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金鐘日牧師
찬양대 영성 훈련
찬양대 영성 훈련 -첫 번째
"음악은 있는데 찬양이 없다.", "예배 시간에 찬양대원들의 자세를 보면 은혜가 떨어진다.", "찬양은 잘 해 놓고서 설교 시간에는 졸거나 다른 짓만 한다.", "찬양대 지휘자가 습관적으로 화만 낸다.", "찬양대원들이 교만하다.", "찬양대원들이 도무지 예배 참석을 안 한다."…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그런 찬양대가 다 있나 싶으십니까?
제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학교에 진학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일텐데 왜 '신자가 되라'는 교훈이 있어야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뿐 아니라 신학교에도 '신자답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찬송가 518장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를 부를 때마다 새삼스레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우리가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종(청지기; steward)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래하는 재능을 주셨을 때, 우리는 또한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의무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찬양대는 우리가 그 섬김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당한 직분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계십니까?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위하여, 먼저 마음을 비우고 무조건 섬길 준비를 하십시다. 찬양대에는 찬양대원으로서 여러분의 섬김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두 가지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감동이 '찬양대를 향하여', 그리고 '찬양대를 통하여' 샘솟아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찬양과 예배에 동참하는 회중 역시 그 감동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관점을 현실적으로 접근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찬양대를 통하여 그의 말씀이 선포되도록 결정하신 때로부터 수많은 작사자나 작곡자를 먼저 감동시키시고, 음악목회자(지휘자)로 하여금 그들의 작품을 선택하게 하여 찬양대에게 연습시키게 하시고, 찬양대로 하여금 찬양을 통해 회중에게 감동을 주게 하며, 그 감동은 또 예배에 참석했던 회중이 밖에서 만나는 가족과 이웃, 직장 동료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을 통한 말씀 선포란 그분의 온갖 다양한 구원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사자나 작곡자의 마음과 생각에 말씀이나 느낌, 또는 어떤 사상으로 감동하실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 적어 하나의 찬양 작품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 과정은 그 감동이 갈 수 있는 데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악보로 인쇄되어 성가집의 모습으로 출판되었을 경우, 그리고 녹음되어 음반의 모습으로 나왔을 경우에는 그 사상이나 말씀으로부터 또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작사자와 작곡가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감동이 먼저 곡을 고르고 준비하는 음악목회자(지휘자)에게 이동하는 것입니다. ('음악목회자'라는 표현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생소하지만, 일단 여러분의 찬양대 지휘자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음악목회자들은 수백 수천 곡의 악보가운데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력에 따른 선곡 기준을 마련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악보와 음반을 구입하게 됩니다. 이상적으로 볼 때, 그의 선택은 찬양대의 음악적 역량과 교회 내부적으로 요구되는 담임목사의 목회 방침,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가나 찬송가편곡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음악목회자가 선택을 끝내었을 때 음악과 그것에 담긴 하나님의 감동은 찬양대원들의 몫이 됩니다. 경건한 찬양대원들은 성가곡의 가사와 음악에 담긴 그 메시지가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적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감동을 전달하는 찬양대원 개개인의 능력과 두름손(手腕)을 생각해 보십시다. 믿거나 말거나, 어떤 찬양대의 몇몇 대원들은 교인 중의 어떤 이들에 대해 언제나 매우 화가 나 있기 때문에 좀처럼 말을 걸기도 힘듭니다. 그런 대원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 교인을 비롯한 다른 성도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1~23)고 말씀하셨습니다. '흘기는 눈'조차 경계하셨던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찬양대원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성도의 당연한 의무 가운데 한 파트인 찬양대를 섬기는 것이므로, 자신과 다투었던 사람과 더불어도 올바른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애쓰며 고민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怒)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2~24) 이것은 쉽지 않은 요구이며, 심지어 공평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쉽고 공평한' 것이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부르신 그분의 필연적 요구조건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혹시 앞서 인용한 말씀들이 찬양대에 속한 특정 인물이나 여러분이 아는 어떤 신자에게 적용되는 것일 뿐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섬기는 찬양대에서 '왕따' 당하는 대원은 혹시 없습니까? '그 사람'이 찬양대에서 다른 대원들과 나누는 교제를 전체 교회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따뜻하게' 똑같이 나누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찬양대 대원이라는 점입니다. 찬양대로부터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성도는 사회로 나아가 그들의 세속적 삶에 그것을 적용하고 그 다음에 사회에 그것을 분배하기 위한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어떤 지점에서인가 멈출 수 있습니다. 