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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를 들르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보지 못한 것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이다.
첫 번째 솔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마요르 광장으로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바, 카페, 상점 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펠리페 3세 때 완공되어 광장에는 펠리페 3세의 청동 가마상이 세워져 있으며 우아한 바로크 양식이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은 현재는 왕실 결혼식이나 스페인 주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고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는 명소 중 하나라고 한다.
마요르 광장
두 번째는 마드리드의 명품샵 거리인 그란비아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망고, 자라, 아돌프 도밍고, 우테르퀘 등의 매장을 만날 수 있다.
명품을 구입하고 싶다면 '세라노 거리' 로 가는 것을 추천하며 텍스리펀은 크게 2가지로 분류되며 자라, 망고는 그란 블루로엘, 꼬르떼 잉글레 백화점은 일반 텍스로 처리하면 된다고.........
그랑비아 거리...그랑은 큰 이라는 뜻이고 비아는 길 이라는 뜻이다.
세 번째 산 미구엘 시장으로 마요르 광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드리드 시장의 중심으로 '꽃보다할배'에 나오며 무척 유명해진 곳이라고 한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 치즈, 하몬, 해산물 등 다양한 식재료가 판매되고 있으며 100년이 넘은 전통 시장이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으로 여행자라면 꼭 들러서 맛있는 먹거리와 간식들을 쇼핑해보아야 한다고 한다.
산 미구엘 시장
네 번째 '알무데나 성모대성당' 이며 줄여서 알무데나 대성당이라고 하는데 스페인의 국토회복전쟁 당시에 아랍어로 '알무데나' 라는 성벽 안에서 성모상을 발견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알무데나 성당
다섯 번째 마드리드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이다. 줄여서 '소피아 왕비 미술관' 이라고도 불리우며 1986년 레이나 미술센터로 개관 후 1992년 소피아 왕비의 이름을 따서 재설립 되었다. 스페인의 근, 현대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피카소, 달리, 미로, 타피에스 등 20세기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너무나도 유명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별도의 특별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예술에 관심 높은 분이시라면 이곳을 꼭 방문해보아야 한다고....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
여섯 번째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알칼라문으로 .카를로스 3세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개선문 이다. 원래는 아라곤으로 통하는 옛 성문의 역할이었다고 하는데 스페인 독립을 기념하여 알칼라문 주변은 독립광장이라고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독립광장에 있는 알칼라 문
일곱 번째 데보드 신전으로 데보드 신전은 이집트에서 마드리드로 옮겨와 재조립, 설치된 고대 이집트의 신전인데 1902년 나일강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스완 댐으로 수몰 및 홍수의 위기에 처했던 이 신전을 평소에 학문적 도움을 많이 주었던 스페인에게 기증하기로 해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이 신전은 북부 이집트, 나일강 주변에 기원전 2세기에 신들의 왕인 아몬 레와와 이시스 여신에게 바치는 성전이었다고 한다.
데보드 신전
위에 열거한 것들은 혹시 개인적으로 마드리드에 간다면 들러 보아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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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EU회원 국가이며 면적 505,990km2ㅇ이고 인구 46,700,000 명이며 국민소득은 32,559달러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로마를 빼고 유럽을 이야기 할 수가 없듯이 스페인을 빼고 유럽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스페인을 가는 사람이라면 스페인이 어떤 나라 였는지 대충이라도 알아 보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무엇인가를 보고 왔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스페인 국기의 문장...그 위미를 알아보면 역사를 알 수 있다
상단의 왕관: 왕실의 관
-왕관 아래의 방패모양 문장: 이베리아 반도가 통일되기 전 존재했던 주요 4개의 왕국을 의미함 (시계방향으로)
>성채(요새): 까스띠야 왕국(까스티야는 레온을 통합하고 국토회복운동의 주요 역할을 함, 이사벨1세)
>사자: 레온 왕국(까스티야에 통합)
>황금쇠줄: 나바라 왕국(국토회복전쟁에서 기독교 측 승리의 교두보 역할을 한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에서, 해방시킨
기독교 포로들을 묶었던 사슬)
>적색 세로줄: 아라곤 왕국(까스티야와 함께 국토회복운동의 주요 역할을 함, 페르난도2세), 현재 까딸루냐 주 기
-방패 아래 석류: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그라나다 나스리 왕국
-방패 가운데 세 송이 백합: 부르봉 왕가 표식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 이후 왕위는 합스부르크에서 부르봉 왕가로 교체되었으며, 현재 펠리페6 부세도 부르봉 왕가임
-양쪽의 기둥: 헤라클레스 기둥(북쪽 지브롤터, 남쪽 세우타)
헤라클레스는 이베리아반도 끝에 있는 게리온의 소떼를 가지러가는 도중 아틀라스 산맥 줄기를 잘랐고 남북 끝 양쪽에 기둥을 세웠음. 그 전 까지는 한 덩어리 였던 유럽과 아프리카가 이때부터 나눠지면서 그 사이로 지중해가 생겨남(그리스신화)
-기둥 리본 글씨: PLVS VLTRA '더 넓은 세상으로' (라틴어에는 알파벳'U'가 없어서 'V'로 표기 했으며, 'U'는 3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함)
