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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캔 커피 두 개의 담화
‘실장석 관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연락 바란다.’
이렇게 문자를 보낸 뒤 몇 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리더니 답장이 왔다.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조금 있다 전화를 주겠다는 뜻인가?
연락을 기다릴 동안 시간을 때울 겸 월간 짓소 이번 호를 펼쳐들었다.
이번 호의 특집 ‘위석 심리학, 추악한 사기극의 진실’의 세 번째 단락을 흥미롭게 읽고 있던 찰나, 내가 듣게 된 것은 핸드폰의 진동이 아니라 실장학교 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딸랑
“선배! 넘버링! 넘버링 어딨어요?”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내가 말한 ‘연락 바란다’는 문자나 전화를 달란 이야기이지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오란 의미가 아니었다.
“작업복 입은 걸 보니까 일하는 중이군. 여기 오면 안 될텐데?”
“나도 알아요! 그런데도 점심시간에 택시까지 타고 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넘버링부터 보여줘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그 뻔뻔함은 나도 좀 배우고싶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구사하는 방문객은 싸구려 츄리닝 같은 유니폼에 검푸른색 투박한 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핏 보면 대부분 경비원이나 청소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무늬없는 야구모자 뒤로 길게 빠진 탐스러운 포니테일과 매끄러운 피부, 특히 유난히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동자와 장난기가 가득한 입가가 의상과 괴리감을 일으켜 코스프레라도 하는 듯 어색했다.
“없다. 안 된다.”
정말로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거절하는 나의 말을 좀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녀석은 입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 녀석은 내가 졸업한 A대학 실장교육학과 후배이다.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지나치게 밝다고 해야할지 모를 그런 성격이지만 나에게도 살갑게 대해주는 터라 A대학교에서 맺은 인연 중 여전히 교류를 유지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사람을 몇 마디의 말로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가혹하고 성급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해야한다면 나는 이 녀석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뼛속까지 실장석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
“넘버링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면서요! 불러놓고 이러기에요?”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것 마냥 몰아세우는 말에 나도 약간 얼이 빠졌다.
“⋯난 연락해달라고했지 부른 적은 없는데. 그리고 실장석 관련이라고 했지 넘버링 관련 일이라고도 한 적 없다.”
“아, 몰라요! 아무튼 보여줘요! 택시비도 비싼데! 저 월급 박봉인거 알잖아요? ”
택시비가 비싼 것도 사실, 박봉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놀라울정도로 뻔뻔한 소리이기도 하다.
나는 녀석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거 팔면 중고차 한 대⋯아니 두 대 값 정도는 나오겠다?”
은근슬쩍 손목을 뒤로 감추며 딴청을 부리는 모습에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거요오? 짭인데요오? 애초에 선배는 시계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안대요?”
“난 시계를 끼지는 않지만 그런 시계 끼는 고객들은 많이 상대한다. 그리고 그건 가품이 아니라 진품이고 가격이 아마⋯⋯.”
“아이고 네네, 저는 돈이 많습죠. 네, 제가 죽일 놈입니다. 됐나요? 이만하고 좀 보여주세요, 네?”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는 이 녀석은 성격도 성격이지만은 학창시절부터 운, 특히 금전운이 좋기로 유명했다.
여흥삼아 하는 고스톱이나 포커판을 휩쓸고 내기를 하면 무조건 이기며, 주식을 사면 상한가를 치고 땅을 사면 재개발이 된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 주제에 싸구려 츄리닝과 작업복을 입고 박봉을 받으면서 일하는 이유는 이 녀석이 ‘실장석 생태공원 관리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원관리자면 식사도 근처에서 해결하는 게 원칙일텐데? 이러라고 협회에서 월급 주던가?”
“넘버링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나요?”
하여간 쾌락주의자들이란.
실장교육학과를 졸업한다고 모두 브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장석 관련 산업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그 밖에도 취직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실장석 생태공원 관리인’도 그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브리더 협회 산하의 ‘실장석 생태공원’의 환경을 관리, 감독하는 일이다.
‘실장석 생태 공원’은 공식적으로 두루마리 공원과 같이 ‘시민들의 정신적인 휴식을 위해 실장석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조성’을 위해 브리더 협회에서 설치한 공원이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브리더 협회 회원들이 야생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실장석들의 생태와 행동, 집단적 행동을 연구하기위한 것으로, 회원들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진다.
가령 브리더 협회에서 ‘식량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실장석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교류하는가?’에 대한 실험결과를 필요로할 경우 내 후배와 같은 공원 관리자가 인위적으로 공원의 식수량과 식량을 극도로 제한하여 공원을 기아상태로 몰아넣고 공원 곳곳에 설치된 CCTV로 데이터를 수집하여 실험 보고서를 협회에 보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브리더협회 전용 네트워크에 게시되어 여러 연구에 인용되거나 실장교육학과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쓰인다.
초기에 이러한 공원은 소규모로 운영되었지만, 실장석 업계가 성장함에따라 실장석 연구에대한 필요성이 증가해 브리더 협회에서 아예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공원의 설치 비용을 일부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국 곳곳에 ‘실장석 생태 공원’ 이라는 이름의 공원을 설치했다.
나는 들으라는 듯이 ‘이런 놈한테 월급주려고 브리더 협회에 회비내는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 제발요! 이번엔 콘페이토 안줄게요! 마음대로 새끼 낳아도 된다고 안할게요! 사실 선배는 엄청 약하니까 노예로 삼을 수 있다고도 안할게요! 그러니까 보여만 주시면 안될까요, 제발?”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동안 뒤에서 들리는 재촉에 나는 ‘역시나’ 싶었다.
26번이었던가. 느닷없이 분충이 되어버려 왜 그랬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녀석 짓이다.
“역시 그거 너였나?”
“네! 그럼 누구겠어요? 파하하하!”
캔을 두 개 꺼내어 발로 냉장고문을 닫으며 그렇게 묻자 녀석은 시원스레 인정하며 제풀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는 것을 내가 아무말 없이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에 비치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마감 다 맞추고 하자도 없었잖아요?”
“그래, 맞추긴 맞췄다. 덕분에 1주일동안 20시간밖에 못잤지만.”
“에이, 솔직히 저 없었으면 그거 그냥 그대로 출하했고 그랬으면 손해 엄청 봤다. 인정?”
그렇다. 유달리 교육에 잘 따라서 머리가 좋은 실장석이라고 생각했지만, 분충이 된 후 자세히 관찰해보니 유약하고 귀가 얇은 문제가 있는 실장석이었다. 그래서 후배놈의 꼬드김에 쉽사리 넘어간 것이리라.
만약 그걸 교정하지않고 그대로 출하했으면 몇 년 후 분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도움이 된 건 인정하지만 넌 그냥 그 실장석을 교육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지?”
내 지적에 후배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제 순수한 호의와 일류 브리더인 선배의 교육방식을 배우고 싶어하는 후배의 존경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기에요?”
“아닌가?”
“왜 아니겠어요? 파하하하하! 그때 선배가 교육하는거 보니까 실장학과 2인자 안 죽었던데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소파 등받이에 허리를 깊숙이 파묻고 새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는 후배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너희 지부장한테 공원관리자가 몰래 공원 들실장들 빼돌린다고 제보한다.”
“으, 그건 진짜 싫을 것 같은데요? 그 아저씨가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럼 넘버링 좀 그만 찾아라. 온 김에 내 애기도 좀 듣고.”
‘확 지부를 사버릴까보다.’ 라고 투덜거리는 후배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가죽지갑에는 실장석이 아첨하고 있는 모습이 팬시하게 표현된 아크릴 악세사리가 붙어있었다.
직업을 굳이 가질 필요도 없는 이 녀석이 공원 관리인이 된 이유는 실장석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애정의 수단은 콘페이토와 푸드같은 달짝지근한 것이 아니라 주로 반짝이는 금속재질의 것이다.
공원 관리인의 일에는 공원의 환경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 분충의 숫자를 줄이는 것도 포함된다.
걸러낸 분충은 죽이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녀석은 그 분충들을 망치로 때려 기절시키고 검은 봉투에 넣어 자기 ‘작업실’로 데려간다.
그리고 분충들은 그 곳에서 인간이 말하는 애정의 형태에는 일방적인 파괴행위도 있다는 것을 ‘뼛속까지’ 알게된다.
죽이든 말든 공원에 없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위에서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귀에 들어가면 문책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주기적으로 감사가 내려올지도 모르고 그렇게되면 녀석의 망치와 검은 봉투는 수확물을 얻기 영 힘들어질 것이다.
애초에 직업이 필요하지도 않은 이 녀석이 공원 관리인을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 취미생활 때문이니 그건 정말로 싫은 일이 될 것이다.
“넘버링을 사고싶어하는 이유라도 좀 말해봐라.”
“세레브 실장석의 위석을 긁으면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해서요! 선배는 안 그런가요?”
“그것 봐라. 이러니 내가 팔고 싶겠나.”
나는 맞아도 상관없다는 느낌으로 캔커피를 던졌지만 기대와 달리 요령좋게 잡아채 나는 작게 ‘쯧’하고 혀를 찼다.
녀석은 ‘안 맞았지롱’하며 킥킥대다가 손에 든 음료수를 확인하더니 질렸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와, 선배. 아직도 이 싸구려 캔커피 마셔요? 월마다 xxx 만원씩 버는 사람이?”
“싫으면 내놔.”
“윽, 싸구려틱해. 맨날 이런 거나 마시니까 여친이 안 생기는 게 아닐까요?”
“닥쳐.”
달리 반박할 말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녀석은 순식간에 캔커피를 원샷하고는 약간은 진지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선배가 실장석 관련 이야기로 할 말이 있다길래 드디어 급전이 필요해서 나한테 넘버링을 팔려나부다~ 했는데 무슨 일이에요?”
이제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일단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41번은 여기에 없다.”
하지만 이게 이 녀석에게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김사장 딸 인스타에서 40번 사진 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아직도 일에 안 들어갔다구요? 선배 무슨 일 있어요?”
녀석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41번은 지금 공원에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키우더니 이윽고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세레브 실장석 후보가 공원에 버려지다니 이건 대체 무슨 재미있는 일일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겠지.
하여간 쾌락주의자들이란.
“공원이라구요?”
“그렇다.”
나는 말하기 싫어서 못내 말하지 않은, 하지만 해야하는 말을 꺼냈다.
“네가 관리하고 있는 그 두루마리 공원이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폭소를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건만 어째 눈가를 찌뿌리고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이거 혹시 이미⋯⋯
“어, 잠깐. 혹시 자실장인데 과하게 예의바르고 이상할정도로 말 잘하고 똑똑한 애 맞아요?”
“⋯맞는 것 같다.”
“아악! 역시 그냥 잡아갈걸 그랬어!!”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공원에서 푸드라도 뿌리다가 41번을 발견하고 특이한 언행 때문에 흥미가 생겨서 잡아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동의없는 납치는 금지라는 공원의 불문율 때문에 포기한 것이겠지.
“지금 내가 넘버링을 거저 얻을 기회를 놓친거에요? 아니, 위치는 파악해 뒀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안 그래도 그 녀석 때문에 부른거니까 좀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 애초에 41번은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원하는 넘버링이 아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태세인 녀석을 간신히 붙잡았지만 내심 좀처럼 본론이 나오질 않는 대화에 갑갑했다.
“지금부터 딱 5분만 입을 다물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주면 좋겠다. 부탁이다.”
“⋯재미없으면 나갈거에요.”
