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린은 라미엘이 겉모습과는 다르게, 어두운 계획을 실행해온 것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상시에는 그저 귀찮음으로만 가득해 보이던 그가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계획을 준비해 왔었다니... '역시 사람의 속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솔직한 감정을 말했다. "조금... 무섭네." "무엇을 말이지?" 모르겠다는 그의 나지막한 말투와는 달리, 작게나마 설래설래 흔드는 얼굴이 여전히 무표정한 것은 평소와는 같은 그의 이미지였지만, 이번의 그녀에게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세상을 발칵 뒤집는 계획을 세웠다는 게... 라미엘, 당신답지 않아 보여서." "나 답다는게 어떻다는 거냐?" "음, 그러니까... '에라이 다 귀찮으니까 될 대로 되라...' 같은 느낌?" 대놓고 본인 면전에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다운 무반응만을 보이는 라미엘이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은 기분에 속이 '뻥'하고 시원하게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에야 라미엘 특유의 냉랭한 분위기에 밀려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애초에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엥? 뭔 말이야?" "말 그대로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을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럼 언제부터였는데?" "너와 이야기하던 도중이다." "..."
"경우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수단 중의 하나라는 거다." 그 말은 즉슨, 그가 처음에 성검을 강탈한 것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랬다는 건데... 어이가 없어진 카린은 '뭐, 이딴 바보가 있나?' 싶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를 바라보며 이 남자가 겉으로는 예쁘장하지만, 사실 머릿속은 멍청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계획도 세우지 않았으면서, 일단 싸질러 놓고 보자 그런 거야?" "그저, 귀찮다." "...의외로 생각 없이 사네?" "관심 없다." "인생의 목표라던가, 꿈이라던가... 그런 것도 없는 거야?" "나는 그저 허상이다. 꿈이다. 인생이라는 말은 내게 없다." "...그런 식의 말은 좀 그만... 아니 됐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카린은 이 남자의 막장 인생론에 기가 막혀오기만 하였다. 거기에다가 자기 자신을 꿈이나 허상으로 빗대기까지 하니... 덕분에 그가 이상하기만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뭐, 처음 만났을 때도 뭔가, 나사가 반쯤 풀린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만약 전의 사건 때, 그의 도움을 받아보지 못했더라면... 그와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라미엘을 반쯤은 미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
'천사니... 꿈이니... 이 사람은 현실을 기피하기만 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지나가듯 한 말로 ‘[인연]과 [추억]이 천사라고 했다, 아니라고 했다,' 하며 왔다갔다했던 것 같은데... 망상도 그 정도면 중증이다 못해 병이다. 카린은 이 남자의 암담한 장래가 상상되자, 안타까움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현실기피주의자' 라미엘을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팡팡 두들기는 식으로 그녀 나름의 격려를 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라미엘, 당신이 성검 탈취범이라는 건, 나랑 공작 그리고 재상만 알고 있으니깐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 "일자리라면 내가 알아봐줄게... 아니, 돈이 많으니깐 필요 없으려나? 재상하고 동갑쯤 보이는데, 그 나이를 먹을 때까지 꿈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건 그쯤에서 관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
카린은 자신이 그보다 어른인 것인 냥, 그의 삐뚤어진 인생을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는 방을 나가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라미엘이 멋대로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응? 왜?" 갑자기 어깨를 잡혔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은 카린은 그를 돌아보고서 태평하게 물었다. 항상 타인과 거리를 두던 라미엘이 관심을 보이자, 카린은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달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걸 물으려고 날 찾아온 거냐?" "아, 맞다!" "..." 카린은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고 귀엽게 혀를 내밀며,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의 깜찍한 리액션에도 디자엘 재상과는 다르게 작은 미소하나 보이지 않는 라미엘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도리어 전의 우울한 감정이 떠오른 카린의 얼굴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따라하듯 웃음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카린은 양손의 다섯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며 잠시동안 우물쭈물하다가, 결심을 했는지 눈동자만을 올려 소극적으로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그런 건 디자엘에게 가서 물어라. 