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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2장
북제성주는 비무대회 겸 창단식이 끝난 그날부터 대사형 관일엽과 함께 무림맹 총단에서 살다시피 했다.
타우와 초하이, 경설형 역시 성주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호위를 했다.
취임하기도 전에 각파에서 비밀리에 차출된 호위병이 엄중한 호위를 펼쳤지만 타우와 초하이 등은 한발 더 가까운 거리에서 성주의 신변을 보호했다.
상전벽이란 말이 실감났다.
맹주를 배출한 문파는 모든 면에서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맹의 업무를 맡는 크고 작은 자리에서부터, 무림의 각종 이권을 조정하는 역할까지....
그래서 모든 문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맹주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것이다.
무림맹 총단에서 며칠을 보낸 후 잠시 몸을 빼낸 성주가 북제성 본단으로 왔다. 성주는 몇 명의 사람들과 대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본 곽자서와 주완 사저가 뛰듯이 달려나가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원 각지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한 명의 초로인과 세 명의 중년인, 그리고 세 명의 젊은이들이었다.
쉴 틈도 없이 성주는 곧바로 술자리를 마련했다. 며칠 동안 거의 밤은 새운 듯 성주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엇다. 성주를 본 진우청은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성주의 눈썹이 빠지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큰 사백과 함께 일찍 사정을 알고 역천의 무공을 쓰지 않고 억눌렀기에 증세가 덜했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주완 사저 역시 그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과 함께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초조하고 무거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인사들 나누게.”
성주는 새로 합류한 사람들을 진우청에게 소개시켰다. 초로인은 대사형 관일엽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짐작대로 대사형의 바로 아래인 이숙의 서열이었다.
진우청에게는 둘째 사형이 되었는데 이름은 포종명이고, 타우의 스승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타우처럼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다. 타우처럼 권장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다른 세 명의 중년인은 각각 이십육숙과 이십칠숙, 이십팔숙의 위치에 있는 사형들이었다.
그리고 세 청년은 그들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을 보자 을지소소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모두 을지소소나 진우청보다 어려 보였다.
사숙들과 사형들 속에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았던 그녀는 이젠 막내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기색이었다.
특히 세 명 중 한 명은 여인, 아니, 소녀에 더 가까웠다. 을지소소는 안을 듯 그녀를 반겼다.
소개가 끝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성주와 대사형으로부터 전 성주의 죽음과 그들의 운명에 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술을 한 잔 마시 후 자연스럽게 그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 무림맹의 정보망을 동원하여 북제성 문도들에 대한 소집령을 내렸네.”
성주는 무거운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 모두 모이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진우청이 질문을 던졌다.
“ 별일이 없다면 두 달 안에 다 모일 걸세.”
성주가 답했다.
“ 그럼 흑궁 쪽은?”
진우청은 재차 질문했다.
“ 그들은 정확히 알 수 없네. 역현강, 그 아이와 주형반이 얼마나 빨리 설득하고 데리고 오느냐에 달려있네.”
성주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흑궁 쪽의 인물들은 그들의 내력을 계속 극성으로 운기하는 바람에 그 증세가 훨씬 심각했다.
그들이 오히려 제일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일이 틀어진다면 몇 달은 더 걸릴 수도 있고,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 북제성은 두 쪽이 난 채 서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건 무엇보다도 슬픈이었다.
“ 그럼 전 지금 떠나겠습니다. 저도 두 달이면 창룡금시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진우청은 당장이라도 신형을 일으킬 듯 말했다.
“ 서둘러서 득이 될 건 없네. 어차피 자네가 갔다 온다고 하여도 흑궁의 인물들을 기다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테니,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내일 떠나도록 하게.
오늘 저녁은 새로 온 식구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하세. 무림맹의 일이 너무 벅차서 머리가 아프구먼.”
성주의 지시와 함께 그날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새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조촐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 이걸 가지고 가도록 해.”
