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로베르또 (Robert)
축일 9월 24일
성 로베르또는 요크에서 태어나
사제 되기를 바라다가, 동생이 시토회원으로 있던
모르페트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련을 받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어떤
봉헌생활을 원하시는 지를 깊이 깨닫고
성 질스 성당에 딸린 어느 동굴 속에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장남으로서의
모든 유산을 온전히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동굴은
이미 어느 기사의 소유였으므로, 근처의 가까운
숲속으로 들어갔으나 야만인들과 강도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움막이 파손되었다. 이에 그는
스포포스로 갔는데, 이때는 이미 그가 성자로서
알려진 뒤였다. 그뒤 그는 루드파링톤으로 가서
크나르스보루그에 정착하였다. 그는
도둑들과 걸인들이게 쉴곳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문에 여기서도 그가 정착하기엔 힘들었지만,
드 스튜트빌이란 은수자가 자기의 동굴 곁에 있는
땅과 두마리의 말과 소 등을 제공하였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후일,
그의 은둔소는 삼위일체회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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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코 (Mark)
축일 9월 24일
아스꼴리의 산따 마리아 디 몬떼갈로 출신인 그는
뻬로지아와 볼로냐에서 수학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부터
이들 부부는 각각 수도 성소를 감지하고는 합의하여,
아내는 글라라회, 남편은 프란치스꼬회로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순회 설교가로 곧 명성을 얻었는데,
거의 40년 동안 놀라운 정열로 활동하였다.
한번은 그가 무릎을 끊고 기도하던 중에
"마르코 형제여, 사랑을 설교하여라"는 말을
듣고는, 그의 설교 주제는 거의 항상 사랑이 되었다.
그는 늘 새벽 일찍 일어나 편태하였고, 한밤중에는
고행을 행하므로써 자신을 단련시켰다.
또 까메리노에서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면 즉시 극복된다는 예언을 하여
그대로 적중 시킨 이후 그는 더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비첸짜에서 운명했는데, 임종하는 바로
그날, 그는 수난 복음을 읽어 달라고 한 뒤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이제는 다 마쳤다"는
말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흔히 "사랑의 샛별"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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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나탈론(Anathalon)
축일 9월 24일
성 아나탈론은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파견되었다. 밀라노의 주교로서 그는 자신의
교구와 브레시아(Brescia) 부근에서 오랫동안
사목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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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도키오(Andochius)
성 티르수스(Thyrsus)
성 펠릭스(Felix)
축일 9월 24일
성 안도키우스(또는 안도키오) 신부는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에 의해
오늘날의 프랑스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성 티르수스(Thyrsus) 부제와 함께
오툉(Autun)으로 갔고, 그곳에서 상인이었던
성 펠릭스(Felix)와 함께 머무는 동안 그를 개종시켰다.
그 후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아
로마제국에 의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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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라르도 사그레도(Gerard Sagredo)
축일 9월 24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태생의 귀족이었던
성 게라르두스 사그레도
(Gerardus Sagredo, 또는 제라르도)는
산 조르지오 마초로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덕을 소지하고 있었고 후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성지에서 고적한 은수자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을 향하다가 악천후로
인하여 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헝가리에
정착하게 되었고 더욱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020년경 헝가리의 국왕
성 스테파누스(Stephanus)는 그를 자신의 왕자인
에메릭의 가정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은 백코니 숲 속의 은둔소에서
고적한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는 국왕이
크사나드 교구를 설정하고 그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활동하였다. 그의 복음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스테파누스 왕이 1038년에 서거함과
아울러 이방인들이 물밀듯 쳐들어 왔을 때
게라르두스는 부다(Buda)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는 베네치아의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헝가리의 사도'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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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레마로(Geremarus)
축일 9월 24일
성 게레마루스(또는 제레마로)는
프랑크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궁중에 들어가서
아내 도미나(Domina)를 만났고, 두 딸과
외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는 가족을 버려두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수도자였다. 엄격성과 관대함을
고루 갖춘 그는 고향 가까운 곳에 수도원을 짓고
원장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과 늘 대화하였고,
손수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인근 주민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곧 원장직을 사임하고
동굴 속에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 따라 죽을 때까지 원장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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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치피코(Pacificus)
축일 9월 24일
성 파치피쿠스(또는 파치피코)는
안토니우스 디비니와 마리아 브루니의
아들로서 세례명은 가롤루스 안토니우스
(Carolus Antonius)였다. 다섯 살 때에
양친을 잃은 그는 거칠고 난폭했던
외삼촌댁에서 자랐다. 외삼촌은 그를 마치
하인인 양 마구 다루었으나 어린 파치피쿠스는
17세가 될 때까지는 오로지 참기만 하였다.
