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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이야기
지은이 이 운 종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 빛
태백은 약 500년 전 화전 땅에 삼척 김씨들이 이주해왔고
황지 땅엔 480년 전 밀양 박씨들이 문헌상 이주해왔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1925년 상장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장해룡 씨가 금천에 심부름 갔다가 (당시에는 검은 냇물) 거무네미골 금천 검은 돌 하나를 주워왔고 이것을 본 일본인에 의해 고원료 석탄으로 판명 지금의 장성지역이 탄전지대로 개발되었다. 당시 일본은 시라키 다꾸치라는 광산전문가 1922년 동국제국대학 지질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우수한 재원이 많아서 석탄업에 관해서는 조선을 능가하였다.
여기서 당시의 교통상황에 대해 들여다보겠다.
1930년대 장성지역이 탄광을 개발하면서 비로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동점동 구문소에는 인공석굴이 37년대 뚫어져 그 전엔 삼척 땅 도계에서 심포리를 거쳐 통리 백산 철암 동점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을 이루었다. 지금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들어오는 35번 국도가 동점 구문소 인공석굴을 거쳐 장성 문곡 황지에 진입하게끔 되어있고 이어서 이어진 길이 창죽 상하사미 조탄을 지나 삼척시 하장면 방향의 길을 그 밖에 416번 지방도로가 통리에서 갈라져서 삼척시 구사리와 신리를 거쳐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통리 백산 철암 동점으로 이어지는 423번 지방도로 또한 411번 지방도로가 혈리의 화방재에서 만항재로 광산 개발 이후 태백의 교통망을 열어갔다. 광산 개발 후 시 전역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교각(다리)가 100개 정도 가설되어 편리함을 더하였다. 태백에 철도가 처음 가설된 것은 1940년대 장성지구의 석탄수송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통리에서 철암까지 철도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철암에서 장성까지 약 2.5Km 굴을 뚫어서 전차가 다닐 수 있게 하였고 장성지역에서 캔 석탄을 2.5Km의 굴을 통해 전차로 철암역까지 운반하여 철암역에서 통리역까지는 열차로 운송하고 통리역에서는 다시 삼척의 심포리까지 약 1.1km의 강삭철도 갈지자형 철도라 하여 (스위치백) 철도를 따라 도계역으로 동해시 묵호역까지 운반하는 과정을 택했다.
묵호는 묵호항 배를 이용해 수송된 연탄을 외국과 부산으로 보내졌다. 그 뒤 54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철암까지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었으나 통리역에서는 심포역까지 운반에는 강삭철도 (인크라인, 마끼)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전쟁 전후에 교통사정이다.
그동안은 태백에서 캔 석탄을 묵호항으로 수송하여 화물선에 실어 뱃길로 대도시에 운반하던 것을 영암선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철도를 통한 직접 운송수단을 갖춤으로 태백지역은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62년도 황지역에 황지선 철도까지 부설되고 이듬해인 63년 통리와 심포리 사이 강삭철도가 폐지됨으로 통리와 심포리까지 ㄹ자형 철도를 설치하면서 영동선 철도가 완전 개통되었다. 그 덕분에 심포리에서 통리까지 비탈길을 걸어서 오르내리던 승객들의 불편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66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추전역이 만들어졌고 그동안 5.16 군사 혁명 후 사회정화 차원의 국토건설단이 주체가 되어 정암터널이 뚫리면서 73년 태백선 철로가 개통되었다.
이때 태백시는 추전 태백 문곡 통리 동백산 백산 철암 동점 등 8개 열차역이 있어 전국에서 가장 역이 많은 시가 되었다. 2012년 통리역에서 심포리역 사이 ㄹ자형 철도와 심포리역과 나한정역 사이 갈지자형 (스위치백) 철도가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하여 동백산역과 도계역 사이 17km에 이르는 똬리굴을 새로이 뚫어 개통함으로써 통리역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의 광산 개발로 인해 현재 태백시 전역에는 철도교 23개소 철도굴 15개소가 산재해있다.