넘버링을 놓쳤다는 아쉬움 떄문에 약간 삐진 모양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내가 실장석이 들어있는 택배를 받았는데⋯⋯”
내가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까지 나가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재미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솔직히 나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녀석의 눈동자와 표정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꽤 즐거웠다.
“⋯그래서 공원에 두고 왔다.”
“선배.”
녀석이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과 얼굴이 되자 나 역시 내심 약간 놀랐지만 언제나 평온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은 내 몇 안되는 특기이다.
“어쩜 이렇게 재미있을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없게 하는거죠?”
“⋯⋯.”
화를 내도 되지 않을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음, 선배의 말대로 41번은 세레브 실장석도 아니고 위석을 긁어봤자 소리를 내지도 않을 것 같네요. 어, 혹시 낼지도 모를려나요? 그거 엄청 궁금한데요? 진지하게 저한테 넘길 생각 없어요?”
예상은 했지만 저 끝모르는 소유욕은 질릴 지경이다.
“너한테 넘기는게 41번에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애초에, 이미 세레브 실장석 사놓고 굳이 다른 실장석들을 탐내는 이유가 뭐냐. 3대 세공사의 탄생석 시리즈, 11월의 토파즈. 맞나?”
그러자 녀석은 약간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빠른 어투로 여러 문장들을 순식간에 늘어놓았다.
“아, 개요? 제가 그거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아니, 실장석 사는데 학대를 하면 손해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살 수 있다는게 말이되요?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로 좀 색다르게 재미를 느껴볼까, 하고 진짜로 애호해보려고 한 번 사봤는데 애가 너무 착해서 영 재미가 없지뭐에요? 그래서 친구 줘버렸는데 그건 진짜 재밌었어서 선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걸요?”
정말 빠른 어투여서 나는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세공사라면 선대에 비해서 지금은 명성이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세레브 실장석 시대의 개척자라는 무시무시한 네임벨류의 브리더인데 그걸 기껏 사놓고 친구한테 줘버렸다니 참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사치의 결말이 뭐가 재밌고 왜 저런 사악한 표정을 짓는건지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떤 실장석을 괴롭히거나 괴롭게하는 이야기일테니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41번에 관해서 부탁하고 싶은게 있다.”
“선배가요? 저한테요? 와, 그건 좀 놀라운데요?”
여기에 말리면 또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다.
나는 과장되게 깜짝 놀라는 척하는 녀석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말했다.
“그 녀석을 지켜봐라. 그리고 그 녀석에 관련된 영상을 백업시켜놓으면 좋겠다.”
내 부탁에 녀석은 약간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장석 생태공원의 곳곳에는 실험관찰을 위해서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있고 관리자에게는 이걸 열람할 권리가 있지만, 이걸 별도로 저장하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영상유출하다 걸리면 나 짤리는거 몰라요? 짤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최소 손해배상청구, 재수없으면 경찰서행이라구요?”
“그렇게 규칙을 좋아하면서 폐기해야하는 실장석을 잡아가나?”
“에이, 그건 감수할만한 재미라도 있는데다가 사실 걸려도 그냥 한 소리 듣고 만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무리 선후배라지만 일방적으로 위험을 부담하게 하는 것은 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위험을 좀 부담하기로 했다.
“옛다.”
나는 속주머니에 넣어둔 500ml짜리 흰색 플라스틱 약품통을 꺼내서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녀석은 약품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흔들어보고 뭔지 대략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이게 뭐에요? 혹시⋯내가 생각하는 그거에요?”
“그래.”
누가 볼새라 후배는 약품을 집어 냉큼 작업복 주머니에 감추고 양 주먹을 움켜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 엘릭시르!! 드디어!! 내가 이거 갖고싶어하는거 어떻게 알았어요?”
엘릭시르.
브리더 협회에서만 제조하여 판매하는 초고농축 활성제, 누군가에게는 돈주고도 못 구하는 꿈의 물질이다.
실장석을 둘로 나누면 둘로 분열한다던가, 죽은 실장석도 살릴 수 있다던가 등 과장된 소문이 많긴하지만 어쨌든 시중에 있는 활성제와는 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실장석을 죽이고 싶지만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브리더 협회에 등록된 브리더만 구매할 수 있으며 일반인들에게 유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만약 이것을 유출한 것이 적발되면 나는 브리더협회에서 제명당해 실장학교 문을 닫고 내일부터 벼룩시장 구인란을 뒤적여야할 것이다.
“나한테 그거 좀 구하자고 접근해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말이다.”
“음, 사실 저도 선배한테는 아니지만 접근은 많이 해봤죠. 그런데 어떻게 된게 전부 다 거절을 한대요?”
얼마를 제시했는지는 모르지만 원래부터 원체 비싼 물건이라 어지간한 가격으로는 되팔기도 힘들어 정상적인 브리더라면 굳이 자기 커리어를 걸어서까지 반출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나도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비정상적인 브리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평생 날 먹여살릴 생각이 아니라면 제발 얌전히, 안 들키게 써라. 부탁한 건 잊지 말고.”
녀석이 듣는 둥 마는 둥 작업복 안에 손을 넣어 약품통을 쓰다듬으며 연신 웃음을 짓는 모습은 얼핏 훈훈해보였지만 그 훈훈함은 오늘 밤 작업장에서의 평소보다 좀 더 길고 끊이지않는 비명으로 환산될 것이다.
“아, 영상 걱정은 하지 마세요, 헤헤. 내가 자동해석기능으로 자막까지 입혀서 보내드릴게요!”
드디어 용건이 깔끔하게 끝났건만 녀석은 끝내 불길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41번 관찰하는거,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마침⋯아니, 이건 말 안 하는게 나을려나요? 푸하하하!”
갑자기 말을 하다 마는 것이 영 수상쩍었지만 더 캐묻기에는 이제 슬슬 용건도 끝났고, 이 녀석이 헛소리하는게 하루이틀도 아니기에 그만두었다.
시계를 보니 1시가 거진 다 되어 갔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이다.
“그런데 선배, 그래서 그 택배를 보낸 사람은 누구에요?”
일부러 그 부분과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말했건만 눈치챈 모양이다.
“점심시간 끝나가지 않냐?”
“괜찮아요. 가는 길에 빵이랑 커피라도 사가서 돌리면 다들 제가 늦은지도 모를걸요.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41번을 보낸 사람이 누군데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
“어, 잠깐. 나 알 것 같애. 흠⋯아! 하린 선배 맞죠?”
나는 별수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선배 부탁이라서 이렇게까지 하는거에요? 이거 수상한데요?”
“이렇게까지?”
“그야 뜬금없이 실장석을 보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하고, 그걸 해달라고 해주는게 일반적이지는 않잖아요?”
“⋯일반적이지는 않지 그래.”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래요? 하던 일 다 내팽겨치고 41번을 돌보고 저한테 엘릭시르까지 쥐어주면서까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말하고 있는건 물론 나로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본 것이다.
나는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것인가.
애매하게 결론을 냈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이것 뿐이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음? 41번을 돌보는 쪽이요? 아니면 하린선배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요?”
“⋯그건 모르겠다.”
“그거 신기하네요. 양쪽 다 선배 인생관이랑은 거리가 있는 행동 아니에요?”
“하린이한테는 빚이 좀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41번 건은⋯나도 잘 모르겠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바르지않다.
“설마 실장석한테 애착이 생기신거에요? 교수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신거 기억하시죠? 애호파와 학대파는 브리더가 될 수 없다고 하신거?”
“그래. 그래서 내가 너한테 브리더 보다는 공원 관리인이 되라고했지.”
“역시 브리더는 저같은 애호파한테는 너무 가혹한 길이라고 생각하신거죠?”
“그 뻔뻔함은 나도 좀 배우고싶다. 진심으로.”
“에이, 장담하는데 저만큼 실장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걸요? 그건 선배도 아시잖아요? 애호파는 실장석을 좋아한다, 나는 실장석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는 애호파이다. 완벽한 삼단논법 아니에요?”
이 녀석 성격이 나쁜 점 중 하나는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가 말한게 후건긍정 오류인건 둘째치고 그래서 너 좋다던 실장석이 한 마리라도 있나?”
“음, 개들과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요?”
“네 작업실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1시 10분을 넘기고 있었다.
“너 진짜 안 가봐도 되냐?”
“으, 이제 진짜 가야겠네요. 물어볼게 아직 하나 남았는데. 뭐, 언젠간 기회가 있겠죠?”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툭툭 옷을 털자 얼핏 안쪽 받쳐입은 티셔츠의 테두리가 녹색인게 보였다.
보나마나 저 티셔츠의 가운데 문양도 실장석일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도 실장석을 좋아하는지 일평생을 실장석과 살아온 나도 알 수 없었다.
“참, 근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뭐지?”
“말투좀 고치세요! 선배가 무슨 중대장이에요? 푸하하하!”
직업이 이렇다보니 하대(下待)할 때는 습관적으로 이상한 말투로 말하게 되버리는 것은 나도 그렇게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너야말로 남자인데 그 긴 포니테일은 좀 그렇지 않나?”
“괜찮아요, 전 잘생겼으니까. 아닌가요?”
부정할 수 없다는게 참으로 짜증났다.
“그러면 진짜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들어왔을 때처럼 재빠르게 실장학교의 문이 한 번 열리고 닫히자 미지근한 봄 공기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긴 이야기 때문에 갈증이 느껴져 나는 아까 꺼내두어 미지근해진 캔커피 뚜껑을 열어 길게 한모금을 마셨다.
쓰고 달짝지근한 갈색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소파에 깊게 파묻혀 녀석이 마지막에 말한 하나 남은 질문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선배랑 하린 선배는 무슨 관계이길래 이런 부탁을 한 건가요?’
이것이겠지.
커피가 마침내 목구멍을 벗어나자 나는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지만, 푹신한 소파에서 벗어나기도 싫었다.
나는 애써 흡연욕을 참으며 뒤통수에 깍지를 진채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오래된 대화를 떠올렸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이유를 뭔데?.’
‘어떤 표정을 해야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해야할 필요가 없거든. 답답한 가면을 벗어버린 기분이랄까?’
‘그건 내가 우리 과에 친구가 없어서야? 아니면 내가 눈치 볼만큼 대단치 않아서?’
‘그런 이유만은 아닌걸! 그 이유도 맞지만, 풉. 왜 너는 항상 그런 표정이야? 웃고 다니면 좋을텐데.’
‘굳이 웃을 이유가 없다. 별로 즐겁지도, 웃고 싶지도 않은 걸 어쩌겠어? 나는 오히려 항상 웃고 다니는 네가 더 신기한데.’
‘웃고 다니면 나도 기분이 좋고, 주변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져.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합리적인 이유네.’
‘그럼 앞으로는 너도 웃고다닐거야?’
‘내가 웃고다녀봐야 주위 사람들이 기분나빠하겠지.’
‘그건 그렇네~.’
‘긍정하냐.’
‘하지만 웃고 다니면 굉장히 편해! 주위에서 멋대로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얻을 수 있는게 많거든. 귀찮을 때도 많지만.’
‘그 말, 다른 사람들한테 해도 괜찮은거냐?.’
‘응? 괜찮아! 어차피 다른 애들이 니 말을 믿을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군.’
나는 문득 눈을 뜨고 갑자기 말하지 못한 뒤늦은 아쉬움을 생각했다.
“말하는걸 죄다 물음표로 끝내는 네 화법이 더 이상하지 않냐.” 라고 한 마디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6.
아침이 되자 찔레숲에 내려앉은 서리가 사방이 서늘하였다.