찬양대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감동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여러분의 삶 속에 변화를 이루고, 그리고 그 감동이 여러분을 통하여 온 교회에 넘쳐흐르는 일이 멈춰지지 않도록 확실히 하는 것은 필경 찬양대원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당면하는 두 번째 관점 혹은 측면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찬양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거기에는 주일학교 교사, 집사들, 당회원과 전도회 회장들, 그리고 단순히 찬양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찬양대를 그 교회의 완전한 축소판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배우는 그것은 우리가 '모든 곳'에서 배워야 할 내용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찬양대에서 우리 자신과 섬김에 대해 어떤 것을 배우면, 우리들이 배운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삶의 모든 영역뿐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운 상황에서도 보다 나은 섬김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찬양대원들은 마땅히 음악 자체보다도 배우고 봉사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먼저 '섬김'(stewardship)을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찬양대에서 음악보다 '섬김을 연습'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우리들은 분명히 성도에게 영향을 끼치는 찬양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찬양대는 물론이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찬양대 영성 훈련 -두 번째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영성 훈련을 이야기해 봅시다. 처음에 '영성 훈련'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여러분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떠올리셨습니까? 특별히 날 잡아서 심산유곡의 어느 수양관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조별로 둘러앉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가져야되는 일종의 '연례 행사' 정도로, 아니면 교회 내에서라도 찬양대 연습 시간과는 별도로 마련되어야 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영성 훈련'은 평소 교회의 신앙생활 속에서, 찬양대의 연습과 찬양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자연스런 '생활 훈련'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누구나 찬양대 연습 또는 훈련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가끔은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연습 시간에 '음악' 뿐 아니라 '영성'까지도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찬양대 대원으로서, 적잖은 지체들이 받는 가장 크고 또 가장 잦은 유혹은 "오늘 연습엔 가지 말까?"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유혹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마음속에 "그 성가는 충분히 잘 연습했잖아.", "나 하나쯤 빠지면 또 어때?"라고 거듭 속삭임으로써 마침내 우리 양심의 동의를 얻어내고야 마는 집요함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한두 번 유혹에 넘어가 본 대부분의 찬양대원들은 처음에는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몇 번 지각과 결석이 반복되다보면 아주 무뎌져서, 충분히 오래도록 열심을 내어 연습하는데 인색하게 되며, 이런 현상에 한계를 느끼게 된 음악목회자들도 결국 일방적인 의욕을 접고, 대원들의 재능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심이던 대원들이 어느 때부터는 음악목회자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고 보다 어려운 봉사에는 아예 관심을 가지려들지를 않게 되고 마는 이러한 상황의 뿌리에는 항상 똑같은 유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번만!', '나만!'이 그것입니다. 언젠가 찬양대 평일 연습을 하는데 어떤 파트에서 한 명도 안 나왔기에 알아보았더니 한결같이 "저만 빠진 게 아닌가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무심코 "나는 오늘 특별한 사정이 있으니까 나만 살짝 빠져도 다른 대원들은 다 참석해서 잘들 연습하겠지"라는 생각을 공교롭게도 모두가 동시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나 하나쯤이야'가 반복되다가 말 그대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나중에는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심지어 주일예배에도 늑장을 부려 참석해서 찬양대석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대원이 점점 늘어날수록 연습이 부실해지니 찬양곡은 당연히 음악적으로나 영적인 완성도 면에서 결코 고급하지 못하게 되고, 찬양을 부르는 대원들이나 듣는 회중이 똑같이 무감각한 예배시간을 지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찬양대원이나 지휘자가 이런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그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왜 연습에 빠지고 싶어하는 유혹이나 연습을 진행하면서 겪는 좌절, 그리고 그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직면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찬양대가 드린 지난 주일의 찬양은 솔직히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찬양대의 '영성' 회복을 위해 '음악'보다 더 많이 '연습'해야하는, 우리들이 연습할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요소를 함께 찾아봅시다.
그 첫 번째 요소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나는 분들 계시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권위'를 이야기할 때 이 단어는 세속에서 쓰이는 것처럼 거슬리는 말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찬양 연습을 위해 모였을 때에 대부분의 대원들은 직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1시간 이상의 연습 시간동안 음악목회자의 '권위'에 따릅니다. 그가 "앉으세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앉고, "일어서세요"라고 하면 모두 일어섭니다. "53페이지를 보세요"라고 하면 모두가 53페이지를 찾아 책장을 넘깁니다. 이렇듯 음악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섬기는 것이 본질인 찬양대에게서 볼 수 있는 참 좋은 모습입니다.