우리 부모님의 고향은 원래 제천이었다.
물 맑고 산천 좋은 청풍명월의 고장 청풍이 우리 아버지 고향이었다.
울 엄니 고향은 이웃 마을
50년대 말 먹고사는 게 힘들다 보니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이곳 태백으로 이주하셔서 통리라는 곳에 처음 정착하셨단다. 요즘이야 교통수단이 좋아서 가정마다 승용차 한두 대는 기본이요 도로 사정이 좋아져 교통이 원활하지만 50년대 말 우리 아버지께서 처음 태백에 정착하셨던 때는 1955년도 철암역인 영암선 개통되어 통리는 교통의 중심지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심포리 삼척과 태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철암역은 1939년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지어진 1층짜리 역사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장성에서 캐낸 석탄을 동해 묵호로 운반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지금의 역사는 1985년도 원래 있었던 자리에 약 100미터 밑으로 옮겨서 새로 준공한 것이다. 석탄산업이 호황일 때 철암역의 하루 석탄 수송량이 12,000톤에 달했고 역무원만 대략 120명에 달하는 규모가 큰 역이었다. 당시 강릉역 직원이 28명으로 비교해보면 느낄 것이다. 또한 지금의 철암 역두 선탄시설은 1935년도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시멘트 철골 구조물이다. 이곳에는 근대화의 석탄산업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철암 역두 선탄시설은 외형적인 구조물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 안에 있는 시설물 등이 더욱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것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2000년 5월 3일)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1호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었다. 이 건물 앞쪽에는 지상 3층의 탄광 역사촌이 지어져 각종 광산지역의 발전 당시 모습 진, 규폐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의 모습 등 사진으로만 전해준다.
통리역 앞
이곳에서 당시 부모님께서는 좌판 장사를 시작하셨단다.
고등어장사 꽁치장사 손에 잡히는 물건을 구해서 파는 장사부터 시작하셨다.
물건은 심포리에서 삼척에 발품 팔아서 가져다가 황지읍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되파는 좌판 장사 보따리 장사였다.
그게 우리 형님 2살 때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던 장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원치가 않아서 접게 되었고
63년 시작하여 73년 황지역 개통으로 인구의 이동이 황지읍으로 몰리면서
함태탄광 광원 모집에 취업하여서 그때부터 광부의 길 탄광촌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함태탄광 양지 사택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체험공원 있는 자리가 바로 양지 사택 자리 내가 태어난 곳이다. 탄광촌의 사택이라는 게 허술하기가 그지없고 비 오면 비가 새고 눈 오면 눈발이 부뚜막까지 날리던 허술하게 만든 거처였다.
부엌에 쥐가 드나드는 건 기본이었고 엄니가 생선이라도 한 마리 사 오시면 줄에 달아놓으셔야만 우리 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이야 냉장고도 있다지만 당시에는 장기간 보관방법이 마땅히 없는 터라 그나마 고안해낸 방법이 줄에 걸어두어 말리기도 하고 고양이 쥐로부터 생선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내셨으리라 짐작이 간다.
혹여 엄니께서 우리 어린 4남매 챙기시느라 생선을 줄에 걸어두지 못하면 어느새 쥐가 물고 가서 애써 사온 생선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날이면 엄니께서 부엌 도처에 쥐약을 놓고 쥐잡기에 여념이 없다. 생선을 물고 간 쥐를 탓하며 부엌문 창호지를 뚫어서 우리 4남매는 쥐가 나타나서 잡혀주기만을 기다리며 밤을 새우곤 하였다.
당시에는 이 벼룩 등이 많아서 참빗으로 머리 빗어 이를 잡던 게
광부 사택촌 원래 허술하게 벽돌로 세운 집이라 문틈 사이 겨울 찬바람은 황량함만 더해준다. 겨울이면 연탄아궁이 광업소에서 내준 연탄 한 장 덩그러니 올려놓고 온 집안을 난방하던 터라 구들이 있는 아랫목만 따끈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냉골이라 차갑기가 그지없는 자리였다. 우리 4남매는 한방에서 살았으며 서열에 따라 잠자리 순위가 정해졌다.
