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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자빈 간택, 즉 며느리를 얻는 것이었다. 세자인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의 첫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은 휘빈 김씨였다. 그러나 세자와의 사이가 극히 좋지 못했던 세자빈은 세자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고, 사랑하는 여자의 신발을 태워 가루를 내고 그것을 술에 타 마시게 하는 민간의 비방책을 쓰다가 발각이 되어 2년 3개월 만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두 번째 세자빈은 순빈 봉씨(純嬪 奉氏, ?~?)였다. 세종은 두 번째 며느리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지만 봉씨는 술주정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소쌍(召雙)이란 여종과 동성애에 빠지는 문란한 생활 끝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 그는 조선 왕실 입장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왕세자였다. 개국 초기의 혼란함이 안정된 이후, 최초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적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이 5대 문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왕실에서 문종에게 거는 기대가 컸으며, 문종은 아버지 세종을 빼닮은 활동으로 기대에 부응하였다.
문종이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2년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1421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1450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는 29년 동안을 세자로 있었다. 세자로 있는 기간 동안 문종은 세자빈을 맞이하였는데, 세 명의 세자빈은 모두 문종과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인 1427년(세종 9)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휘빈(徽嬪)으로 맞아들였다. [세종실록]에는 “김씨를 왕세자의 휘빈(徽嬪)으로 봉하였다. 왕이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고 근정전에 거둥하여 문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판부사 최윤덕과 병조참판 성엄을 보내어 왕세자빈에게 책인(冊印)을 주었다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종은 휘빈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초조함을 느낀 휘빈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압승술(壓勝術)을 쓰려 했다. 휘빈은 이를 시녀 호초(胡椒)를 통해 알게 된 술법이라고 진술했다. 휘빈이 사용하려 한 압승술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뒤, 이를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는 것이었다2). 휘빈은 문종이 사랑했던 시녀 효동과 덕금의 신발을 몰래 입수하여 이를 태우고, 그 재를 갖고 있다가 발각되었다. 실행도 해보지 못한 채 미수에 그쳤지만 세자빈의 엽기적인 행각은 시아버지인 세종을 분노케 했다. 결국 휘빈은 문종과의 사랑을 회복하기는커녕 압승술을 썼다는 이유로 2년 만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세종은 “7월 20일에 종묘에 고하고 김씨를 폐빈(廢嬪)하여 서인(庶人)을 삼았으며, 책인(冊印)을 회수하고 사가로 쫓아 돌려보내어서 마침내 박행(薄行)한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가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여 그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한 시녀 호초는 유사(有司)에 넘겨서 법과 형벌을 바르게 밝히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상례(常例)에 벗어난 일로서 실로 국민들의 귀와 눈에 놀라움을 줄 것과 더욱 모든 관료들도 아직 그 일의 시말(始末)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에 교서를 내려 알리노라”라고 하며 세자빈 폐출을 발표하였다. 요즈음으로 치면, 대국민담화를 통해 세자빈 폐출의 불가피성을 발표한 것이다.
첫 번째 세자빈 간택에 실패한 세종은 두 번째 며느리만큼은 심혈을 기울여 선발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세종이 특별히 외모도 선발 기준에 넣었다는 것이다. 문종이 휘빈 김씨를 멀리한 것에는 그녀의 용모도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자빈 간택을 위해 세종이 내린 교서를 보자.
이제 동궁(東宮)을 위하여 배필을 간택할 때에는 마땅히 처녀를 잘 뽑아야 하겠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다. 나는 부모 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揀擇)하고자 하나, 옛 예법에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으므로, 창덕궁에 모이게 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시녀(侍女)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둘째 아들)과 더불어 뽑게 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세종실록] 1429년(세종 11) 8월 4일
이에 대해 허조(許稠)만 유독 불가하다고 반기를 들었다. 한곳에 모이게 하여 가려 뽑으면 오로지 얼굴 모양만을 취하고 덕(德)을 보고 뽑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세종은 잠깐 보는데 어찌 그 덕(德)을 알 수 있겠냐고 이야기하며, 이미 덕으로서 뽑을 수 없다면 용모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외모까지 고려해서 선발 된 인물이 바로 순빈 봉씨였지만, 그녀는 세종대 왕실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순빈 봉씨는 봉려(奉礪, 1375~1436)의 딸로, 1429년(세종 11) 10월 15일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 순빈(純嬪)에 봉해졌다3). 시아버지 세종이 공을 들여서 용모까지 보고 뽑게 한 봉씨. 그녀는 비록 외모는 검증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성격이 문제가 되어 문종과의 금슬(琴瑟)이 좋지 못했다. 순빈은 아주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성품을 가졌다. 처음 순빈을 들였을 때, 세종은 휘빈의 전례를 생각하여 다시는 문란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사(女師)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순빈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4)” 하면서, 수업 받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세종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순빈은 궁궐 안에서 술을 즐겨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생활하였다. 실록에는 술을 즐겼던 봉씨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였다.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였다. 또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 이것이 어찌 빈(嬪)이 마땅히 할 짓이겠는가.- [세종실록] 1436년(세종 18) 11월 7일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의 소유자인 문종에게 있어 술을 즐기고 심지어 주사(酒邪)까지 있는 순빈은 매우 버거운 상대였다.