이 '권위'는 대원들에게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보다 조용한 소리로 노래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찬양대가 음악을 연습하고 있을 동안에, 대원들은 또한 완전한 공동체의 작업을 해야하는 그 관계 때문에 '권위에 복종'이라는 비음악적인 개념을 함께 연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함께 더불어'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또 하나의 '비음악적'인 접근은 '권위에 복종'과 비슷한 훈련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색깔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그건 제 가운(Gown; Robe)인데요!", "저 사람이 또 내 악보를 갖고 갔어.", "저 여자는 꼭 내 자리에 앉는단 말이야."… 여러분이 만일 '고참' 대원이라면 이런 식의 불평불만을 남들이 또는 본인 스스로가 터뜨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찬양대에서 오래도록 봉사해 온 경력이 고작 '기득권'을 주장하거나 매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늘 자기 몫만 챙겨야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까?
찬양대에서 우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거나 혹은 중요한 일을 함께 이루어 가는 일종의 '공동 작업 기술'을 훈련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섬김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운, 성가집, 의자와 같은 사소한 부분들조차 나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대원들과 교인들을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도록 이끌어주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우리들의 소유도 아니고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가슴에 붙이는 훈장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평소에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의, 예를 들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고전 성가라든가 아니면 너무 복잡한 리듬의 현대 성가 등의 악보를 대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찬양대원들은 음악목회자의 선곡에 대해 단순한 눈빛이나 몸짓만으로도 보다 명백하고 정확하게 그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찬양대 지휘자의 선곡 감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라든지, "저 사람은 즉흥적으로 아무 곡이나 고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라는 식으로 불만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대원들도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서 과연 순전한 '하나님 찬양'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음악목회자의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맡은바 직무를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자 애쓰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지도자로 세워지도록 배후에서 기도하면서 도와야만 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해도 모든 구성원의 기대와 취향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또 그가 찬양곡 하나를 고르는 것도 자신의 신앙으로 해낸 '사역'인 줄로 이해하자는 것이지요. 이와 유사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경우는, 이미 전에 몇 번 부른 적이 있던 곡을 '재탕'(revival)하게 될 때입니다. 많은 대원들이 속으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이 노래를 또 하자는 거야?", "저 지휘자는 정말 성의 없는 것 아니야?" 물론 음악목회자가 무성의할 수도 있고,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점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 현실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상습적인 리바이벌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떤 곡을 대할 때 먼저 (선곡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보다 그 곡을 고르도록 간섭하신 성령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해가 전제될 때에 비로소 메시지의 내면화가 이루어지고 '마음과 영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 나의 이익과 이해를 위하여 우리가 찬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래가 즐겁고 쉬우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열심을 내어 찬양을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지휘자와 반주자, 대원들이 찬양의 본질과 찬양대의 존재 목적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의 찬양은 음악적 완성도를 떠나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준비된 살아있는 찬양이 될 것입니다.
찬양대 영성 훈련 -세 번째
찬양대 연습을 위한 네 번째 '비음악적' 요소는 '재능(달란트)에 대한 청지기 의식'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재능을 잘 감당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재능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직분 의식은 우리가 찬양대 연습에 참석할 때마다 매번 훈련됩니다. 우리가 실제 연주를 위하여 찬양을 연습할 때에는 단지 음악 뿐 아니라 성도들의 예배 가운데 드려질 '재능의 청지기 직분'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훈련들이 때때로 힘겹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달란트'가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재능의 청지기 직분을 감당한다는 것이 자신을 혹사시켜 가면서 죽을 기를 쓰고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평소에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랑하던 테너 파트의 한 대원이 주일 아침에 목이 잔뜩 쉬어 갖고 나타났습니다. 지휘자가 연유를 물었더니, 금요일 밤에 산상기도회에 참석했는데 목사님께서 '목이 쉬지 않으면 산에서 내려올 생각을 말라'고 하셔서 목청껏 부르짖으며 기도하다 보니 목이 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원은 그 날 완전히 목이 잠겨서 전혀 노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찬양대에서는 보다 좋은 목소리로 찬양하고 싶어서 남자 대원 몇 사람이 아침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발성 연습'을 했는데 목에서 피까지 나왔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께 창(唱)을 배우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송스런 표현이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릇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적절한 휴식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도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쉬셨습니다.