제일 추운 윗목은 엄니 자리였고 자식 생각에 우리는 아랫목 재우시고 추위와 싸우시며 긴 겨울 보내셨던 것이다. 그것이 50 넘은 요즘에야 부모님 사랑으로만 느껴진다.
당시에 자리끼라는 물 한 사발 방안에 담아두면 물그릇이 꽁꽁 얼어 얼음덩어리가 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아버지께서 출근하시면 엄니께서 밥을 새로 지으셔서 밥사발 담아 아랫목 이불로 덮어두어서 밥을 보온하셨고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식사하시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즘이야 보온밥통이다. 여러 취사도구도 많다지만 당시에는 빈약했던 터
태백의 겨울은 예나 지금이나 춥고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겨우내 내린 눈은 태백산 주목 가지에 앉은 설화가 아름답다.
한겨울 날씨는 영하 20도는 기본이고 겨우내 흰 눈은 밤새도록 소리 없이 내린다. 오늘날 지구온난화 인구의 증가로 추위도 덜하고 눈도 덜 내리지만
요즘에야 제설장비가 있어 눈 많이 오면 길 뚫고 길 내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사람의 수작업으로 삽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1미터씩 내린 눈을 개구멍같이 샛길을 내어 교통하던 게 태백의 풍경 연중행사처럼 되어버린 태백의 옛 모습이었다.
어느 해는 5월 폭설로 인해 학교에 등교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요즘 천재지변으로 인한 휴교령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다. 지금이야 아이들 놀이기구가 각종 휴대폰 컴퓨터 수영장 실내스케이트장 오락실 등 다양하지만 당시 광산촌 아이들은 겨울에는 얼음 빙판 시게또 (일본말:얼음 빙판용 썰매기구) 팽이 돌리기 여자아이들은 오자미 (모래주머니) 던지기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이런 놀이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지난 추억이 새롭다.
간혹 얼음 빙판 놀이에 열중하다가 얕게 얼은 얼음물에 빠지면 엄니한테 혼날 생각에 모닥불 피워놓고 양말 벗어 말리다가 양말 태워 먹고 집에서 벌서던 생각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엔 눈을 모아 산처럼 만들고 삽으로 구멍 파고 들어가서 이글루집 만들고 바닥에 자리 깔고 촛불 하나 켜두면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자연인의 모습과 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3학년 때 야외 미술활동 시간 태백의 산천을 도화지에 담는 시간이었는데 우리 모두가 냇가의 하천을 탄 물이 흐르는 검은 냇물로 도화지에 그려 그 이야기가 전국 뉴스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태백은 크고 작은 광산 덕대와 쫄딱구뎅이가 수없이 산재 있었던 터라 하천물은 늘 광산 폐수로 검게 변하여 냇가를 이루었으리라.
비교적 큰 광업소로는 함태 황지 태영 한성 강원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등이다. 그것을 선생님 의도는 깨끗한 하천을 그려주길 원하셨지만 어린 동심이야 사물을 본 그대로 그리는 순수함이 화폭에 묻어있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변하여 태백은 늘 검은 도시 어두운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 어릴 적 기억의 전부는 아닐께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6살 때 인지 7살 때 인가 항내 현장으로 어린 나를 데리고 가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채굴한 지 얼마 안 된 광산이었는데 사갱으로 광산 상태가 양호한 직선 방향 150미터 정도 채굴해 들어갔던 것 같다.
막장에 처음 들어간 내 기억은 어둡고 컴컴한 습한 공기가 내 후각을 찔렀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입구를 바라보니 갱도의 입구는 어둠 속에 밝은 작은 점 하나로만 느껴진다.
요즘이야 광산장비 방진마스크 안전모 안전등 착암기 콤베아벨트, 록카쇼벨 등 현대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안전등 대신 간드레불 (카바이드를 통에 담아) 물을 넣고 불을 붙여서 채굴하였던 재래식 광산 안전장비 조명기구였다. 방진마스크는 어떠했는가.