잔디에 내려앉은 투명한 알갱이들은 누구의 발걸음에도 닿지않고 홀로 반짝이다 해가 높아지면 그대로 스러져 땅에 스며드는 것이 이 숲의 일과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거기 아무도 없는데스우?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좀 나와주는데스우~”
느닷없는 인기척에 41번과 자실창은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하는보쿠?”
“일단 들어보는테스.”
대답이 없자 관리실장은 더더욱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와타시는 수상한 실장석이 아닌데스우~! 이 공원의 식량실장⋯아니, 관리실장인데스우~! 여기에 산다고 들은데스우~! 나와주는데스우~!”
“아는 똥벌레인보쿠?”
“아마 대장석인 모양인테스.”
“대장석이 뭐인보쿠?”
“그건 나중에 설명해주겠는테스. 그런데 이거 곤란하게된테스.”
41번의 기본적인 생존 전략은 여간해서는 들어올 수 없는 이 골판지에서 아무도 없는 것 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 골판지를 관리하게 된 이후로 골판지 입구를 나뭇가지와 잎으로 위장으로 하고 빗장을 하나 더 채우고 심지어 비밀통로도 이곳저곳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설령 여기에 골판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찾기 쉽지 않고 찾아도 열 수 없다.
설령 자신을 이 숲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빗장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백중 구십은 그냥 돌아가고 열은 찔레 가시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돌아간다.
하지만 대장석은 보스의 직속부하이고 보통 대장석의 명령은 보스의 명령으로 간주된다.
만일 저 실장석이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보고하면 다음에 오는 것은 경찰석, 어쩌면 군대석들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골판지를 잘 숨겼다 하더라도 여러 무리가 파헤치면 위치를 들키고 골판지가 박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41번은 자실창을 바라보며 골판지의 모퉁이에 세워둔 큼지막한 대못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겠는테스. 오마에는 저걸 들고 문 근처에서 숨어있는테스.”
“들어오면⋯그냥 찔러버리는보쿠?”
41번은 잠시 고민했다.
“들어가기전에 암호를 말하겠는테스. 상황이 괜찮으면 ‘콘페이토’, 찔러버려야하면 ‘코로리’, 도망쳐야하면 ‘네무리’라고 말하고 들어가는테스. 알겠는테스?”
자실창은 입으로 암호를 중얼거리다 머리를 끄덕이고는 굳은 표정으로 못을 집어들었다.
41번도 실창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판지를 나섰다.
“오마에가 안 나오면 와타시는 큰일나는데스우~! 그러니까 제발 좀 나와주는데스우~! 지금 나오면 콘페이토 한 개 정도는 줄 수 있는데스우~!”
41번은 찔레숲의 숨겨진 입구 근처에 숨어있다가 관리실장이 뒤돌아보기를 기다리고는 재빠르게 기어나와 관리실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이, 온테스.”
“데덱! 갑자기 뒤에서 무례한데스우!”
“그렇게 불러대놓고 왜 나오니까 화내는테스?”
느닷없이 뒤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란 관리실장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41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마에가 여기 산다는 그 실장석인데스우?”
“‘그 실장석’이 뭔지는 몰라도 여기 사는 건 맞는테스.”
“중실장인걸 보니 맞는 것 같은데스우. 오마에의 마마는 어디있는데스우?”
41번은 관리실장의 말에 굉장히 오랜만에 어머니에 대해 떠올렸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살짝 비틀었다.
“와타시의 마마는 여기 없는테스. 여기서 아주, 아주 먼 곳에 있는테스.”
41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순식간에 관리실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런데스우⋯⋯. 죽은데스우?”
“그건 와타시도 보지 못해서 잘 모르는테스. 꽤 오래 전 일인테스.”
보스와 대장석들 덕분에 다른 공원보다 분충이 없다고는 하지만, 자실장 혼자 살아남으려면 상상도 못할 고생을 겪었을 것을 상상한 관리실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 자실장이 혼자 사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는데스우? 힘 내는데스우. 살다보면 언젠간 꼭 좋은 날이 오는데스우.”
난생 처음 들실장으로부터 들은 격려의 말에 41번은 감동적이거나 기쁘기보다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어⋯그것 참 고마운테스.”
순간 두 실장석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고 관리실장의 따뜻한 눈빛에 41번은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자신을 왜 부른 것인지 설명해주길 기다리다 결국 41번 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그 말 하려고 와타시를 부른테스?”
관리실장은 41번의 ‘밤마다 엄마를 부르며 색눈물을 흘리며 잠드는 모습’을 상상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스우! 아니아니, 그게 아닌데스우! 오마에가 큰 쓰레기봉투를 혼자 들고 다니는 것을 누군가 봤다고한데스우. 맞는데스우?”
순간 41번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오고갔다.
거짓말을 할까?
대장석이 여기 올 정도라면 확실한 정보일 것이다. 아니라고해도 최소한 골판지 수색정도는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실창 존재가 알려지면 더욱 큰 일이다.
대장석을 죽일까?
이 대장석은 직접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나를 본 것을 들었다고 했다.
입막음이 되지 않을 뿐더러 만약 여기로 오기전에 누군가에게 말했으면 바로 자신에게 혐의가 갈 것이다.
도망칠까?
도망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저 대장석이 돌아가 경찰석들이나 군대석들을 불러오면 골판지의 위치가 들킬 것이다.
골판지에 있는 식량들을 다 들고갈 수도 없고, 이 시기에 골판지를 버리면 자실창과 사이좋게 얼어 죽거나 얼어갈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 뿐이지만 그 전에 41번은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캐내기로 했다.
“그건 무슨 일로 묻는테스?”
그렇게 물으면서 41번은 내심 ‘그런걸 묻는다니 역시 네가 맞구나’라던가 ‘닥치고 너는 질문에 대답만 해라’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관리실장에게는 굳이 여기에 온 목적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건 와타시가 식량을 잘 구하는 실장석을 찾고있기 때문인데스우. 아니아니, 다른 데서부터 이야기 해야겠는데스우. 예, 그러니까 식량석상이 여기를 알려줘서⋯.아니아니, 보스상의 명령부터 이야기 해야하는데스우?”
정신없는 서두를 시작으로 시간순서는 뒤죽박죽에 인칭대명사는 죄다 자기위주, 안해도 그만인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늘어놓는 터라 자세해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이야기를 한참이고 들으면서 41번은 관리실장이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은 실장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식량석 상의 말을 듣고 여기에 온데스우. 그래서 오마에가 그 실장석이 맞는데스우?”
“어⋯잠시만 시간을 주는테스.”
복잡하게 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간신히 정리하자면 이 대장석은 관리실장으로 식량실장이 될 실장석을 찾고 있고 거기에 마침 큰 쓰레기봉투를 들고다니던 41번이 눈에 띄어서 찔레숲으로 왔다, 이런 이야기다.
아무래도 일단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맞는 것 같은테스.”
“정말인데스우? 그럼 대체 어떻게 그 큰 쓰레기봉투를 혼자 독차지한지 알려주는데스우!”
“몸을 깨끗이 하고 사육실장인척 해서 닝겐사마들이 사는 곳에가서 쓰레기봉투를 가져온테스.”
관리실장은 깜짝 놀랐다.
관리실장이라고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쓰레기와 식량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원을 벗어나 인간의 거리를 오고 가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위험하다.
만일 인간들이 사는 곳을 아무런 위험없이 다닐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데스우?”
“아직까지는 실패한 적이 없는테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데스우? 역시 오마에는 와타시가 찾던 실장석이 맞는 것 같은데스우. 혹시 식량실장이 되고싶은 생각이 없는데스우?”
당연히 없다.
41번의 골판지에는 이미 겨울을 두 번을 날 정도의 식량과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
꾸준히 다른 실장석들과 교류해야하며 자칫 주목받을 수 있는 대장석을 맡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미안하지만 와타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테스. 와타시는 그냥 들실장에 불과하니 그냥 돌아가주었으면 하는테스.”
하지만 관리실장은 말 그대로 필사(必死)적이다.
아직도 전 관리실장의 머리가 쪼개지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럴 수는 없는데스우! 이대로 돌아가면 와타시는 보스에게 죽은 목숨인데스우!”
“아무리 그래도 와타시에게 그런 일은 무리인테스. 부디 다른 실장석을 찾아봐주길 바라는테스.”
이대로 돌아가면 위험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부(頭部)가 박살나고 다산(多産)을 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관리실장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정 그렇다면⋯어⋯어⋯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겠는데스우!”
41번에게는 굉장히 난감하다.
이 관리실장이 정말로 강제로라도 끌고가려한다면 저항할 방법이 없다.
싸움이라면 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멍청해 보이는 실장석 뒤에는 보스가 있기 때문에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다.
홀몸이라면 최소한의 식량만 들고 골판지를 버리는 방법이라도 생각해보련만 자실창이 있는 이상 그 방법도 무리다.
“도게자라도 하는⋯!”
“알겠는테스. 일단 가는테스.”
실장석 최후의 비기 '엎드려 빌기'를 시전하려던 관리실장의 눈에 41번의 영 기분나빠뵈는 얼굴이 들어왔지만 관리실장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데스웅! 아리가또데스우! 덕분에 산데스우! 빨리 보스상한테 돌아가는데스우~”
길고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 관리실장은 신바람이 나서 당장이라고 보스에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참, 잊을뻔한테스.”
41번이 그것을 멈춰세웠다.
“뭐인데스우? 운치라도 누고오는데스우?”
41번은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뭐인데스우?”
“콘페이토. 내놓는테스.”
관리실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 동안 골판지 안에서는 콘페이토에 대한 또 다른 번뇌가 이어지고있었다.
“안전하면 콘폐이토, 찔러야하면 게로리, 도망쳐야하면 네무리였던보쿠? 아니 코로리였던보쿠? 그러고 보니 먹으면 죽는 쪽이 코로리인보쿠 아니면 게로리인보쿠? 정신차리는보쿠, 빨리 제대로 떠올려야하는보쿠. 그런데 왜 이렇게 늦는보쿠? 팔에 아무 느낌도 안 나려고 하는보쿠⋯⋯.”
8.
41번이 관리실장의 옆에서 보스의 집이라는 그 ‘회의장’으로 향하며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들실장이 상대라면 죽이거나 최소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지만, 공원의 들실장 무리 전체를 통솔하는 보스나 대장석을 상대로는 철저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집에 자실창까지 둔 상태로는 사소한 트집거리 하나만으로도 골판지 수색, 사이좋게 운치굴행이 될 수 있다.
일단 보스를 만나자.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은 이 자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자.
그것이 41번인 내린 퍽 순진한 결론이었다.
“다 온데스우. 여기가 회의장인데스우.”
골판지로 만든 집은 재료는 인간의 것이지만은 최소한 실장석이 직접 수집해서 세우고 개조하기 때문에 백번양보하자면 실장석의 것이라고 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스티로폼 판넬을 외벽으로하고 우레탄으로 된 지붕을 가진 이 집은 절대 실장석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집은 누가, 왜 지었단 말인가?
“이 집에⋯보스가 사는테스?”
“그런테스. 참 멋진 하우스이지않은데스우?”
공원 한 가운데에 떡하니 있는 인간의 손이 닿은 집이 41번에게는 영 괴이쩍었다.
인간이 실장석을 위해 지은 집이라니?
그것도 전원주택의 정원같은 곳이 아니라 공원 한복판에? 왜?
똑똑
“보스상, 관리실장인데스우. 들어가도 되는데스우?”
“벌써 온데쓰? 들어오는데쓰.”
기억자 모양의 의 금속 문고리를 내리고 들어가니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커다란 애꾸눈의 실장석이 책상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41번이 빠르게 집을 훑어보고 느낀 첫인상은 ‘넓고 밝다’ 였다.