다음날, 길을 떠나는 진우청에게 주완 사저가 작은 도자기 병을 내밀었다
“ 이건 사제도 알다시피 홍와향이야. 우리 북제성 사람들 중 몇 명은 이 향에 대해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수백 리 밖에서도 사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뚜껑을 일각만 열어두었다가 닫아. 그리고 몸에 한 방울만 뿌리고......”
주완 사저는 걱정이 태산 같다는 눈으로 자기 병을 진우청의 손에 쥐어주었다.
“ 이건 흑궁의 인물들도 감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우청은 백화원에서 귀면랑이 이 향기로 자신을 추적하려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 그렇긴 하지만 사정을 안다면 모두 사제를 도울 거야.”
사저의 말에 진우청은 손에 든 도자기 병 뚜껑을 슬쩍 열어 코를 킁킁거렸지만 자신의 코엔 아무런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 수년 동안 수련하지 않으면 힘들어. 나도 최근에야 가능해졌어. 백화원에서 귀면랑은 내가 그걸 못 익힌 줄 알고 방심했다가.....”
주완은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일찍 서로의 사정을 알았다면 그때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야!’
잠시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공순후상과 함께 유난히 권력욕이 강했던 그는 모든 걸 알았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이 사라졌으니 다른 사람들은 마음을 돌리고 예전처럼 한식구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휴-”
주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준비 됐어요, 사숙!”
을지소소가 바쁜 기색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남패천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날렵한 흑색 경장을 차려입고 한 마리 표범처럼 변해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진우청과 동행하게 되었다. 꼭 같이 가겠다는 그녀의 의견도 있었지만, 흑풍과 백왕, 설아를 부리는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초하이와 타우는 성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빠졌고, 대신 경설형과 어제 이곳으로 온 세명의 사질이 동참했다. 그들은 긴 여행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적극 나섰다.
그들의 미래가 고스란히 이번 일에 달려 있었기에 혈기가 들끓는 그들로서는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자시를 조금 넘긴 시각, 진우청을 포함한 사남이녀는 은밀히 북제성을 벗어났다.
그들의 뒤로 세 마리의 짐승이 소리없이 따르고 있었다.
벌컥!
벌컥!
목젖이 움직이는 소리가 목탁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리며 한 병이 술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탁자 위에는 이미 여러 개의 빈 병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구 있었다
탁!
또 한 병의 술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그러고도 모자라는지 팽정기는 새로 날라져 온 술병을 잡았다.
“ 이젠 그만 마시게.”
옆에 있던 황가정이 마침내 팽정기가 들고 있는 술병을 잡아챘다.
“ 취하지 않았네!”
팽정기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술병을 도로 빼앗았다. 스스로의 말대로 팽정기는 여러 병의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 속에 가득 찬 응어리가 피독주처럼 술기운을 밀어내는 모양이었다.
“ 빌어먹을... 무슨 술맛이 이래, 야, 점소이!”
이번에는 반쯤만 비우고 탁자에 소리 나게 술병을 내려놓은 팽정기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 왜 그러시는지요. 공자님!”
점소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 술맛이 왜 이래? 맛이 간 걸 내놓은 거지?”
팽정기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점소이를 쳐다보았다.
“ 그럴 리가 있습니까. 공자님. 어느 안전이라도 제가 감히...”
점소이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으로 소리쳤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팽정기와 황가정에게 점소이는 이곳 객점의 최고급 술을 대령했다. 그런데 맛이 없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쫘악-
점소이가 뺨에서 격타음이 터지며 뒤로 나자빠졌다.
“ 가서 주인을 불러와!”
팽정기는 일어서는 점소이를 재차 가격할 듯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 왜 이러나, 자네답지 않게!”
황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팽정기를 만류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음식을 다 들지도 않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고, 세도가의 사람들로 짐작되는 중년인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은 팽정기의 신분을 알고 있기에 아직 나서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황가정은 그들에게 얼른 고개를 숙인 후 팽저익의 팔을 끌었다.
