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음모
다혜의 절교선언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한번도 다혜와 헤어지게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만남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다혜는 내가 은주 누나네 집에 입주한 것에서부터
예민한 반응을 일으켰다. 쓸데없이 어렸을 때 은주 누나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 것이 화근인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속 좁은 여잘 줄 몰랐어. 은주 누난 분명히 누나야. 그 이상은 없어."
내가 답답해서 이렇게 말했다. 다혜는 별로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누가 뭐랬어?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는 거지. 찬이더러 그 여자하고 이상한 관계냐고 따진 거 아냐.
그런 건 내가 상관할 일도아냐."
"그럼 갑자기 왜 헤어지자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애 낳고 한집에서 살던 사람들도 싫으면 헤어지는 거야."
"내가 싫어서 이러는 거니?"
"좋은데 그럴까."
차가운 대답이었다. 나는 다혜의 이런 차가운 표정을 처음 보았다.
"내가 은주 누나네 집에서 나오면 되잖아."
"왜 나와? 그렇게 편한 곳에서 뭐하러 나와."
"장난하지 말고...... 내가 나오면 되잖아."
"나오고 안 나오고가 무슨 상관야."
"그럼 왜 그래. 무슨 불만이 있으면 얘기해
"내가 그렇게 속없는 여잔 줄 알아? 치사하게 굴지 말고 깨끗이 헤어져."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서 심상치 않았다. 나는 다헤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고 단정했다.
은주 누나가 과부라는 것과 내가 그 집에 입주한 것을 묶어서 나쁜 상상력을 발휘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은주 누나를 만나기 전부터의 내 아리송한 행적에 대해 믿음을 상실한 것 같기도 했다.
"난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어. 헤어져도 좋고 다시 안 만나도 좋아. 그러나 분명히
밝힐 건 밝혀야겠어. 은주 누나하곤 추호도 양심이 꺼릴 게 없어."
나는 정말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었다.
"이거 왜 이래. 누굴 바보로 알아? 나는 뭐
"그럼 말해 봐. 이유를 대봐."
"찬이가 그렇게 뻔뻔스러울 줄 몰랐어. 난 여태 그런 남잔 줄은 몰랐어."
아까보다 표정이 더 굳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완력으로 다루려고 하지마."
다혜가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내 표정에서 그런 완력을 느낀 모양이었다.
"헤어져도 좋다. 사연이나 듣자."
나는 화가 치미는 걸 참고 이렇게 말했다.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었으면 좋겠어. 말하라면 못 할 것도 없지."
"해 봐."
"이거 놔."
"말해야 놓는다."
"웃겨. 내가 찬이 맘대로 되는 물건인 줄 알아"
"잔소리 말고 말해."
"못할 거 없지."
"어서 해 봐."
나는 다혜의 팔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죄없는 은주 누나를 화냥기 있는 여자로 몰고가면 따귀라도 갈길 참이었다.
그리고 그런 누명만은 뒤집어 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혜가 그렇게
소갈머리 없게 나오는 건 봐 줄 마음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미나란 계집앨 모른다고는 않겠지?"
다혜 얼굴이 표독스러울 만큼 침착해졌다.
"알아. 우리 주임교수 딸...... ."
"교수 딸이란 걸 얘기하려는 게 아냐. 난 삼류 연속극 얘길 하는 거야. 우리나라 둘이 붙거나 여자 하나에
사내가 두어 명 붙는 거 몰라? 난 삼각관계 취미 없어. 더 얘기할 필요 없겠지."
다혜는 손목을 틀어서 빼고 또박거리며 걸어 갔다. 나는 그 순간 힘이 빠지는 걸 알았다.
다혜를 붙잡을 힘이 없었다.
미나와 뜨겁게 끌어안고 입맞춤한 것이 그 순간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 뜨거운 입맞춤의
의미를 잊어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을 설명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생명이 끝장나는 그 순간에 그 한 번의 입맞춤으로 나는 지하실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처절한 순간, 일어날 힘조차 빼앗겨 버린 폭행, 전신이 무감감하도록 매질을 당한
그 순간에 나를 살려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나가 그렇게 뜨거운 열기로 내 입술을 끌어당겼을 때
내 어디에서 그런 질긴 힘이 솟구쳐 올랐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미나의 입맞춤으로 나는 생명을
건져냈었다. 다혜한테 몇 번인가 그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재주가 내겐 없었다.
그런데 다혜가 미나와의 일을 어찌 안단말인가? 설마 미나가 다혜에게 그런 걸 고백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혜가 미나와의 일을 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천국직행교 지하실에서의 뜨거운 입맞춤
뒤에 미나와 나는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들어가기 전날 저녁이었다. 병원에서는 미나의 식구들과 함께 만나서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산에 들어가기 전날 저녁에는 미나가 특별히 나를 초청한 날이었다.
"오빠, 고마워요."
미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생기 있는 입술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를 닮았다면 크로마뇽인처럼 투박해야 마땅할 미나의 입술이었지만 내 생명을 구해줄 만큼
소담한 매력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까딱했으면 지금 미나와 얘기도 못할 뻔했으니까. 미나 때문에 살아났으니까 말야."
"아녜요. 오빤, 괜히 나 때문에 죽을 나오라고 한 거예요."
