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어항 語港
- 김겨리
책 속에는 많은 어류(語類)들이 유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활자들
의 지느러미가 퍼덕거려 책 밖으로 물이 튄다 물비린내가 흥건한 대목을 읽
다 접어놓은 갈피에 수초들이 무성한 건 슬어 놓은 은유들의 은폐, 모음이 자
음을 낳고 자음이 묵음을 낳고 묵음이 촌음을… 낳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수많
은 나이테로 밑줄을 그어 놓은 책을 읽는 방향은 가로일까 세로일까
책의 두께를 지나면 높이에 다다른다 도입부를 벗어난 전개부는 현재형이라
과거형을 뒤적거리다 미래에 도착하는 일, 흔한 일이다 우수수 출렁거리는 낱
말들은 행과 연 구분 없이 엮은 한 두름의 문장, 시제는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수심 수위 수압 중 어떤 게 과거 현재 미래인지 알 수 없다
책의 두께는 수심과 같아 깊이에 따라 어종이 달라지는 법, 오래전 퇴화된 고
전의 어종과 진화를 거듭한 신간의 신어종이 도처를 갈마드는데
서표는 부표다 죽방렴 안이 빈 것은 여백의 美라 오히려 갇힌 것은 바깥의 어
족(語族), 아가미로 집필된 슬픔을 또박또박 읽는 부레의 복화술을 받아쓰느라
책의 가두리는 모서리가 없다
전생은 나무, 후생은 책인 종이에 글자들이 수북하다 번지수를 잘 못 찾은 주소
지로 송고된 문장처럼 어종을 알 수 없는 글꼴로 탈고될 무렵, 손안의 만선 한 척
귀항하는 지금은 독서의 시간
ㅡ웹진 《시산맥》(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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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는 많은 어류(語類)들이 유영하는 항구와 같다는 전제로 시를 펼칩니다
낱낱의 물고기는 활자 상태로 보면 온통 은유일 뿐이네요
그렇다면 책을 읽는 방향에 따라 좌우로 갈릴 수 있고, 보수와 진보로도 읽힐 겁니다
과거형인지 현재형인지 아니면 미래형인지 항구의 수심 수위 수압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깥의 어족(語族)이어서 아가미로 집필된 슬픔을 또박또박 읽지 못하므로
한 권의 책이라는 가두리 안에서 빙빙 돌아다녀도 모서리는 없습니다
서표를 꽂아두고 책을 덮으면 독자는 다른 어족(語族)이 되어 어항 밖을 파닥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