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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최후의 마에스트로(거장) 카를로스 클라이버 타계
←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최후의 마에스트로(거장) 카를로스 클라이버(Karl Ludwig Kleiber)가 2004년 7월 6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클라이버는 유려하고 다이내믹한 ‘초서체(草書體) 지휘’로 음악팬을 사로잡았지만,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음악감독’이나 ‘상임’으로 얽매이지 않은 음악적 자유인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등 특급 악단의 러브콜도 “한 군데 매이기 싫다”며 한사코 뿌리쳤다.
36세부터 2년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을 맡은 게 음악감독 경력의 전부다. 그는 까다로운 성품이어서 걸핏하면 연주와 녹음을 취소, 음반도 썩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완벽주의 예혼을 담아낸 ‘장미의 기사’ ‘오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엘렉트라’ 등 오페라와 ‘브람스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은 걸작으로 꼽힌다.
클라이버는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부친이 나치정권에 항거하면서 1935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학했다. 클라이버는 1954년 독일 포츠담에서 지휘자로 데뷔, 독일·스위스·이탈리아 오페라무대서 이름을 날렸다.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빈 필하모닉과 즐겨 공연했다.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클라이버는 그 자신에게조차 수수께끼’라고 저서 ‘거장의 신화(The Maestro Myth)’에 적은 대로, 수수께끼처럼 클라이버는 갔다./조선
[2004년] 주간조선, 국내 첫 신문사 발행 시사잡지 ‘신조선’ 창간호 발견해 일반에 공개
← 1927년 2월 10일자로 발간된 신조선 창간호 원본 속표지. 겉표지는 떨어져 나가 찾을 수 없다.
2004년 7월 6일 주간조선이 국내 언론사가 발행한 최초의 잡지 ‘신조선(新朝鮮)’ 창간호 원본을 찾아내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조선일보사가 1927년 2월 10일자로 발간한 이 잡지는 안재홍 당시 조선일보 주필의 ‘20년 후의 극동정세’를 비롯,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문예·과학·역사·스포츠·어린이 관련 기사·해설을 50쪽 분량으로 보도했다. 가격은 10전(錢)이었다.
‘신조선’은 지금까지 신문사가 발간한 최초의 잡지로 인정받아온 동아일보사의 ‘신동아(新東亞)’(1931년 11월 1일자)보다 4년여 앞서 발행된 것이다.
‘신조선’ 창간호에는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 조선일보 편집고문 문일평,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최초의 러시아 특파원 김준연 등 일제하 애국지사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정진석 한국외대 교수(언론사학)는 “신조선 발행은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으나 창간호 실물을 본 사람이 나오지 않았고, 창간 후 지속적으로 발간됐는지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한국 언론사 첫 잡지’란 사실을 공인받지 못했다”며 “이번 발견으로 조선일보사가 국내 언론사 중 처음으로 시사잡지를 발행했다고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조선
[2000년] 사법사상 최초의 대법관 인사청문회
← 2000년 7월 6일 사법사상 최초 열린 국회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이강국 후보자가 선서하고 있다.
