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하고 있을 때 그냥 행하라. / 숭산 스님
중국말로 법화경은 ‘실상묘법경(實相妙法經)’이라고 부른다.
실상은 ‘참’이라는 뜻이고 묘법은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어떻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법화경은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해 가르친다.
사실 이것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얻어야 할 것들도 아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린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휙휙 훑고
지나가는 망상들을 좇으면 여러분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을 끊어서 단지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돌아오면 완벽하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내 말과 여러분의 듣고 있는 귀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둘이 아니요,
그것이 이미 부처님이고 예수님이다.
이것은 한국 사람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독일, 중국 사람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남자만 경험하는 것도, 여자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때때로 이것을 ‘원점(primary point)’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신부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하나가 전날 나의 법문을 듣고
의문이 생겨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원점(primary point)’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지금처럼 법상을 ‘쿵’쳤다.
그게 전부였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신부님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테이블을 치는 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부처님 이전입니다. 우주 이전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이전입니다.
당신이 그 지점을 볼 수 있다면 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신을 볼 수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신부님이 입고 계신 셔츠가 까만 색이군요.”
법화경은 ‘쿵!’ 바로 이 지점이 어떻게 우리의 본성이고
모든 현상의 본질인지 깨닫게 해준다.
또 이 경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미래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다음 생은 실제 다음 생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나온 구별일 뿐이다.
실제 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이 장소가 아닌 때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되고 싶으면 단지 수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수행한다면 ‘다음 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된다.
‘쿵!’
여러분은 단지 이 순간을 가질 뿐이다.
‘다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
[출처] 나홀로 절로 | 작성자 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