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암 금석문을 찾아서 역동 우탁선생 탄로가(歎老歌)
사인암 청련암 삼성각 올라가는 계단입구에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는 우탁(禹倬)선생의 탄로가(歎老歌)이다. 우탁 선생의 호는 역동(易東)이다. 역동은 해동(海東)에서 주역(周易)으로서는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역동 선생은 고려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이 부왕(父王.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忠烈王)의 총애를 받던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불륜관계를 저지르자 우탁은 소복(素服)을 입고 도끼를 들고 입궐하여 임금의 잘못을 간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 상소를 들고 흔히 지부상소(持斧上訴)라고 한다. 숙창원비에 대해서 흔히 말하기를 고려시대 자유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탁선생의 시는 이것 외에도 춘산에 눈 녹인 바람이 있다.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불리과저 머리 위에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이것을 현대적인 문장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을 녹여(다시 검은머리가 되게) 볼까 하노라.
사인암리 청련암 삼성각
춘산(春山)은 청춘(靑春)을 말함이다. 해묵은 서리는 백발(白髮)이다. 두 시조 모두가 늙어 감을 탄식(歎息)하는 시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면서 주역(周易)의 대가(大家)로 알려 졌으나 생사 법에는 큰 평점을 주기는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렵다. 다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질감으로 범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월은 허무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면이 있다. 백발(白髮) 한탄(恨歎) 탄로(歎老)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모두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이라는 조선 정조 때 발행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에 수록되어있다. 1956년 경북 영천시 고강면의 이형상 유품 속에서 발견된 책으로 작가 172명의 시조 작품이 무려 1109수가 실려 있는 시조의 보서(寶書)이다. 그리고 김천택(金天澤)이 저술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도 실려 있다.
우탁 선생의 시조를 학산스님이 각자를 하였다.
이 글은 사인암 청련암(靑蓮庵)에 주지로 주석(駐錫)하였던 학산(鶴山)스님이 우탁 선생의 작품을 돌에 각자(刻字)를 한 석비(石碑)이다. 각자에 보면 단기4328년으로 되어있다. 이는 1995년 을해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무렵쯤에 나는 사인암 청련암에서 태양이 작열(灼熱)을 하던 여름날 학산 스님을 뵌 적이 있다. 스님은 남다르게 청련암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다. 지금의 청련암 주련(柱聯)도 학산 스님이 계시던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
경북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 소재 우탁선생 묘소
역동 선생은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태어 나셨으며 묘소는 경북 안동시 예안면 지삼동에 있다.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불리는 경북 안동시 남쪽 낙동강변의 영호루(映湖樓)에도 우탁 선생의 시판(詩板)이 있다. 여기서 우탁 선생의 또 다른 한시를 살펴보자.
嶺南遊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영남유탕열년다 최애호산경기가 방초도두분객로 녹양제반유농가
風恬鏡面橫烟黛 歲久墻頭長土花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抄漲寒槎
풍념경면횡연대 세구장두장토화 우헐사교가격양 좌간임초창한사
영남 땅에서 생활한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호산 땅의 경치 좋아 제일 좋다네.
풀 향기 나는 나루터는 양 갈래 길이고
푸른 버들 언덕 가에 농가 몇 채 서 있구나.
바람 잔 수면에는 노을이 비껴있고
오래된 담장위엔 이끼 끼어 있네.
비개인 들녘에선 격양가를 부르는데
앉아서 숲 끝난 곳 바라보니 돛단배 오고 간다.
첫댓글 동제님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