나는 관심 없다." "...우웅" "...알았다. 말해라." 엎드려 절받기인 꼴이지만, 억지로나마 라미엘에게 수락을 받아낸 카린은 아침 회의 때부터 속에서 끙끙 앓고 있던 화제를 꺼냈다. "그, 전쟁에 관한 얘기인데..." "...그런 쪽은 그 리프라는 여성이나 디자엘이 잘 알 터인데?" "정치나 그런 쪽이 아니라... 순수하게 전쟁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 그녀는 그 말을 하자마자 목이 금방이라도 막혀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을 하기 전에 메여오는 목을 풀고자 근처 주전자를 들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도중, 카린은 눈을 돌려 라미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여전히 주변 어떤 일에 별 관심이 없는지, 고개 하나 안 움직이고 전에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 쪽만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카린에게는 그가 믿을만한 사람처럼 닿아왔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민거리를 꺼낼 만큼이나 믿을만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안... 이것을 언어을 사용해 그대로 표현한다는 쏟아낸다는 이 불가능한 일은, 설사 이 불안을 품고 있는 그녀 본인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남자. 라미엘...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라면은...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안을 읽어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전쟁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폭력이란 수단으로 다루는 거다." "...갈등 같은 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말하자면... 사람들 간의 이상(理惻)이 부딪히는 거다." "...이상(理惻)? 하지만,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전쟁이란 건 무리의 지도자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일으키는 게 대다수잖아?" "지도자가 전쟁의 전부는 아니다. 전쟁이 그러한 욕심으로 일어난다 해도 그 전쟁 속에는 각각의 이들이 품고 있는 이상이 어느 곳에나 심어져 있는 거다." 카린은 그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상이니, 수단이니...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사람이 죽는다. 평생 땅을 일구고, 흙을 파먹으며 살던 이들이 군대에 끌려가, 쥐어본 적도 없던 창칼을 들고 밀려나갔다가 죽어 돌아온다. 아무리 원대한 목적이 있다, 해도 죽는 건 결국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상' 같은 추상적인 게 사람을 먹여 살려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이 나라는 뭐냐?" 카린은 그 말에 떠오르는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여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이 드레마라는 이 나라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수많은 전쟁을 치러가면서까지 얻어난 나라라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겨우 삼 년 전에 돌아가셨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희미해 그의 얼굴조차 초상화의 그림을 보며 상상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선하고, 멋지고, 그리고...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쭈욱 믿어왔다. 그런 이 세상 최고로 좋은 사람인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어 희생시키면서까지... 피를 바치면서까지 이 나라를 세운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상'이라고 불리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 여왕이라는 지위는 일단 젖혀두고, 아무리 전쟁을 원치 않는 그녀라 해도 아버지가 세운 나라의 이상마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왕이 되고 싶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몬 악인이라고 그녀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라미엘이 말하는 그 추상적인 '이상' 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그녀 자신의 아버지를 단순한 악인으로 만들어버린 꼴이 되어버린다. "설사 지도자가 어떤 흑심을 품는다 해도, 그를 따르는 이들은 각자의 이상이 있기에 전쟁에 참전하고, 전쟁을 '이용'한다." "..." "사람이 죽는다. 그건 끔찍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이루고 싶어하는 거다. 너의 주변에 있는 이들처럼 말이다." 카린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친우를 사지로 내모는 것을 원하는 이가 있을까?'