요즘은 분진용 필터가 두 겹 세 겹 포개져서 광부의 인체에 해가 없게끔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광목천으로 호흡기를 감싸고 작업하며 분진과 막장의 열악함에 싸워야만 했다. 광산장비의 부실은 진, 규폐라는 직업병으로 이어져 평생을 고통 가운데 삶을 마감해야만 했다. 당시 유일한 작업도구는 삽 곡괭이 도끼 톱 우리 부모님들은 초창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산업에 종사하셨다. 장비의 부실과 보안의 허술함은 곧잘 광산재해 사고로 이어져 85년-88년 사이 광산재해 숫자는 한해 5925명에 달할 정도로 안전의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또한 82년도 1월 3일 함태광업소 함백항 갱내가스 폭발사고로 무려 9명이 순직하였으며 순직자의 위폐는 청원사의 위폐 안치소에 또는 황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업전사 위령탑에 모시어져 그 넋을 달래고 있다.
현재 광산사고로 순직한 사업전사자는 총 4080명의 위폐가 산업전사 위령탑 안 모셔져 있으며 작은 쫄딱구뎅이의 순직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어 애통함만 더해진다.
이러한 광산재해사고는 광업소에서 마련한 위로금과 산재처리됨으로써 종결되었고 남편을 잃은 유족은 비교적 안전이 보장된 난전에서 회사의 배려로 취업하여 입에 풀칠하며 어린 자녀를 키우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갱외 선탄장에는 갱내 사고로 순직한 미망인들로 차고 넘쳤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배고픈 것 모르고 좋은 음식에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광업소에서 배급 주는 백미로 하얀 쌀밥 먹었고 명절 때 되면 광업소에서 돼지 잡아서 고기 몇 근씩 나눠주면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아버지께서 가져오시면 엄니께서 요리해서 온 식구들 밥상머리 둘러앉아 목구멍에 때 벗기던 것이 주마등처럼 기억 저편에서 스쳐 지나간다.
이제 시간의 바늘이 저 벽에 걸릴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어릴 적 희미한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여름 장마철 물놀이기구 없었던 당시로써는 막장 폐수와 생활 폐수 똥물이 섞여진 냇가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자맥질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던 것이.... 그것도 싫증 나면 사십 마지기 쪽 재를 넘어 산 넘고 냇가를 지나 문곡 풀장에 몰래 사람 틈에 끼여서 공짜 수영을 즐기곤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민둥산에 올라가 횃불 만들고 망우리 돌리며.... 구 함태초등학교 산 위에 지은 건물이 있던 자리가 학교가 옮겨가기 전 공동묘지 터라 횃불 놀이터로서는 최고의 자리였다.
잣이 달리는 가을철에는 친구들과 함태탄광 앞산 국유림 터에 잣나무가 많아서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잣을 따서 몰래 가져오다가 광업소 청원경찰들한테 붙잡혀 경비실에 들어가 벌서고 반성문 쓰고 애써 따놓은 잣은 뺏기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그나마 맘 좋은 아저씨 만나 뒤로 슬며시 몇 송이 밀어주면 그 잣 받아와 잣 까먹는 고소함과 즐거움이 입안 가득하다.
송진 묻은 옷 때문에 엄니한테 혼나던 기억은 뒤로 한 채 60년대 석탄산업은 국가의 기관 산업으로 육성, 발전하여 국가에너지 사업 안방을 따뜻이 덥히던 효자산업이 되었다.
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해 1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연탄보일러 연탄난로 등이 각 가정의 난방원이 되었으며 이어 발생한 2차 오일쇼크로 인해 태백은 서부개척시대 엘도라도 검은 황금을 캐기 위한 꿈의 도시 약속의 땅이 되었다. 한때 태백시 인구가 12만 명이 넘을 정도의 부존자원의 혜택을 누리기도 하였다.
