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1)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오.
1) 온유의 반대말은 ‘강팍(剛愎)’
이다. 곧 강팍함이 없는 것이 곧 온유다.
① 강팍은 고집스럽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 것, 심지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도 절대로 사과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것이다. 이들은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다. 모세와 대결하였던 바로의 위신과 자존심이 결국 자기를 멸망시켰다.
② 강팍한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이론에 갇혀서 살면서 새 것을 싫어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거나 비판부터 한다. 남을 이해할 줄 모르고, 자기를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남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한다.
③ 이스라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이었다(행 7:51).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멸망을 당했고, 지금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성도들을 박해한다. 몸이 굳어짐도 큰 병인데,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병일까?
④ 우리가 강팍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팍하고 교만해지므로 패망의 선봉(잠 16:18)에 선다. 이미 천국에서부터 180도 방향을 돌려 지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⑤ 목이 곧은 짐승의 대표는 나귀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어야”(출 13:13) 한다. 나귀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이다. 목이 곧 내 고집이 꺾여야 한다.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 안에서 감격해하며 순종해야 한다.
2) 목이 곧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도 못하며, 기쁨도 감격도 없는 사람이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을 모르고 은혜를 받지 않으니 갈수록 더 강팍해져서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
② 머리를 돌려 좌우를 살펴볼 수 없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름은 민주 투사라지만 실제로는 독재자보다 더 독재자다. 목사가 독재한다고 악을 쓰는 장로는 자기 속에 독재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로가 독재해서 목회를 못하겠다는 목사도 자기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
③ 이런 사람이 온유해지면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온유한 사람은 배우기를 즐기고 계속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마음이 강팍하면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고, 진리를 배우지 못하면 자유를 얻지 못하고(요 8:32), 마음에 안식이 없다.
3) 온유란 부드러운 것인데, 곧 외유내강(外柔內剛)을 말한다.
① 산 속의 왕을 사자나 호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산 속에서 번성하여 산을 차지하고 사는 짐승은 토끼나 다람쥐 같은 것들이다. 조개, 게, 달팽이 같은 하등동물은 속에 뼈가 없고 단단한 껍질로 자기를 보호한다. 그러나 고등동물은 뼈가 속에 있고 겉은 부드러운 살과 가죽으로 되어 있다. 하등동물은 겉이 강팍하고, 고등동물은 겉이 온유하다. 하등인간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 같은 딱딱한 껍질(겉옷)을 입고 허세와 위엄을 부린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겉이 부드럽다. 누구 앞에서나 겸손하다. 그래도 아무도 함부로 넘보지 못한다. 위엄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가장 위엄이 있고 가장 큰 능력을 행했던 사람은 모세였다. 그의 온유함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민 12:3). 당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이 허세를 부리는가가 당신의 위엄의 척도가 아니고, 당신이 얼마나 버렸으며, 얼마나 온유한가가 당신의 위엄의 척도다.
② 껍질이 단단한 씨앗에서는 생명이 싹을 내지 못한다. 씨앗이 땅에 묻혀 물렁물렁해져야 그 속에서 생명이 싹을 낸다. 사람도 딱딱하면 생명의 싹이 나오지 못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부드러워질 뿐 아니라, 아예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재물이나 권세를 위엄 삼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분이 아니다. 그는 온유하셨다. 한없이 못나고 약한 제자들보다도 더 약해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명령 한 마디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시켜서(마 26:53) 잡히시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 권세를 다 무너뜨릴 수도 있으셨을 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끝까지 온유하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보다도 하늘의 새로운 생명이 움틀 수 없기 때문이었다.
③ 좋은 운동선수가 되려면 군살이 없어야 하고 허리가 유연해야 한다. 사람이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자신이 없으면 몸이 굳어진다. 얼굴의 표정도 딱딱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회의가 잘 될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국회도 교회도 가정도 난장판이 된다. 얼굴을 풀어야 한다.