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며 무모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휴식을 알맞게 갖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책임과 재능을 감당하려는 열심 사이에 '재능의 청지기' 직분 의식은 갈등이 아닌 지혜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하면서 바르게 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비음악적' 개념들의 연습은 성가를 '필요한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소한으로 준비한다든지, 정기적인 연습을 가끔 빠지도록 유혹하는 상황들에 대해 양보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명백히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비음악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연습한 대원들은 찬양으로 섬김에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설교하기는 어려워도 설교 준비는 즐겁다'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표현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준비 과정은 실제 상황보다 부담이 훨씬 적기 때문에 즐기면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긴장을 가끔 늦추어도 상관없습니다. 연습 때에는 시간에 좀 늦을 수도 있고, 연습 도중에 기침을 할 수도 있으며, 음악적으로 까다로운 부분은 건너 뛸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습을 아무리 잘 한들 실제로 '연주'하지 않는다면, 또는 '연주' 때마다 망치거나 그저 소홀히 한다면 그 연습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군대에서 가르치듯이 '훈련의 땀 한 방울은 실전의 피 한 방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연주(찬양 드림)'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연주'란, 주일 아침마다 대다수 찬양대원들에게 그다지 편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 실제적 행위입니다. 왜 편안하지 못할까요? 필경 그것은 음악적으로나 영적으로 '보다 잘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일 수도 있고, 하나님보다는 당장 그 찬양을 듣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 음악에서의 '연주'와 같은 행위를 준비하고 '사람들 앞에서' 실행하면서도 그 '사람들의 갈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최고의 하나님께 드릴만한 최선의 수준을 만드는데 늘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연습하기는 즐거워도 찬양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연주'란 편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찬양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어떠어떠한 연습에 참여해야 하며 어떤 연주에 몇 차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계약서에 서명 날인한 적이 없습니다. 음악목회자, 다른 찬양대원들, 그리고 회중과 더불어 우리는 결코 근거와 기록이 없었던 '하나님과의' 계약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습과 연주의 횟수를 계산하면서 섬길 일이 없습니다. 찬양은 우리 모두가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 위에 "부득불 할 일"이며, '찬양 드림'이라는 우리의 연주 행위는 이미 살펴본 네 가지 비음악적 요소에 의해 제대로 훈련되었을 때 그 방법들과 더불어 가진 연습 이후의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네 가지 요소를 '연주'를 위한 관점으로 다시 살펴봅시다.
첫 번째 요소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권위는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의미합니다. 복종하는 입장에서는 관리할 일이 없으므로 부담이 없어서 편하기도 합니다. 연주를 하는 모든 상황에서 권위에 따름으로써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편안함은 일반 대원들만의 특권이자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할 줄 아는 대원들은 임원을 맡아도 제대로 감당하게 됩니다. 찬양을 하면서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따르며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므로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해 주다 보면 나와 생각이 다른 어떤 이의 주장이나 통솔력에도 뜻밖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입니다. 권위에 복종하는 훈련을 찬양대를 통해 받는 동안 대원들은 교회 내의 모든 사역에서 보다 창조적이고 효과적인 섬김을 감당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에 분명한 유익이 됩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함께 더불어'입니다. 이는 복종과 권위에 반드시 따라오는 요소입니다. 어디에서나 권위에 따르는 사역들은 '함께 더불어' 감당하는 가운데 위대한 결과를 낳게 되는 법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이것들은 양보나 항복이 아니라 협력입니다. 이를 통하여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더 큰 소리로 찬양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찬양할 때만큼은 '함께 더불어' 앙상블(ensemble)을 만들어감으로써 부정적인 사고를 없애주고 화음 가운데 긍정적인 분위기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이루어내는 찬양의 화음은 듣는 이들이 먼저 압니다. 찬양대의 협화음이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동안 그 분위기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마땅히 교회에서는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하는 자세를 갖추고 지내는 것이 교회의 진보와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찬양 드림'은 "나의 의견(음색깔과 음높이)과는 다르지만 교회의 평안을 위해 상대방의 입장과 의견을 진지하게 수용하여 합의점(화음)을 찾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네 번째 요소는 '재능의 관리'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찬양대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두드러진 자리'에 앉아 있는 찬양대원들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대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찬양대원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헌신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찬양 행위로만 그치는 섬김이 아니라 삶, 생활을 드리는 '재능의 관리'로서의 섬김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청지기의 존재 의미는 교회의 유익으로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찬양대 대원으로서의 사역은 기본적으로 예배 모범을 포함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인 찬양대석에 앉아 강단 위를 바라보는 찬양대원들의 모습은 또 하나의 '연주'입니다.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모범적인 예배 자세를 보여주는 연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역인지요.
첫댓글 성가대원으로써의 저의 자세와 마음가짐,또 찬양연습에 임하는 저에 자세는 어떠했는지 두루두루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네요 찬양대원들을 위해 이렇게 자료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