그녀에게 전쟁을 요구하는 영주들 역시, 사실은 전쟁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피를 흘린다는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값을 저울질 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에도 그들이 전쟁을 왜 원하는 걸까? '이상' 그들에게 있어서 카린은... 드레마의 여왕은 그들의 이상이다. 그들에게는 친자식이나 마찬가지이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여왕이... 작은 이상이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자라 큰 거목으로, 큰 나라로 자라나기를 모두가 원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모욕하고, 해하려 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카린은 목에서 넘어오질 않는 무언가가 뱃속을 휘젓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음식을 먹다 속에서 얹힌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영주들이 어떠한 말을 하던, 어떠한 이상이던 그것에 상관없이 그녀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다. 진짜 전쟁터가 아닌, 그녀가 상상한 전쟁터이지만... 그렇기에 현실보다 더욱 참혹하다. 비명 속에서... 불속에서 타죽는 사람들... 도망치다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 살고자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이들 가운데에 먼지투성이인 얼굴로 울고 있는 한 어린 아이... 상상이지만, 동시에 실제로 본 기억이다. 이름 모를 타지에서 사람이 타죽고, 칼에 맞아 죽는 광경은 이미 보았다. 그렇지만, 그때의 자신은 보지 않았다. 본 것이라고는 오직 적병들, 자신과 가까운 주변인, 그리고 자기 자신.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바라던 이들을 그때, 자신은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늦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나왔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은 그런 참혹한 일들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다. 자신의 손으로는 더더욱이...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들이 울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다. "순전히 전쟁이 무서운거냐?" "...응." 카린은 하늘에서 물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 그러자 핏빛 구름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그녀를 비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터에 혼자 뎅그러니 남은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자신 역시 없는 거냐." "...응. 나는 여왕이니까." "그렇다면..." 그 말과 함께 하늘의 빛 사이로 라미엘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신처럼 그는 깃털이 가라앉듯 찬찬히 내려왔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질 않았다. 후광도 없었고, 날개도 없었다.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드는 것도 아니었고, 성스럽게 불타는 검이나 악마를 쫓는 방패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신성함은 조금도 보이질 않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먼 하늘에 있는 그가 매우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코앞에 살포시 내려와 여자처럼 고운 손을 뻗어왔다. 가까이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쓱쓱' 애를 다르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를 달래는 상투적인 행위지만, 카린은 그 손마저 거부하지 못할 만큼 도움의 손길을 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어 주는 이가 없음이 너무나 서글펐기에 그의 사교성 없는 손길조차 너무나 기뻤다. 그의 손을 잡고서 어느새 웃고 있는 소녀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라미엘은 그녀가 가장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내가 도와주마."... 카린에게는 지금 이 순간만큼 속이 시원했던 적이 없었다. 무거운 짐을 떨쳐낸 이 기분이라면 성 밖으로 몸을 던져도 저 푸른 하늘 위로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들뜬 기분을 어린애 같은 폴짝폴짝 경쾌한 발걸음으로 여실히 드러낸 채로,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경비병들에게 크게 명령했다. "수감자 이제 풀어줘도 돼! 성 출입증 발급해주고, 방도 하나 잡아줘! 공작이 뭐라 태클 걸면 나한테 오라고 해!" "예? 아, 옛!" 병사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 계단을 달음박질로 뛰쳐 내려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허겁지겁 경례를 표하며 큰 소리로 대답하였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반응은 그녀의 비명과 함께 '우당탕탕' 계단을 구르는 소리였다. "꺄악! 아야야... 아퍼라, 너무 기분 냈다." 날 것 같은 기분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높은 계단 위에서 몸을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물찬 제비처럼 아주 잠깐 허공을 나는 기분을 만끽했다가, 물찬 물통처럼 추락해 때굴때굴 계단을 구른 그녀는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을 멍청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병사들에게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창피하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예.' 병사들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빨갛게 익어가는 여왕의 얼굴에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입단속 할 것을 약속했다. 