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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고집
240421낮 (룻1:15-18)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아멘
성경에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 사용되었는데, 긍정적인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고집불통, 고집쟁이, 고집통이 등도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하고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완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완고함은 곧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옹고집, 왕고집, 똥고집, 쇠고집...)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고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제일 고집이 센 성씨가 무슨 성씨라고 합니까?
안! 강! 최!
고집 3姓입니다. 안씨, 강씨, 최씨 성을 가진 성도님들 오해는 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안가 고집이 얼마나 센지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벼룩을 한 마리 잡아놓고 바늘을 하나 주면서 ‘그놈을 바늘로 찔러서 잡아라’고 하면 끝까지 찔러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게 안가 고집이라고 합니다. 그 작은 벼룩을 그 작은 바늘로 찔러서 잡는 고집이니 얼마다 대단합니까? 안씨 고집 다음이 강씨 고집이고, 그 다음이 최씨 고집이라고들 합니다. 3등인 최씨 고집만 해도 얼마나 센지 ‘산 김가 셋이 죽은 최가 하나를 못 당한다’ 하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최씨가 앉은자리는 풀도 안난다.
제가 우리 지방 목사님들 중에 최씨 성을 가진 목사님들이 몇 되시는데... 최씨 중에는 앉아서 풀 안 나는 최씨도 있고, 앉아서 풀 나는 최씨가 있다.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 믿고 성화되신 최씨는 앉은 자리에 풀이 난다.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고집 없는 성이 어디 있으며, 고집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죽은 사람이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고집이 있습니다. 고집 때문에 낭패 보기도 하지만 고집 때문에 성공합니다. 에디슨의 고집이 없었으면 전기가 없었을 것이고, 라이트 형제의 고집이 없었으면 비행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고집으로 한글이 창제되었고, 이순신장군의 고집으로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집은 개인의 성공과 역사의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고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공통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고집이 보통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동안 심판의 기별을 전하며 방주를 짓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땅에 머물면서 떠나온 고향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이삭에게는 원수가 아무리 우물을 메워도 그것을 다시 파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기도를 목숨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에게는 아무리 원수가 방해를 해도 성전을 재건하고 말겠다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고집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고집함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고집을 잘 부리면 자기도 성공하고 남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고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려면 역시 고집이 필요합니다. 믿음생활에도 고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면 양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면 누가 뭐라 하고 방해를 해도 끝까지 가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라면 어떤 손해가 와도 어느 누가 방해를 하고 핍박을 해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하는 고집이 필요합니다. 이런 고집이 거룩한 고집입니다.
부모님이 교회 나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 순간부터 교회 안 나옵니다. 남편이 새벽기도 가지 말라니까 그 순간부터 새벽기도 그만둡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십일조 하는 것 반대한다고 결단한 것 쉽게 포기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싫은 소리 좀 했다고 봉사하던 것 중단합니다.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고, 바빠지면, 쉽게 예배생활 그만둡니다.
쓸데없는 데는 고집피고, 세상 이득 좀 보는 데는 죽기 살기로 고집 피며, 끝까지 자기 고집 관철시키면서 믿음생활에는 전혀 고집이 없습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고 양보합니다. 고집을 부려야 할 때는 안 부리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양보해야 할 때는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신앙생활이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이 나라가 공산화가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가정이 해체되고, 마약이 젊은이들을 망가트리고, 차별금지법이 통과 되고 동성애가 합법화 되면 교회는 금방 무너지고, 이 사회는 겉잡을 수없이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잘 못된 것을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에 다 걸립니다. 남자, 여자라는 표현도 쓰지 못합니다. 동성애 하면 안 된다고 설교도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거룩한 고집이 없으면 정말로 신앙생활 할 수도 없고, 믿음 지키기 정말 힘들어집니다. 거룩한 고집이 없으면 믿음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신앙생활 제대로 하면 감옥에 가든지...벌금을 내든지 그것도 한번에 3천만원, 오천만원씩 내게 된다면 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으며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고집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본문 룻기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의 고집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그 여인은 바로 룻이라고 하는 이방여인입니다.
