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여로의 하룻밤 이제 익숙했지만 나이탓(?)으로 이른 새벽 어김없이 일어나 심향사로 향했다. 답사길 동선에서 하루의 출발은 언제나 절집이다. 편안한 느낌을 즐기는 분위기 있는 남자가 아니라 그시간에 마땅히 답사할 만한 옛님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창건주로는 통일신라시대 원효(元曉), 혹은 고려 때인 951년에 도선 국사(道詵 國師)를 꼽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특히 도선 국사 창건설은 도선의 생몰 년대인 827~898년과 부합되지 않아 더욱 신뢰하기 어렵다.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현종이 이곳 나주로 몽진하여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신황사(神皇寺)’라는 이름에서 황제 황(皇)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이 절의 대법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경내에 고려시대의 석불(미륵불)과 지붕돌 등이 남아있어 고려시대에 절이 경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창건 당시 심향사의 이름은 미륵원(彌勒院)이었다고 한다.
고려 광종 2년(951)에 신왕사(神王寺)로 고쳤다가 다시 신황사(神皇寺)로 바꾸고, 곧이어 다시 심향사로 바뀌었다. 이 가운데‘신왕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신황사’라는 명칭은 정조 13년(1789) 조성된 상량문에서 확인된다. 심향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미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언제부터 심향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왕사’로 기록하고 있고, 미륵전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정조 13년(1789) 무렵 까지는 ‘신황사’로 불렸던 듯하다.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현종이 이곳 나주로 몽진하여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신황사(神皇寺)’라는 이름에서 황제 황(皇)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이 절의 대법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향’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중(八部衆) 가운데 하나인 건달바(乾達婆)를 뜻하는 것으로, 이 건달바는 오직 향기만을 먹으므로 심양행(尋香行)이라고도 부른다. 창건이후의 역사도 자세하진 않지만 고려말인 공민왕 7년(1358)에 다시 중건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조 13년(1789)에 몽수(夢守), 최정(最定)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후 1796년에 미륵전이 무너져 이듬해 중건하였는데, 1789년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는 ‘금성산신황사용화당중건(錦城山神皇寺龍華堂重建...)’이라 쓰여 있어 당시 절 이름이 신황사였고, 또 미륵전도 용화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근래 들어 1982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극락보전으로 전각의 이름을 바꾸었고, 1985년에는 민가 형태의 요사인 백설당(白雪堂)을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절 일원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나주 향교 대성전의 초석은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심향사에 있던 것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문 닫힌 극락보전. 공사중인 미륵전...인연.인연이겠지요.
극락보전 ...건칠아미타불좌상/문화재청
아침이른 시간 문 닫힌 금당. 다시 오라는, 아직 인연이 아니라고 받아들여야겠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온다."이 불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특히 많이 조성된 건칠불상 중 하나이며, 점토나 석고로 만든 원형을 제거한 탈활(脫活) 건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인 이국적이면서도 단엄한 얼굴표정을 지니고 있으며, 왼쪽 어깨 위에 부채살처럼 흘러내린 세밀한 잔주름은 13세기 후반에 조성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76년),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1362년 이전) 등에서도 확인되는 공통된 특징이다.
출처...한국전통사찰정보
"미륵전 중앙 불단에 모셔져 있으며, 높이 150cm의 미륵불로 석조로 제작되었고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상의 얼굴에는 연노란 빛을, 광배에는 적색을, 법의와 양손에는 흰색 등으로 덧칠을 하여 돌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머리와 왼쪽 어깨의 일부도 보수된 상태이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되었으며, 흑색으로 채색된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갖추어 있는데 민머리로 묘사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 보이고, 귀는 이마부터 턱까지 길게 묘사되었다. 신체는 각이진 어깨로 건장한데, 왼쪽 어깨는 보수하면서 자연스런 감각을 잃었다.
광배는 몸체와 하나의 돌로 제작된 판석에 원형 두광과 신광을 그리고, 윗부분이 깨어져 나간 주위의 여백에는 붉은 화염문을 묘사하여 본래 광배의 표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법의는 두 어깨 모두 덮은 통견식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가슴아래에서 평행으로 처리하였다. 수인은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으며, 몸의 중앙에서 손바닥을 위로하여 다리위에 가볍게 놓았다."
나주 북문외 삼층탑. 몇년전 나주 금성관 들에서 뵈었던 것 같다.2006년 고향을 찾아 심향사 경내 미륵전 앞으로 옮겨 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이며 안정감 있고 체감도 정연하다. 몸돌에는 우주를 새겼고. 옥개받침은 3단이며 처마긑에 반전은 부드럽다. 상륜에는 한돌로 조각한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다.
2기단. 아랫기단에는 면마다 안상을 3개 새겼다. 윗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보인다.
기단갑석 등 복원과 여러 차례 이건에도 불구하고 단정하고 격조가 풍기는 고려 후기탑으로 추정한다.
기단 면석이하가 매몰되어 기단 구성은 분명하지 않다. 면석에는 우주를 새겼고 두터운 갑석에는 우동마루를 내고 3단 탑신받침을 내었다. 탑신에고 우주가 보이고 옥개받침은 3단, 2.3층 탑신은 체감률이 정연하지 않고 재질도 다르게 보인다.
앙화와 노반의 재질도 다르다. 최소 2기 이상 탑부재 조합으로 보인다.
심향사에 있었으나 나주군청으로 옮겼다가 1977년 12월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옆 2006년에 옮겨 온 석탑도 동일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 두 탑이 심향사 탑이었는지 궁금하다.
극락보전 옆 오층석탑 부재. 4개 옥개석과 상륜을 포개 놓았다. 옥개 받침은 아래 2개는 5단, 위는 각각 4단과 3단이며 풍탁을 달았던 구멍도 있다.
석탑 면석 부재
심향사는 산사 음악회. 이주자 가족을 위한 행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산속 절집에 그치지 않고 도심으로 나와 중생들과 함께하는 바람직한 포교를 전개하고 있는 듯했다. 심향사 문화재를 둘러보다가 휴대폰을 분실하여 처사님의 의혹에 찬 눈길을 받으며 샅샅히 저인망식 답사를 다시 했다. 다시 인연 지을 날이 언제일런지......
2009.07.27 |
첫댓글 심향, 건달바...절 이름이 독특하네요. 첫사진의 돌담과 대문이 정겹네요.^^*
돌담을 예술같이 잘쌓았네요..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