당시 임금도 다른 업종보다 많은 편이라서 모집공고 후 취업 시에는 신체검사 체력테스트 등 엄격한 심사와 절차에 의해 사원이 채용되었고 사원으로 채용되어도 임시부 몇 달 간접부 몇 달 정도의 숙련기간을 거친 후 정식사원이 되었다. 광부가 되는 과정도 만만한 게 아니라서 요즘 이야기하는 빽이라는 게 만연하여 모 과장 모 항장의 줄로 쉽게 취업했노라 하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뒷이야기로만 무성했다.
이렇게 모여든 광원들은 저마다 출신 지역에 따라 연령에 따라 혈연에 따라 친목계니 향우회니 하는 것을 만들고 30년-40년 뿌리내리며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친해져갔다.
또한 친목계는 이웃들의 경조사를 챙기며 크고 작은 대소사에도 관여를 하여 친목계를 통하여 딸, 아들 시집 장가 보내고 상조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목계를 통하여 미래의 사윗감, 며느릿감 등 점찍어 사돈이 된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런 친목 활동을 통하여 비록 타관객지 남으로 만나 이웃하여 살아온 정으로 우애를 나누며 삶에 정주심을 더하였다.
당시 김장철 마을 전체 김장을 같이 할 정도로 친분을 나누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곳만의 풍습으로만 전해진다.
사원이 되면 직번을 나눠주고 직번에 어느 항 누구라는 번호표와 사진을 붙여서 요즘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취업과 동시에 회사에서 가정이 있는 사원은 사택 한 채를 무상으로 줌으로써 주거문제의 해결과 사택촌이 형성되었으며 독신자들에게는 독신자들만의 숙식을 해결하는 합숙소를 마련하여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직번은 회사 구내매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고 말일 날 구매한 물건 값은 봉급에서 공제하고 월급으로 나눠주었으며 봉급날에는 직번을 지참한 부녀자들이 간난 아기를 등에 업고 간주를 (월급봉투) 타기 위해 회사 노무과 앞에 100미터 이상 줄을 서는 진풍경이 생겨나곤 하였다.
직번은 사용처가 다양하여 색시집 술 한잔 몰래 외상 그어놓고 색시집 주인 아줌니 빚 독촉에 경리계 가불 받아 빚 청산하고 급여를 계산해본 마님 추궁에 이실직고하면 몇몇일 가정불화의 원흉이 되기도 하였다.
태백엔 색시집도 많아서 일명 방석집 기생들이 술 한 잔 마신 광원들과 뒤풀이 2차를 나가서 회포를 풀고 광부의 호주머니를 털던 게 당시 사창가의 형성 대밭촌의 탄생이다.
이곳은 8도의 젊은 윤락녀가 모여 집단생활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술 취한 광부들이 성욕을 해소하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당시 광산안전관리법이 광산보안법으로 만들어져서 사원이 많은 광업소일수록 안전 관리자들이 많았고 회사에서는 특별우대하여 계원이라는 직책을 주었으며 직책에 따라 소장 과장 항장 계원 등 직위가 정해졌다.
혹은 계원과 항장에 따라 갑질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삶을 더욱이나 힘들게 하였다. 이때 생겨난 용어가 하나 있는데 일명 야리끼리 (도급) 일감을 도급으로 주어 시간에 관계 없이 일 마치면 바로 직권으로 퇴근시키는 편법도 가능하였고 자신에게 술 한 잔 색시집 데리고 가 뒤로 아부하는 사원은 쉬운 막장 도급으로 일감 몰아주고 밉상 보인 사원은 험한 구뎅이 박아 넣어 쌔가 빠지게 혹사시키곤 하였다.
요즘과 같이 밝은 세상엔 큰일 날 이야깃거리이다. 70년대 태백의 경기는 호황을 누리었다.
시내 도처에는 대폿집 선술집이 생겨났고 갑방 을방을 마친 광원들은 막걸리한 잔 쓴 소주 한 잔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며 막장의 계원 한 사람을 안줏거리 삼아 모한 계원이 첩이 몇이라는 둥 와이로를 (뇌물) 잘 받아서 마른 공수도 잘 준다는 둥 이리 씹고 저리 씹고 그들만의 질박한 이야기 속 삶의 애환을 녹이곤 하였다.