기둥의 리본은 훗날 미국 $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함(미국이 독립한 18C 스페인은 페소화를 썼는데, 은화에 기둥이 새겨져 있었음,
미국 독립 후 한동안 스페인 페소화가 유통되었으며 페소화에 '리본이 둘린 기둥'을 보고 변형$를 고안 했다는 설이 있음)
유럽의 역사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 이끌어 왔자민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수용하고 나서부터는 유럽의 역사에 기독교(로마교황청의 천주교)가 막대한 영향을 미쳤었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는 천주교와 더불어 개신교 또한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데 기독교(基督敎)는 천주교(天主敎)와 개신교(改新敎)를 합해서 말할 때 쓰는 말로서 이슬람교 불교 등 종교를 분류할 때 기독교라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를 개신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스페인인 로마의 속주(屬州)였으나 로마가 멸망하면서 이곳에는 서고트족들이 세운 왕국들이 건설되었고 이 왕국들도 기독교를 국교를 받아 들에게 된다.
지금의 모로코에 세워진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아의 왕조가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을 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800년간이나 다스리다가 기독교 왕국이었던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들의 국토회복 운동으로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 한 나라로 통합이 되었다.
1492년도가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로 스페인은 해외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유럽의 여러 왕실들과 혼인을 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701에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서 스페인은 벨기에·룩셈부르크·밀라노·사르데냐·나폴리등을 잃게 되었고 를 잃었다. 179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스페인은 프랑스의 속국이 되든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1805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함으로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 혁명을 시작되면서 독립을 하게 되고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식민지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고 엄격한 가톨릭국가로 거기에 대한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에 입각한 공화국이 1931년 성립되었으나 1939년부터 3년 동안 좌퐈의 우파의 내전이 발발하면서 국가 전체가 황폐하면서 유럽 역사의 변방으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 소득이 3만 불을 넘어가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있는 나라이며 2017년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7600만이나 찾았던 세계 3위의 관광대국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엄격한 가톨릭국가로 레콘키스타를 통해서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도 다 같이 추방을 하였으나 그 문화와 건물들은 남아 있어서 유럽의 순수한 기독교 국가와는 유적이나 문화가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나라이다.
스페인이나 유럽의 어느 나라를 갈 때 그 나라의 왕조의 혈통을 보면 반드시 스페인의 왕가와 혈통적으로 얽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스페인은 과거에 대단했던 나라였었고 역사를 알고 간다면 볼거리가 정말로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간다면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가는 격 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아래는 위키백과의 스페인 중에서 역사부분임...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 보시길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스페인의 역사입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선사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두번째로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마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키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6]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비슷한 대우를 받게 된다.[7]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를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6]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이슬람 시대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포르투갈, 스페인)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 시대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베르베르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8]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9]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 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들은 북부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Parias)라고 불리는 보호비 명분의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1492년 최종적으로 후퇴하였다.