우리는 어색한 만남이었다. 지하실에서의 그런 뜨거운 충돌이 없었다면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웬만해서 겸연쩍어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 자리만은 그렇지 않았다. 자꾸만 그 뜨거운 입술과
혀의 감촉이 되살아나곤 했다. 어색한 시간과 침묵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더하지 못했다.
미나는 꽤 취해 있었다. 잘 마시지 못하는 맥주를 거푸 마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취하고 싶었지만
더 말똥말똥하게 의식이 깨어 있었다. 붉어진 얼굴, 가빠지는 목소리, 길게 내쉬는 한숨소리,
그리고 흐트러지는 자세, 그것이 미나의 술취한 행동이었다.
"그만 일어나자. 우리 그런 건 몽땅 해프닝을 벌였었던 걸로 치부해 버리자. 자,
그만 일어나. 눠었어. 내가 바래다 줄게."
미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못다한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녀에게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라면 그녀와 다시 한번 뜨겁게 충돌하고 싶었다.
내가 미나와 뜨겁게 부딪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더 있다 가요, 오빠. 나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녀가 주임교수의 딸이 아니었거나 내가 다혜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날 밤 나는 그녀를 훔쳤을지 모른다.
가슴 속에서는 그런 욕망의 끈이 자꾸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는 그 두 가지의 제약 때문에
욕망을 겨우 달랠 수 있었다.
"늦게 들어간다고 얘기하고 나와서 괜찮아요."
눈빛에 말할 수 없이 절절한 애원이 담겨져 있었다. 다혜보다 훨씬 성적 매력이 돋보이는 자태였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여자의 매력을 건강이나 지성, 얼굴의 생김새나 정신 따위라고 말했다.
물론 누구든지 나한테 여자의 매력을 물으면 그런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내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매력있는 여자를 제일 먼저 손꼽으라면 내 말을 잘 듣는 여자라고
대답할 것이고 그 다음에 꼽는것은 성적 매력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속적으로 매력있는 여자를 순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확실히 여자의 매력은 성적 매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았다. 도덕으로 무장한 가면쓴 인간들이 하기 좋은 말로 어쩌구 떠드는 게
나는 가소로워 못 견디었다.
하나님, 인간의 마음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특수 촬영기나 안경 같은 게 없을까요?
사람 마음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본심을 숨긴 채 도덕이나 윤리같은 걸로
무장하고 사는 거야 인간사의 혼란을 막는 것이니까 이해한다 하더라도 주둥아리는 그렇게 놀리고
행동은 본심대로 해치우는 족속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그런 안경 하나 만들어서 보내주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렇게 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아름다운 땅이 될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굳이 천당이나 지옥 같은 무기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다스리기 쉬울 겁니다.
미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가 미나의 손을 잡았다. 미나는 내 손목을 잡고 의자에 앉았다.
"왜 이래?"
"오빠, 할 얘기가 있어. 나 취했어. 취했다고 하는 소리가 아냐.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해봐."
"나, 오빠 좋아해도 돼?"
가슴 끝이 찌르르 했다.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은듯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 난......오빨 좋아해."
목소리가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알아, 안다니까. 그러나...... ."
"다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냐, 그런 건 아니지만."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그 순간에 다혜보다 미나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심정적으로 편하다는
생각을 어째서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혜를 놓을 수 없다는 가슴 밑바닥의 소리를 들었다.
"그럼 내가 싫어서?"
취한 목소리치곤 너무 엄숙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잡힌 팔목이 행복해지는 걸 느꼈다.
"아녔잖아. 우린......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나는 내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내 입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빠한테 준 거야. 난 오빨 사랑해. 내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 게 아냐."
"알아, 안다니까 그래."
"그럼 날 가져. 오빠 거야, 난 오빠 거야."
"너 취했구나. 일어나. 어서!"
가슴 속에서는 당기고 같으로는 거부하는 내 이중성을 그 순간에 깨닫고 있었다. 나 자신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내가 한마디만 하면 오늘 밤 그녀를 조용히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혜처럼 훔칠 궁리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
"취한 게 아냐. 오빠, 난 취하지 않았어. 내 입술을 처음 줬기 때문야."
"그건...... 무슨 말인가 알지만......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맑은 정신으로."
"오빤 치사해."
"그런 게 아니래두 그래."
"다혜를 그렇게 사랑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두려워. 두려울 거 없잖아. 오빠 남자잖아?"
"아무것도 두려운 건 없어."
"그럼 날 다 가져 버려. 오빠한데 다 주고싶어."
"제발 정신 차려."
"난 멀쩡해."
나는 어째서 다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녀를 갖고 싶었다.
아주 쉽게 갖고 싶었다. 다혜처럼 드세게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고 그렇게 훔치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다혜를 데리고 바닷가로 가기 위해 하숙비를 모아 놓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다혜는
여름의 바닷가에 가서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다혜에게 올 여름엔 동해안과
설악산 일대를 안내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밤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텐트를 치고 나는 파도소리 따라
다혜의 가슴을 요동치게 할 셈이었다. 그리고 다혜를 훔칠 생각이었다. 여자에게 분위기만 만들어 주면
쉽게 넘어가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평소에 내가 그녀를 갖고 싶어도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을 했지만
한 텐트 안에서 자게 되면,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그녀를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훔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못된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음료수에 묘한 약이라도 타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빠, 나 처녀야. 날 가져봐."
