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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으뜸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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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남경대(攬景臺)는 용담(龍潭) 권지(權誌, 1567~1637)가 1615년(광해군7) 영해도호부사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의 권유와 건축비 부담으로 반변천 강안 남경대 절벽 위에 대지를 마련하여 정자를 짓고, 좌우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여 남경대라 하였다. 권지는 임진왜란 때 이곳 이웃 마을인 북면 후평리에 피난하여, 용담정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한 적이 있으므로 남경대 주변은 익숙한 지형이었다. 아들 번곡(樊谷) 권창업(權昌業)과 손자권태시도 이곳을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817년(순조17)경 권태시의 6대손 권상도(權尙度)가 사림에 폐허 참경을 알려서 1827년 (순조27) 권지, 권창업, 권태시 3대의 학행을 추모한 영남사림에서 남경대 중건계(重建契)가 조직되고, 이로부터 약 100년 후에 사림대표 정건모(鄭建模), 조진용(趙晉容), 권한모(權翰模), 신익호(申翼浩), 오석준(吳錫浚) 등이 주도하여 3년간의 건축공사로 훼철된 봉람서원 (鳳覽書院)의 기와와 목재로 1916년 남경대를 중건하고 춘추로 계회를 하였다. 그 뒤 1993년에 후손에 의하여 남경대가 새로 건축되었다. |
건축 구성 |
남경대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이다. 하층은 모두 개방시켰으며, 상층에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인 우물마루를 두었으며, 퇴칸의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시멘트 기단 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은 후 12본의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오량가구의 홑처마집이다. |
현판 |
남경대(攬景臺) |
산택재(山澤齋) |
영모당(永慕堂) |
당 안의 동편 벽면에 걸려있다. |
남경대기(攬景臺記) |
1920년 9월 하한(下澣)에 진성(眞城) 이만규(李晩?, 1845~1921)가 쓴 기문이고, 기문 뒤에는 1992년에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추록(追錄)이 적혀있다. |
산택재운(山澤齋韻) |
영모당운(永慕堂韻) |
차운(次韻) |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차운(次韻) |
난은(懶隱) 이동표(李東標)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각각 쓴 2수의 시문이다. |
시판(詩板) |
종후생(宗後生) 권재강(權載綱)이 쓴 시문이다. |
누정 이야기 |
- 누정이야기 |
권태시는 1684년(숙종10) 남경대를 중건하고 이곳이 반변천에 위치하여 경치와 지형이 『주역(周易)』의 산택손괘(山澤損卦)와 같다고 하여, 남경대에 산택재라고 편액하였다. 산택손괘는 못의 흙을 파서 산에 올리면 못은 깊어 좋고 산은 높아 좋아진다는 것인데, 자기 수양을 철저히 하면 스스로 좋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찾아와 권태시가 지은 「산택재 원운(山澤齋原韻)」에 차운하면서 수려한 산천의 풍광을 격찬하였다. |
관련인물 | |
- 권예(權?, 1495~1549) | |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崖)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16년(중종11) 식년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마애실기(磨崖實記)』가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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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지(權誌, 1567~1637) | |
자는 중명(仲明), 호는 용담(龍潭)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문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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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창업(權昌業, 1600~1663) | |
자는 자기(子基), 호는 번곡(樊谷)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권지(權誌)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언필(朴彦弼)의 딸이다.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박호(朴豪),이엄(李儼) 등과 교유하였다. 효종 때에 재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왕명에 향리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추천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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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시(權泰時, 1635~1719) | |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택재(山澤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선중기의 뛰어난 예학자이다. 그는 고려조 개국공신인 태사공 행(幸)의 25세손이며, 중종시 이조판서를 지낸 권예가 고조부가 된다. 부친은 문행으로 널리 알려진 숭정처사 권창업이다. 권창업과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당시 명사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어려서 경당 장흥효의 수문인이었던 아버지에게 글을 읽었고, 장성하여 졸재 유원지 문하에서 성리, 상수, 예설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문해리 소재의 퇴락한 남경대(攬景臺)를 중건한 후 산택재라 자호하여 현판을 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주부를 거쳐 충청도 회덕현감이 되었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선정을 베풀어 퇴임 때 회덕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주변경관 |
- 주변경관 |
영양군 입암면에서 2번 군도를 타고 오다가 산해교를 건넌 뒤 바로 도로변 오른쪽에는 건물이 남경대(攬景臺)임을 알리는 꽤 큰 석비가 세워져 있다. 석비 오른편에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있고, 30여 그루의 소나무가 둘러가며 심겨져 있다. 건물 뒤로도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다. 마당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반변천이 흐르는 산해교가 옆으로 바로 보이고, 산해리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건물 앞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대 앞뜰에는 반타석이 있다. 있다. 이곳 산해리에는 국보 제187호로 지정된 봉감모전오층 석탑이 있다. 입암면 산해2리에 위치한 이 탑은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탑의 기단은 자연 편평석(偏平石)으로 부설한 한 변이 약 5m이고, 그 뒤에 방형지대석 (方形地臺石) 위에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이 구성되었고, 높이는 약 8m이며 각 부재(部材)는 전형(塼形)을 모방하여 수성암(水成岩)으로 만들어진 전(塼)으로 축적하였다. 독산(獨山)같이 보이고, 또 큰물이 지면 섬 같기도 하다. 상부가 평평하여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으며, 풍치가 아름답다. 그 아래는 여러 사람들이 풍유와 천렵으로 많이 모여 노는 곳이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입암면 산해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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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이 큰 내를 이룬 마을 ‘산해리(山海里)’ | |
산해리는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마을에 속한 자연부락을 지나는 마을이다. 낙동강의 동쪽원류인 반변천과 소하천인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하여 호수와 같은 큰 내를 이루었으니 마치 산 속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동산(東山)과 문해(汶海)의 이름을 따서 산해라고 한 것이다. 삼산동의 일부와 안동군 임동면의 동산리를 합하여 영양군 입암면에 들게 하였다. 수습발굴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정해졌다.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많아 문해라고 하였다. 속했을 때, 동산령 너머 마을이라 하여 동산동으로 불리워졌으며, 윗마을을 동산태, 아랫마을을 아랫동산태라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는 가득차면 가라앉는다고 해서 살림이 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아래로는 문해가 이어지고 있다. 주파와 동산동 그리고 문해를 잇는 세 갈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산해3리이다.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약 500년 전인 1599년(선조32) 이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감서원(鳳鑑書院)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감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며,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이 자리 잡고 있다. 남경대(攬景臺)와 봉감사(鳳鑑寺) 터에 남아있던 벽돌로 쌓은 봉감모전오층석탑, 그리고 송간(松澗) 이정회(李廷檜)가 1599년(선조32) 이곳에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창건하여 퇴계를 배향하다가 뒤에 터만 남은 서원터가 남아 있다. 남경대攬景臺 모습 |
<출처:블로그 수산/http://blog.daum.net/kil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