실장석들이 사는 대부분의 골판지는 창문을 낼래야 낼 수 없고, 기껏해야 몇몇 손재주 좋은 실장석들이나 셀로판테이프나 투명한 비닐을 이용해서 작은 창문을 내는 정도라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어두컴컴하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보스의 집은 제대로 된 유리창이 달려있어 밖과 다름없이 밝을 뿐 아니라, 집 크기는 실장석 스무마리는 넉넉히 들어갈만큼 넓고, 화려하거나 정교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간단한 탁자, 서랍 등 가구가 비치되어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는데쓰.”
보스는 원탁에 앉아 공책에 그림과 작대기를 그리며 무언가의 계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참을 보니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는데, 한쪽에 귀가 두 개 달린 길쭉한 동그라미는 저실장, 군데군데 뾰족하게 튀어나온 세모가 있는 동그라미는 콘페이토, 네모는 푸드를 뜻하는 것 같았다.
41번도 그림은 아니지만 숫자와 글을 이용해서 저런 식으로 식량창고의 식량을 체크한 적이 있었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천장에 이상한게 달려있는테스.’
집의 다른 곳을 살펴보니 이상한 뭔가가 41번의 눈에 띄었다.
검은색 콘페이토를 반으로 잘라서 밑부분만 붙여놓은 것 같이 생긴 것이 천장 모서리마다 붙어있었다.
뭔지모를 그 물체의 안쪽에는 새까맣고 빛나는 구멍이 마치 눈동자처럼 자리잡아 꼭 누군가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얼추 다 된데쓰. 대충 앉는데쓰.”
보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방 한 쪽을 턱으로 쓱 가리키자 41번은 처음으로 보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눈 한쪽을 가리는 안대와 얼굴 한가운데에 새겨진 흉터였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세개의 사선으로 된 흉터는 그 모양과 각도로 어떤 생물이 남긴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실장석에 비해서 유난히도 각진 얼굴형에 어떤 질기고 단단한 음식이라도 씹어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 다부진 하관과 턱이 눈에 띄었다.
입은 또 어찌나 큰지 다른 실장석들이 세 입, 네 입에 넘길 것을 한번에 물어 삼킬것 같았고, 깊게 패여진 주름, 그리고 거기에 섞인 흉터들은 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관록을 증명하고 있었다.
41번이 천천히 앉으면서 보스를 관찰하는 동안 관리실장은 아직도 보스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쭈뼛쭈뼛 거리며 보스 사이에 41번을 두고 앉았다.
“관리실장.”
“하이데스우!”
보스의 목소리는 그르렁거리는 듯이 잡음이 섞이고 탁한 음색이었다
아마도 성대가 있는 곳을 다쳤다가 재생한 영향일것이다.
“이 실장석이 새로운 식량실장인데쓰?”
보스는 41번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흠⋯키가 좀 작긴한데 몸은 꽤 단단해보이는데쓰. 오마에, 나이는 어떻게 되는데쓰?”
“1년하고 11개월정도되는테스.”
“지금 테스라고한데쓰?”
41번의 중실장 어미를 들은 보스는 눈가를 살짝 찌뿌리며 조금 사나워진 눈초리로 관리실장을 바라보았다.
“식량실장, 지금 중실장을 데려온데쓰?”
찔끔한 관리실장은 빠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중실장이긴하지만 똑똑한 실장석인데스우. 얼마나 똑똑하냐 하면 혼자서 쓰레기 봉투를⋯⋯”
안 된다. 지금 저 이야기가 보스의 귀에 들어가면 절대로 식량실장의 자리를 거절할 수 없게된다.
“죄송한테스, 보스상. 와타시는 그저 멍청하고 모자란 중실장에 불과한테스. 경험도 부족하고 어린 와타시에게 공원을 책임지는 대장석의 자리는 너무 과분하니 부디 와타시보다 더 나은 실장석을 찾아 맡겨주시길 바라는테스.”
재빠르게 관리실장의 말을 끊고 식량실장의 자리를 맡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지만 문제는 말하는 방식이었다.
41번은 분명히 다른 실장석들에 비해 명석했지만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과 지냈으며 실장석들끼리 지낸 시간은 친모와 자매와 있던 자실장 시절 잠깐 뿐이었다.
공원에 정착한 이후로도 다른 실장석들과 교류하지않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며 살았고, 선천적으로 감정이 부족한 탓에 다른 실장석들의 감정과 생각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행동과 말투가 다른 실장석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차라리 여기서 멍청해보이는 언행 혹은 분충짓을 하거나 관리실장에게 매수를 당했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였다면 식량실장 자리를 고사할 수 있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교육을 받아 위선과 거짓에대한 무지와 부족한 들실장 사회경험이 41번으로 하여금 최악의 수를 두게하였다.
“흐음? 호오⋯이것 참⋯. 어디서 이런 녀석을 데려온데쓰?”
들실장에게는 지나치게 장황하고 현학적인 문장에 보스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41번을 더욱 자세히 훑어보았다.
41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도저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리실장 수고한데쓰. 이제 나가서 일 보는데쓰.”
“하이데스우!”
관리실장이 나간 보스의 집에 남은 것은 둘 뿐이었다.
보스가 한참동안 41번을 쳐다보았고 41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마에, 나이는 몇 살이고 들에 산지는 얼마나 된데쓰?”
“나이는 1년하고 11개월이고 들에서 산지는 1년하고 6개월 정도된테스”
“오마에의 마마는 어디에 있는데쓰?”
“와타시가 태어난지 2달 쯤 되었을 때 헤어진테스. 그 뒤로 본 일이 없는테스.”
“호오⋯그럼 들에서 쭉 혼자산데쓰?”
“그런테스.”
“대장석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데쓰?”
“보스의 바로 아래에있는 4명의 실장석인테스. 식량실장, 관리실장, 군대실장, 경찰실장이 있다고들은테스. 그 밖에는 잘 모르는테스.”
“오마에를 데려온 대장석이 관리실장인데쓰. 관리실장은 오마에와 같이 일할 때가 많으니까 친하게 지내놓는게 좋은데쓰.
“보스상, 와타시는⋯”
“오마에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한데쓰. 식량창고를 먹을 수 있는 걸로 채우는데쓰. 식량석들이 오마에를 돕는데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우는데쓰. 경찰석, 군대석, 관리석들은 하루종일 일만해서 식량을 못 모으는데쓰. 그래서 식량석들이 그 셋들의 식량을 책임지는데쓰.”
“보스상!”
“듣고 있는데쓰.”
“와타시는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냥 어린 들실장에 불과한테스. 그런 와타시에게 이렇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는 것은 좋지 않은⋯”
“헛소리는 그만하는데쓰.”
보스는 41번의 말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만약 41번에게 감각이 있었다면 얼굴이 부서져라 조여오는 보스의 악력과 41번보다 두 배는 크고 거친 손바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보스의 손바닥이 떨어진 41번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낙인처럼 박혀있었다.
“오마에, 이름이 뭐인데쓰?”
이름. 그것을 묻는 질문에 41번은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들에서 살아야하는 실장석에게는 참 기가막힌 주박(呪縛)이다.
“⋯41번인테스.”
그 말을 들은 보스는 ‘역시’ 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와타시가 못 본줄 아는데쓰? 오마에,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와타시가 쓰는 걸 한참동안 본데쓰. 들실장들은 쉴새없이 하우스나 가구들이나 바라보지 절대 그러지 않는데쓰. 그리고 ‘와타시는 멍청하고 모자란?’ ‘과분한?’ 웃기지마는데쓰. 들실장들은 절대 그런 말들을 안 쓰는데쓰. 오마에는 전 사육실장인데쓰. 그것도 혼자서 1년 넘게 들에서 살아남고, 상당히 똑똑하기까지한데쓰.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쓰? 여기서 죽어서 나가고 싶지 않으면 잘 생각하고 말하는데쓰.”
“⋯⋯.”
여기서 전 사육실장이 아니라 사육실장 후보였다, 이런 말을 해봤자 들어먹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판단한 41번은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로했다.
“보스상의 말이 맞다고 치더라도 왜 하필 와타시인테스? 식량석들도 많고, 와타시 말고도 들에서 오래 산 실장석들이 많지않은테스?”
“그 녀석들은 글러먹은데쓰.”
보스는 나지막한 어조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미 공원에 있는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긁어모은데쓰. 지금 이 상황은 실장석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데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와타시타치에게 필요한 것은 닝겐의 지혜인데쓰.”
보스는 41번을 가리키며 그 안에 든 것을 모조리 읽어내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와타시를 무식한 들실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와타시도 들에 살면서 배운 것들이 있는데쓰. 사육실장들은 사육실장이 되기위해 닝겐들과 살면서 그들의 지혜를 배운다고 들은데쓰. 오마에가 전 사육실장이라면, 공원 모두를 위해 그 지혜를 써주는데쓰.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와타시의 공원에 그런 분충은 필요없는데쓰. 당장 공원에서 내쫓는데쓰.”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41번의 입장에서는 제멋대로인 이야기이다.
41번은 고민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벌을 받기 위해서는 이 공원을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언젠간 공원을 떠나야하는 처지에 식량실장의 자리를 맡을 수는 없다.
게다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가 골판지에 있다.
“보스상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테스. 하지만 와타시도 사정이 있어서 식량실장의 자리를 맡을 수는 없는테스.”
“지금 와타시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말인데쓰?”
“그런테스.”
“지금 이 공원을 나가겠다는 말로 알아들어도되지데쓰?”
“아닌테스. 대신 와타시가 제안할게 있는테스.”
보스의 험악해진 말투와 표정에도 41번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밖에 다니면 얼어 죽을 정도로 겨울이 오기까지 한 달정도 남지 않은테스? 와타시가 그 안에 식량창고를 가득 채우겠는테스. 대신 겨울이 끝나면 와타시는 식량실장을 그만두는테스. 이게 와타시의 제안인테스.”
41번의 제안에도 보스의 얼굴은 펴지지않고 도리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참 듣자듣자하니 건방지기 짝이 없는데쓰. 와타시의 제안을 거절한데쓰? 그리고 한 달안에 식량창고를 가득 채우겠다고한데쓰? 그것 참 대단한 소리인데쓰! 그래서, 만약 못 채우면 어떻게 하는데쓰? 도게자정도로는 못 넘어가는데쓰.”
“모조리 다 가져가는테스. 겨울이 끝나고 와타시의 골판지를 뒤져서 있는 것은 모조리 가져가는테스. 그리고 와타시를 운치굴에 처박아서 샌드백이든 자판기든 좋을대로 쓰는테스.”
겨울이 끝나면 자실창이 골판지를 나갈 수 있다. 설령 일이 잘못되어 운치굴에 처박혀도 ‘공원에서 살아야한다’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41번에게는 어찌되든 괜찮은, 합리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보스에게는 이 제안이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데파파팟!! 중실장 골판지를 털어봐야 뭐가 나오기나 하겠는데쓰?“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는 보스에게 41번은 어리둥절했다.
“데퍄퍄퍗!! 좋은데쓰. 대장석을 하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하지 않겠는데쓰? 오마에, 보기보다 상당히 곤조있는 실장석이지않은데쓰까. ”
‘정말로 그래도 좋다’라는 의미로 한 41번이 말이 보스에게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보였는지 보스는 두꺼운 손으로 41번의 어깨를 호탕하게 여러 번 내리쳤다.