미나가 내 가슴에 안겨왔다. 미나의 심장 소리가 드세게 울려왔다. 나는 미나를 밀어냈다.
"솔직하게 얘기할게. 솔직하게."
미나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널 좋아하고 싶어. 그런데 내겐 다혜가 있어. 다혜는 나를 사랑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단 말야. 그렇지만 계약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사랑하는데 무슨 계약."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난 뺏을 거야, 오빨 뺏을 거야."
"미나야, 이러지 마. 정신 좀 차려 봐."
미나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빛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불꽃이라도 일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반 시간이 넘도록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빠, 그럼 좋아.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그래. 무엇이든지."
나는 쾌히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손가락 걸어."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한 거다."
"그래."
"키스해 줘."
미나가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망설인 채 앉아 있었다.
"첨엔 내가 했어. 되돌려 받아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난 갈 수 없어."
미나는 눈을 감은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대었다. 미나는 두팔로 나를 안았다. 그리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 냈다. 열기였다.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정이 숨겨져 있었다. 나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하늘 한 자락을 물고 서 있는 초승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다혜의 팔을 잡았다.
"다 얘기할게. 얘기할 테니까 이리와."
"듣고 싶지 않아. 이젠 끝난 거야. 이거 놔. 창피하게 왜 이래?"
"변명이라도 하자. 사실을 알고 이래야 할거 아냐?"
"알고 싶지 않아. 그리고 두번 다시 연락할 생각 마. 이건 이제 필요없겠지."
다혜는 내게 설악산행 관광버스 예약표를 내밀었다.
내 음모와 그녀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던 버스표 두 장이었다.
"너, 정말 이럴 거야? 이유나 알고"
나는 염치없이 다혜를 끌어당겼다.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창피하게 이러지 마. 사내답게 굴어."
다혜는 내 손을 뿌리치고 달려오는 택시를 세웠다. 문소리가 나고 그녀는 떠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여름의 음모가 무너지는 걸 나는 깨닫고 있었다.
다혜를 훔칠 기회를 나는 또 한번 잃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다혜의 완강한 의사가
우리들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는 결과까지 몰고 가게 될지도 모른다.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다혜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질이 못돼 먹어서 그래요. 금방 괜찮아지니까 걱정마요.
아침에 외갓집에 간다고 나갔으니까 며칠 있으면 올 거예요."
"글쎄요. 별 거 아닌데 토라져서...... ."
"그럴 거예요. 좋아할 땐 싸우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는 거예요.
싫어봐요, 왜 싸우고 토라지고 그래요."
서글서글한 다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나는 자신감 같은 걸 얻었다.
그러나 다혜 어머니의 싸운다는 표현은 어떻든 싫었다.나는 여자하고 싸운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싸움이란 마음 속으로라도 상대가 될 거라는 가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낱말이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나는 설악산행 차표 두 장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해 보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혜를 외갓집까지 찾아가 끌고 올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표 두 장과 여관비를 손해볼 수도 없었다.
미나를 생각해 보았다. 내 가슴이 용납하지 않았다.
미나를 생각한다는 건 그녀를 농락하겠다는 결심밖에 안 되었다.
다혜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시외전화를 걸었다. 다혜가 전화를 받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왜 걸었어?"
"변명이라도 할 여유를 달라고."
"듣고 싶지 않아."
"어디서 어떻게 해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알고 그만 만나든 때려 치우든 해얄 거 아냐?"
"무릎맞춤 하고 싶거든 미나란 애한테 가봐."
"미나? 미나가 그러든?"
"왜 놀라실까?"
"미나가 뭐라고 그랬는데 그래?"
"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전화비 많이 나오니까 그만 끊어."
"다혜, 왜 이래? 내 말 들어보지도 않고 이럴 거야."
"빤한 거 아냐. 나는 아무 죄도 없다. 미나가 그런 거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뭐 그런 거잖아."
"그런 거야, 내 얘길 듣고 나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혜만은 보통 계집애들처럼 그러지 않길 바란다. 내 얘기 알겠어?"
"알고 싶지 않아. 이젠 끝난 거야. 전화 끊겠어. 이런 것 다시는 하지마."
다혜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잠깐!"
나는 급한 대로 전화 끊는 것을 막고 잠시 정리해 보았다.
"앞뒤 얘길 다 들으면 후회하게 돼. 그러니 내 얘길 끝까지 듣고...... ."
"후회하지 않겠어."
매몰찬 한마디였다.
"다혜, 너 정말...... ."
"분명히 얘기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찬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날 겁주려고 하지마. 나한텐 안 통해."
"정말 너 이렇게 나올 거야!"
나는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자라고 깔보고 이러지 마."
"널 후회하게 만들 거다."
"좋도록 해봐."
다혜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화가 삭지 않았다.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좋은 때다. 나도 사랑 쌈이나 했으면 좋겠다."
"누나, 남 약올라 미치겠는데 웃기만 할 거야?"
"너답지 않게 사랑 쌈 하니까 그렇지. 여잘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고 그래.