시내 곳곳 실비집 고기 굽은 내음에 퇴근 후 가정으로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을 술집으로 불러들인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때 생겨난 것이 식사 대용 술안주로 만들어진 태백 물닭갈비 광부의 허기지고 쓰린 속을 소주와 함께 풀어주었으리라.
70년대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학교 겨울철 난방은 광업소에서 목재를 만들고 부산물로 모아진 톱밥을 학교에서 가져와서 광업소에서 만들어준 화덕용 목재 난로에 톱밥을 태워서 난방연료로 사용하였으니 교실 안에는 항상 자욱한 톱밥 연기와 수업 시간마다 창문을 열어서 교실을 환기시켰으며 삼교시 쯤 도시락을 난로 주변에 올려놓으면 뻰또 (도시락: 일본말) 맨 밑바닥에 올려놓은 뻰또는 시커먼 숯밥이 되어 절반 이상 급우들은 탄 밥을 먹게 되고 그나마 요령 있고 꾀 있는 친구들은 늘 2번 3번 줄에 도시락을 올려놔서 따끈하고 맛있는 도시락을 먹곤 하였다.
그때부터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80년대 초 광부의 임금이 공무원 봉급을 상회하여 공무원 되기보다는 광원이 되어 위험이 따르고 열악한 지하 막장에서 일하지만 직종 면에서는 선호하는 직업으로 자리매김한 적도 있었다. 당시 함태탄광에서는 만근 시 백미 한 포대 매월 계란 한 판 두부 한 판 만근 시 연탄표 100장짜리 한 장 사택 한 채 자녀 학자금은 국가에서 2명까지 무상으로 공부시킬 수 있게끔 제공해주어 교육 문제에도 도움을 주었다.
당시 부실한 안전장비 보안점검 미비 등으로 인하여 붕락사고 출수사고 등으로 재해가 잇따랐으며 80년대 후반을 지나오면서 호황을 유지하던 석탄산업은 검은 연탄이 재로 변하듯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86년 1월 8일 정부는 석탄산업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경제성이 있는 탄광은 육성 기금으로 계속 지원하고 나머지 광산은 대책비를 지급 폐광하는 이른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86년-89년 그동안 호황을 누리던 태백 탄전지대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내 곳곳에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반대하는 현수막과 집회와 시위가 열렸으며 법은 어느 사이 시민의 여론은 무시한 채 국가 기간산업의 자리 안방을 덥혀주던 친구의 자리 막장에서 순직한 산업전사의 절규를 외면한 채 입법화의 길로 들어섰다.
광산촌은 뜨내기로 시작해서 제2의 고향이 될 정도로 뿌리내리며 살던 약속의 땅이었던 탄전지대에 불어온 찬바람은 1989년 한 해 130개 광산이 문을 닫게 만들었고 89년-2009년 사이 전국에서 무려 340개 태백도 한해 44개 광산이 폐광의 아픔을 겪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평생을 일하시며 우리 남매를 키우셨던 광산마저도 (55년 1월 개광) 93년 12월 20일 문을 닫게 되었다. 개광 후 38년간 지역경제를 책임지던 광산은 그것이 경영의 부실이든 정부 정책이든 지금 글을 쓰는 본인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당시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면 설비투자나 매장량으로도 질 좋은 갑탄을 자랑하던 광산이 쉽게 문을 닫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원용 목욕탕과 세탁 시설 사원의 복지 차원 노동조합이 활성화된 몇 안 되는 광업소였기 때문이다.
나도 20대 후반을 기계 쪽에서 함태탄광에 종사하였던 사원으로서 하는 소리이다. 이것은 비단 광산의 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도시의 역할 기능마저 떨어지게 만들어서 타 시군의 집단 이주 기관 산업 붕괴 등 태백시의 존립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생긴 공단지역 이주 경기도 안산이 태백 사람의 범람으로 제2의 태백이라 불릴 정도의 정착 신도시가 되었다.
