤 가라앉은 배,
부드럽게 죽어가는 수초들 사이에서 녹슨 갑판이 흑등고
래의 눈을 뜬다
번갈아 똑딱이는 소리처럼 별들이 바다 위를 빙빙 돌며
길을 잃게 만든다
빨간색 볼펜으로부터 타오르는 이야기, 모든 불꽃이 하나
의 작고 둥근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성냥 머리처럼 붉게 묻은 생각에 하얀 종이를 구름으로 펼
쳐놓고 기다린다
부딪쳐라, 바람에게
하늘을 다 태우는 저녁을 주고 싶다
나는 내 몸속에 쓰인 붉은 글자들을 안다 사막이 많은 나
라의 문자처럼
바다를 잃어버린 내 몸의 해변을 돌고 도는 핏줄들,
매번 새롭게 쓰여지고 매번 까맣게 지워지는 내 몸의 파
도를 아무도 읽지 않아서
생각의 저녁을 붉은 화농으로 키우는
가로등,
불빛으로 휘감기며
검은색 볼펜으로 쓴 죽음들
밤,
그 속에 무언가 갇혀 있다 어둠의 캄캄한 벽을 조금씩 밀
어내며 오직 머리로만 남아 있는 그것들이
세 개의 눈동자를 갈아끼우는 소리가 들린다
-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문학동네, 2021
첫댓글 파란색 볼펜을 자주 쓰진 않는다.
빨간색 볼펜도 자주 쓰진 않는다.
삼색볼펜의 까만색 볼펜을 가장 많이 쓰다보니
삼색볼펜만 점점 필통을 차지한다.
버리자니 아깝고 쓰자니 필통이 가득차고,
볼펜회사는 내 필통처럼 돈을 벌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