여자란 그저 우지끈 뚝딱 꺽어놓고 보는거야."
"누나도 그렇게 된 거 아냐?"
"나도 그렇다, 머."
"이젠 다 글렀어. 그게 아예 전화도 안 받으니...... ."
"널 무지무지하게 사랑하나부다. 우리집에 있는 것부터 싫어할 정도라면 말이다.
너, 혹시 미나란 애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차암. 누나까지 이럴 거야."
"사내 녀석을 어떻게 믿어."
"안 믿어두 할 수 없지. 바람난 수캐라도 할 수 없고."
"그나저나 내일 떠날 준비나 해둬라. 표를 썩일 순 없잖아. 너희들 말처럼 현지조달을
하든지 차관을 얻든지 해얄 거 아냐. 그렇게 맘 상해 하지 말고 훌쩍 갔다 와."
"차라리 그럴까봐."
은주 누나는 밤 늦도록 밑반찬이며 조미료 따위를 챙겨 주었다.
나는 간단히 배낭을 챙겨놓고 마음맞을 만한 녀석들을 주욱 연락해 보았다.
한 녀석도 집에 붙어 있는 녀석이 없었다. 모두 바닷가나 산으로 도망간 뒤었다.
"빌어먹을 놈들. 한놈도 없어."
"불황 불황하지만 놀러가는 데만은 불황이 없는 거란다. 여름에 바캉스 안 갔다오면
조상모독죄에라도 걸리는 줄 아는 거란다. 너두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다혜한테 미쳐
가지고 다른 친구들 다 떠나도록 그러고 있었잖아. 혼자 갔다 와."
"누가 아니래. 약올라 죽겠잖아."
머리속에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명식이었다. 한번도 내게 반말을 해보지 않는 우리 과의
장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서 침울한 성격이었다.
명식이와는 꽤 친하게 지냈지만 어울려 다니지는 않았다. 명식이 쪽에서 피하는 눈치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누나, 갈 애가 하나 있는데 누나가 뒷돈 대주는거지"
"누구하고 가는지 말해봐."
"명식이라고 있잖아. 우리 모였을 때 노래 젤 잘 부르던 녀석 말야."
"다리...... 소아마비 앓았다는 애?"
"그 녀석은 어디 안 갔을 거야. 공부만 해대는 녀석이니까."
"네가 어떻게 걔 생각을 다했니. 걔하고 간다면 내가 뒷돈 아니라 장빛이라도 얻어줄게."
나는 명식이가 내 뜻에 응해 줄지 그게 걱정이었다. 일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여행이나 답사길에 따라나선 적이 없었다. 가정형편도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늘 빠지곤 했었다. 명식이는 가정교사를 할 수 없게 된 뒤부터 더 형편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공부 뒷바라지를 하며 겨우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건강한 사내라면 일자리가 나서겠지만
명식이는 그런 자리가 나서도 갈 수 없었다.
"아예 짐 싸가지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할까?"
"과외했다고 소문나면 어쩌고."
"그게 무슨 상관이니? 동생 친구 그냥 와 있는 게 뭐가 나빠. 그러나 심심하거나 쉴 때
공부도 가르칠 수 있고...... 아무 조건없이 받으면 되잖아. 그냥 말야."
"정말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든?"
"누나! 정말 고마워."
은주 누나와 나는 죽이 맞는 편이었지만 이번 결정만큼 신나게 맞는 일은 없었다.
"나 총찬이오. 할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형, 나하고 같이 있읍시다. 우리 누나집 말요. 아무 부담없이 와서 공부나 합시다.
우리 누나가 먼저 제안한 거고...... 우리 누나 지난번에 왔을 때 봤지요."
나는 앞뒤 사정을 죄 얘기하고 우리집에 같이 있자고 했다.
"나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누님께도 미안하고 총찬 씨한테도 그렇고...... ."
선뜻 응답을 할 수 없는 명식이의 마음씨를 나는 알 것 같았다.
누나와 나는 번갈아가며 전화를 바꿨다. 명식이는 그러겠다고 했다.
설악산엘 가려고 하는데 이형이 동행 좀 합시다. 빈몸으로 가기만 하면 돼요. 준비는 다 됐으니까.
다른 뜻은 없고 한집 살 사람끼리니까 배를 맞추자는 거요. 마침 다혜하고 가려고 표도 두 장 준비했었는데
그만 실연도 당하고 해서...... 이형이 위로도 좀 해주쇼."
"나랑 가면 불편할 텐데 괜찮습니까?"
"그런 생각말고 갑시다. 편하자고 떠나는 게 아니고 같이 고생하러 가자는 거니까요."
"그래도...... ."
"실연당한 사람 위로해 주지 않을 거요?"
명식이는 한참 만에 같이 출발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새벽에 짐 싸가지고 일루 오쇼. 여기서 아침 먹고 같이 떠납시다."
명식이가 한집에 살게 되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네 옆방 한칸 내줄 테니까 걱정마."
누나는 내 옆방을 가리켰다.
"신세 갚는 날까지만 살아 있어."
"알았다."
명식이가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편했지만 다혜와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것은 마음이 찜찜했다.