한때 인구 12만 명을 자랑하던 약속의 땅 태백은 황량히 부는 정부 정책 앞에 생사를 같이 했던 평생의 동지들 사택촌의 서글픈 사연을 뒤로한 채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혹은 다른 광업소로 공단지역으로 삶에 길을 떠나갔다.
이제 모두가 떠난 사택촌 빈집에 문짝은 열려있고 주인 없는 강아지만이 허공을 가르며 쓸쓸히 짖어댄다.
그렇게 광부가 떠난 태백시는 2000년대를 지나오며 고원휴양도시 맑은 물 깨끗한 공기를 소재로 한 고원스포츠 관광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제 태백은 내가 어릴 적부터 자라왔던 태백의 모습에서 변모하여 광산도시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간혹 광해방지사업으로 산 쪽 폐석 더미를 바라볼 때마다 이곳의 예전 번화가 생각나곤 한다. 한때 사택촌이 80년도 광원용 주거아파트로 변하였고 남편 을방 병방 일 보내놓고 춤바람 난 김 여사의 이야기는 바람으로 끝나버렸다.
바람 난 두 사람은 야반도주하여 새살림을 차리고 사회문제로 치부되던 것이 불과 20-30년 전 이야기 거리이다. 쫄딱구뎅이를 합쳐 100개가 넘던 광산은 없어진 지 오래이며 냇가의 시냇물은 맑아져 물고기와 메기가 살 정도로 깨끗한 물이 되었고 탄광촌에 날리던 비산 탄가루는 사라져서 산록을 푸르게 만들었다.
이것이 50년 넘게 태백을 지키며 보아왔던 태백의 현재의 모습이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한보탄광도 문 닫은 지 오래되었고 남은 가행 광업소는 장성석공 화순탄광 도계석공 경동탄광 등이다.
이미 지나온 광산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태백산 자락 작은 언덕에 1997년 5월 27일 태백석탄박물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으며 박물관의 소제는 암석 광물 화석 광산장비 등 약 7450종의 소장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휴관일을 제외한 시간에 문화관광 해설사분들이 출근하여 박물관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에게 석탄의 생성 과정과 지질 지층 지난날의 석탄산업의 발달과정과 정부 정책에 의해 사양화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현실을 소상히 해설해주고 있다.
이제 태백의 남은 과제는 도시 재생의 역할과 기업 유치 등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 우선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다면 이제 남은 광업소 1개가 가행을 멈춘다면 인구의 대량 이주로 시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시정에 힘을 보태어 보다 살기 좋은 태백 건설에 이바지해야 되겠다.
그것이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며 자손만대 후손들까지 살아가는 미래의 태백 모습은 아닐는지 우리 아버지께서는 2005년도 광산에서 얻은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순직 산재처리 되셨다.
이 글을 집필하며 삼가 아버님의 명복을 빌며 편안한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는다.
우리 엄니도 남편 뒷바라지 자식들 키우시며 고생만 하시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4남매도 타 도시로 전출하고 이곳을 지키는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다.
태백에 살며 광산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 태백의 미래에 발전이 있길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 평생에 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검은 땅에 푸른 희망을 심는 광부의 한 맺힌 사연의 노래가 아닐는지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많은 광부가 한 소절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져 한다.
태백아리랑
불원천리 장성 땅에 돈 벌러 왔다가
꽃 같은 요내 청춘 탄광에서 늙네
작년 간다 올해 간다 석삼년이 지나고
내년 간다 후년 간다 열두 해가 지났네
남양군도 검둥이나 얼굴이나 검다지
황지장성 사는 사람 얼굴 옷이 다 검네
통리 고개 송이재는 자물쇠고 개인가
돈 벌러 들어왔다가 오도가도 못하네
문어 낙지 오징어는 먹물이나 뿜지
이내 목구멍에는 검은 가래가 끓네
태백 아리랑 노랫말은 철암탄광 역사촌에서 발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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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밤 되세요
광산 사고로 순직하신 산업전사
분들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무국장 실수로 작품방 글이
날라가서 다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