“좋은데쓰. 겨울이 끝날 때까지 오마에가 식량실장인데쓰. 매일 아침마다 해가 뜨면 여기로 오는데쓰. 그 때마다 대장석들이 모여서 다같이 회의를 하는데쓰. 회의가 끝나면 식량석들을 데리고 해가 질 때까지 공원에서 식량을 모으면 되는데쓰.”
끄덕끄덕
“하이데쓰.”
“⋯하이테스.”
“좋은데쓰. 눈치가 빠른 걸 보니 일도 금방 잘하게 생긴데쓰.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 해가 뜨면 여기로 오는데쓰. 알겠는데쓰? 그럼 내일보는데스.”
“하이테스.”
그렇게 보스와의 대담을 마친 뒤 한 손에 관리실장에게 받은 콘페이토를 들고 찔레숲의 골판지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있었다.
해가 지면 또 찔레숲에는 서리가 내려앉을 것이지만 내일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서리들을 밟고 나가야한다.
별 생각없이 골판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41번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콘페이토.”
그렇게 말하고 골판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뒤편에서 자실창이 찡그린 얼굴로 못을 끌어안은 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으으⋯.콘페이토⋯.코로리⋯네무리⋯?⋯게로리⋯.? 빨리 생각해내야하는보쿠⋯⋯..”
41번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자실창에게 이불용 손수건을 덮어주고 콘페이토를 보존식 상자에 넣은 뒤 자신도 자실창 옆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딱히 잠이 오지는 않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나마 말동무가 될 자실창도 곯아 떨어져버렸으니 뜬 눈으로 몇 시간을 보내야 하리라.
그러기를 몇 시간이 지나자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어두컴컴해진 골판지 속에서 어둠을 적록으로 빛내던 41번은, 문득 어떤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느끼는,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가끔 들에서 보던 다른 실장석들이나 TV에서 본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마도 이런 말이었다.
“인생 참 마라같은테스.”
유난히 잠이 오질 않는 밤이었다.
8.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 직전에 자실창을 깨우자 자실창은 굉장히 짜증을 냈다.
어느 정도의 짜증이냐 하면은 초콜렛 반 개, 비스킷 한 조각, 스테이크향 푸드 두 개 정도의 짜증이었다.
“우걱우걱, 보쿠가 어제 느낀 힘듬은 이 정도로는 택도 없지만 이 정도로 봐주는, 끄윽, 보쿠!”
배를 두드리며 시원스레 트림을 하자 육체와 정신 모두 차분히 어제 상황을 떠올릴 여유가 생긴 자실창은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어제 나갔다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보쿠? 그리고 대장석이라는건 뭐인보쿠?”
“그게 참 일이 복잡하게된테스.”
어제 있었던 일을 41번이 억양없이 차례차례 설명하자 자실장은 쉴새없이 놀랬다.
“똥벌레들의 보스가 있는보쿠? 그리고 네가 그 보스 부하가 되는보쿠? 그리고 똥벌레들 식량창고를 가득 채워야하는보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한보쿠?”
“하나씩 놀라는테스. 그러다가 숨 넘어가겠는테스.”
“똥벌레들 먹이를 못 모으면 운치굴에 넣어진다니, 왜 그런 제안을 한 보쿠?
“어쩔 수 없는테스. 식량실장을 계속하게되면 골판지를 들킬 수 있는테스. 겨울은 실장석들이 죄다 골판지에 틀어박히는 시기니 괜찮고, 겨울이 끝나면 오마에도 나가서 혼자 살 수 있는테스. 어찌됐든 오마에는 무사할테니 괜찮은테스.”
자실창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보쿠를 위해 그런보쿠?”
“오마에도 알겠지만 와타시는 좀 다른 몸을 가진테스. 골판지나 운치굴이나 와타시에게는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신경쓰지마는테스.”
신경쓰지 말라고하는 말은 보통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을 때 하는 소리이다.
때문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 자실창은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장석을 상대로 실창석이 쉽사리 할법한 말이 아니었기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슬슬 해가 떠올라 만물이 제 빛을 찾아가고 있었고, 41번은 골판지를 나서야할 때가 되었다.
“와타시는 가보는테스. 시간나면 골판지 청소 좀 해놓고 오늘 먹을 건 옷감상자 위 작은 상자에 넣어놨으니 잘 챙겨먹는테스. 함부로 문 열어주지말고, 좀 있다 보는테스.”
“잘⋯갔다오는보쿠.”
문이 닫히자 골판지에는 자실창 혼자만 남았고 자실창은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말했어야하는 것일까?
뭘 말했어야하는 것일까?
회의장으로 가는 길에 나뭇잎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들도 말라비틀어져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고 그나마 싱싱한 동백나무의 이파리에는 차갑고 투명한 것들이 다닥다닥 반짝였다.
입을 벌리고 길게 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어지러이 하늘로 올라갔다.
한기(寒氣)가 보인다.
단 한 번도 ‘한기’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고 무엇인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풀들은 시들고 물들이 얼어붙는다.
추워지는 것이 명백히 보임에도 자신의 옆에 자실창이 없자 머릿속에 부동(不動)의 공포가 오랜만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까싶어 손을 쑤셔넣어 입을 틀어막자 깨물린 손목에서 피가 흘러 땅을 적시고 핏자국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어제 그 뾰족나무네 중실장 아닌데스우? 오마에도 회의장에 가는 길인 데⋯뭐하는데스우?”
뒤에서 들린 관리실장의 말에 정신을 차린 41번은 입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관리실장을 몇 초간 응시하고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손을 빼고 몇 번 털어 피와 침을 털어내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일견 고귀하게 까지 보이는 그 연속동작에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멍하니 쳐다보는 관리실장에게 대충 매무새를 정돈한 41번이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신테스, 관리실장상. 춥지는 않은테스?”
“뎃? 어? 어어어, 안녕한데스우. 그런데 뭘 하고있던데스우?”
“춥지는 않은테스?”
“인사는 했지않은데스우? 그보다 뭘 하고 있던데⋯”
“춥지는.않은.테스?”
41번의 말에 느껴지는 묘한 박력에 관리실장은 움찔했다.
“어, 음, 뭐⋯조금 쌀쌀하긴한데 아직은 괜찮은데스우.”
“그런테스까. 대답해줘서 고마운테스. 덕분에 안심한테스.”
대답을 들은 41번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실장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추워지는 것 같으니 관리실장상도 조심하는테스. 월동준비는 잘 하고있는테스?"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가끔 자를 가지지 못하거나 고아인 실장석들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괴상한 행동을 하곤 한다는 것을 떠올렸고 관리실장은 당혹감은 측음함으로 바뀌었다.
"와타시는 아직 자가 없어서 식량은 크게 부족한 게 없는데스우. 식량실장상은 괜찮은데스우?"
혹시라도 부족한게 있다면 약간은 도와줄 심상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한게 어느 쪽인가에 대해서 관리실장의 생각은 실제와 차이가 좀 있었다.
“와타시도 괜찮은테스.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혹시 괜찮은테스?”
“흠? 뭐인데스우? 덱! 콘페이토라면 더 이상 줄 수 없는데스우!”
“그런 이야기가 아닌테스. 부탁을 들어주면 어제 받은 콘페이토 돌려주는테스.”
“뎃?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데스우?”
내심 멀쩡한 콘페이토 하나를 잃어서 속이 쓰리던 찰나 반가운 제안이다.
하지만 콘페이토를 주고 하는 부탁이라면 보통의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 아침마다 회의장으로 갈 때, 와타시와 함께 가줄 수 있는테스?”
순간 관리실장의 머릿속에는 이야기가 한 편 그려졌다.
어릴 적 가족을 잃어 온갖 죽을 위기를 넘기며 외롭게 살아온 자실장.
자실장은 나이를 먹어 어느새 중실장이 되고 우연히 어느 실장석을 마주친다.
외로운 자실장은 문득 그 실장석에게서 아주 어릴 적,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자신의 친모와 닮았음을 떠올린다.
가족이 없어 무뚝뚝해보이고 이따금씩 정서불안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지만 내심 정에 굶주려있던 중실장은 그 실장석에게 아련한 가족에대한 추억을 조금이나마 더 느끼고 싶어 아까운 콘페이토까지 줘서라도 매일 만나려한다.
평소답지않게 꽤 그럴듯한 이야기를 생각해낸 관리실장은 콧물을 훌쩍이며 41번의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왜 안되겠는데스우? 아침마다 매일 와서 여길 기다리겠는데스우. 같이 가는데스우.”
관리실장의 손과 자신의 손이 맞닿자 체온으로 덥혀진 손이 아까보다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41번은 내심 생각했다.
콘페이토 하나에 이렇게까지 기뻐하다니 말한 것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월동식량이 많이 부족한 모양인테스.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콘페이토로 부탁하면 되겠는테스.
몇 초동안 손을 잡고있던 관리실장이 다시 손을 빼려하자 41번은 문득 손을 계속 잡고있으면 서로 체온이 전달될테니 얼어붙을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 혹시 괜찮으면 손 계속 잡아줄 수 있는테스?”
내심 자기가 혹시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가 싶던 관리실장은 41번의 말에 상상을 확신으로 단정짓고 41번을 으스러져라 껴안으며 ‘물론인데스우, 괜찮은데스우.’를 연발했고 41번은 방금 으스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를까 염려되니 조금만 살살 껴안아 달라 부탁했다.
9.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는 농담으로 들린 모양이지만, 어쨌든 포옹을 푼 관리실장은 41번의 손을 잡고 회의장으로 향하였다.
사이좋은 친자처럼 걸으며 관리실장은 경찰실장과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던가 보스의 힘이 얼마나 쎈지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41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들어주었다.
“와타시는 아직도 보스가 무서운데스우.”
혹여나 누가 들을새라 주변을 몇 번 휘휘 둘러보고 하는 소리이다.
"오마에도 그 떡대를 봐서 알겠지만 어우, 힘이 엄청난데스우. 얼마전엔 주먹 한 방에 성체실장 머리를 깨부숴버린데스."
"확실히, 힘은 세보였던테스."
관리실장은 보스의 힘이 두려운 모양이지만 41번이 계속해서 신경쓰이는 부분은 보스의 지성이다.
간략하게나마 수를 이해하고 쓰며 자신이 인간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을 한 눈에 알고 적절히 압박하는 그 수완은 41번이 들에서 경험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만약 보스와 대립할 일이 생긴다면 무서운 적이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보스는 눈 한쪽이 안 보이는테스?”
“그 안대 말하는데스우? 와타시가 듣기로는 보스가 보스가 되고나서 자기 눈을 스스로 찔렀다고 들은데스우. 정말 무시무시한데스우.”
초고농축의 활성제에 위석이 담긴 41번이라면 모를까 들실장의 재생력으로는 눈 같이 복잡한 기관은 재생이 어렵다.
그렇다면 보스는 스스로 한쪽눈을 포기함과 동시에 석녀(石女)가 되기를 자진한 셈이다.
“대체 왜 그런 일을 한테스?”
“와타시도 잘 모르겠는데스우. 안 그래도 보스는 와타시가 이해못할 짓이랑 말을 자주하는데스우. 아마 똑똑해서 그런 것 같은데스우.”
대체 왜 보스는 자기 눈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가에 대해서 한참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둘은 회의장앞에 도착했다.
"도착한데스우."
햇빛에 금속질이 반짝거리는 회의장의 처마 끝에는 녹은 서리가 출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 있으면 이 자리에는 고드름이 얼게 될 것이다.
"오늘은 첫날이니 복잡한 것은 안 시키는데스우. 뭐하는지 보기나 하는데스우."
