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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 대민(주일낮)
무룻 거짓되고 헛된 것(욘2:7-9)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세상에는 거짓되고 헛된 것들이 많습니다.
거짓은 속고 속이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고 헛된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은 ‘무가치한 것,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하는 단어와 ‘수증기, 숨’을 의미하는 단어가 결합한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허상, 우상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식이 있는가 하면 영적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적 지식인 성경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받아 들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은 상대적인 지식으로, 성경과 일치할 때는 받아들이지만 성경과 맞지 않을 때는 부인합니다. 성경에 위배될 때 그 모든 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윗은 기도할 때에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시31:6)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우상들은 허탄한 거짓입니다. 다윗은 이런 우상숭배자들을 미워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 행위를 미워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였습니다(롬1:23).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니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벌레로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고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본래 우상 숭배에는 반드시 도덕적 부패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오직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참된 종교, 참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삶은 거짓되고 헛된 것이요, 향방 없는 달음질이요, 그리고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찾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염려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참 되십니다.(고전 1:9).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거짓되고, 사람이 만든 우상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 그러나 우상과 우상 숭배자들은 다 망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습니다.
1.여호와를 생각하지 않는 것(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우리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눈 뜨자마자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은 과연 무슨 생각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갈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갈망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요나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며, 하나님께서 응답 주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침에 눈을 뜬, 잠에서 깬 우리의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생각인가 확인해 봐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갈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가깝게 느껴보기 원하는 갈망과 갈증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사랑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보고 싶어하는 갈망과 갈증입니다. 하나님과의 그 사랑에 대한 갈망과 갈증입니다. 그렇기에 눈을 뜨자마자 내 가슴을 물 밀듯 밀고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피곤해 있을 때 생각만 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죠지뮬러의 병상일기에는 이러한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몸은 어느 때보다 약해졌고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기도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더 걱정되는 것은 내 몸이 아프다는 것보다 내게 속해있는 어린아이 걱정이다. 나는 요양를 위한 돈도 거처도 없기 때문이다." 그후 필요한 돈이 보내져 왔고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고난 중에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성산에서 준비해 놓았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준비해 놓았을 것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더 큰 깨달음과 더 큰 사명을 감당케 하려고 할 때에 고난 중에 예비하십니다.
보통 때 느끼지 못하였던 것을 느끼게 하고, 보통 때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바치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예비한 제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버린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주기 위한 연단입니다.
요나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요나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구원의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는 영혼이 피곤할 때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풍랑에 시달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잠도 잘 수 없었고 피곤한 환경에서 영혼도 탈진한 상태에서 아무 것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건 속에서 요나는 외쳤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보통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실패를 거듭하고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은 도무지 앞길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 속을 채웁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절망의 순간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각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고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어떤 생각을 갖는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말이 씨가 되어서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해서 우리들의 운명과 환경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요, 창조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를 입으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숨 막히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기도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기도가 진정한 과학이요, 능력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도무지 되지 않는 일,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를 만났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기도의 맛을 알고 나면 기도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사실 요나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지만 요나 역사하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직까지 응답받은 것은 아니지만,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신 것으로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요나가 아직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구출해 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감사한 요나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면, 어떠한 경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요나였기에 그 죽음의 자리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를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일에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손에 쥔 자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2.베푸신 은혜를 버린 것(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하게 되고 어떠한 어려운 처지와 환경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강 가운데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담대할 것을 명하시면서 자신이 늘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수1:5-6).
마찬가지로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어 모든 길에서 실족지 않고 승리케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게 하십니다.
사실 모든 성도는 죄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다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믿음의 길로 행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보호 하심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와 오늘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결과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마치 돼지가 매일매일 도토리를 먹으면서도 도토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토리는 원래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들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자비를 곧바로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경우를 우리는 결코 특별한 경우라 볼 수 없는데 그것은 그만큼 은혜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는 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이었습니다(눅 17:11-19).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시편116편12절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여기서 우리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고, 조목조목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짧은 시에서 시인은 여러 차례 자기가 기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이렇게 들어주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역사하셨다!” 구체적인 일에서 실제 사건 속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그 누가 막아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누구이신가?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모르고 혈기로 대한 모세는 그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자비의 깊이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는 그분의 은혜를 더욱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의 더 깊은 곳에 들어가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죄와 유혹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보다도 더 강합니다. 죄의 영역이 아무리 넓고 깊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영역은 그 보다도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골짜기가 깊으면 깊을 수록 산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깊이 뉘우치는 회개의 골짜기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은혜의 산 봉우리는 더욱 더 높아져 갑니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위해 성실히 산다고 해도 결국 그 놀라운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 죽기까지 사랑하신 은혜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갚을 수 없는 은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분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더욱 절감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보살핌과 구원하심이 요구되는 존재인 것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베푸신 은혜를 버린 것이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3.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드리지 않는 것(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구원시키고 싶으셔서 요나를 선지자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과거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니느웨를 구원시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사람은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는 요나가 탄 배는 파도에 횝 쓸리게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니 반드시 누군가 죄인이 이 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죄인을 가려내기로 하였습니다.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바다로 던지자 말자 큰 물고기 즉 고래가 요나를 삼키고 말았습니다. 이제 요나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요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본문9절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이 노래와 감사는 복을 주신 데에 대한 감사라기보다는 풍랑을 주신 데 대한 감사이며, 자신을 죽게 만들어 주신 데에 대한 감사입니다. 스올의 깊은 속으로,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던져 주신 데에 대한 감사입니다.
요나는 그 환난과 죽음 속에서 회개와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생명, 두 번째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자신의 최대의 깨달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올의 밑바닥에 떨어진 그대로의 자세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부르짖는 겸손과 의지하는 믿음과 회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거친 바다에 던져졌음에도 죽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에벤에셀의 감사를 했고, 지금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 있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에 임마누엘의 감사를 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시 성전을 바라보게 될 것을 믿으며 여호와 이레의 감사를 했습니다.
이런 감사가 요나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도 요나의 기도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요나처럼 감사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 그대로 감사의 제사, 즉 감사의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감사의 제사는 곧 감사의 목소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찬송으로도 나오고, 기도로도 나오며, 말 속에도 나오고, 행동 속에도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사람은 한 입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있습니다. 감사는 곧 단물이고, 불평은 곧 쓴물 입니다. 우리들은 입만 열면 감사가 나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기본으로 가질 때 긍정적이 되며 이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시편50편14절에 “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우리의 서원을 갚아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들의 생활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호흡처럼 중단할 수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어떤 사람은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정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체험이 없고, 기도가 개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고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도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의 지침서로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성경 여러 곳에 기도를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코로 호흡하여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영혼의 호흡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요나는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요나는 물고기 뱃속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드릴 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결코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나아갈 것임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놀라운 삶의 모습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베푸신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르고 불평과 원망에 빠지게 되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의 말을 하며 살아가는 삶이 복된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드리지 않는 것이 무룻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1.여호와를 생각하지 않는 것(7)
2.베푸신 은혜를 버린 것(8)
3.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드리지 않는 것(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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