영 잠들 것 같지 않았다. 미나가 다혜를 찾아가 무슨 얘기를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미나를 불러내서 따질 수는 없었다. 자존심을 팽개치고 내게 고백한 그 용기를 나는 보호해 줄
필요가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게도 그녀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것이다.
미나는 다혜에게 나를 사랑한다고,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한번식 서로 구해 준 인연과 뜨겁고 긴 입맞춤,
고백과 또 뜨거운 입맞춤 따위를 서슴없이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다혜에게 물러나 줄 것을 간청했겠지.
다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다혜는 만만찮은 여자였다. 뭐라고 대답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헤어지겠다고 약속하고서 저렇게 강경해진 걸까? 아니면 헤어질 수 없다고 버티고선
약이 올라 저러는 걸가?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나님.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다혜는 내가 도장 콱 찍은 여자예요. 내가 차지하고 맙니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해치우고 싶은 대로 해치울 겁니다. 난 결코 시시하게 살다 신문에 부고 따위나 내고 죽진
않을 겁니다. 신문마다 며칠식 내 죽음에 대한 얘기를 쓰게 할 참입니다.
세종문화회관 앞까지 도착한 명식이와 나는 힘들게 마련한 관광버스표와 숙박예약권을 놓고 나온 것을 알았다.
"니기미...... ."
나는 명식을 내려놓고 다시 택시에 탔다.
"짐을 싣고 무조건 버텨. 출발해 버리면 뒤차로 꼭 갈 테니까 걱정말고 우격다짐으로 타라구.
이십분이면 돼. 십오분 후면 출발한다고 발광할 테니까 오분 동안만 버텨."
내가 택시에 올라타며 소리 질렀다.
"까짓거, 해볼게."
명식이는 소리쳤다.
택시는 무섭게 달렸다. 기사는 내 실수를 속력으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택시비를 두곱쯤 주겠다고 마음 속으로 약속을 했다.
누나는 멍청한 나를 눈 흘기며 쳐다보았다.
"다혜, 그 기집애 땜에 정신 뺏겨서 그런 거야 머."
"누군 사랑 안 해 본 줄 아니?"
"알았어. 갈게."
택시는 왔던 길로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계를 보고 지금쯤 명식이가 악을 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택시가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꺽어들었다. 시계를 보니 오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기사가 손가락으로 여행사 버스 앞쪽을 가리켰다. 명식이가 맞았다. 명식이는 배낭을
멘 채 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뛰어가자 명식이는 씨익 웃었다.
여행사 사람들과 운전기사들이 죽 둘러서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성공시켰지."
명식이가 바지를 털고 일어나며 한 말이었다.
"세상에, 저런 친구 첨일세."
여행사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땜에 출발도 못했잖소. 저 친구는 막무가내로 버스 앞에 누워 버리고......
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살다보니 별꼴 다 본다니까."
상황을 자세히 들을 필요도 없었다. 차가 출발하려고 하자 무조건 버스 앞에 누워 버렸고 말리는 사람들이
지쳐서 구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출발시간 전에라도 손님이 다 차면 당겨서 출발할 수 있는 일인데
명식이는 한사코 버스 앞에 누워서 버티더란 거였다. 나는 표를 내밀고 몇 번이고 미안하단 말을 했다.
여행사 직원들과 운전기사들도 따라 웃고 말았다.
"적당히 해두고 보내지 그랬어. 우린 고속버스 타고 가도 되는 거니까."
내가 녀석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슬쩍 이렇게 말을 걸었다.
"나도 사내다. 한번 약속한 거 지키는 놈이다. 너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내릴란다."
명식이는 정색을 해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
우리가 자리잡자마자 관광버스는 출발했다. 명식이는 제2호 차의 명물이 되어 있어서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운전기사도 명식이와 같은 독종을 25년 기사생활 동안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놈의 차 어째서 냉방이 안 되는 거요?"
명식이가 서울을 벗어나자 안내원에게 물었다.
"미안해요. 고장이 났어요."
"하필 왜 오늘사 고장이 나는 거요?"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말이나 돼요? 자동차 여덟 대가 몽땅 고장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명식이는 차표 위에 써 있는 냉방 버스 안내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내가 못 가게 한 건 미안한 일이고 이놈의 차가 사기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 악착같이 따져야겠다."
명식이는 내가 미안해서 말리고 나서자 이렇게 옹골차게 말했다.
"사실은 고장난 게 아니라 냉방장치를회사에서 못 쓰게 합니다."
운전기사는 냉방장치 가동으로 생기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장났다고 합니까?"
"그 편이 말하기 편해서 그런 겁니다."
"이런 찜통차를 타고 가는 손님들 생각은 않고 저희들 돈 벌 궁리만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여행 갔다 와서 분명히 것하곤 별개의 것입니다. 아깐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거야 손님 맘대로 하세요."
기사의 대답이었다. 여름철의 관광버스라는 게 거의 모두 그 지경이란 걸 승객들은 알고 있으면서
이듬해 또 탈 수밖에 없는 것은 목적지까지 편리하게 태워다 준다는 것밖에 없다.
수요가 넘치면 공급자는 언제나 행패가 심한 것이 우리나라의 도덕인지도 모른다.
