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의론(譜疑論) 연구결과(硏究結果) "세계안(世系條)" 번복(翻覆) 시말(始末)
아래의 기록은 보의론을 다룬 연구위원회 구성 및 활동과 연구결과와 확정과정 등의 대략을 간추린 것이다. 즉 도문회 총회와 운영위원회의 위임에 따라「장흥 위씨 보의론 연구위원회」가 발족되고 그 위원회가 보의론을 연구해서 공고절차를 밟아 확정시키는 경과이다. 그리고 공고절차 이의신청기간을 넘어서 한 사람의 운영위원이 보의론 연구결과 가운데 세계조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 이를 번복한 과정을 담았다. 이들 과정은 도문회 운영위원회의에서 "이후 족보수보 등에 전거로 삼게 하자"는 의결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먼 훗날 후손들이 족보문제를 다룰 때 다시 세계문제가 나오면 어떤 방안이 옳았는지를 평가하는 자료로 제공하기 위함인 것이다. (편집자 주)
【Ⅰ】세계(世系) 연거(硏究)와 수정(修訂) 과정(過程)
1. 보의론 연구위 발족 배경
장흥 위씨 족보는 1759년 영이재공 등이 발행했다. 공께서는 창제 당시에도 "世系" 등에 관해 의문을 남겼으며, 이후 존재공, 만암공, 죽오공, 천관공, 도곡공, 송당, 계사로 이어졌다. 존재공은 공의 아드님이고, 죽오공은 손자로 직계 후손이었으나 보의론을 제기한 것은 바른 족보에 대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염원은 후손들의 몫으로 넘겨졌다.
2005년「왕조실록 태백산 사고본」이 완역되면서 인터넷에 오픈되자 2009년 위의환은 이를 근거로 「방촌학Ⅰ」이 출판되고, 2010년 위정철은 역대 보의론을 망라한「譜疑論叢」을 출간했다. 이에 따라 도문회는 2010년 4월 24일 하산대제 제관을 천정하는 운영위원회에서 "판사공의 진도 유배기록 등이 역사와 배치될 수 없다. 차제에 보의론을 정리해야한다" 등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이에 참석 위원들은 5월 2일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의했다. 이 안건은 하산대제 후에 열린 총회에 상정돼 운영위에 위임되기에 이르렀다.
2. 보의론 연구위원회 구성
도문회는 총회의 위임에 의하여 2010년 7월 7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위원장에 증, 간사 정우, 상임위원 정철을 선임했다. 그리고 이들 3인에게 약간명의 위원선임과 원만한 운영을 위임했다. 3인은 종파와 지역 등을 감안, 아래와 같이 위원을 선출했다. 啓候(안항), 載均(관북종친회장), 煥(행원), 斗煥(운암), 聖太(청계), 又良(종사랑 여수), 聖(방촌유물관 명예관장), 昌復(한학자 서울), 洪煥(존재문학 박사), 義煥(방촌학 저자) 등 13인으로 「보의론 연구위원회」를 구성, 7월 21일 도문회에 인선 결과를 보고하고 위촉절차를 밟도록 했다.
3. 연구위원회 제1차 회의
위원회는 1차 회의를 2010년 8월 5일 백산재에서 열었다. 이날 모임에는 우량과 의환 2명만 불참하고 11명의 위원과 황량 도문회장, 모량 재무유사가 동석했다. 회의에서는 바로 5개항의 주제와 11개 세부항목의 심의원칙을 의결하고, 초안 작성은 실무소위에 위임했다. (보의론 연구결과 보고서 18쪽 참조)
1) 연구주제
제1항 시조공, 제2항 실계, 제3항 중시조공, 제4항 세계, 제5항 판사공
2) 심의원칙
보의론 심의는 주제별 족보원문을 기준으로 설정 한다 등 11항(위 보고서 4쪽 참조)
4. 전거검증표 초안 작성
실무소위는 2010년 8월 8일부터 11월 4일까지 8회에 거쳐 장성했다.(위 보고서 8-17쪽 참조)
5. 연구위원회 제2차 회의
연구위원회는 2010년 11월 24일 제2차 위원회를 백산재에서 하려다 뜻하지 않는 사정으로 읍내 덕인식당에서 열었다. 참석자는 증(增), 계후(啓侯), 정우(楨佑), 재균(載均), 환(煥), 두환(斗煥), 정철(正哲), 성태(聖太), 우량(又良) 등 9명이었으며, 성, 창복, 의완 등 3인은 의결권을 위임하고 불참했다. 그 외 도문회장 황량, 재무 모량 등 2명이다. 회의 진행은 "전거검증표(典據檢證表) 초안(草案)"에 의거 축조심의(逐條審議) 방법(계후 위원 제안)으로 족보원문에 대한 보의론 및 전거, 원문 정설 및 전거, 논점(論點) 검증 등의 방법으로 심의했다. 전거사실이 확실한 사안은 이의 없이 의결했으나 제4항 "世系條"는 난상토론을 벌였다. 계후 위원은 대동보를 지참하기도 했다.
위원장은 "세계(世系)"분야는 역대 보의론(譜疑論) 가운데 가장 의혹이 많이 제기된 사안이기 때문에 이번에 심의를 거쳐 수보(修譜)돼야 할 사항이라 매우 조심스럽다고 전제한 후 실무소위에서도 초안 작성을 유보했지만 오늘 위원들의 중의를 모아보자. 존재공(存齋公) 등 몇 분 선조가 세계의 모순을 지적한 대목을 상기했다.