2000년 7월 6일~7일 양일에 걸쳐 사법사상 최초의 대법관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박재윤 이강국 강신욱 배기원 이규홍 손지열 대법관 제청자를 상대로 열린 인사청문회는 국회의원들의 준비부족과 정파적 이해 그리고 인사청문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보자 역시 자신들의 철학보다는 핵심을 비켜가는 답변으로 일관, 인사청문회의 운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대법관 후보들의 답변이 대체적으로 형식적이어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점과 활발한 논쟁과 토론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물론 진솔하고 자기반성적인 답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대법관 후보들의 답변이 너무 정치적이다 못해 눈치보기식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조선
[1998년] 국산 중어뢰 ‘백상어’ 개발
← 국산 중어뢰 ‘백상어’
1998년 7월 6일 잠수함에 탑재돼 적의 수상 함정이나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는 중어뢰 `백상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됐다. 가격은 1발당 9억5천여만원이다. 당시 실전배치돼 있는 일부 209형 잠수함은 1발당 22억원에 달하는 독일제 어뢰 `수트`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개발로 모두 2천여억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백상어`는 `수트`가 잠수함에서 선으로 유도하는 유선 유도 방식인데 비해 적 함정의 소리를 스스로 추적해 공격하는 첨단 능동형 음향 호밍 어뢰이다. TNT 폭약 3백70kg에 버금가는 강력한 파괴력도 갖고 있다. 1990년 국방과학연구소의 주도 아래 lg정밀 등 13개 업체와 연구소 등이 참여해 개발에 착수했으며 국산화율이 94.3%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제원은 사정거리 30여km, 최고 속도 35노트(시속 65km),길이 6m,무게 1.1t,직경 19인치(4백83mm)이다./조선
[1995년]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방한
← 김영삼 대통령이 방한한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을 맞아 사열하고 있다.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남아공 대통령이 김영삼대통령의 초청으로 2박3일간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하기 위해 1995년 7월 6일 오후 특별기편으로 공식 방한했다.
만델라대통령은 7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두나라간 외교, 민주화투쟁 경험과 개혁,경제적 협력방안 등을 협의했다. 두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무대에서 계속 긴밀히 협조해 나가기로 하고,북한이 하루빨리 고립에서 벗어나 교류와 협력의 세계 조류에 합류해야 한다는데도 인식을 같이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한편,남아공이 오는 2004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도록 한국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며,김대통령은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조선
[1989년] 카다르(Janos Kadar) 헝가리 전 공산당 서기장 사망
← 헝가리 전 공산당 서기장 야노스 카다르
야노스 카다르 전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이 1989년 7월 6일 사망했다. 향년 77세였다. 카다르 전 서기장은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 학생, 노동자들의 반소봉기를 짓밟던 1956년 집권한 뒤 1970년대 헝가리를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번창하고 개방적 국가로 이끈 인물이다.
농촌 출신인 카다르는 그의 나이 19세였던 1931년 불법단체로 규정됐던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갔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혁명에 성공했으며, 철저한 스탈린 주의자인 마티아스 라코시 정권 아래서 카다르는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이미 카다르의 급신장을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라코시는 1951년 카다르에게 간첩죄와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티토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며 그를 체포해 버렸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죽자 라코시 정권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고, 카다르는 1954년 감옥에서 풀려나 복권됐다. 점증하는 국민들의 불만으로 라코시는 1956년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학생들은 그 해 10월 23일 언론자유, 소련군 철수, 다당제 실시 등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봉기가 진압되자 카다르는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1958년 6월에는 나지 전 총리와 추종자들을 사형시키는 등 강권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나지가 사망한지 석달이 되기 전에 카다르는 경제개혁을 단행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헝가리는 조심스럽지만 자유주의 노선을 걷게 됐으며 이로 인해 헝가리는 점차 번영을 누리게 됐고 서방 세계와 밀접한 유대를 맺게 됐다./조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로 제9대 대통령에 박정희 당선
1978년 오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공화당의 단일 후보로 나선 박정희 현직 대통령이 당선됐다. 출석 대의원 2,578명 가운데 2,577명으로부터 찬성표를 받았다. 나머지 한 표는 무효였다.
그는 이로써 1963년 직접선거로 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5선을 기록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80년대에 조국을 번영시켜야 하는 사명감에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10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다. /YTN
[1976년]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의 아버지’ 주덕(朱德) 사망
←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덕
중국 인민 해방군 ‘건군의 아버지’ 주덕(朱德)이 1976년 7월 6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886년 사천성에서 태어난 주덕은 1911년 신해혁명 때 운남의 무장봉기에 참여, 지방 군벌 내에서 기반을 굳혔으나 1922년 프랑스를 경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주은래를 만나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귀국해 북벌에 참가했고 1928년 정강산에서 모택동 부대와 합류했다. 당시의 홍군이 ‘주모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군사능력은 뛰어났다. 1937년에는 국공합작으로 홍군을 개칭한 국민 혁명군 팔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항일전을 지휘했다.
