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함양박씨 미산고택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56 14.08.01 14: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미산고택(味山古宅)
소 재 지 :  용문면 대제리 259
(원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 259)
건 축 주 :  박세주(朴世柱)
건축시기 :  1650년대
이건시기 :  1825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1985. 08. 05 지정

건축 이야기
미산고택(味山故宅)은 함양박씨인 독처재(獨處齋) 박세주(朴世柱, 1612~1727)가 1650년(효종 1) 금당골에서 대저(큰맛질) 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것을, 그의 5세손인 미산(味山) 박득녕(朴得寧)이 1825년(순조 25)에 원형대로 이곳으로 옮겨서 지었다는 가옥이다. 사랑채 마루 위에 게액된 ‘미산재’ 현판은 대원군이 방문하였을 때 박득녕의 호에 따라 써준 것으로 전해온다.

건축 구성
마을 새날골 입구에 서남향으로 좌정하였으며 4동의 건물을 ‘튼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정면을 향하여 왼쪽에 중문채가, 오른쪽에 사랑채가 위치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방형 담장 내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 오른쪽 사랑채 뒤쪽에 작은 곡간이 놓여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에 1칸 반의 부엌이 놓이고, 오른쪽에 3개의 방으로 구성된 상방, 그 앞으로 1칸의 상방 부엌이 놓여 있어 ‘?’자형 모습을 이루고 있다. 대청 뒷면에는 가운데 설주가 있는 두 짝 널문이 있는데, 좌우의 문 크기가 다르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오량가로 대청 상부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운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사분합 미서기 문으로 서로 구획되었다. 뒤쪽으로 반 칸의 책방과 감실을 두었고, 오른쪽 1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며, 그 뒤로 온돌방을 1칸 두었다. 전면과 오른쪽 면에는 툇마루를 두며 난간을 돌려 누각 모습을 하였다.
중문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오른쪽 단 1칸이 대문으로 되어 있으며, 곡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문간채와 고방은 많이 훼손되어 유구(遺構)를 분명히 하기 힘들다.

 

관련문서
- 저상일월(渚上日月)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의 미산재(味山齋)에 소장되어온 함양박씨(咸陽朴氏) 5대의 한문 초서 일기다. 박득녕이 이 일기의 시필자이며, 시필 연대는 1834년(순조 34)이다.


관련이야기
- 미산고택
미산고택(味山故宅)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다. 저곡리는 용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대저리와 하학리, 서로는 능천리, 남으로는 상금곡리와 예천읍 생천리, 북으로는 하리면 율곡리와 접한다.

맛질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한천을 경계로 동쪽의 ‘큰 맛질’, 서쪽의 ‘작은 맛질’로 나뉘며,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큰 맛질은 대저리, 작은 맛질은 저곡리이다. 미산고택은 큰 맛질에 위치하며,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문계천(文溪川)을 경계로 위쪽의 저상(渚上), 아래쪽의 저하(渚下) 마을로 나뉜다. 예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맛질’은 ‘금당실’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예천 사람 사이에 전해져오는 “금당, 맛질은 반(半) 서울이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반서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산골 마을인 금당실과 맛질에 대하여 ‘서울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랄 것이 없다’는 예천 사람들의 자긍심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두 마을이 예천의 대표적 명문가의 세거지로 예천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두루 배출했기 때문이다.

관련인물
- 박득녕
박득녕(朴得寧, 1808~1886)의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미산(味山)으로 『저상일월(渚上日月)』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인물이다. 『저상일월(渚上日月)』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의 미산재(味山齋)에 소장되어온 함양박씨(咸陽朴氏) 5대의 한문 초서 일기다. 박득녕이 이 일기의 시필자이며, 시필 연대는 1834년(순조 34)이다.

그 뒤 아들 『나암수록(羅巖隧錄)』의 저자 박주대(朴周大, 1836~1912)를 거쳐 손자 박면진(朴冕鎭), 증손 박희수(朴熙洙), 그리고 황손 박영래(朴榮來)가 계속 써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끝났다. 이 일기는 우선 그 길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이며, 내용도 근대 1백 년의 역사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조선 왕조 23대 순조 말년에서 시작해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 27대 순종을 거쳐 일제 36년, 그리고 광복 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긴 역사가 이 일기 속에 그림처럼 전개되고 있어 파란만장하던 이 시기의 사회?정치?경제?문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집필자의 거주지가 경상북도 예천의 산골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이는 다른 일기류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사건 묘사가 매우 간략하여 이 일기만으로는 체계적인 역사 서술이 어렵다. 또 먼 지역의 소식을 소문으로만 듣고 적었기 때문에 날짜의 차이라든지 사건 내용에 대한 오기가 많다는 점이다. 이 일기와 별도로 「저상일용(渚上日用)」이라는 자가경리(自家經理)에 관한 가계일기(家計日記)가 있다.
- 배출 인물
박세주(朴世柱)

 

예천 > 용문권 > 대저리
- 대저리.
대저리는 용문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직선상 4.5㎞ 정도 떨어져 있다.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에서 14번 군도를 따라 4.5㎞ 정도를 가면 저곡리 ‘맛질’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 정도를 가면 미산고택이 위치한 대저리가 나온다. 대저리의 사방경계는 동으로 감천면 관현리, 서로는 저곡리, 남으로는 하학리, 북으로는 부초리와 접한다.

대저리는 본래 예천군 저곡면 지역으로 ‘맛질’의 큰마을이므로 ‘큰맛질’ 또는 ‘대저곡’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상리와 하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저리라 해서 예천군 용문면에 편입되었다.

‘맛질’이란 지명은 이곳에서 마(藷, 산약)가 대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 미도(味道)라는 한자에서 유래하여 맛길(味道)이 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의 사투리로 ‘길’을 ‘질’이라고 하기 때문에 ‘맛질’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맛질 저곡리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1545년 안동 서후면 도촌리 출신으로 작은 맛질에 정착한 권의(權?)가 4형제 중 맏이였기 때문에 맏길(맛질)이라 하였으며, 또한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싼 가운데 큰 들이 펼쳐져 있어 맏일이라 불렀다고 한다. 맛질은 한천(漢川)을 경계로 동쪽의 ‘큰 맛질’과 서쪽의 ‘작은 맛질’로 나누어진다. 행정구역상으로 큰 맛질은 대저리, 작은 맛질은 저곡리이다.

맛질은 상금곡리 ‘금당실’과 함께 예천을 대표하는 양반마을인 동시에 인재의 보고였다. 문경송씨가 터전을 개척한 이후, 밀양손씨 사위에게 물려주었고, 밀양손씨가 후사가 없어 안동권씨 권의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금당·맛질 지역은 이들 성씨들과의 혼인 관계로 얽히고 설킨 인척관계를 맺어 왔다. 그래서 이들 지역은 지금까지 함양박씨·원주변씨·안동권씨, 그리고 예천권씨·의성김씨 등이 각기 집성촌을 이루며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

예천 사람들 사이에는 “금당·맛질은 반(半) 서울”이란 말이 전해진다. 이 말의 의미는 두 마을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인데 번화함, 권세, 규모, 짜임새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당·맛질’을 함께 묶어 얘기한 것은 두 마을을 한 마을처럼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마을은 4㎞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러나 금당실 앞에 펼쳐진 ‘배날들’과 맛질 앞의 ‘저곡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상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