무슬림 통치의 종말과 스페인의 통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콘키스타(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10]
한편 8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11]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12]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14]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 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추방하였다.[15]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스페인의 전성기
네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16]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5년)으로 여러 고비를 겪었다.[17]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하게 된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8]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스페인 제국의 변천
그러나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지나치게 강요하였으며 더구나 무적함대가 1580년대 말 영국에 패배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적이 남발하면서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19]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20]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18세기 초부터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21]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생겨났고 부르봉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두 나라의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를 후일을 우려해 계승권을 포기했다. 스페인의 완전한 자주 독립은 펠리페 5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지역을 완전히 합병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서 성취됐으며 그는 바로 귀족들의 터무니없는 특권을 폐지하였다.[22]
통일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23]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 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 강 서부에 있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쇠퇴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왕은 권력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이양하는 한편 조제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한다. 원래 스페인의 왕은 나폴레옹의 맹장(猛將)인 조아생 뮈라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아생 뮈라에 대한 스페인 군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관계로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하고 원래 나폴리의 왕이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왕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 역시 뮈라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군중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으므로 1808년 5월 2일 민족주의자 군중은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일종의 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 운동의 전개와 함께 이러한 움직임은 반도 전쟁으로 촉발됐다.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낸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겹치면서 프랑스 세력은 1814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에 따라 나폴리의 왕으로 지내던 찰스 3세(나폴리의 페르디난드 7세)가 복권한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스페인-미국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미국-스페인 전쟁입니다.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과 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혼란한 20세기
스페인 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공화국(Rep. of Rif)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전선/우파연합과 제휴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국민전선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3년 뒤 스페인 내전의 시민 세력이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주도로 승리를 얻게 된다. 상당 부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24]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게 됐다.[25]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만 30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6]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최초 시작이자 유럽의 시민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추축국에 협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행적이 국제 사회로의 진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반대를 부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순을 보일만큼 부가 지주계층, 군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편중돼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창궐하였다. 인민전선에서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 등 심각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국민 운동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2004년경의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소피아 왕비
1975년 유럽의 마지막 군사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영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1979년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으로 보통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스페인사》(청아)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에서 길게 줄을 설 만큼 보통선거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때 수감됐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부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이나 스페인의 정권을 독점하던 좌파계열의 사회노동당은 개혁을 요구받으며 결국 1996년 우파에 참패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스페인의 인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Euskadi Ta Askatasuna”)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주장은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라는 것이다.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가 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27]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28]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ETA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29] 2004년 3월 13일 토요일 정오, 중도 우파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의 대변인이었던 Eduardo Zaplana는 검찰 수사가 ETA에 집중되어 있다고 발표한다. 이는 스페인 총선거 하루 전날 일이었다. PRISA 그룹에 속한 la SER 에선 정부 대변인 발언을 부인하며 검찰 당국이 이슬람 세력을 수사 중이라고 발언, 총선거 하루 전날 시민들은 SMS와 전화 등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당 본부 앞에 모여 "사실을 원한다.", "거짓말쟁이들", "선거 전에 우린 사실을 알고 싶다.", "Aznar(당시 국민당의 스페인 총리) 너는 알고 있다!" 등의 슬로건을 내달고 시위가 이루어진다.[30][31] 결국 다음 날 총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 총선거에 25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국민당과 사회노동당, 두 정당에 표가 가장 많이 집중된 선거(82%)로 기록되었다.[32]
2009년 11월 부로 스페인 정부는 양성 평등 비율이 거의 평균으로 동등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공표했다. 18명의 정부 각료 중 9명은 여성이며 현재 호세 로드리게스 총리 하의 내각에서 스페인은 양성 평등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히 안정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는 성평등 문제를 의식적으로 정부 내 문제로 각인하고 있는 정부가 스페인 이외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33] 2007년 입법 절차를 거쳐 성별에 관련한 정치, 경제에 대한 평등 문제를 용인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Gender Equality Act).[34][35] 현재 입법부에서 350명 의석 중 128명은 여성으로 36.3%이다.[36] 현재 하원의 경우 여성 의원이 더 많은 13번째 국가가 됐으며 상원의 경우에는 263석 중 79명이 여성으로 30%에 머물고 있다.
첫댓글
말탄 동키호테. 나귀 탄 산쵸판사를 굽어보는 세르반테스의 거대한 동상탑이 있는 스페인 광장도 볼만 합니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사창가 구경도 재미 있구요. ㅋ 현관 앞에 야한 여인들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