팔로군과 신4군을 합친 인민해방군의 초대 총사령관인 채로 1949년 건국을 맞은 주덕은 이후 국가 부주석, ‘10원수’ 서열 1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거쳤지만 정치적으로는 두드러진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4인방’의 군 원로들을 향한 공격을 비판하여, 임표나 강청 등 급진파로부터 “모택동에게 반대했다”고 규탄받아 정치국원으로 한때 격하되었지만 실각하지는 않고, 임표 추락사 이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유지했다./조선
[1971년] 사법파동 발생
1971년 7월 6일 서울지방 검찰청 공안부 검사들이 서울형사 지방법원 항소 3부의 2판사와 입회서기에 대해 구속 영장을 신청하면서 국가배상법을 둘러싼 사법부와 행정부의 갈등사건인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피의사실은 재판부가 증인검증을 위해 제주시로 출장했을 때 비행기탑승료·주대(酒代)·여관비 등의 명목으로 9만여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배경은 대법원이 군인·군속 등 특수신분인 경우 국가배상청구권을 제한한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단서조항을 인간의 존엄, 평등권, 국가배상청구권에 반한다는 위헌결정을 내린 데 대해 정부가 보복조치한 데서 기인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100여 명의 판사가 집단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러 당시 사법부 및 정계에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한국 사법사에 사법권의 침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브리태니커
[1971년]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사망
←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
재즈의 황제 루이 암스트롱이 심장마비로 1971년 7월 6일 사망했다. 암스트롱이 죽었을 때 미국 매스컴은 ‘문화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추도했다. 그는 재즈의 역사였다.
재즈음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행복하게 일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흥청거리던 뉴올리안즈의 빈민가에서 시작됐다. 부모조차 돌봐주지 않는 버림받은 부랑소년은 소년원에서 음악을 배웠고 이후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 1929년의 대공황, 알 카포네가 휩쓴 금주법시대의 중심부에서 거의 종일 트럼펫을 불며 분투했다.
그는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의 대위적 선율을 주축으로 삼는 뉴올리언즈 재즈의 리듬과 아프리카의 블루 노트를 유럽의 음악유산으로 완성,1930년 이후 태동한 스윙재즈의 빅 밴드스타일로 넘겨준 사람으로 재즈사에 기록되고 있다. 그는 무지막하게 커다란 입이라는 의미의 슬랭인 ‘사치모(Satchmo)’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즉흥연주의 대가로 초창기의 재즈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목 루이 암스트롱은 ‘블루베리 힐’(1949) ‘맥 더 나이프’(1956), ‘헬로 돌리!’ 등의 명곡을 남겼다. 훗날 재즈의 황제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누군가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자 루이 암스트롱은 "이봐, 뭘 알려고 드나, 영원히 모를 걸세"라고 대답했던 일화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조선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지역에 UFO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 1947년 7월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공군기지 부근에서 번개맞고 추락한 UFO로 추정되는 비행체에서 발견된 외계인 사체를 비밀리에 해부하고 있는 것을 촬영한 필름의 한 장면.
2차대전 종전 2년뒤인 1947년 7월 히틀러의 유럽침공을 압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우주인이 지구를 침략했던 것이다. 이날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지역에서 UFO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됐다.
언론은 물론 미 정부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외계인 5~6명이 비행접시 부근에서 사체로 발견됐고, 몇몇 외계인은 생존해 있었다. 맥 브라젤이란 농부는 자신의 목장에 떨어진 UFO의 파편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까지 생소했던 ‘UFO’(미확인비행물체)의 데뷔였다.