찜통차.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관광버스는 낡고 칠이 벗겨지고 더러웠다. 냄새가 나고 불편한 것이야
늘상 겪는 일이지만 사고 예방도 마찬가지로 허술할 거란 생각을 하면 온몸이 근질거릴 일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게 아니라 팔당과 인제와 한계령을 잇는 산악으로 차가 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였다. 관광버스가 아니고선 그런 길을 굳이 달리려고 하지 않을 일이었다.
산악과 물굽이를 도는 아슬아슬한 버스의 행렬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산악길은 군인들의 피땀으로 얼룩져 만들어진 길이었다.
수럿이 돈을 투자한 고속도로가 엉망진창인 것에 비하면 그 험산준령을 그렇게 정교하고
깨끗하게 다듬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해 보였다.
설악산의 기암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버스에서 우리는 관광회사에 대한 불만을 아주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의 다리에 구멍이 나고 아스팔트 길바닥이 옛날 거지의 옷처럼 누더기가 되어 있는 현실에 비추어
그 험난한 산악의 아스팔트를 보면 뭔가 잘못된 도시행정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현대의 거지는 그런 누더기를 입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 행정만은 어째서 아직도 거렁뱅이의 누더기 꼴인지 모르겠다.
어떤 늙은이가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고 헛소리를 했었다. 병사는 살아서 말하는 것이지 죽어서 말하는 게 아니다.
한계령 산악길을 지친 듯 기어오르는 버스의 차창에 매달려 우리는 모두 감탄만 하고 있었다.
금강산에 비기면 욕 먹는다는 설악의 정경앞에 나는 갑자기 금강산 구경을 하고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 뒤
백두산과 압록, 두만강에서도 텐트를 치고 싶었다. 한계령 위에서 차가 멎었다. 백팔계단 위에 올라가
목청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메아리가 길게 여음을 몰고 내리꽂혔다.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명식이와 나는 물싸움을 했다. 명식이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잘도 쫓아 다녔다.
"야, 사진 한방 박자."
명식이가 카메라를 꺼내들었다.우리는 십수 년 전에나 유행했을 그런 어색하고 경직된
자세로 한계령 정상에 서서 승객 가운데 젊은 사람한테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어주던 승객도 우리의 촌스런 자세에 웃고 말았다.
"돈 왕창 벌어서 이놈의 설악산 사버리자."
나는 그런 명식이의 말투가 좋았다.
"팔까?"
내가 익살스럽게 물었다.
"안 팔면 접수해 버리는 거야."
"거, 좋고좋고."
"사실 난 이런 데가 첨이다. 이 더러운 놈의 다리 때문에 미치게 가보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지.
이제부터 한쪽 다리마저 없어지더라도 돌아다닐 거다."
명식이는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겨우 오늘 아침부터 말을 터놓는 사이였지만 마치 어릴 때부터
친했던 것처럼 부담없이 얘길 나눌 수 있었다. 우린 그만큼 배가 맞았다.
"너 돈 충분해?"
명식이가 물었다.
"억수로 써도 돼. 누나한테 보내달라면
"그게 아니고 저놈의 옥수수 좀 먹어도 되느냐 말이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옥수수가 마당 한가운데 쌓여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인 듯싶은 사람이 철푸덕이 주저앉아서 어린애 젖을 빨리고 있었다.
"통째 다 사도 돼."
내가 기분좋게 말했다. 명식이는 내게서 만원짜리 한장을 뺏어 가더니 옥수수 두 개를 사들고 왔다.
"임마, 겨우 두 개 사면서...... ."
"맛 있는 건 조금, 모자란 듯 사는 걸 알아야지."
옥수수 맛은 그 특유의 은근한 맛을 냈다. 출출할 시간이어서 그런지 맛이 좋았다.
"야, 법으로 옥수수를 이렇게 맛있게 할 수 명식이의 익살이었다. 법대생다운 농담이었다.
"옥수수 맛 하나 어쩌지 못하는 놈의 법을 우린 지겹게 배우고 있으니 원."
"누가 아니래. 인류 최초로 법 만든 녀석이 누구더라? 그 녀석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한테 죽어라 하고 매일 볼기짝 맞고 있을 거야."
"맞아 죽어도 싸지."
우리는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차에 올라 탔다. 내버려두면 아까 출발 때처럼 명식이가
또 차 앞에 벌렁 누워 버릴지 몰랐다. 태어나서 이런 여행을 처음 해보는 녀석이어서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어서 고등고시를 치르지 않는 형편이고 명식이는 실력이 있으면서도 그래서 우리는
법조계에 대한 질투가 언제나 들끓고 있었다. 할말을 다 하라고 내버려두면 볼 만할 것이다.
버스가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다. 맞은편 자리의 여학셍인 듯싶은 애들을 아까부터 봐왔지만
꽤 인상이 좋아 보였다. 나는 명식이의 총각딱지를 이번 여행길에 떼주고 싶었다.
"난 아직도 동정입니다. 나는 도덕 그 자체죠. 순진무구한 청년 그대로입니다."
언젠가 술좌석에서 명식이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이런 고백을 했다.
"총찬 씨는 숫총각입니까?"
명식이가 취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뇨."
"부럽습니다. 총찬 씨는 숫총각 딱지를 어디서 뗀 거요."