부부의 사이가 멀어지고 후사가 없자, 세종은 후사를 잇기 위해 세 사람을 세자의 후궁으로 뽑아 들였다. 순빈은 이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는데, 특히 후궁 중에 권 승휘(權承徽: 후의 현덕왕후)가 임신을 하게 되자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순빈은 궁녀에게 항상 “권 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거야5)” 하며, 때로는 소리 내어 울어 그 소리가 궁중에 퍼지기까지 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며느리 순빈을 불러서 타일렀지만, 순빈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세종은 세자에게 “비록 여러 승휘가 있지마는, 어찌 적실 부인에게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귀할 수가 있겠느냐. 적실을 물리쳐 멀리할 수는 없느니라6).”하며, 순빈을 가까이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부터 세자가 순빈을 조금 우대하는 예절을 보였으며, 순빈이 스스로 태기(胎氣)가 있다고 말하면서 왕실의 분위기는 고양되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순빈이 스스로 낙태(落胎)를 하였다고 말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녀는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하였으나, 궁녀에게 살펴보게 하니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순빈도 너무나 불안한 상태에서 상상임신을 했을지 모르나, 결국 임신했다고 한 것이 거짓말로 밝혀지면서 순빈에 대한 왕실의 신뢰는 더욱 무너졌다.
순빈은 투기 때문에 여러 번 궁인을 구타하기도 했는데,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정도로 폭력적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세자는 “내가 그를 총애한다면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비록 칼날이라도 또한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뜻대로 된다면 옛날의 한나라 여후(呂后)라도 또한 능히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7).”라고 말하면서 고충을 토로하였다.
이 밖에도 순빈의 경솔한 행동들은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 사이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거나,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것 등 세자빈의 자리에서 결코 모범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것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세종은 순빈 봉씨의 거친 성품과 그녀가 했던 가벼운 행동들을 어느 정도는 용인해주었다. 그러나 세종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괴이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에 빠졌다는 것이다. 동성애 스캔들은 결국 순빈 봉씨의 폐출로 이어졌다.
나머지 일은 모두 가벼우므로 만약 소쌍(召雙)의 사건만 아니면 비록 내버려두어도 좋겠지마는, 뒤에 소쌍의 사건을 듣고 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세자빈을 폐하고자 한다. 대개 총부(冢婦: 맏아들의 정실 아내)의 직책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은데, 이러한 실덕(失德)이 있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儀表)가 되겠는가.- [세종실록] 1436년(세종 18) 10월 26일
당시 궁궐에서는 궁녀 사이에서의 동성애가 암암리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시녀와 종비(從婢: 계집종)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하여 동침하고 자리를 같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웠던 기록에서도 이러한 정황이 포착된다.
순빈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을 사랑하여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궁인들은 순빈이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수군거렸다. 이 소문을 들은 세자는 어느 날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소쌍에게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물었고 소쌍에게서 그렇게 했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문종의 경고 이후에도 순빈은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었다. 심지어 순빈은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쌍은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두려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 소쌍이 권 승휘의 사비(私婢)인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봉씨는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소쌍에게 감시자까지 붙인 것이다.
순빈과 소쌍의 스캔들이 궁중에 파다하게 퍼지자, 세종은 부인과 함께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8).”하고 사실을 토로하였다. 일반 사대부가의 부녀자로서도 감히 못할 행실을 저지른 순빈의 행태에 세종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첫 번째 세자빈 휘빈에 이어 순빈도 폐출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1436년(세종 18) 11월 7일 세종은 마침내 사정전에서 전교를 내려 순빈 봉씨의 폐출을 발표하였다. “하물며 지금 세자는 전에 김씨(金氏)를 폐했는데 또 봉씨(奉氏)를 폐하게 되니, 이것은 나와 세자가 몸소 집안을 올바르게 거느리지 못한 소치이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신하들과 백성들에 대한 사과의 뜻이 포함된 전교문이었다.
순빈 폐출 후 세종은 다시 세자빈을 간택하려고 하였으나 마땅한 처자가 없자, 세자의 후궁들에 눈을 돌렸다. 이때 눈에 들어온 여인이 승휘 권씨였다. 휘빈과 순빈 두 세자빈을 폐출하는 비운을 겪으면서, 새롭게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보다 후궁 출신 중에서 검증된 인물을 찾는 방식으로 세자빈을 간택한 것이다.
성품도 좋고 문종과의 관계도 돈독하여 자식까지 임신했으나, 안타깝게도 권씨(후에 현덕왕후로 추증)는 단종을 낳은 지 이틀 만인 1441년 7월 24일 산후병으로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빈은 아름다운 덕이 있어 동정(動靜)과 위의(威儀)에 모두 예법이 있으므로, 양궁(兩宮)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이 위독하게 되매, 왕이 친히 가서 문병하기를 잠시 동안에 두세 번에 이르렀더니, 죽게 되매 양궁이 매우 슬퍼하여 수라를 폐하였고, 궁중의 시어(侍御)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9).”고 기록될 정도로 슬픈 죽음이었다. 세자빈 3명이 연이어 폐출되거나 사망함으로써 세종의 세자빈 간택 징크스가 이어진 것이다.
세자빈 사망 후 문종은 이후로 적처(嫡妻)의 빈을 두지 않았다.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왕비를 들이지 않음으로써, 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간 중 왕비가 없는 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종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문종은 살아생전 후원해주는 왕비가 없었고, 승하 후에는 어린 단종을 지원해주는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단종에게 어머니인 대비가 있었다면, 삼촌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비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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