그러나 충격적인 이 사실은 곧 바로 부인된다. 미 정부의 해명자료는 ‘비행접시가 아니라 기상관측 풍선의 잔해’였다. 그럼에도 1947년 7월의 해프닝이 일으킨 UFO 열풍은 1947년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전자 뚜껑을 찍은뒤 UFO라 주장하는 사람도 끊이질 않았다. ‘X파일’이란 드라마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제작사에 거금을 안겨줬다. 전쟁도 끝난지 2년이 지나 조금 한가해진 인류가 눈을 외부에 돌려 신기한 것을 찾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947년 7월의 해프닝 22년뒤, 지구인은 소속원을 달에 보냈으나 달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던 원주민 토끼를 만날수는 없었다./조선
[1933년] 미국 프로야구 첫 올스타전 개막
← 올스타전 선수단이 개막 전 한곳에 모여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1933년 7월 6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미국 야구 팬들의 열전인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1845년 알렉산더 크라이트와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뉴욕클럽에서 시작된 미국야구는 1850년대 뉴욕, 시카고 등지를 시작으로 야구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1870년대에 들어 이내 미국인의 대중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76년 2월 메이저리그의 원조인 내셔날리그가 탄생했고,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 1905년에는 월드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1933년 오늘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誌)의 스포츠 담당기자 아치 워드의 제안에 따라 올스타전이 탄생했다.
출범 초기 미국 프로야구의 최대 행사인 월드시리즈의 권위에 손상을 입힐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올스타전은 일반 팬들의 투표로 선발된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단, 투수는 국내와 다르게 팬투표를 거치지 않고 감독이 뽑은 선수가 출전하도록 했다. 참가선수 인원은 50명으로 제한했고, 감독 자리는 전년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팀의 사령탑에 주어지도록 했다.
이날 수용인원 4만9천명인 야구장은 올스타전을 보려는 팬들로 성황을 이뤘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코니 마크 감독과 뉴욕 쟈이언츠의 존 마그로 감독의 지휘 아래 펼쳐진 경기 우승은 베이브 루스의 2런 홈런에 힘입은 전자(4대2)에게 돌아갔다. 올스타전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등의 이익은 선수들의 후생자금으로 쓰였다./조선
[1893년]프랑스 작가 모파상(Henri Rene Albert Guy de Maupassant) 사망
←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
1893년 7월 6일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이 파리 교외의 한 정신병원에서 43세로 숨졌다. 모파상은 한 해 전에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노르망디의 미로메닐에서 태어난 모파상은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중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참전한다. 전쟁은 그를 극심한 염전(厭戰) 감정에 빠지게 해 그의 발걸음을 문학으로 돌리게 했다.
모파상의 문학 이력에는 두 사람의 선배 문학인이 등장한다. 바로 플로베르와 그의 소개로 알게된 에밀 졸라이다. 플로베르는 그에게 직접 문학을 가르쳤고, 졸라는 자신이 주도하는 자연주의 문학동인 ‘메당파’에 모파상을 끼워넣음으로써 소설가 모파상을 탄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1880년 모파상은 졸라를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에 자신의 출세작인 중편소설 ‘비곗덩어리’를 싣는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짜임새 등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로써 그의 문단 데뷔를 확고히 했다. 1883년에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발표함으로써 문명(文名)을 더욱 높였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까지 평가받았다. 27세부터 신경증세를 앓아왔으나 고통속에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아미’(1885) ‘몽토리올’(1887) ‘피에르와 장’(1888) ‘죽음처럼 강하다’(1889) ‘우리들의 마음’(1890)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에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어두운 염세주의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의 무감동적인 문체를 통해 그의 작품 전체에 묘한 고독감을 감돌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그의 질병과 맞물려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조선
[1885년] 파스퇴르, 광견병 치료 성공
← 파스퇴르
1885년 7월 6일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조제프 메스테르라는 9세 된 소년의 생명을 구했다. 이로써 광견병을 예방·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파스퇴르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1882년 당시 광견병의 예방적 치료를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광견병에 걸린 동물의 타액을 접종하는 실험을 한 뒤에 이 바이러스가 신경중추에도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광견병에 걸린 개의 연수 일부를 건강한 동물에 접종하면 광견병의 증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끝에 그는 접종에 사용할 수 있는 약화된 형태의 바이러스를 얻어냈다. 1888년 파스퇴르는 광견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했다. 파스퇴르의 광견병 연구는 의학자 집단과 언론으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밖에도 파스퇴르는 발효·저온살균·맥주·탄저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브리태니커