"어려서...... 그냥 그런 여자요 머."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난 깨끗한 여자한테 떼줄 거요. 귀찮고 번거러워서 발리 이놈의 동정 누구에겐가 주고 싶지만......
숫처녀나 깨긋한 처녀가 아니면 안 줄 거요."
명식이의 어투가 사뭇 도전적이고 나를 불결하게 취급하는 것 같았다.
"이형은 여자가 없소?"
내가 이렇게 건성으로 물었다.
"나라고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난 계속 혼자이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은 쓸쓸해 보였다. 신체적 불구 때문에 그 흔한 애인이 없는 것 같았다.
"쟤들 이쁘지?"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관심없어."
차가운 목소리였다. 버스는 양양을 돌아 동해의 명승지 길을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낀 해변길이 길게 뻗어 나갔다. 낙산해수욕장에서 승객 일부가 내리고 차는
다시 낙산사를 끼고 돌아 설악 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울긋불긋한 백사장 풍경이 정겹게 가슴에 와 닿았다.
"병신이 수영하러 왔다고 욕하지 않알까."
"지랄하구 있다. 너 그 따위 소리 한번만 더 했다간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내가 화를 냈다. 명식이는 멋적게 웃었다.
"너 수영 잘 한다고 했잖아."
내가 물었다. 명식이는 시골에서 자랄 때 수영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했다고 했다.
다른 운동은 다른 애들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지만 수영만은 물 속에서 기량껏 겨룰 수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영을 배웠는지 몇 번이나 강에서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도 했다.
그래서 결국 명식이는 동네의 수영선수가 되었었다.
그것이 내가 명식이를 가까이하는 명식이의 장점인 것이었다.
"여기서 네 수영실력 한번 보여 주자구. 구명요원들이 배타고 쫓아오도록 보여 주란말야."
나는 명식이를 충동질했다. 녀석의 투지와 주고 싶었다.
"바다는 첨인데."
"강물보다 쉬워. 처음엔 나만 따라서 해. 강물에서 한 시간 떠 있을 수 있으면 여기선
두 시간도 충분해. 물이 차니까 올리브유만 듬뿍 칠하고 들어가면 돼."
"까짓거, 해보자."
우리는 다시 여행사의 미니버스로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명식이와 둘이서 떠날 여행이었으면
해수욕장 근처의 여관을 잡았을 텐데 다혜와 이 여름의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 설악동 쪽에 여관을 잡은
것이었다. 내 음모는 간단한 것이었다. 다혜를 훔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나 말대로 다혜를 우지끈
뚝딱 꺽어놓고 말 계획이었다. 살아서 다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번 꺽인 나무는 꺽은 사람
마음대로이듯이 나는 다혜를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다. 욕망의 끝에는 내 사랑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책망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여자를 해치우고 도망가는 사내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괜찮은 것이다.
요즘 누가 결혼할 때까지 귀찮게 그 놈의 처녀, 총각 딱지를 끌어안고 사느냐 말이다.
"다혜하고 왔으면 근사할 뻔했잖아."
명식이는 제법 내 기분을 이해하려고 들었다.
"현지조달도 있고 차관도 있는데 멀."
"그러면 죄 받는다."
"받을 때 받더라도."
"너 같은 비도덕군자와 나 같은 도덕군자가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 아니냐."
"너 같은 친구 때문에 더러운 놈의 법이 생긴 거 아니가."
"맞다 맞아."
설악동 여관단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옛날의 어지러운 정취만큼 정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뻔질거리는 외모만이 관광개발이라면 뭐하러 개발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외국의 산장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산장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개발인 것만 같았다.
외국의 흉내를 그렇게 내고 싶으면 설악산도 외국의 산처럼 깍고 다듬어서 새로 만들 일이지.
이름도 알프스라고 고치고 구경 오는 사람들도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고쳐
T산장에 짐을 풀었다. 주인 남자가 친절하게 짐을 받아주며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나 말하라고 일러 주었다.
인상이나 태도가 장사꾼 같지 않았다. 태도나 말씨도 관광지의 장사꾼이 아니라 집안에 온 손님
대하듯 해서 기분이 좋았다. 온통 외국 흉내만 낸 설악산에서 내가 유일하게 맛보는
우리나라의 정취가 바로 주인의 친절이었다.
"오늘은 요 앞 물가에 가서 밥이나 해먹고 일찍 자자. 하루 종일 차를 탓더니 피곤하다."
내 제안이 달갑지 않은 듯 명식이는 자꾸 설악산과 바깥 풍경만 바라다 보았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을 테니까 오늘은 푹 쉬는 게 좋아."
방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저녁밥을 먹고 우리는 계곡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텐트촌을 끼고 왼쪽으로 숲길을
따라 걸었다. 명식이는 느닷없이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개나 걸이나 시인 되는 게 아니다."
"나는 개나 걸이 아니니까."
명식이는 확실히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시공부를 하지 않는것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어린 것들이 너무 많다."
명식이가 숲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텐트촌을 벗어나도 곳곳에 작은 촌락처럼 텐트들이 많았다.
외진 곳에는 까가머리 사내들과 단발머리 계집애들이 많았다. 우리는 호기심으로 그곳을 기웃거렸다.
