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영조 14) 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제 얼음창고.
지정번호 : 보물 제66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시대 : 조선
크기 :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
종류 : 얼음창고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보물 제66호.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이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는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에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지정번호 : 국보 제31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 : 신라시대
크기 :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
종류 : 천문대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병기(兵器).
분류 : 병기
제작국가 : 조선
제작연도 : 1409년(태종 9) 1월
사용국가 : 조선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409년(태종 9) 1월 군기소감(軍器少監) 이도(李韜)와 군기감승(軍器監丞) 최해산(崔海山) 등에 의하여 제작 ·시험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화차는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소차(小車)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을 사용하여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라고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전하고 있다.
태종 때 화차는 실전(實戰)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문종(文宗)에 의하여 발명된 화차를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 변이중(邊以中)이 개량하여 실전에서 활용하였다. 1451년(문종 1) 2월 문종의 창안에 의하여 임영대군(臨瀛大君)이 만든 화차를 시험하였는데, 그것은 차 위에 가자(架子)를 만들어 그 안에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 또는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질러 차례로 발사하게 한 것으로 평탄한 곳에서는 2명이 쉽게 끌 수 있었다.
놋쇠·납·무쇠 등을 녹여 부어 만든 활자.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주자(鑄字)라고도 한다. 고려·조선 시대의 금속활자는 구리·철·납 등 여러 가지 금속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의 금속활자는 납을 주로 하는 합금(合金)이다. 형태는 사각 기둥으로 자면(字面)에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겨져 있다.
이 활자 몸체의 길이는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한국은 2.3875cm, 미국은 2.489cm, 독일은 2.357cm , 러시아는 2.514cm로 되어 있다. 크기(호·포인트)에 따라 가로·세로의 치수도 다르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종.
지정번호 : 국보 제29호
지정년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장 : 국립경주박물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시대 : 771년
크기 :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
종류 : 종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72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쓰인 기구.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禮曹)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周尺)으로 7치(14.7 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尺]로 측정한다. 즉, 대(臺)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 ·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벽.
지정번호 : 사적 제3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장 : 경기 수원시
소재지 :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대 : 조선 후기
크기 :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
면적 : 18만 8048㎡
분류 : 성지(성곽)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장악당(長樂堂), 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 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남암문(南暗門)·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남공심돈(南空心墩)·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동북노대(東北弩臺)·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북부에 있는 면.
위치 : 경남 합천군
인구 : 6,646명(2001)
면적 : 104.99㎢
주요문화재 :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 해인사 장경판고(국보 52), 해인사 고려각판(국보 206), 반야사 원경왕사비(보물 128), 합천치인리 마애불입상(보물 222), 청량사 석등(보물 253), 청량사 3층석탑(보물 266),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264), 청량사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265),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 해인사 목조희랑대사상(보물 999), 대적광전 비로자나삼존불(경남유형문화재 38),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좌상(경남유형문화재 41), 사명당비 및 부도(경남유형문화재 145), 해인사 3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254), 해인사 석등(경남유형문화재 255), 해인사 대적광전(경남유형문화재 256)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면적 104.99㎢, 인구 6,646명(2001)이다. 동쪽으로 야로면(冶爐面), 북쪽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伽泉面), 남쪽으로 묘산면(妙山面), 서쪽으로 거창군 가조면(加祚面)과 접한다. 14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는 가야산(1,430m)·두리봉(1,133m)·남산 등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가야천과 산천(山川)이 흐르고 있다. 주요산업은 쌀·보리 중심의 주곡농업 외에 무·배추·고추·마늘 등을 생산하며, 합천군 내에서는 유일한 기업목장이 있어 소가 사육된다. 대구광역시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가 있으며 진주·마산 방면으로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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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7·18세기의 조선 후기에 제작된 2개의 해시계.
지정번호 : 보물 제845호
지정연도 : 1985년 8월 9일
소장 : 궁중유물전시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과학기기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85년 8월 9일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37년(세종 19) 처음으로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반구형(半球型)의 대접 모양에 네 발이 달려 있는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계절선(季節線:緯線)으로 나타내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子午線)을 그었으며, 시표(時標)는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졌는데, 그 선과 글은 은상감(銀象嵌)으로 새겨,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① 지름 35.2cm, 높이 14cm이며, 재료는 흑칠청동(黑漆靑銅)이다. 여기에는 ‘漢陽北極高三十七度二十分 仰釜日晷 冬至∼夏至(24節候 寅, 卯, 申, 酉, 戌)’라고 새겨져 있어 그 제작연대가 1713년(숙종 39) 이전임을 알 수 있고, 12시 96각(刻)의 시제(時制)에 의한 것에서 1654년(효종 3) 이후임을 알 수 있다.
② 지름 24.3cm, 재료는 흑칠 청동이다. 여기에는 ‘漢陽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仰釜日晷 冬至∼夏至 寅, 卯, 申, 酉, 戌’이라고 쓰여 있어, 1713년 한양의 북극고가 서구의 도법(度法)에 의하여 측정된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