41번은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회의장 안에는 41번과 관리실장을 제외한 3명인 보스, 경찰실장, 군대실장이 원탁에 앉아있었다.
실장석들은 그 특성상 서로 특별히 구분되는 외형적인 특징이 많지않아 서로 구별하기 쉽지않지만, 41번은 저 3명이라면 절대 헷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온 데스까? 적당히 앉는데쓰.”
커다란 덩치에 찢어지는 목소리. 가까이서 눈을 보려면 올려다 봐야하는 저 체구는 10m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늦지 않은데스?”
“미안한데스우, 장녀쨩.”
“장녀쨩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한뎃샤!”
오자마자 관리실장과 티격태격하는 실장석은 얼핏 다른 실장석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였지만 처음 볼 때부터 내내 얼굴을 찌뿌리고 있고 그 때문인지 눈 사이에 주름이 유난히 깊었다.
눈이 안 좋거나 얼굴을 펼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모양이다.
아까 관리실장이 말하기를 경찰실장과 자신은 어릴 때 부터 친구라고했으니 저 ‘눈 사이 주름’은 경찰실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군대실장인지는 자명하다.
“⋯⋯.”
줄곧 보스의 오른편에 앉아 침묵을 지키는 실장석을 처음 보고 단번에 떠오르는 단어는 ‘독라’일 것이다.
독라가 운치굴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흔치는 않지만 없는 일은 아니지, 하고 납득한 후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실장석들의 눈에는 ‘세레브한 망토’ ‘세레브하고 커다란 보검’이 보일 것이고 인간의 눈에는 어깨에 두른 ‘대형 안경닦는 수건’과 요령좋게 허리띠에 꿰어찬 ‘공업용 커터칼’이 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보스의 덩치가 다른 실장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건만 저 독라는 그 보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가 망토로 감춘 몸 위로 드러난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있었다.
‘⋯?’
얼핏 하반신에서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지만 휙 지나가버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와중에 군대실장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독라와 눈이 마주친 41번은 시선을 돌리고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들 이야기 들었겠지만 새로운 식량실장인데쓰. 어이 식량실장, 일어서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보는데쓰.”
엉거주춤 일어서긴 했지만 피차 처음 만난 사이에 특별히 할 말이 있을리가 없었다.
어차피 듣는 쪽도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 적당히 넘기면 되리라.
“이번에 식량실장이된 실장석인테스. 배울게 많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는테스.”
무난하지만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인사를 끝내고 무심코 치마끝을 살짝 들어올리는 사육실장식 인사를 할 뻔 했지만, 보스와의 대면에서 교훈을 얻은 덕에 고개만 살짝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테스하는 어미에 경찰실장은 약간 놀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버릇처럼 인상을 찌뿌렸고 군대실장은 노려보다시피 뚫어져라 쳐다보고, 관리실장은 흐뭇함과 불안함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중실장이지만 관리실장의 추천으로 특별히 식량실장을 시킨데쓰. 오마에타치도 알겠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건 식량을 모으는 것인데쓰. 그러니 식량실장이 뭘 물어보거나 도와달라고하면 왠만하면 무조건 들어주는데쓰. 할말있는데쓰?”
그다지 비합리적이지 않고 이의를 제기할만한 것이기도 못되기에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좋은데쓰. 그러면 오마에타치도 식량실장에게 한 마디씩 하는데쓰.”
보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대실장으로 추정되는 독라가 벌떡 일어났다.
“와타시, 군대실장데스. 오마에, 식량 모으는데스. 분충무리, 야옹씨 만나면 말하는데스. 와타시타치, 처리하는데스.”
굵직하고 낮은 군대실장의 목소리에 41번은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보통 실장석들의 하이톤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저음의 음성.
41번은 들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와타시, 오해 싫어하는데스. 와타시, 그러니까 말하는데스. 와타시, 독라데스. 그리고⋯”
군대실장은 41번을 향해 몸을 돌려 망토를 휙 젖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었다.
독라인 이유가 혹시 근육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의심이 들정도로 단단해보이는 몸에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재생하여 생겼을 잔상처와 흉터들이 훈장처럼 새겨진 육체는 군대실장이 겪어왔을 것들을 짐작케 해주었다.
바위에 새겨진 벽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군대실장의 몸을 눈으로 훑던 41번은 군대실장의 사타구니에 시선이 멈추었다.
보통 실장석들에게는 총구가 있어야할 자리에 잘려나간 나무의 밑동과도 같은 흔적을 보고 41번은 자신이 조금 전에 느낀 익숙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들에서 생활하기 전에 듣던 남성의 저음이었다.
“와타시, 마라였던데스. 군대석들, 마찬가지인데스. 마라들, 와타시처럼 마라 자르고 군대석 되는데스. 안 그러는 마라, 죽이는데스.”
실장석들 사이에서는 간혹 태어나곤하는 마라실장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근력과 거대한 둔기를 지닌데다가 성욕에 미친 괴물들인 마라실장은 살려둬야할 이유도 없고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스는 그들을 죽이는 대신에 좀 더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궁리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군대석들이다.
그렇게 마라실장들은 남성성을 거세당한 채 옷을 벗고 머리칼을 잘라 가장 위험한 일을 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돌연변이인데다가 독라인 그들을 우습게 여기는 실장석들이 없을리가 없었고, 공원의 보검이 되어야할 군대석들이 불만을 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렵지않게 예상한 보스는 그들에게 한 가지 특권을 주었다.
“이런 와타시타치, 비웃는 분충들도 있었던데스. 하지만 와타시타치, 공원 지키는데스. 중요한 일인데스. 비웃는 분충들, 모두 보검으로 죽인데스. 그러니까⋯⋯.”
군대석들을 비웃는 실장석들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 그리고 그것은
“와타시를 비웃으면 이 보검으로 오마에의 머리통을 잘라 운치굴 구더기 밥으로 주는데스.”
대장석 또한 예외가 아니다.
군대실장이 차갑게 눈을 번뜩이며 협박에 가까운 자기소개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여전히 인상을 찌뿌리고있는 경찰실장이 눈치를 슬슬 보며 일어났다.
“반가운데스. 와타시는 경찰실장인데스. 주로하는 일은 공원에서 다툼이 생기면 처리하는데스.”
그렇게 말하고는 관리실장을 한 번 째려보자 관리실장은 찔끔하며 시선을 피해 41번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싸울 일 있으면 보통 와타시가 처리하지만 와타시가 처리하는게 마음에 안 들면 보스에게 가서 말할 수 있는 데스. 음, 하지만⋯”
경찰실장은 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경찰실장의 판결은 구더기를 몇개 뺐거나 강제로 노동을 시키는 등 비교적 가벼운 벌을 내리지만 보스의 판결은 일부러 무겁게, 구체적으로는 운치굴에 몇 주간 처박히는 것 부터 시작한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스. 식량 모으다가 자실장을 납치해가거나 도둑질하는 분충보면 와타시타치에게 말하는데스. 빠르게 가서 처리하는데스.”
얼굴 표정과는 달리 친절한 말씨와 하는 일을 듣고 41번은 경찰실장 미간 사이의 주름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실장석들이 바글대는 공원에서 다툼을 처리하는 역할을 하려면 하루에도 인상 쓸만한 일이 수십번은 될 것이다.
경찰실장이 자리에 앉고 관리실장이 일어날 차례가 되었지만 관리실장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경찰실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쯧 한 번 차고 관리실장을 쿡 찔러 눈치를 주어서야 관리실장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일어났다.
“데덱! 흠흠, 와타시는 관리실장인데스우. 아니아니, 정확히는 운치굴관리실장인데스우! 와타시가 하는 일은 운치굴을 관리하는 일인데스우. 오마에는 운치굴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스우. 거기 실장석들 머리 박살나가지고 우지챠 마냥 하루종일 기어다니는 걸 보면 마음이 안 좋은데스우. 그래도 운치굴 노예들은 분충들이니 상관없다고 경찰실장상이 그런데스우. 와타시가 운치굴에서 구더기들 모아서 식량석들에게 갔다주면 그거 육포로 만드는데스우. 육포로 만들 때는 파킨 안하게 프니프니를 해주면서 만들면 맛도있고 상하지도 않는데스우. 가끔 운치굴 노예들 죽으면 그것도 보내주는데스우. 그런데 개네는 덩치가 커서 육포로 만들기 힘든데스우. 그래서⋯⋯.”
“그만하는데스! 이러다가 밤새 떠들겠는데스! 오마에는 어떻게 된게 말만 하면 매번 이 모양인데스?”
한없이 늘어지는 말을 경찰실장이 뚝 끊어버리자 관리실장은 시무룩했지만 다른 대장석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넘겼고 보스가 손뼉을 두어번 쳤다.
“다 끝났으면 모두 각자 할 일 하러 가는데쓰. 그리고 식량실장. 오마에의 일은 회의장 바깥에 있는 늙은 식량석이 알려주는데쓰. 그럼 다들 가는데쓰.”
보스를 제외한 대장석들이 회의장을 우루루 나섰고 잠시 멍해진 41번도 정신을 추스리고 회의장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오니 해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고 부하석으로 보이는 많은
실장석들이 회의장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 머리칼은 희끗한 색이 섞여 탁한데다가 얼굴 곳곳에 주름살이 자글한 실장석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식량석’인지는 몰라도 ‘늙은’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확실하게 충족시키는 실장석이었다.
“오마에가 새로 들어왔다는 식량실장인데스?”
늙은 외관에 어울리게 여유가 묻어나오는 느릿느릿한 목소리였다.
“그런데스. 그러면 오바상이 그 ‘늙은 식량석’인테스?”
무례하기 들릴 수도 있는 41번의 말에도 식량석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거 참 맞는 말인데스. 그런데스. 와타시는 늙은 식량석인데스.”
“보스가 말하기를 오바상이 와타시가 뭘 해야할지 알려줄거라고한테스.”
“사실 할 일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데스. 일단 이쪽으로 따라오는데스, 식량실장상.”
늙은 식량석은 느릿한 말씨처럼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41번도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그래서 와타시가 할 일이라는게 뭐인테스?”
“식량실장상은 와타시타치 식량석들이 하는 일이 뭔지 아는데스?”
41번은 흔히 생각할 법하고 당연한 것 한 가지, 그리고 조금 전에 들은 것을 한 가지 떠올렸다.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모으고 운치굴에서 구더기들 받아서 육포로 만드는 일인테스.”
“잘 알고있는데스. 거기에 한 가지. 그렇게 모은 식량들을 창고에 보관하는 일인데스.”
식량을 모으고 가공하고 보관한다.
식량석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당연하고도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그럼 식량실장의 일은 그걸 관리감독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걸 시키는게 와타시가 하고있는 일인데스.”
식량실장이 바뀌어서 임시로 자기가 하고있단 뜻일까?
41번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보자 늙은 실장석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사실 원래 식량실장상들이 하던 일이었는데 식량실장들은 계속 바뀌는데 식량석들은 그대로 있는데스. 그러다보니까 식량실장보다 식량석들이 더 아는게 많아져서 부하석들이 알아서하게된데스.”
그 말대로 식량실장들이 계속 바뀐다면 굳이 번거롭게 식량실장들이 바뀔 때마다 난리를 피우느니 그냥 식량석들이 알아서 하는게 낫다.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있다.
만약에 이 늙은 식량석이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면 보스는 왜 자신을 식량실장으로 임명했단말인가?
"물론 식량실장상이 원하면 언제든 보스에게 말해서 와타시를 쫓아내고 식량실장상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스. 하지만 안 그러는게 서로에게 좋은데스."
그 말에는 41번도 동의했다.