“ 그만 나가지. 이곳은 술맛이 변했으니 딴 곳에 가서 한잔 더 해.”
“ 무슨 소리! 비싼 돈 내고 썩은 술만 마시고 갈 수야 없지. 점소이. 어서 주인 데리고 와!”
팽정기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주인은 물론이고 주인을 데리러 간 점소이마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 이것들이 나를 개똥 보듯 한단 말이지?”
팽정기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 이러지 말게. 이러다가 자네 부친께서 아시면 큰일이지 않나?”
“ 부친? 큭큭큭! 와... 하하하!”
부친이란 말을 들은 팽정기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토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난 팽정기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시 한 병의 술을 비웠다.
웃음과 함께 그의 얼굴에는 그동안 억눌렀던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 있었다.
“ 내 부친이 어쩐단 말인가? 비무대회 후 여태까지 한마디도 안 하신 대범하기 짝이 없으시 내 부친께서 이런 사소한 일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은가?
큭큭큭! 그분은 오늘 내가 여기서 술독에 처박혀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대범한 모습을 보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와하하!”
팽정기가 타락하듯 술독에 빠진 이유는 그것이었다. 비무대회 며칠 전에 을지소소에게 따귀를 맞고 그 자리에서 그 수모를 만회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비무대에 올라서도 단번에 용호곤에 나가떨어지는 더 심한 수모를 당했다.
그 상대들이 북제성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고도 목숨을 구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북제성이나 팽가나 무림맹의 같은 한 축이니 동등한 위치라 생각하는 부친 팽만유는 팽정기를 무관심 일변도로 대했다.
무림맹 창단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팽정기는 그걸 예상했지만 부친의 태도는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그동안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말도 건네지 않았으며, 가문의 모든 대소사에서 팽정기를 제외시켜 버렸다.
소가주의 신분에서 이제는 가문의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인 대접을 받게 된 팽정기는 자연 술독에 빠지게 된 것이다.
팽정기의 이성이 점점 허물어지는 것을 본 황가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황가정은 술 몇 병을 더 시켰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점소이가 바람처럼 달려나왔다.
“ 그런 괴로운 심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렇다면 더 마시게. 그리고 깨끗이 털어버리게 한 번 패배는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던가?”
“ 한 번?”
이젠 눈까지 풀리기 시작한 팽정기가 입술을 비틀었다.
“ 내 부친 말씀은 세 번이라던데, 객점에서 계집에게 한 번, 그리고 그 옆에 선 놈에게 한 번, 비무대 위에서 또 한 번...... 그래서 도합 세 번! 세 번을 한꺼번에 패했다고 하시더군.”
팽정기는 킬킬거리며 술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마침내 팽정기가 탁자에 코를 박자 황가정은 술값을 계산하고 팽정기를 들쳐 업었다.
“ 누렸던 호사가 클수록 추락에서 오는 상실감도 큰 법이지. 후후!”
채준생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앞에는 한 청년이 석상처럼 시립해 있었다.
“ 인근의 움직임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겠지?”
채준생은 질문을 던졌다.
“ 차질없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석상처럼 서 있던 청년 황가정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아주 은밀해야 한다. 아무도 눈치 챌 수 없게 말이다. 팽가의 인간들은 덩치만 컸지 멍청한 구석이 많지만, 그 총관 놈은 약삭빠르기 짝이 없지.
인근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나 비난들이 작위적이라는 것을 알면 낌새를 채고 조사할 수도 있다.”
“ 염려 마십시오. 팽가의 움직임은 손바닥처럼 읽고 있습니다. 팽가의 가주 팽만유와 아들 팽정기 사이는 앞으로도 점점 더 벌어지게 될 겁니다.
이대로라면 팽정기, 그놈도 서서히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소가주란 자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그걸 노리는 놈의 사촌들은 적게 잡아도 서른 명은 되니까요.”
황가정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 좋아. 계속 그렇게 구슬러서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해주어라.