④ 교회를 보자. 자칭 정통파다 보수파다 하는 사람들일수록 겉이 딱딱하고 고집스럽다. 남을 이해하고 알아줄 아량이나 융통성이 크게 부족하다.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모두가 이단이고 사이비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실은 속이 비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묵수주의(墨守主義)에 빠질 위험이 크다. 바리새인들은 교리적으로는 옳았지만 행실엔 진실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마 23:3).
딱딱하면 부러진다. 태풍이 불면 큰 나무들은 뿌리째 뽑히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갈대들은 꺾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정통 중의 정통이고, 보수 중의 보수다. 그러나 굳어지지 않으셨고, 온 우주를 다 품으셨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악인들을 향하여서도 무한한 사랑과 동정을 가지셨다.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고, 그들의 죄까지도 짊어지시고 피 흘려 돌아가셨다.
16.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2)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오.
1) 온유의 반대말은 ‘강팍(剛愎)’이다. 곧 강팍함이 없는 것이 곧 온유다.
2) 목이 곧은 사람이란 깨닫지도 못하고, 좌우를 돌아볼 줄도 모른다.
3) 온유란 부드러운 것인데, 곧 외유내강(外柔內剛)을 말한다.
4) 온유란 부드럽다는 말이요, 남의 사정을 알아준다는 말이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① 온유한 사람은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영어로 이해한다는 말을 under-stand라고 한다. “낮은 자리에 내려서서 쳐다보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그때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게”(빌 2:3) 된다. 그래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게 된다.
② 남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다. 강팍한 사람은 세상 것을 다 자기가 잡으려고 움켜쥐지만,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욕심을 다 버리고 베풀기를 즐겨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천국의 더 좋은 것을 얻을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의 것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마 19:16-21).
③ 온유한 사람은 남을 이해하고 도와줌에서 삶의 참 기쁨을 맛보며 보람과 행복을 가지고 살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안의 주님이 하심을 안다.
5) 온유란 따뜻한 것을 말한다. 곧 속에 생명의 온기가 있는 것이다.
시체는 온기가 없고 겉이 딱딱하며 찬바람이 난다. 인간들도 찬바람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냉혈동물(冷血動物)이라는 것이 있다. 바깥 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한다. 뱀이나 개구리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한다. ‘인간 냉혈동물’도 있다. 따뜻한 감정이나 인정이 없는 냉혹한 사람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뱀이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 이들은 자기의 것은 놀라울 정도로 뜨겁게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에겐 무섭도록 냉혹하다. 이들의 일면만 보고 사랑이 많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들은 진리를 대적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오늘날에도 이 독사의 후손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 사랑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 큰 사랑을 바로 깨달으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변화를 받는다. 나를 살피기도 바쁜데 언제 남을 정죄하는가? 생명의 뜨거움을 소유하자.
6)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온유해질까?
① 부단히 자기를 살펴 회개해야 한다. 진리를 배우려고 사모해야 한다. 남에게서 나보다 더 나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
② 예수님은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주님께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번 설교에 3,000명씩 회개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먼저 주님의 온유한 마음을 배우고 닮아야 한다. 이 마음이 없이 자기를 나타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능력도 지혜도 결코 얻지 못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자기의 교만하고 강팍한 마음을 회개하고 변화돼야 한다.
③ 성령이 오셔야만 된다. 하나님의 새 언약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마음판에 새겨지고,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온유해질 수도 없고, 온유해지려는 마음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면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자.
☞ ‘剛愎’은 전에는 ‘강퍅’이라고 썼다. 그런데 1989년 3월에 개정된 새로운 맞춤법에 발음 간소화의 방법으로 ‘퍅’(愎)을 ‘팍’으로 쓰기로 하면서 예로 ‘乖愎’을 ‘괴팍’으로 쓰기로 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아직도 ‘강퍅’을 ‘강팍’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