“그럼 와타시가 할 일은 없단 말인테스?”
“물론 그건 아닌데스. 암, 절대로 아닌데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늙은 식량석을 보며 41번은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식량실장은 와타시타치를 바꿀 수 있는데스."
"바꾼다고한테스?”
뜬금없이 대체 뭘 바꾼단 말인가?
"음, 일단 가서 와타시타치가 일하는 걸 좀 보고 말해주겠는데스. 자, 서두르는데스."
말을 마친 늙은 실장석은 아주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두 실장석이 도착한 것은해가 동쪽 산을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빛날 때쯤이었다.
늙은 식량석이 발을 멈추니 41번의 코에는 익숙한 구린내가 풍겼다.
실장석들의 요르단강, 모든 것이 버려지고 주워지는 장소. 쓰레기장이었다.
“오늘이라고 뭐 줏을게 있는데스? 이러다 보스에게 슬픈 일을 당하는거 아닌데스?”
“무슨 소리를 하는데스! 와타시타치는 노력한뎃샤! 그런데 먹을 게 없는걸 어쩌라는뎃샤! 이런 걸로 슬픈 일을 당하는 건 말도 안되는뎃샤!!”
“그래도 며칠째 찾은게 말라 비틀어진 열매 3개 밖에 없다는 걸 보스가 알면 화내지 않겠는데스?”
“그건 와타시타치의 잘못이 아닌뎃샤! 재수없는 소리 따위는 하지도 마는뎃샤!”
“다들⋯너무⋯걱정하지 마는데스⋯⋯. 그러면⋯와타시도⋯걱정되는데스⋯데에엥⋯⋯.”
쓰레기장에 들실장들이 너도나도 가리지않고 들쑤셔서 가져갈 수 있는건 죄다 가져가 쓸모없는 찌꺼기만 남은 탓에 쓰레기장 한 구석에서 들실장 십수명이 잡담을 나누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늙은 식량석은 단상처럼 생긴 약간 높다란 돌 위로 슬슬 올라갔다.
“모두들! 잡답 그만하고 모이는데스!"
나이든 외모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우렁찬 호령이었다.
식량석들은 거기에 익숙한 듯이 열을 맞춰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바상, 어차피 일도 없는거 뻔히 알면서 뭘 그렇게까지 하는데스?”
“갈 때가 된데스? 오바상 죽으면 골판지는 와타시가 가지는데스."
말로는 야유를 던지면서도 착실히 줄을 서는 식량석들은 3열횡대로 5줄, 15마리였다.
“각 조별로 인원 확인하는데스!”
“분류조, 다 모인데스!”
“가공조, 다 모인뎃샤!!”
“보관조⋯다⋯모인데스⋯⋯.”
열의 맨 앞에 있는 실장석들이 차례대로 다 모인 것을 보고하자 늙은 식량석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확인한데스! 모두들, 오늘은 식량실장상이 새로 온데스! 식량실장상이 한마디 하는데스!”
그렇게 말하고 41번을 쳐다보자 자연스레 실장석들의 시선이 41번에게 쏠렸다
41번은 늙은 식량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늙은 식량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41번은 별 수 없이 바위로 올라갔다.
이 공원은 갑자기 말을 한마디씩 시키는게 전통인가?
16명의 시선이 쏠리자 41번은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한 끝에 결국 회의실에서 했던 것을 반복하기로 했다.
“이번에 식량실장이된 실장석인테스. 배울게 많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는테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자 식량석 무리들이 웅성웅성 거리고 ‘⋯번엔 사육⋯’ ‘⋯번보다는 똑똑⋯’ 같은 말들이 간간히 들렸다.
“조용! 그럼 이제 대기인원 제외하고 다들 어제처럼 흩어져서 식량을 모아오는데스!”
늙은 식량석의 호령이 끝나자 각 열의 마지막 줄에 있는 실장석 3명을 제외하고 빠르게 흩어져 쓰레기장에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찬 바람이 휑했다.
“어떤데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빈 쓰레기장을 보고있는 41번에게 그렇게 묻자 41번은 약간 멍해졌다.
“어떠냐니테스, 그것 참⋯⋯.”
자신이 인사를 한 후 지나간 일들은 순식간이었다.
아니 사실, 인사를 하기 전에 많은 일이 있었냐 하면은 그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건 자신이 영향을 미친 것은 조금도 없었다.
이 두 가지 점을 종합해서 ‘어땠냐’고 말한다면
“와타시, 여기에 필요하기는한테스?”
쓰레기장에서 인사를 했건 말건 이 늙은 식량석은 방금 한 것 처럼 식량석들에게 흩어져서 식량을 모아오라고 했을 것이고 41번의 존재는 거기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이 여기 있을 이유는 무엇이란말인가?
“사실 와타시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던데스. 하지만 그건 와타시타치가 이대로 괜찮을 때 이야기인데스.”
공원 광장 한 구석에 몸을 맞대고 대기하고 있는 실장석들 사이에서 데츄! 하는 재채기 소리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와타시타치, 그러니까 식량석들이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식량실장도, 아무 규칙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면서 먹을 걸 주워다니기에 바빴던데스. 까놓고 말해서,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얼간이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던데스.”
그것이 지금과 어떻게 다른건가? 라고 생각하던 41번에게 늙은 식량석이 물었다.
“식량실장상, 만약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죄다 창고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데스?”
이걸 듣고 오래 생각해야하는 실장석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물이 많은 것부터 썩어버리고 곧 아닌 것까지 썩어버리는테스.”
대답을 들은 늙은 식량석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한데스. 그런데 그 때의 식량석들은 식량을 많이 모아오라는 명령만 생각하느라 그런건 생각도 못한데스. 그래서 결국 그 해 겨울은⋯⋯”
늙은 식량석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꽉 다문 입이 열린 것은 조금 뒤 였다.
“⋯⋯참 끔찍했던데스. 그나마 다행인건 와타시타치는 뭔갈 배운데스. 보스는 공원에서 어느 전 사육실장을 뽑아 식량실장으로 정한데스. 그리고 그 식량실장상은 많은 것을 바꾼데스.”
늙은 식량석은 턱끝으로 대기인원들을 가르켰다.
41번이 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고 별 의미없이 마주친 시선이 애매해져 서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하였다
“와타시타치가 일을 하다보면 다른 노동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할 때가 있는데스. 분충을 발견하면 경찰석들한테 말해야하고 야옹씨가 나오면 군대석들한테 말해야하는데스. 처음에는 그냥 다른 부하석들을 찾아 하루종일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대장석이 저걸 생각해낸데스. 다른 부하석들도 저렇게 ‘대기인원’들이 있어서 도움을 청할일이 있으면 바로 다른 ‘대기인원’들에게 전하면 되는데스.”
“그럼 아까 분류조니 가공조니 하던것도?”
“그런데스. ‘대기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죄다 모아오는데스. 그럼 ‘분류조’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데스. ‘가공조’는 창고에 보관하기 좋게 다듬고 우지챠로 육포를 만드는데스. ‘보관조’는 그 식량들을 창고로 옮기는데스.”
늙은 식량석은 41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와타시가 하루종일 공원을 돌아다녀서 식량을 모아봤자 얼마나 모이겠는데스? 그런데 식량실장상의 지시대로 식량석들을 셋으로 나누고 저렇게 대기인원을 두기 시작하면서 모은 식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데스. 그건 와타시가 몇 년을 살아도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스.”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하는 늙은 실장석의 얼굴은 약간 분해보였다.
‘대기인원’, ‘분류’, ‘가공’, ‘보관’.
확실히 들실장들이 생각해낼만한 발상도 어휘도 아니다.
인간으로부터 배운게 분명하다.
“보스가 주로 전 사육실장을 대장석으로 삼는 이유가 그것인데스. 닝겐상과 살던 실장석들은 와타시타치는 생각지도 못한 걸 해내기 때문인데스. 와타시가, 아니 와타시타치가 식량실장상에게 바라는 것도 그것인데스.”
보스가 억지를 부려가면서 자신을 식량실장으로 임명한게 이런 이유였나.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이 알고있는 인간의 지혜라고 해봐야 글을 읽고 쓰는 법, TV를 보면서 얻은 지식 정도이다.
“일단 식량석들이 일하는 것을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은데스?”
하지만 이미 그런 조건을 걸어놓은 이후이다.
아무리 감각이 없다지만 운치굴에 처박히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은 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인데스. 일단 식량 모으는걸 보러가는데스.”
기대를 가득 담고있는 저 눈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10.
“이쪽은 허탕인뎃샤!! 어이, 오마에! 그 쪽은 어떤뎃샤!!”
“거긴 와타시가 이미 갔다온데스. 운치열매밖에 없는데스.”
“데샤아아악! 왜 닝겐상들은 맛있는 달콤달콤상이 열리는 나무를 안 심고 이딴 나무나 심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샤아아악!!!”
“그만하고⋯저쪽으로⋯가보는데스⋯⋯.”
아까 쓰레기장에서 열의 맨 앞에 있던 세 명의 실장석들이었다.
“아까도 그렇지만 저 오바상은 왜 저렇게 화가나있는테스?”
“아, 저 친구라면 원래 저런데스. 신경쓰지마는데스.”
“늘 저러는테스?”
“의욕은 좋은 친구인데 잘 안되면 저렇게 짜증을 내는데스. 나쁜 친구는 아니니 신경쓰지마는데스.”
그런데 저 대화에 모르는 단어가 나온 것이 신경쓰였다.
“그런데 운치열매란 게 무엇인테스?”
다른 실장석들과 교류를 하지 않은 탓에 모르는 것이 많긴 했지만 운치열매란게 도무지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식량실장상도 중실장이면서 아직도 운치열매를 모르는데스? 따라오는데스.”
늙은 실장석을 따라서 간 곳에는 공원 입구쪽의 도로에 인접한 외곽지역이었다.
“저 열매인데스. 으, 냄새 참 지독한데스.”
커다란 나무 몇 그루 아래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열매들은 과연 운치열매라고 불릴만했다.
과육들은 썩어가는데다가 쉽게 짓무르는지 온 사방에 과육을 묻히는데다가 냄새는 운치와 확실히 비슷했다.
게다가 그런 열매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역겨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41번은 저 열매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것을 운치열매라고 부르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저걸 운치열매라고 부른단말인테스? 어째서인테스?
“운치같은 냄새가 나고 먹지도 못하고 쓸데도 없으니 운치열매라고 하는게 맞지 않는데스? 운치는 우지챠들이나 독라노예들이 먹기라도하지 저건 도무지 쓸데가 없는데스.”
“그럼 저 ‘운치열매’는 아무도 손을 안 댄다는 말인테스?”
늙은 식량석은 영 시덥잖은 걸 물어보는 41번이 이상한지 뭘 그런걸 물어보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굶주린 고아실장들이 굶다못해 저걸 주워먹기도 하는데스. 그런데 그 때마다 죄다 위 아래로 운치를 토하며 죽는데스. 제대로된 실장석이라면 저건 만지지도 않는데스.”
확실히 저 열매는 실장석은 물론이고 사람에게조차 독이 되는 열매였다.
“공원에 저 운치열매가 얼마나 있는테스?”
“주우려고만 하면 봉투가 꽉차게 3번은 주울 수 있을 것인데스. 가끔 닝겐상들이 큰큰 봉투상에 잔뜩 넣어서 버리기도 하니 뭐 하여튼 엄청 많은데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스?”
아까전엔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음, 괜찮은게 생각나서그런테스.”
“운치열매가 말인데스?”
고개를 갸웃거리는 늙은 실장석을 내버려두고 41번은 갑자기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디가는데스?”