그래서 뭔가 한 건을 하지 않는다면 가문에서 축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생각이 그놈 머릿속에 절실해질 때쯤 미끼를 던지면 된다.”
“ 알겠습니다.”
황가정은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네놈 가문을 거지꼴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팽가 아들놈의 처지가 그리워질 테니까......”
황가정의 등 뒤로 채준생의 목소리가 방울뱀 꼬리의 경고음처럼 위협하고 있었다.
“ 죽일놈들!”
어지럽게 서류가 늘어져 있는 탁자 앞에서 황가정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벌여온 일들이 조금씩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빚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빚이란 것은 아무리 많아도 받을 돈이 더 많다면 큰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우며 살았고, 부친으로부터 사업을 이어받았을 때도 그런 법칙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고나 할까.....
받아야 할 돈은 철저하게 들어오지 않았고, 갚아야 할 돈은 일시에 늘어났다.
소낙비는 피하자는 생각으로 급전을 끌어들였는데, 그 급전을 갚아야 할 시간까지도 채권은 회수되지 않았다.
결국은 급전보다 좀 더 급하면서도 이자가 높은 고리채를 쓰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딱 두 번 더 반복되자 황가정은 수렁 속에 목까지 빠져든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었다.
그때는 차라리 그 수렁 속에 머리까지 들이밀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수렁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같이 끌어들인다.
결국 일면식도 없는 사내가 던져 준 밧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밧줄을 잡고 나온 후 황가정은 그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자신의 목에 걸 수밖에 없었다.
그 올가미의 끝을 채준생이 잡고 있는 것이다. 채준생은 하북팽가 주변까지 자신을 끌고 왔다.
하북팽가의 팽정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어 황가정은 그에게 음모를 꾸미는 채준생과 함께하는 자신을 보며 가책을 느끼고 있었지만,
가족이 수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가책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가 있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됐지?”
황가정은 탁자 위에 수북이 놓여진 서류와 장부를 구멍이 나도록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읽어나갔다.
돈의 흐름이란 것이 갑작스럽게 한쪽이 막히고 한쪽은 급격하게 흐르는 법은 없다. 처음에는 채준생을 의심하여 초점을 거기에 맞췄지만 그건 아니었다.
놈은 악덕고리업자였다. 지금은 더 큰 먹이를 위해 자신을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끼로서의 이용 가치가 끝나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내팽개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 음모를 파헤쳐야 한다.
펄럭-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춰본 서류들을 다시 들척였다.
한번씩 더 볼때마다 흐름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윽고 그 흐름은 한곳으로 모여지고 있었다.
“ 이놈이다!”
어느 순간 황가정은 고함을 질렀다. 들어올 돈의 흐름을 막았던 놈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장부와 서류 속의 수많은 이름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이름 하나가 집요한 추적 끝에 나타난 것이다.
받아야 할 돈의 흐름을 악착같이 틀어막은 그 이름은 갚아야 할 돈의 흐름을 급격히 터뜨린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같은 놈일 수도 있었다.
황가정은 더 많은 서류들을 꺼내 읽기를 거듭했다.
갚아야 할 돈의 흐름을 급격하게 만든 놈이 그놈이란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받아야 할 돈을 틀어막은 놈임에는 확실했다.
“ 이 죽일 놈! 이놈 때문에......”
그리고 그 이름을 저승에 가서도 잊지 않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 하남진가의 진우혁.....”
황가정은 그 이름을 거듭해서 되뇌었다.
팽정기는 마시던 술병을 던져 버렸다. 술을 마시고 자책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신도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결국 부친의 노기는 누그러질줄 알았다.
하류 잡배에게 진 것도 아니고, 백명이면 남패천이나 서왕문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북제성의 제자에게 패한 것이니 그리 큰 수모는 아니라 생각했다.
부친도 차츰 그런 빛을 보엿지만 밖으로 나갔다 오기만 하면 표정이 싹 달라졌다.