카린은 그들의 입을 막고 나서야,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팔십 먹은 노친네처럼 허리를 구부러뜨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우... 허리야... 아파죽겠는데 뭔 계단은 이렇게 끝이 없어..." 카린은 이번 따라 유난히 길어 보이는 원형 계단을 내려가며 투덜거렸다. 조급한 마음에 뛰쳐 올라갈 때는 성 꼭대기라는 게 이렇게 높은 곳인 줄 몰랐는데, 막상 걸어 내려가려니 도저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더군다나 계단에 달려있는 창(窓)으로 반대편에 있을 태양의 빛이 들어올 리 없으니, 어두컴컴한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누군가 자신을 업어주고서 계단을 내려가 주는 것도 아니니, 빙글빙글 반복되는 계단에 속이 울렁거려 옴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려가고, 내려가고... 한참을 내려가며 점차 지쳐가던 중, 계단 밑에서 뭔가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들이 그녀의 귀에 들렸다. "꺄하하하..." "끼햐햐햐..."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계단을 혼자 내려가는 것도 무서운데, 밑에서부터 마녀가 가마솥을 저으며 웃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 하나에 멈춰진 발걸음이 도저히 떼어지질 않았다. 어떡할까 얼어붙어 가는 머리로 열심히 굴린 카린은 옆으로 보이는 복도 쪽으로 가던 방향을 돌렸다. 허나, 그쪽에는 오리털이 가득 쌓인 수레들이 계단과 복도를 잇는 작은 통로를 가로막고 세워져 있었다. 아마, 올겨울에 미리미리 대비하고자 가져다 놓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마차들이 세워져서 통로를 막은 통에 도저히 넘어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수레 위를 넘어갈까 발을 올려봤지만, 수레바퀴 끝이 계단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것이, 서투르게 넘으려다가는 아마, 수레를 타고 계단의 맨 아래층까지 질주하게 될 것이리라. 결국. 처음처럼 계단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카린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없을지 모를 신들과 천사들에게 자신을 지켜줄 것을 기도했다. "으아... 신님, 천사님 제발 저 좀 지켜주세요." "..." 그 기도에 대답해주는 신이나 천사가 있을 리가 없을 터, 당연히 어두컴컴한 계단 속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끼야야아앙!" 고양이가 죽을 때 지르는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리자 억지로 추스르던 카린의 마음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마녀가 검은 고양이의 목을 비틀고, 불에 구워먹는 상상이 떠오른 카린은 막 가을에 접어든 날씨 속에 벌써부터 오한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내려간다' 뿐... '귀신은 없어... 귀신은 없어... 귀신은 없어...' 그 말만을 속으로 되뇌며 그녀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벌벌 떨며 내려갔다. 그 잠깐을 머뭇거린 사이에 해는 더 높은 하늘로 혼자 도망갔는지 창문에 들어오던 밝은 빛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전보다 어두컴컴해져, 통로 안은 마치 한밤중처럼 느껴졌다. '아빠, 아빠, 엄마, 엄마, 아빠, 아빠, 엄마, 엄마...'
카린은 하늘에 계실 두 분을 공평하게 두 번씩 연달아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던 중, 자신의 발 사이로 검고 작은 무언가가 빠르게 획 지나가자 깜짝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악!" "니야앙!" 그 작은 무언가도 놀랐는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카린은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었지만, 그것이 고양이임을 뒤늦게 알아보고서야, 겨우 고양이 하나 때문에 놀라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카린은 자신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그것이 단순히 검은 고양이일 뿐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그것을 조심조심 내려다보았다. "겨우 이것 가지고 놀라다니..." 막상 직접 보니 조그맣기만 한 것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카린은 십년감수 했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에게 매달리다시피하는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 "꺄악!" 손끝에 닿는 고양이의 털은... 축축하고 찐득했다. 마치, 피가 묻은 것처럼... 그녀는 들어 올리던 고양이를 집어던져 손에서 떼어놓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 고양이는 그녀가 자신을 집어던진 것에 놀랐는지, 떨어진 자리에 멀뚱히 서서 '냥, 냥' 거리며 우는 것이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직 그녀가 마음에 드는지 발밑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뛰어올라 그녀의 옷 중간쯤을 타고서 매달렸다. 그리고는 등산하듯 발톱으로 붙잡고 기어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턱 하니 올라앉았다. "냐앙~" "으...으..." 옷에 벌레가 붙은 것처럼, 카린은 목이 뽑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고개를 최대한 젖혀 고양이와 거리를 두려 애썼다. 그럼에도 그 검은 고양이는 수염을 그녀의 볼에 대고 쓱쓱 비벼오며 친근감을 표시하기까지 하였다. "으으...에, 설마 프롬?" 왠지, 그 고양이의 행동이나 울음소리가 낯익다고 느껴진 그녀는 작게 물었다. 그런다고 고양이가 사람 말로 '그래, 나다.' 라도 대답해줄 리는 없겠지만, 그 검은 고양이는 한 번 더 '냥' 하고 우는 것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말도 안돼... 프롬은 분명 흰 고양이일 텐데..." 카린의 전의 그 귀여운 고양이... 솜처럼 보송보송하고 하얀... 