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아버지
가와타 마리(川田眞理)
아버지(사토 시로)가 하늘로 돌아가신지 벌써 8년이 되어 갑니다. 아버지는 1918년 충북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한국은 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약 40년에 걸쳐 도움받고 살았던 소중한 고향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두 번의 일본군 침략을 시작으로 옳지 않은 길을 걸어온 과거가 있었고, 식민지로서 35년간 긴 고난의 역사가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대죄, 상처의 흔적을 생각하면 마음 깊이 죄송함 뿐입니다. 그래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자수명의 땅인 청산에는 조선시대 귀족과 고관들이 은퇴하여 지내던 곳이어서 그분들과 할아버지가 서로 필담을 나누며 교류했던 때가 그립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송두용 선생과 친척이던 인근의 대부호 송복헌 씨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깜짝 놀랐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가족은 한국의 이웃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미움받는 일본인이 많았음에도, 집 앞을 지나는 한국의 이웃들이 아버지의 집을 가리키며, "이 집에는 좋은 일본인이 살고 있어."라고 말했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모에게서 듣고, 정말 감사한 일이라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 집은 나중에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났을 때, 아버지의 고향 청산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고종사촌 언니와 둘이서 방문하였습니다. 생각지않게 당시의 제자분들이 집이 있던 곳을 가르쳐 주셔서 아버지와 고모가 나고 자랐던 땅을 밟아보았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31년 청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국말을 잘 하여 친근감에서일까, 동급생 민형래 씨와 친해졌습니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이끌려, '이 매력은 도대체 어디서 올까' 하고 늘 궁금해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그후 인생을 바꾼 결정적 만남이었습니다. 민형래 씨는 일본에서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게 신앙을 배운 김교신 선생의 일요집회원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고도 동양에는 동양정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질문하니,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나 야나이하라 다다오 선생의 저서를 통해 성서와 신앙을 배우기 바라네." 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동급생 이종근 씨도 집회에 출석하게 되어, 일요집회를 마친 월요일마다 민형래와 이종근 씨 둘이서 강의 내용을 놓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합니다. 그 두 친구로 인해 조금씩 복음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1937년 4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광양서 소학교에 부임한 아버지에게 민형래 씨가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을 보내주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성서의 셰계가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제대로 알지 못하여 바로 가까이 김 선생이 있었음에도 집회에 참석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였습니다.
1945년 패전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귀국하기 까지의 수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 야나이하라 선생의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수없이 반복하여 읽고, 특히 예레미야에 크게 감동하여 일본에 돌아온 후에 야나이하라 선생의 저서를 통해 성서를 배워갔습니다. 결국 신앙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국의 여러 사람들 덕분에 하나님을 알고, 무교회 그리스도교를 알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받았습니다. "성서를 몰랐더라면 참 부질없는 인생을 살았다 생각하니, 한국의 그분들께 감사하기 그지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이종근 씨는 1940년 10월 19일,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매년 그날이 되면 친구를 생각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민형래 씨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 언제 여쭤봤더니,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은 기회가 있었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한국과 국교가 회복된 1968년 8월에 방한하여 27년간 아버지의 소식을 찾던 제자들과 감격의 재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속리산 하기성서강습회에도 참석하였고, 민형래 씨에게 성서를 전한 민 씨의 친척 박정수 여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너무나 놀랐고 감격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개월쯤 전에 니가타성서연구회의 여러분이 입소시설로 위문을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신 후 방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큰 소리로 "한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마도 한국에의 감사가 아버지 마음에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큰 사랑으로 감싸준 한국과 길 잃은 양같은 나를 신실한 삶으로 구해주신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외쳐보겠습니다.
"한국과 아버지, 만세!"
두 나라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가와타 마리 씨는 사토 시로의 차녀입니다.)
첫댓글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감사 감사 늘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면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