[1872년] 한말의 의병장 장윤덕(張胤德) 출생
1872. 7. 6 경북 예천~1907. 9. 1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아버지는 재안(載安)이다.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재직했으며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사임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비롯한 일제고관과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재차 거사할 기회를 엿보았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궐기하고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키자, 각 처에 창의격문을 돌리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다. 이강년 휘하의 의병장으로 주로 풍기·봉화·문경·용궁·예천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7월 9일 일본경찰과 교전하여 경찰 보조원 3명과 순검 2명을 사살했다. 8월 27일 의병 300명을 이끌고 풍기에 있는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했으며,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 소각했다. 그후 9월 3일에는 문경읍으로 나가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 가옥을 소각했다. 9월 10일에는 이강년·민긍호 연합부대에 합세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문경면 갈평리에서 일본 경찰대 및 수비대와 교전하여 5명을 사살했다.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16일에는 대구수비대와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결국 의병진은 와해되고 그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에서 총살당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796년]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NikolayⅠ) 출생
1796년 7월 6일 태어남 / 1855년 3월 2일 죽음
"내 힘이 다 할 때까지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리라." - 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 1세는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파벨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알렉산드르 1세가 갑자기 죽은 후,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진압하고 1825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로 인해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실시해 출판물 검열을 엄격히 하고, 대학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 또한 러시아인과 유럽인의 여행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비밀경찰로써 질서유지를 꾀했다. 대외정치 역시 공격적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이란과 터키를 간섭했다. 그 때문에 터키를 돕는 영국·프랑스와 충돌하게 되었고, 1853년 크림 전쟁이 일어났다. 화폐제도의 개혁, 철도의 건설, 기술 학교의 개설 등 내정 개혁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농노제 폐지를 두려워했고 모든 독립적 발안과 대중의 참여에 의혹을 품어 전제정치 유지를 결심한 니콜라이와 그의 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근본적 개혁을 도입할 수는 없었다./브리태니커
[1599년] 권율(權慄)장군 사망
← 권율장군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장군이 1599년 7월 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62세였다. 장군은 1537년(중종 32년) 영의정 권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45세인 1582년 식년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급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를 모집, 곽영, 이광 등과 함께 4만명의 군사로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광주로 되돌아온 권율은 의병을 다시 모집, 3천여명으로 충남 이치에서 적과 싸워 고바야카와의 대부대를 참패시켰다. 이 승리로 왜군들은 그후 다시 전라도 지방을 넘보지 못했으며, 이 싸움은 임진왜란 7년에 걸친 전투중 육군의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 군사와 승병 8천여명을 이끌고 서울 탈환에 나섰다. 서울로 향하던 중 수원의 독왕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은 경기-충청-전라도의 관군 및 의병 총지휘관이 되어 1593년 2월 28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왜군들은 북쪽에서 서울로 퇴각 중 경기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사에 승리한 터라 사기가 드높은 때였다.
마침내 2월 12일 왜군들은 3만여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쳐들어왔다. 왜군은 이날 하루에만 9회에 걸쳐 산성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 2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승리로 권율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랐다./조선
[1535년]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처형
← 토마스 모어
소설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가 1535년 7월 6일 58세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는 법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학중이던 옥스퍼드대를 중퇴하고 런던법학원에 입학했으나, 대학 재학중에 르네상스 문화운동을 접하면서 인문주의자와의 교류를 시작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1511)도 모어의 집에 기거하며 쓴 것이다. 인문주의자란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연구하고 새로 편찬하던 학자들을 뜻한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며 의회에도 진출했다.