몸을 말고 있으면 마치 공처럼 굴리고 싶어지는 긴 털을 가진 새끼고양이가 이렇게 변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흰 털이 검게 자란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어깨 위의 프롬을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손에 닿는 느낌은 여전히 축축하고 끈적거린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끼는 고양이 자체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계단 안이 어둡다고는 하지만, 피의 붉은색과 검은 고양이의 검은 색을 구분 못 할 정도도 아니었다. 카린은 프롬의 몸에 코를 가까이 대고는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코에 닿는 축축한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낸 그녀는, 프롬이 발톱이 선 앞발로 휘두르는 거친 애교라도, 현재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 속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 잉크 냄새지..." 카린은 프롬이 검은 잉크통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털이 엉망으로 뭉친 것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설마설마' 하며 자신의 손바닥의 내려다보니, 어두운 통로 내에서 살색 손바닥이 잉크로 시커멓게 변한 것이 보이자 그녀는 그 고양이와 접촉한 자신의 꼴이 어떨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할아버지가 알면 난 죽었다." 비싼 옷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범벅되었고, 여왕으로서 위엄을 갖춰야 할 얼굴은 팩이라도 한 것처럼 지저분하게 변했을 터이니, 베르제바브 대공이 이를 알게 된다면 성이 무너져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죽을 때까지 두들겨패려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거 들켰다간... 내 용돈으로 옷값을 물어내라 할지도..." 할아버지라면 분명 용돈에서 옷값을 제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은... 아니 이 드레스는 진짜 진짜 비싼거라... 한동안은 동전 하나 만져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리라... "절대! 들키면 안 돼! 아무에게도..." 왕성 안에 퍼지는 소문은 화살보다 빠르고, 바람보다 더욱 깊이 스며든다. 남자들에게 들킨다면 어떻게든 입단속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하녀들이나 시녀들에게 들킨다면... 입방정 떠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들의 입을 타고 베르제바브 대공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렇게 됬다가는 아마... 지옥문이 코앞에 당도하리라...그녀는 속으로 '증거인멸, 완전범죄'를 외치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프롬을 만나기 전과는 다른 이유로 말이다. "끼히히히~" "크흐흐흐~" 어두운 계단 밑에서 그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카린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귀신은 절대 아닐 거야...'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계단 아래쪽을 향해 억지로 발을 옮겼다. 그렇지만, 그 계단 밑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자, 그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고양이 프롬은 무언가를 본 것처럼 털을 곧추세우며 경계에 들어섰다. '개나 고양이는 귀신을 볼 수 있다.'라는 미신이 떠오른 그녀는 아무에게나 싹싹하게 굴던 프롬이 그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무서웠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카린은 그 말만을 귀신들린 것처럼 중얼거리며 계단 밑에서 작은 도깨비처럼 폴짝 거리며 올라오는 두 인영을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쿠후후후~" '크후후후~" 점점 가까워지는 작은 두 인영... 카린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왔지만, 발은 바닥에 붙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를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이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몇 발짝 앞에까지 다가온 그들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다... 온다... 왔다!' "꺄아아악!" "끼아아악!" "끄아아악!"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렇다 치고, 저 둘은 왜 놀라는데? "어, 카린 언니다!" "어, 카린 누나다!" 카린은 가까이에 다가온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두 아이가 [인연],[추억]임을 알아보고는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의 가까운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뭐야... 너희들이었어...? 사람 놀라게 하지 마."
갈색 단발머리에 노란 헤어밴드를 하고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인연], 똑같은 노란색의 긴 팔 후드 티와 노란 반바지를 입은 남자 아이가 [추억]. 두 아이의 성별은 달랐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서로를 쌍둥이처럼 따라 했다. 그리고 말하는 것도 하는 것 마냥 비슷비슷했다. "누나, 시꺼메! 시꺼메!" "언니, 시꺼메! 시꺼메!" "...프롬에게 잉크 끼얹은 범인이 너희였어?" 카린은 오도방정을 떠는 두 아이가 각각 품에 안고 있는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잉크통과 본인 키만한 붓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묻자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양 당당히 대답했다. "응, 검게 칠하려고." "고양이랑 같이 놀려고." "...괴롭히는 게 아니고?" 여전히 등을 구부리고 털을 곧추세우며 경계하고있는 고양이 프롬을 가리키며 묻자, 아이들은 하던 이야기조차 접어두고 프롬에게 획 눈을 돌렸다.