무인의 삶이란 것이 평생 승리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고, 패배를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팽정기의 패배는 개망신에 가깝다는 소문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려지며 인근으로 퍼져 나갔다.
계집에게 뺨을 맞고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했고, 비무대 위에서도 칼 한 번 뽑지 못한 채 돌아서는 상대를 뒤에서 공격하다 개 맞듯이 맞고 나가떨어졌다고 했다.
그 소문은 하루가 다르게 뼈와 살이 덧붙여지며 불어났다.
이젠 밖으로 나가기 무서울 정도가 되었다. 더 이상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술을 마실수록 차가운 위기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 한푼을 더 벌기 위해 억지웃음을 웃고, 아무렇게나 허리를 굽히는 천한 장사꾼 놈들이...”
팽정기는 질겅질겅 씹듯이 중얼거렸다.
“ 장사꾼을 우습게 보지 말게. 벌 때는 천하지만 돈을 번 장사꾼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칼이 될 수도 있고, 대포가 될 수도 있네.”
황가정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 자네였나? 자넨 줄 알았으면 입 조심을 할 걸 그랬네.”
팽정기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 이제 술은 안 마시나?”
“ 술맛이 떨어져 버렸네. 아니, 더 이상 술을 마시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팽정기는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 그럼 칼이라도 휘두르지 그러나? 무인들은 가슴속에 응어리가 있으면 그렇게 풀잖나.”
“ 칼?”
“ 그래, 칼!”
황가정이 팽정기의 허리춤에 걸린 칼을 쳐다보자 팽정기도 물끄러미 자신의 애병, 파산도를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칼이었는데, 두 번이나 제대로 뽑지도 못하고 도로 칼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젠 칼을 차고 다니는 것도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 우라질!”
팽정기는 역정을 토했다. 그래도 가슴속의 답답함은 밀려가지 않았다. 대신 의문 한가닥이 답답한 덩어리 위에 추가되었다
“ 그런데.... 자넨 여기 어쩐 일인가?”
질문과 함께 쳐다본 황가정의 눈에 살기가 비치고 있었다. 무인도 아닌 장사꾼에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황가정의 살기에 팽정기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팽정기는 황가정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황가정은 훨씬 더 짙은 살기와 함께 말했다.
팽정기는 ‘그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눈으로 대신하여 황가정을 쳐다보았다.
“ 자네를 단번에 쓰러뜨린 놈이 하남진가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나?”
“ 빌어먹을!”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팽정기는 대답 대신 와락 욕지거리를 토했다.
“ 뭔가, 이건?”
진우혁은 서류를 들척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류와 장부상의 기록된 날짜가 어딘지 어긋나고 있었다. 돈의 총액은 한푼도 부족함이 없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그 과정이 문제였다. 마치 누군가 여윳돈을 잠시 횡령해서 고리채를 놓고 이득을 본 후 총액을 맞춰놓은 것 같은 경우였다.
최근 결혼 준비로 바빠서 서류와 장부 정리를 조금 등한시하다가 작정을 하고 오늘 정리를 하며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뭐, 결과적으로 한 푼도 셈이 틀리지 않으니 됐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시선을 그곳으로 잡아끌었다.
진우혁은 장부의 첫 권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갈등의 빛이 어렸다. 이런 일은 많은 집중력과 시간을 요구했다.
가뜩이나 바쁜 상황인데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계산이 틀린 것도 아니고 시간적인 차이가 조금 나는 것을 가지고......
“ 휴우-”
진우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언젠가 된통 뒤통수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입맛을 다신 진우혁은 장부의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그에 따른 서류들도 같이 펼쳤다.
“ 공자님!”
두어 장 정도 장부를 넘기자 밖에서 하녀의 음성이 들렸다.
“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정혼녀 하수린이 온 것이다. 장부를 덮은 진우혁은 아차! 하고 이마를 쳤다.