1670년 그는 포라노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파치피쿠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그는 25세 때에
사제가 되었으며, 회원들에게 2년간 철학을
가르치다가 인근 마을이나 교회가 없는 곳을
골라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론은 지극히 부드럽고 단순했으므로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넉넉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재앙으로 인하여 그는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조차 불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기도와 보속에만
전념하다가 운명하였다. 특히 그는
사보이아(Savoia)가 터키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한다는 예언을 적중하여 큰 공경을 받았고,
또 미사 중에는 자주 탈혼에 빠졌는데
가끔 이 시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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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프누시오(Paphnutius)
축일 9월 24일
성 파프누티우스(또는 파프누시오)는
이집트의 은수자로서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와 동료들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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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헤르쿨라노(Herculanus)
축일 9월 24일
성 헤르쿨라누스(또는 헤르쿨라노)는
로마제국의 군인으로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
(Alexander I, 5월 3일)에 의해 개종한 후
오래되지 않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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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메르체데의 성모마리아 ( Maria)
축일 9월 24일
1218년 8월 1일, 성모께서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발현하시어 회교도의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를
구출하는 수도원을 창설하라고 분부하셨다.
다음 날 그가 야고보 왕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하니 왕도 똑같이 그러한
성모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조금전 부터 페냐포르트의 라이문도라는
성인도 왕에게 초대를 받아 아라곤에 와
있었는데 그분도 성모 마리아로 부터 같은
말씀을 받았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된 세 사람은 대단히 놀라며
바르셀로나의 주교 베렌가리오를 방문해
자세한 말씀을 여쭙고, (8월10일?)
8월15일을 기해
'메르체데의 성모 마리아회’라는
새 수도원을 창립했다.
이보다 벌써 20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기사 여러명이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해 한 신심회를
세운 일이 있었는데 베드로 등은 그 회의 규율을
기초로 새로운 회칙을 작성하고 즉각 13인의
동료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 수도원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인가를
얻은 해는 1235년이었다.
1212년 사라센들은 유명한 톨로사의 격전에서 패배해
거의 스페인에서 소탕 당하고 겨우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베드로는 수도원 창립 후 즉시 그 지방에 가서
불쌍한 노예 400명을 위해 대금을 내고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베드로 놀라스코는 또한 "노예인 신자들에게
자유를 줘야 할 때,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을
인질(人質)로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한다."라는
회칙의 제4서원에 따라 북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대신해 쇠사슬에 결박되어
투옥 당한 일도 있었다.
그때 사라센들은 그를 죽이려고 돛대도 키도 없는
작은 배에 태워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과 피로와 노령으로 매우
몸이 허약해져서 수도원 총장직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수년간의 여생을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보속으로 지냈다.
이와같이 세상에서 많은 공적을 세운 성인은
1256년, 마침 성탄절 밤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1628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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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헬레나(Helen)
축일 : 9월 24일
볼로냐 출신인 그녀는 17세 때에 결혼하였는데,
이들 부부는 거의 30년 동안 매우 훌륭한
크리스챤 가정을 꾸미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 부부의 애정은 너무나 깊어 모든 이들이
그들을 우러러 공경하였는데, 남편이 죽은지
얼마 후에 그녀 또한 무덤에 묻혀 위대한
부부 사랑을 증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