존재공께서 족보의 세계를 보시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 대목이 있다. "기묘초보를 살펴보니 원외랑공 소(紹)를 5세 충렬공의 아들로 이어간다면 충렬공이 인종(仁宗) 때 졸하였고(1107년), 손자인 원개(원감국사)는 원나라 성종(成宗) 때 죽었으니(1293년) 160여년인데 3세간이니 연대는 멀고 세대는 촉박하다. "면서 슬픈 눈물을 뿌릴 뿐이라 했다. 또 만암공도" 원나라 초부터 조선 건국까지는 겨우 100년인데 원개로부터 지후공(판사공)까지는 무릇 8세이니 세대는 멀고 연대는 짧으니 어찌된 일인가? 문종(文宗) 때 등제하여 고종(高宗) 무신년 원개의 급제까지는 200여년이 되니 연대는 멀고 세대는 너무 가까우니 충렬공 이하부터 우직간공 이상에 혹시 실전(失傳)된 것이 아닌가 두렵다.
정철 위원은 "정말 어려운 사안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5세․6세․7세 즉 3대 조손간이 186년이고, 7세에서 14세까지는 7세 간이나 불과 120년인 것은 납득할 수 없다. 1세대를 30년 주기로 보면 186년은 충렬공과 원감국사 간은 6세간이어야 하고, 원감국사에서 판사공 간은 4세간이어야 마땅한 세계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족보상계에서 생졸년이 확실한 분은 5세, 7세, 14세 등 3세에 그친다. 그렇다면 이 3분을 기둥으로 삼아 세계의 골격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5세~7세간 186년에 최소한 5세로 늘이고, 7세~14세간은 4세를 줄여야 정상적인 세계의 틀이 갖추어진다. 세계를 개선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조손(祖孫)간이 뒤집히지 않아야 한다.
상계와 관련해서 유의할 대목이 있다. 우리는 매년 하산사 신실에서 오현조의 제사를 지낸다. 그 5현조는 시조공, 중시조공, 5세 충렬공, 14세 판사공, 15세 통선랑공이다. 나머지 11위의 선조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제사를 모시지 않고 있다. 정철 종인이 2004년 「종보」에 찬물이라도 떠놓자고 제의해도 한 사람도 호응하지 않았다.
이는 상계조상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1987년 시조공 사적비를 세울 때 비문에 "당나라 한림학사인 시조공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도예지사로 동래하지 않고 스스로 오고 싶어서 왔다." 고 적혔다. 또한 중시조공이 사적비에는 나계인(羅季人)으로, 진도 판사공비에는 여초인(麗初人)으로 기록됐으나 누구도 의론을 달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왕에 보의론 연구위원회가 발족된 이상 이런 모순과 세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방법은 6세 7세조를 10세, 11세로 내리면 간단하다. 그러나 이럴 경우 "조손(祖孫)간 역전현상"이 나온다. 지금까지 윗대 조상이 현손과 5세손으로 내려가고, 손자들이던 8세, 9세가 할아버지가 되는 민망한 현상이 일어나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 길은 만암공이 여러 사서에서 밝힌 방조들에서 찾아야 한다. 1차안은 6세에 絳(補闕), 7세 通元(軍侯), 8세 敦謙(慶州副留守), 9세 公就(郎將), 10세 紹, 11세 元凱(圓鑑國師)로 보정하기로 했다. 이럴 경우 조손(祖孫)의 역전현상이 해소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 위원 모두가 최선은 아니나 차선으로 여겼다.
그러나 "강(絳)"과 "공취(公就)" 두 방조의 활동시기에 문제점이 발견된 것이다. 강(絳)의 경우 1081년 송나라 원풍(元豐)의 생신축하사절로 다녀왔다. 그런데 5세 충렬공은 1090년 원우(元祐)의 생신축하사절로 다녀왔기에 아들이 아버지보다 늦어진다. 설상가상으로 5세 충렬공 계정(繼廷)과 6세 강(絳) 그리고 10세 소(紹)가 모두 "사변(糸辺)"이라는 모순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공취(公就)"도 1250년에 고려의 사절로 몽고에 파견된 기록이 있다. 그런데다 1231년 제1차 몽고군의 침략 때 용주(龍州) 부사(副使)로 재직 중 포로가 된 소(紹)가 (공취公就)의 활동시기에 비해 19년이나 늦어지는 모순이 나온다. 그렇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원개의 아버지인 소(紹)를 배제할 수 도 없는 노릇이라 소위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결국 通元(軍侯)을 6세, 敦謙(慶州副留守)을 7세로 올리는 한편 十韻詩六十二人(고려사, 지장록 61쪽)에 뽑힌 대여(大輿)를 8세로 정리했다. 2차안의 4대를 3대로 줄여 9세 소(紹), 10세 원개(元凱)로 정리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원은 1135년, 돈겸은 1200년, 대여는 1212년, 소는 1231년, 원감은 1245년이라서 활동연대가 맞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보의를 보정하신 우리 문중의 역사는 자랑스럽고 오래 남을 사건입니다. 이를 본받아 훌륭한 후손들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장흥위씨 문중사 각분야에서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뿌리를 연구하시고 열심이신 종친분들이 존경스럽고 고맙습니다.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