"어, 찾았다!" "아, 찾았다!" 두 아이들은 카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프롬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프롬은 금세 겁을 먹고는 카린의 몸을 타고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에까지 대피했다. 그렇지만, 두 아이는 프롬을 앞뒤로, 아니 카린을 앞뒤로 포위하고서, 살쾡이처럼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프롬을 잡을 기회를 노리는 데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야, 야, 얘들아... 위험하잖아..." 카린은 바로 앞에서 찰랑거리며 금세 쏟아질 것 같은 잉크병과 자신의 몸을 툭툭 치며 지나가는 커다란 붓을 불안하게 돌아보았지만, 아이들은 고양이를 잡는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듣는 척도 하질 않았다. "끼야야양!" "키히히히" "크흐흐흐" 프롬은 산꼭대기에 포위된 산짐승처럼 울어대며 빠져나갈 기회만을 노렸지만, 두 아이는 고양이가 반응을 보일 때마다 천진난만한... 아니 작은 악마나 악동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잠깐, 잠깐, 잠깐! 카린은 잠깐이라도 이 아이들을 진정시키려고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아니 오히려 과민반응을 보인 프롬이 결국 그녀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다. "잡아라!" "잡혀라!" 두 아이의 눈은 고양이의 형체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향하였고, 두 아이의 발은 고양이의 뒤를 따라 쫓았다. 그리고... "꺅!" 오늘만 몇 번째 비명을 지르는 걸까? 두 아이와 몸을 부딪친 카린은 뒤로 넘어졌고, 두 아이도 그녀의 몸에 걸려 넘어졌다. 당연히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잉크통이 '철퍽'하고 그녀의 전신에 쏟아졌다. "아우우..." 카린은 눈꺼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잉크를 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간신히 눈을 떴다. 그녀의 몸 위로 넘어진 두 아이도 무사하지 못했는지 아이들의 보송보송 흰 피부와 예쁜 옷도 전부 검은 잉크 때문에 지저분하게 변해있었다.그녀는 고양이 프롬이 걱정되어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보니 계단 위로, 오리털이 가득 쌓인 수레를 넘어가는 검은 고양이의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고양이가 치고 지나간 수레가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덜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안한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시소처럼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설마 설마...' 오늘 아무리 재수가 없다 해도 지금 상상하고 있는 그런 일까지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며 계단 위쪽에서 불길하게 구는 수레를 망연자실이 바라보았다. 계단 끝에 바퀴가 간신히 걸쳐져 있던 수레는 혼자 흔들흔들 거리던 요동이 점차 심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걱정에 보답하고자 계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꺄악! 야, 어서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고!" 몰을 깔고 있는 두 아이의 몸을 흔들며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는 그녀였지만, 눈이 팽글팽글 소용돌이치는 아이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 혼자 일어나고자 해도, 안 그래도 아픈 허리에 아이 둘에게 깔린 무게도 만만치 않은지라 그녀는 연신 계단을 울리며 '덜컹덜컹' 소리를 내는 수레를 올려다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 계단을 구르며 내려오던 수레가 그녀의 근방에까지 다다르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꺄악!" 오늘 아침에만 한 열 번은 넘게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가운데, 그녀는 누운 채로 오들오들 떨며 앞으로 벌어질 참극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다행히 신께서 그녀를 보우하고 계시는지, 수레는 무언가에 걸려 그녀의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 있었다. "...휴우,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작은 숨결이 멈췄던 수레를 건드렸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몸 위로 아주 천천히 기울여져는 수레가 그녀의 붉은 두 눈동자에 크게 비쳤다. "하아... 정말이지... 오늘은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네..." 