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향 산청양수발전소 상부댐 고운호를 지난 8월에 벌초하로 가서 담아 왔다.
45년 전에는 내가 이곳에서 살던 곳이기도 해서 애착이 가는 곳이기도 한데
댐이 생기면서 옛모습이 절반 정도는 사라지고
지금은 펜션과 군소 암자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이곳을 다녀 갔다고 해서 고운동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나름대로는 순수 우리말 고운(곱다)이라는 명칭을 쓰고 싶을 만큼 정감이 가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시천면 반천리 659번지가 내가 살던 집 번지이고 나의 본적이기도 하다.
40여년 전에는 이곳에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지금은 댐에 그의 수몰되었지만 이곳에 논이 100여 마지기가 있었다.
물론 전부가 천수답이여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내기가 힘든 돈들이 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려 쌓여 있고 양지가 발라서 힘든 서민들이 산을 개간하고 숯을 굽어서 사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 고조 할아버지가 이곳을 정착을 해서 내가 어릴적엔 전부가 내한테 8촌 이내의 , 즉 전주이씨 집성촌이였는데
약40여년전 (어떤 종교단체에서 세상이 멸망 한다는 무신 전설같은 루머에 기인 한것이지 싶다)
이곳만이 멸망을 면 할 수 있다는 종교 지도자의 말을 따라
전라도와 충청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10여가구가 이주를 해 온 적이 있다.
당시에 그들은 한학에 괘나 학식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서당을 열어 주민들 한테 한문을 가르키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70년 초반에 우리 전주이씨들은 모두가 우리들 교육을 위해서 내공마을로 이사를 했고 (우리집은 신천마을로 왔다)
이들은 자녀들 교육도 멀리 한채 이곳에 남아서 살고 있었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70년대 중초반 지리산 주변의 독가촌 이주 정책에 의해서
지금의 반천입구 개미정이라는 마을로 강제 이주 당해서 살았었다.
옛날에는 이곳에 갈려면 우리의 영원한 총무이신 영술이가 살던 보안마을 뒷산을 넘어서
아님 반천마을로 가야 했었는데 지금은 차로 내대마을로 해서 삼심터널을 지나 묵계마을에서 좌회전을 하면
20여분만에 갈수가 있다.
신천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기 위해서 7살 때 이곳을 할아버지 따라 걸어서 지금의 신천 마을에 와서 살기 시작 했다.
지금도 내가 살던 집터는 잡목으로 뒤덮인채 축대등 흔적이 남아 있고 고조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님들의 묘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어 매년 추석 2주전에 벌초를 하려 가고 있다.
조금 한가한 시간에 고운동의 역사를 한 번 되새겨 봤다.
친구들 조은 주말 되시고 오늘 양산모임에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첫댓글 바쁘겠지만...모처럼 어려운 시간내어 갔더니만 안 오싯서!~섭섭했다요!~잘 봤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