그리고 보니 보석 가게를 방문하기로 한 약속 일이 오늘이었다.
“ 적잖이 닦달을 받겠군!”
어른 서류들을 치운 진우혁은 방문을 열었다
“ 어서 와. 아니, 어서 오시오, 수련 소저!”
진우혁은 과장스럽게 하수린을 맞았다.
“ 뭐에요, 아직 준비도 하지 않고?”
하수린은 진우혁의 옷차림을 쳐다보며 뾰족하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사나운 표정이 비쳤지만 결혼을 앞둔 그녀의 얼굴에는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지난 가을, 남패천에서 서역 특산물 판매권을 따내 귀가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어릴 적부터 정혼한 사이이기도 했지만 큰 사업을 성공시킨 두 사람의 결혼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군. 린 매와의 첫날밤 생각에 요즘 밤잠을 설치느라.....”
“ 어머머!”
진우혁의 농도 짙은 농담에 사나워졌던 하수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뒤이어 한가닥 기대감이 조금 남아 있던 날카로운 기색을 완전히 밀어냈다.
“ 그나저나 우청, 아니, 도련님은 참석할 수 있을까요?”
보석 가게로 가면서 하수린은 궁금한 표정으로 진우혁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하산한 사실을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해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엔 진우청이 너무 유명해져 버렸다.
큰 이익을 위해 무림의 움직임에 온통 촉각을 곤두세우는 상계의 정보통은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자가 누구인지 이젠 모두 알고 있었다.
집안의 사람들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조부님만 모르고 계실 뿐이다.
이젠 완전히 집안의 대소사에서 뒤로 물러나 계신 때문이기도 했고,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것이라 알리지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 전갈을 보냈으니 지금쯤 무림맹에 도착했을 거야. 거기서 북제성으로, 아니, 북제성주가 무림맹주니까 우청에게 바로 연락이 되겠지. 후후후!”
대답을 하던 진우혁은 흐드러진 웃음을 토했다.
“ 왜 그렇게 웃으세요?”
놀란 하수린이 진우혁을 쳐다보았다.
“ 그 말썽꾸러기가 북제성의 제자라니.. 그리고 정파무림의 제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비무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니.... 난 아직도 안 믿어져.”
진우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상가라고 해서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불어나면 그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인간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들에 대처하기 위해 상가에서는 호원 무사들을 고용한다.
축적된 부가 클수록 호원 무사들의 무공 수위도 높았다. 그래서 억만금을 소유한 갑부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호위 무사 중에는 절정고수들도 더러 있었다.
이곳 진가장에도 많은 고수들이 호원 무사로 고용되어 있었지만 다음 대의 방주나 장문인이 될 사람들은 딴 세상 사람들이었다.
그런 청년들을 동생이 모두 이겼다는 사실은 아직도, 아니, 영원히 믿기지 않을 것 같았다.
“ 남패천에서 죽음의 진을 돌파할 때 보통 내력은 아닐 것이라 짐작했지만 북제성의 제자가 되었을 줄은 몰랐어요.
하남진가의 둘째 아들이 황실과 서로 죽이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는 북제성의 제자가 되었는 것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요.
무림맹주 문파의 제자, 그리고 후기지수 중 최고의 무공을 지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든든하지만, 황실과 적대적인 북제성이라는 것이.......”
하수린은 염려스런 표정을 못내 감추지 못했다.
“ 이제 북제성은 황실과의 은원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무림이라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어. 더 이상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거야.”
진우혁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잇는 하수린을 달랬다. 자신 역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북제성의 성주가 정파무림의 맹주가 되었다.
더 이상 황실도 북제성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동생 진우청은 남패천 천주 구양천을 보고 그냥 노인장이라고 부르는 사이다.
“ 어쨌든 우리 결혼식에 꼭 와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에 겁날 것이 없을 정도로 든든할 텐데.....”
하수린은 그리움이 짙게 드리운 음성으로 말했다
첫댓글 즐감 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ㄳ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