조금씩 기울어지는 마차에서 쏟아져 덮쳐오는 오리털들을 보며 카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성 안에서 부지런히 일하던 하녀, 하인들의 시선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 방향에 모여 있었다. 손안의 짐을 떨어뜨리는 자도 있었고, 머리에 진 물통을 엎지르거나, 한 방향만을 보다 마주오는 상대편을 피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부딪히는 자들까지도 있었지만, 그들의 멍청하게 풀린 얼굴과 성 안에서 말도 안 되는 복장을 한 삼인조를 본다면 그 상황도 이해가 될 것이다. "으으... 창피해..." "오리~ 꽥꽥~" "오리~ 꽥꽥~" [인연]과 [추억] 두 아이는 뭐가 즐거운지 아주 흥이 돋아서 폴짝폴짝 뛰며 걷고 있었지만, 카린만큼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검은 잉크로 끈적끈적한 전신에 오리털이 쏟아져 내린 덕에 그 세 사람의 현 모습은 광대가 분장한 커다란 오리나 다름없었다. 카린은 자기 몸에서 오리털 하나를 한 움큼 뽑아... 아니, 쥐어 대충 던지고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는 성안 사람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목욕탕이 어디야?" "...예? 아, 예." 설마, 그 걸어 다니는 오리가 여왕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하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웃음을 억지로 참으려 하는 게 보였다. 카린은 그 하인이 웃기 일발 직전까지 가자, 차라리 대놓고 웃는 쪽이 덜 창피하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풋, 그... 그... 저기 복도 끝에서 푸훗... 두 번째 문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 풋... 됩니다." "..."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기에 그녀는 하인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불쾌한 기분을 품고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거기에, 안 그래도 몸이 끈적거리고, 오리털 때문에 가렵고, 속옷까지 잉크로 젖어 기분 나빠 죽겠는데, 그녀의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두 아이는 분위기 파악도 못 했는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카린 누나! 카린 누나! 놀자! 놀자!" "카린 언니! 카린 언니! 놀자! 놀자!" "둘 다... 제발 그만 좀 해..." 안 그래도 사람들 시선이 몰릴 때마다 창피해 죽겠는데 두 아이는 아주 크게 소리를 질러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까지 하니 그녀는 미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게다가 하녀들이 서로 수군수군 거리는 것이 보이는 게, 얼마 못 가 베르제바브 대공이 흉기를 들고 달려올 거란 생각마저 들자 그녀의 속은 더욱 불편해져 왔다. '하다못해 이런 꼴을 재상이 보면 안 되는데...' 카린은 만약 디자엘 재상에게 이런 꼴을 보일 바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만다는 악독한 결심을 하려는 참에, 정면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찾는 것이 보였다. "여왕님! 여왕님! 어디에 계십니까?" 먼발치서 보이는 남자애. 헐렁거리는 옷에 손을 삼키고도 넘치는 긴 소매, 그녀보다 한 살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미칠 듯한 동안을 자랑하는 '미소년'. 재상의 비서. 슈 였다. 슈는 뭔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그 엉망진창인 그녀를 보지 못하고 '여왕님'만을 앵무새처럼 외치며 지나쳤다. 그냥 내버려뒀다간 온 성이 시끄럽도록 뛰어다닐게 뻔히 보이기에 그녀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아 강제로 세웠다. "케헥!" 달리다가 목깃에 목이 걸려 숨이 막히자, 슈는 기침을 하며 멈춰섰다. 충분히 기분이 더러운 그녀는 그의 어깨를 어깨로 '툭' 치고는 용건을 물었다. "뭔데 호들갑이야?" 그 말에 슈는 울듯 말 듯한 얼굴로 무언가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엉망진창인 그녀의 모습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그의 모습에 카린은 뭔가 일이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허겁지겁 그 종이를 펼쳐보았다. 《사직서》 그 세 글자가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누군가 쓰다 말았는지, 다시 쓰고자 구겨서 버린 것으로 보이는 종이였지만, 재상의 비서인 슈가 다급히 쥐어 들고 올 정도라면 이 '사직서'를 쓴 인물이 누구인지 상상하고도 남았다. "재상님이... 재상님이... 재상을 그만두고 떠나신데요!"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의미 역시 없습니다.
첫댓글 - 게시글 규정을 깜빡하고 어긴 것에 대해 모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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