1515년 통상외교문제로 네덜란드에 건너간 모어는 임무를 끝마치고 그곳을 여행하며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쓰기 시작해 이듬해 귀국한 후 완성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어원으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이상향과 동일시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유토피아’는 미지의 땅에서 실현된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교육평등 등을 묘사함으로써 중세말기의 유럽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작품은 그의 사후 1551년에 영역됐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아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인문주의자로 신랄한 언어를 서슴지 않았으나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교이며 이름난 명문가이자 논쟁가로 서민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1935년 로마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주었다./조선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John Wyclif)와 얀 후스(Jan Hus) 화형
← 이단으로 정죄돼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얀 후스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가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는 살아서 화형당했지만 위클리프는 이미 죽어있던 사람이었으므로 시신이 파헤쳐져 화형에 처한 다음 강물에 던져졌다.
위클리프는 기존 교회질서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었고, 후스는 루터보다 1백년 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설교를 열정적으로 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의 종소리’를 울린 사람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6차 공의회로, 목적은 주로 세명의 교황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를 재통일하라는 것이었으나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을 조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의회는 교회의 전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내용의 교령 ‘사크로상타’를 공포하고, 또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후스의 30개 조항을 단죄한 뒤, 이들을 구제가 불가능한 이단으로 공포하고 세속 권력에 넘겨 화형당하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더욱 강력한 개혁조치를 취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많은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조선
그밖에
2005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12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런던 확정
2005년 스코틀랜드 G8정상회담
2005년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노조 파업
2004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다이애나 추모 분수 제막
1998년 미국 영화배우 ‘카우보이의 왕’ 로이 로저스 사망
1983년 서울 IPU(국제의회연맹) 중국가입 제의
1982년 미소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개시
1982년 12회 대한국제회의 개막
1975년 코모로,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4년 시인 신석정 사망
1970년 미국, 주한미군 감축 정식통고
1966년 말라위, 영국연방내 공화국으로 독립
1964년 소련, 유엔 가맹국에 유엔 상비군 설치를 제안
1964년 키프로스 비무장지대 설치 위해 유엔군이 그리스 무장해제
1962년 한국-모로코 국교 수립
1962년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사망
1961년 북한, 소련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조인
1960년 콩고, 레오폴드빌서 군대반란
1959년 프랑스, 자르 관리권을 서독에 반환
1953년 유네스코(UNESCO) 한국지부 설치
1952년 세계평화평의회, 베를린서 특별총회
1950년 부산에 한미연합해군방위사령부 설치안 가결(총사령관에 맥아더)
1950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피랍
1935년 제14대 달라이 라마 출생
1931년 카보런덤 발견, 흑연 제조방법을 완성한 미국의 발명가 애치슨 사망
1929년 중화민국, 신국도를 남경으로 결정
1928년 미국 워너브라더스사, 세계최초의 발성영화 ‘뉴욕의 등’ 제작
1923년 소련연방, 연방국 헌법 제정
1921년 몽고 인민혁명정부 수립
1917년 영국장교 Th.E.로렌스가 지휘하는 아랍반군이 터키군의 요충지 아카바를 점령
1915년 대만의 대남서 항일봉기(서래암사건) 일어남
1914년 선린고교 한국학생, 일본학생과 충돌
1909년 일본 각의,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건 의결
1908년 로버트 피어리 북극 탐험 위해 뉴욕 출발
1907년 광복회 안휘성에서 봉기 실패
1907년 호남학회 창설
1906년 궁금령(宮禁令) 발포
1905년 이승만, 윤병구.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고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1877년 스페인의 대통령(1931-36) 알칼라 사모라 출생
1854년 ‘옴의 법칙’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옴 사망
1851년 최초의 전동기 발명한 데이번포트 사망
1832년 멕시코 황제를 지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출생
1796년 러시아의 황제(1825-55) 니콜라이1세 출생
1533년 서사시 ‘성난 오를란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인 아리오스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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