“시험해볼게 있어서 먼저 가보는테스. 내일 보는테스.”
어안이 벙벙해진 늙은 식량석이 갑자기 사라진 41번을 다시보게 된 것은 다음 날 아침, 쓰레기장에서 였다.
“다들 모인테스?”
“하이, 모인데스.”
늙은 식량석은 불안해졌다.
식량실장은 식량석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라는게 항상 긍정적으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냥을 한답시고 야옹씨를 죽여서 그 고기를 먹자고 하는 실장석이 있질 않나(시범을 보여준답시고 덤볐다가 제일 먼저 잡아먹혔다) 농사를 짓는답시고 식량들을 땅에 심질 않나(보스가 직접 땅에 묻어버렸다) 어정쩡하게 배운 지식들이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일도 있었다.
저 식량실장도 어제 운치열매를 보고 갑자기 뭐가 떠올랐다고 하고나서는 왠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봉투를 가지고 왔다.
혹시라도 저 중실장이 세 번째가 되지는 않을까 늙은 식량석은 불안해졌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41번은 가지고 온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운치열매를 꺼냈다.
“오늘부터 오마에타치는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이걸 모으는테스.”
식량석들은 대번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웅성거림 속에 41번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은 없었다.
늙은 식량석은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와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라도 걸고싶어졌다.
“식량실장상, 운치열매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아도 되겠는데스?”
“먹으려고 모으는테스.”
웅성거림은 부정이 섞인 의문에서 노골적인 비웃음으로 변했다.
비웃음 중에서 제일 빈도가 높은 단어는 ‘정신’ 나가다’, ‘그럼 니가’, ‘직접 처먹’ 등이었다.
“다들 입 닥치는뎃샤!!”
이대로 식량석들이 ‘당장 보스에게 가서 저 식량실장이 미쳤다고한다’ 라는 결론에 다다르기 전에 일단 늙은 식량석은 소리를 질러 진정시켰다.
“식량실장상, 어제 와타시가 말한 것처럼 이건 먹지도 못하는 열매인데스. 여기 식량석 중에 이걸 먹고 죽은 실장석을 본게 한 둘이 아닌데스. 그런데 이걸 먹으려고 모은다니, 진심인데스?”
그 말에 담긴 감정은 의심이나 불안보다는 ‘제발 아니겠지’ 하는 희망에 가까웠다.
저 중실장이 말하는 것이 ‘먹을게 없으니 다 같이 운치열매나 먹고 뒈지자’라는 의미라면, 그걸 진지하게 고려해볼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심인테스. 우리는 운치열매를 먹어야하고, 운치열매를 식량창고에 넣어야하는테스. 그러니 다들 모아오는테스.”
빌어처먹을. 세 번째인가. 왜 하필 지금이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늙은 식량석은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식량석들의 통제를 포기했다.
몇몇 성질급한 식량석들이 41번에게 달려드는걸 보면서 늙은 식량석은 보스가 저 중실장을 어떻게 죽일까 상상하고 있었다.
찰칵
“오바상타치, 멈춰주는테스.”
식량석들을 멈추게한 것은 네모난 상자였다.
위 아래로 길쭉한 게 보검만하고 왼쪽 오른쪽으로는 좁다란데 윗쪽에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빛과 뜨거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빛덩이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식량석들은 움찔했다.
“아직 와타시의 말이 끝나지 않은테스. 일단 내려가주겠는테스? 그 다음엔 오바상타치 마음대로 하는테스.”
41번의 정중한 어조에 식량석들은 그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만치 물러나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라이터를 이용한 퍼포먼스가 꽤 효과적이었는지 조용해진 군중을 상대로 41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이 운치열매는 분명히 식량인테스. 그걸 와타시가 보여주는테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식량석들에게도 별 다른 방법이나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들어주기나 하자, 라고 다들 대충 동의했다.
이제야 아무런 방해가 없어진 41번이 봉투에서 꺼낸 것들은 들실장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쑤시개, 나뭇가지, 500ml 생수병, 크린랲, 작은 돌멩이.
41번은 그것들을 주욱 늘여놓고는 크린랲에서 요령좋게 위생봉투를 두장 끊어내 양손에 하나씩 끼우고는 운치열매를 들었다.
“오바상타치가 아는 것처럼 이 운치열매는 먹으면 죽을 뿐만 아니라 만지기만해도 손이 아파지는테스. 그러니까 이렇게 비닐을 끼고 만져야하는테스.”
식량석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그래서 어쩌라는데스?’였다.
애초에 아무도 손도 대지 않아 모르던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와타시타치가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이⋯안쪽부분인테스.”
그렇게 말하며 41번은 운치열매의 부드럽고 무른 열매 부분을 떼어내자 안쪽의 단단한 껍질에 쌓인 하얀 씨앗이 겉으로 드러났다.
생전 처음 본 운치열매 씨앗의 모습에 식량석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저런걸 본적이 있냐고 떠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건 먹을 수 없는테스. 이걸 또 까야하는데스.”
늘어놓은 것들 중에서 돌멩이를 들어 하얀 씨앗에 내리치자 껍질 안쪽에서 또 다시 열매같은 것이 나왔다.
초록빛이 섞인 노란색에 사탕처럼 맨들맨들하게 반짝반짝거리는 것이 세레브해보여서 식량석들은 눈을 반짝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이건 먹을 수 없는테스.”
또? 저것도 크진 않은데 저걸 또 까기라도 하는건가? 그래가지고 먹을거나 있겠는가?
이런 내용으로 식량석들은 또 다시 시끄러워졌다.
“이 운치열매는 매우 독해서 아까 그 부드러운 부분은 물론이고 여기에도 독이있는테스. 닝겐상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와타시타치같은 실장석들은 먹으면 죽지는 않겠지만 심하게 아픈테스.”
‘뭐인데스? 그럼 지금까지 뭘한데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끈데스?’ 웅성웅성
“다행히 와타시가 독을 없애는 방법을 아는테스.”
미리 가져온 나뭇가지들을 여러 다발을 한 자리에 모은 41번은 예의 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마른가지에 불이 순조롭게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자 식량석들은 한 겨울에 여름 햇살을 가져다놓은 그 기적에 온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싸늘한 초겨울 공기에 벌벌 떨고있다가 불의 따스함을 맛본 어떤 식량석은 홀린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모닥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기! 오바상! 물러나는테스!”
그 식량석은 불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첫 표본겸 실장석통구이가 되기 직전에서야 간신히 멈췄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테스. 너무 다가오진 말고 둥그렇게 모여주는테스.”
식량석들은 41번의 지시에도 처음 보는 불이 주의가 팔린 탓인지 시선을 모닥불에 고정한채 멈칫멈칫하기만하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뭣하는데스! 당장 식량실장상 말처럼 둥그렇게 모이는데스!” 하고 늙은 식량석이 소리를 쳐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을 마치고 41번과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원시시대의 종교의식같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41번은 아까 깐 속씨앗을 이쑤시개에 꿰어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어제 이미 연습을 해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로 구워야 알고 있던 41번은 노란 속씨앗 겉이 아주 약간 거무스름하게 될때쯤 빼낼 수 있었다.
“이러면 이제 먹을 수 있는테스. 그리고 이건 운치열매가 아니라 ‘은행’이라고 하는테스. 닝겐사마들도 먹는 음식인테스.”
은행이거나 말거나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일년에 몇 번 맡지도 못하는 ‘음식이 불에 익어가는 냄새’가 더해지자 식량석들은 숫제 정신을 못차리고 침을 뚝뚝 흘렸다.
손에 은행꼬치를 든 41번은 늙은 실장석을 향해 다가갔다.
혹시라도 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다른 식량석들의 귀가 추욱 쳐졌다.
“오바상이 한 번 먹어보는테스. 다른 오바상들은 아까 말하는걸 들어보니 불안해하는 것 같은테스.”
늙은 식량석은 확실히 연륜이 있었다.
손을 입가에 올려 헛기침을 하는 척하며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려 체면을 차렸으니 말이다.
“흠흠, 그런데스? 그럼 혹시라도 아직 독이 안 사라졌을지도 모르니 늙은 와타시가 먼저 먹어보겠는데스.”
다른 식량석들의 부러워하는 눈빛을 조미료삼아 늙은 식량석은 갓 구운 따끈따끈한 은행꼬치 후후 불어 한입 물었다.
“데챱데챱⋯.흠⋯이 맛은⋯”
“어떤데스!! 정말로 우마우마한데스, 오바상?!”
식량석들이 참다 못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아마아마하지도 않고⋯데챱데챱⋯짭짤짭짤하지도 않지만⋯데챱데챱⋯따끈따끈한데다가 향이 고소한게⋯꽤 우마우마한데스.”
“그거 다행인테스.”
자실창에게는 맛을 보게했지만 맛을 모르는 탓에 들실장들의 입맛에도 맞을지 걱정하던 41번은 안도했다.
소금도 기름도 없이 그저 굽기만한 탓에 그다지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갓 구운 화식(火食)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들실장들에겐 그럭저럭 진미인 모양이다.
“그럼 식량석 오바상들, 이제 이 운치열매⋯아니, 은행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안테스? 그럼 이제 은행을 주워서 갔다주길 바라는테스. 주워오면 와타시가⋯.”
“와타시! 와타시 먼저인데스!”
“분명 화장실 근처에 닝겐상들이 운치열매를 큰큰봉투에 넣어서 버린데스! 와타시가 가는데스!”
“은행상은 와타시를 기다리는데스!”
“⋯굽는 방법을 알려주는테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행열매를 주으러 가는 식량석들 뒤로 41번의 말이 의미없이 끝맺었다.
“오마에가 세번쨰가 아니라 다행인데스, 식량실장상.”
“무슨 말인테스?”
“아무것도 아닌데스. 그럼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데스?”
“식량석들을 나눠야하는테스. 은행에서 노란부분을 벗기기, 껍질깨기, 이쑤시개에 꿰서 굽기를 시켜야하는테스.”
“그것 참 할게 많은데스.”
“그런테스. 참 힘들게 된테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식량실장상, 흐뭇한 모양인데스? 그렇게 웃고있는걸보니? 데프픗.”
41번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와타시가⋯웃을 이유가 있는테스?”
늙은 실장석은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와타시가 아직 쓸모가 있고 다른 실장석들이 와타시를 필요로 한다는건 정말 기분좋은 일인데스. 식량실장상도 그렇지 않은데스까?”
“⋯그런테스까?”
41번은 지금까지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살아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몸으로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삶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자실창과 있을 때, 그리고 지금.
위석도 없는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져와서, 조금. 내일을 살고싶단 생각이 들었다.
식량석들이 은행을 짊어지고 쓰레기장으로 몰려올 때까지 두 실장석은 꺼져가는 모닥불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다음 편은 고통과 죽음, 41번 실장-고통편 下 입니다.
http://cafe.daum.net/sweetjissouseki/dZSt/8046
이제 드디어 마지막 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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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것은 역사가 높이 평가.
데뎃, 그런데 왜 댓글이 하나도 없는 데스우?
바로 하편으로 건너가신탓일겁니다.
혹시 하편까지 읽으셨으면 감상 부탁드립니다ㅠㅠ
참피 컨텐츠가 10년도 넘게 이어지니 일반적인 참피로 쓸 수 있는 작품은 다 나와버렸네요. 길을걷는실장석도 이 작품도 실장석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지능이 높은 개체들이 주인공
문학가치가 높아서 찬사도 함부로 못하는 진미인 데스
말없이 빵콘으로 찬사에 동참하는 데스
브리리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