어둠 나오고 있었다. 우린 숲속으로 자꾸 빠져 들어갔다 형광랜턴의 조명 밑에 나이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얼크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맥주병과 소주병이 그들처럼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저 꼴을 눈 뜨고 봐야만 하는 거니? 정의도 이런 땐 침묵하는 거니?"
명식이가 나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한두 쌍도 아니고 수십 쌍을 어떻게 다뤄."
"대여섯 쌍씩이니까 차례차례 훈계를 하면 되잖아."
"저런 경우엔 경찰에 연락해서 훈계하는 게 현명해.
철모르는 애들이라서 우리 얘기가 씨도 안 먹혀."
눈길을 피해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저런 저런!"
명식이가 이렇게 소리 질렀다.
"이놈들! 이 나쁜놈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명식이가 버럭 고함쳤다. 나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청계천 골목에서 눈짓 신호로 파는 이른바 문화영화 필름 한장면 같았다.
"어떤 새끼야? 칵 씹어 버린다."
술취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소녀들은 벗은채 텐트 속으로 뛰어 들어갔고
소녀들은 재빨리 수영복이나 반바지를 입었다. 벌서 그들 손에는 손도끼와 등산용칼,
식칼과 몽둥이가 들려져 있었다. 아홉 명의 움츠렸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라구. 학생 녀석들이 이따위로 놀아!"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맞받아 소리쳤다.
"으흐흐, 우리의 청춘공화국을 무단침입한 너희들을 지금부터 심판하겠다."
소년들이 재빨리 우리를 포위했다. 술냄새가 역하게 끼쳐 왔다.
술병을 깨뜨려 들고 서 있는 소년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놈은 병신이구나."
"머리통을 수박 쪼개듯 박살내 줄게."
"어른입네 하는 새끼들 보면 골통을 깨줘야 해."
"쟤들도 어른야? 그렇다면 표본실의 청개구리 실습 좀 해주지."
"배때지 갈라서 창자 구경 좀 해보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식이가 썩은 나무를 들고 입을 앙다물었다.
"느이들은 형도 없냐?"
명식이의 목청 터지는 소리였다.
"형님 아구통부터 조져주지."
한 소년이 도끼를 치켜 들었다. 나는 명식이를 그 자리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명식이의 몽둥이를 뺏어 들었다.
"얼씨구, 한번 춰보자 이건가!"
소년들이 바짝 다가섰다. 나는 몸을 낮추고 소년들의 동장을 유심히 살폈다.
어린 애들한데 표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비켜라."
내가 위엄있게 한마디 했다.
"나쁘게 말해 보시지 그래."
애들이 일제히 덤볐다. 나는 명식이를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시 세 녀석을 걷어찼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줘선 안 되는 게 어린애들이었다. 몸사릴 줄 모르기 때문에 큰 녀석들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나머지 세 녀석을 땅바닥에 눕혔다. 텐트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던 소녀들의 고개가 쏙 들어갔다.
"너희들 모두 나와."
내가 소리쳤지만 텐트 속의 소녀들은 아무말이 없었다. 명식이가 랜턴을 찾아 켰다.
텐트 속의 소녀들은 아직도 발가벗은 채 수건이나 등산모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 채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그녀들도 술에 취해 있어서 술 내음이 풍겨 왔다.
"이년들, 빨리 옷 입어."
명식이가 계집애들의 따귀를 한대씩 올려 부쳤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계집애가 무릎을 꿇고 명식이에게 빌었다.
"빨리 옷 입어!"
명식이가 악쓰듯 했다. 계집애들이 다른 텐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쓰러졌던 소년들을 풀밭에 앉혀 놓았다. 녀석들은 아직도 도전적인 자세를 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면서 한녀석씩 갈겨 주었다.
급소를 정통으로 맞은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빨리 옷 입고 짐 챙겨. 늦는 놈은 진짜 맛을 보여주겠다."
"형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을 테니 한번만 봐 주세요."
한 녀석이 무릎을 꿇자 나머지 녀석들도 모두 꿇었다.
명식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녀석들 파출소에 넘기면 모두 퇴학당하고 부모들 알면 기집애들은
머리끄댕이가 싹뚝 날아가. 그러니 대충 용서해 버려."
나는 그 순간에 내 계집애 동생 미숙이 생각을 했다. 하찮은 일로 퇴학을 당한 한때의 실수를
그들만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엔 어른들 세계가 너무 지저분하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애들을 저렇게 팽개쳐 둔 부모와, 어린애들이 이런 곳에 와서 저지경으로 놀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몰이해를 나는 그 순간에 또 생각했다. 건전하게 교제할 수 없게 만든
어른들 잘못을 나는 따지고만 싶었다.
"좋다. 대신 나하고 약속한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 떠날 때까지 같이 지낸다는 조건이다."
"승복하겠습니다."
소년들이 이렇게 말하자 계집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명식이 형님 따라가서 짐을 가져와라."
명식이가 세 녀석을 데리고 짐을 가지러 갔다.
나머지 애들을 둘러앉게 하고 오락시간을 갖게 했다.
애들은 티없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재미있게 놀기만 했다.
첫댓글 가는곳마다 정화운동이네요...ㅋㅋㅋㅋ잼나게 잘 읽고 갑니다~
고맙게 잘봤읍니다~
늦게와서 잘 읽고 있씁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