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들소 이야기
한번은 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 수백 마리의 아프리카 들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을 물었다. 들소는 깜짝 놀라서 껑충 뛰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옆에 있던 들소들도 영문도 모르고 함께 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수백 마리의 들소 떼 전체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들소 떼들이 뛰고 있는데 뛰는 이유를 아는 들소는 오직 한 마리뿐이다. 왜 나머지 들소 떼들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뛸까? 다 뛰는데 나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뛰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들소 떼들이 함께 뛰기 때문에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뛰지 않으면 다른 들소 떼들 발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절벽이 나타났는데 선두에 서서 뛰던 들소가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들소 떼에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고 말았다.
이것이 군중 심리이다. 군중 속에 있으면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비판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개인적인 책임감을 잃어버린다. 한 마리의 들소가 뛰기 시작하니까 다른 수백 마리의 들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뛰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사람들도 군중 속에서는 판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로 걸어간다. 내가 왜 이 길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없고,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아무도 이 길을 걸으면 안 된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냥 입을 다물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남들이 다 뛰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눈총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함께 뛰지 않는 자는 그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된다.
내가 왜 장로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침례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내가 왜 수많은 교회를 놔두고 이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없다. 그냥 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회를 다니니까 나도 그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번 자문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었지만 어떤 들소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처럼, 군중 심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것이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되는 위험이다. 들소 같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있으면 그들과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눈치 받게 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결국 군중의 뜻에 굴복하게 된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군중들의 요구와 기대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군중들과 충돌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들이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연어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연어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미국 서북부의 포트랜드에 있는 강의 상류에는 연어 부화장이 여럿 있는데, 연어가 그곳에서 알을 낳아 새끼들이 자라면 그것들을 강에 방류시킨다. 수백만 마리의 연어 새끼들이 강을 따라서 바다로 나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추적하여 몇 년 후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취재하였다. 성인이 된 수많은 연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다른 물고기들은 물의 흐름과 먹이감을 따라다니느라고 정신없는데 연어들은 강을 거슬러 역행하는 것이다. 댐이 나오면 댐을 헤엄쳐 오르고, 물살이 매우 빠른 바위 계곡이 나오면 10번, 20번 실패하더라도 헤엄쳐서 빠져나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이 태어난 부화장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알을 낳고 자신은 죽는다.
연어의 삶의 목적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군중 심리와 역행하는 삶도 마다하지 않는다. 연어의 삶 속에는 전혀 군중 심리가 없다. 연어는 주변에 다른 물고기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땀을 흘리며 줄기차게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어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두뇌 속에 넣어 주신 뜻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부화장으로 다시 돌아온 어미 연어들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기 때문이다. 물줄기를 역행하여 오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댐을 헤엄쳐 올라오는 동안 여기저기 찢겨서 성한 데가 없다. 그런 연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 흘리며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아무나 연어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연어처럼 살 수 있다.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살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면서 살게 된다.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이 세상이든지 교회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연어는 늘 충돌하기 때문에 그 삶이 고달프다. 오해하지 말라. 세상이나 군중과 충돌한다는 말은 사람들의 멱살을 잡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정신을 깨뜨리면서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군중의 요구나 기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하나는 군중을 따라서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군중)과 충돌하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인이다.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하나는 들소와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연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