흉년을 피해 남편,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내려간 나오미의 가정에 재난이 겹으로 닥쳐왔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차례로 죽은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 이렇게 세 과부만 남은 처량한 신세가 되자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연히 두 며느리는 그들의 고향인 모압에 남겨 두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도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어머니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따라 나서는 며느리들을 나오미는 말리고 또 말렸습니다. 결국 큰 며느리 오르바는 고집을 꺾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룻 1:15). 그 때 룻이 시어머니에게 한 말이 16-1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기는 가장 슬프게 시작해서 가장 기쁜 내용으로 마쳐지는 해피엔딩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룻기의 내용이 가장 슬프게 시작해서 가장 기쁘게 마쳐질 수 있는 까닭은 한 여인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 보겠다는 고집이 아닙니다. 팔자를 고쳐 보겠다는 고집도 아닙니다.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남부럽지 않게 살고 말겠다는 고집도 아닙니다. 무슨 고집입니까? 어머니처럼 살겠다는 고집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는 고집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겠다는 고집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고집입니다. 결코,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고집입니다. 한 여인의 이와 같은 고집이 슬프디 슬프게 시작된 룻기를 기쁘기 그지없는 결말로 이끌어 간 것 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집이며 거룩한 고집입니다.
믿음에는 적어도 이런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거룩한 고집에 복을 주셔서 신실한 남편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고, 오벳이라는 아들을 허락하셨는데,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시어머니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이 여인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며느리 룻은 이방 나라 모압의 여인으로 하나님을 모르던 여인이었으나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음생활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비록 남편은 죽었지만, 그 시어머니의 믿음생활을 자기도 배우고 본받고 싶다는 결심을 시어머니가 말리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고향도 떠나고 친정도 떠나 멀리 시어머니의 고향 타국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가는데도 따라갑니다. 믿음생활 제대로 시어머니 곁에서 배우며 해보겠다는 룻의 고집이 대단합니다. 곁에서 아무리 말려도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에는 이런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흔들림 없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믿음의 여인 룻이 보여준 믿음에 대한 거룩한 고집이 여러분의 심령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한 고집은 아집(我執)이 아닙니다. 아집은 자기 이익, 자기 목표, 자기 주관에 집착하는 것이지만, 거룩한 고집은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인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거룩한 고집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보지 않겠다는 고집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는 고집입니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고집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런 거룩한 고집으로 신앙이 더욱 강해지고 단단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너무나 허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연약해 보입니다. 아주 작은 시험만 닥쳐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휘청댑니다. 너무나 불안해 보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믿음을 붙들고 나가는 고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싸워 이기겠다는 야성(野性)이 없습니다. 되는 대로 믿고, 형편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거룩한 고집, 믿음의 고집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의 심령에 세 가지 거룩한 고집이 심겨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첫째는 말씀에 대한 고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말씀에 대한 고집, 말씀을 향한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첫째 자리에 두고 살아가겠다는 결심, 하나님의 말씀만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겠다는 결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고집이 있어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일 년 삼백 육십오일 중에 단 하루도 하나님 말씀 없이는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결심에 대한 고집쟁이, 고집불통이 되십시오. ‘No Bible, no breakfast’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지 않고는 아침밥을 먹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입니다. 거룩한 고집이 여러분의 고집이 되게 하십시오.
제가 몇 해 전 새벽에 꿈을 꾸었습니다. 외국 같았습니다. 모두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말도 안통하고, 낯선 나라에서 한글로 쓰여진 버스가 왔으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버스로 몰려가 올라타기 시작 했습니다. 저도 뒤쫓아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서로 붐비고 밀치고 하는 바람에 성경책을 떨어트렸습니다. 컴컴한 밤에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바닥을 보니 흙먼지가 일어나는 바닥에 서로들 버스에 타려다가 떨어트린 성경들이 여기저기 짓밟혀 뒹굴고 찢어지고 했습니다. 그 중에 좋아 보이는 성경, 내 것 같은 성경을 집어 들었는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제 성경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곳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이렇게 사람들이 버스를 타면서 떨어트린 성경을 주어다 교회에 비치해두고 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들려 제 성경을 찾으려다 꿈을 깼습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찾느라 시간을 꿈속에서도 보냈습니다.
꿈에서 깨어 무슨 뜻인가 한참을 생각하며 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곳은 분명 외국 같았고, 고국 한국 버스가 왔으니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성경 말씀대로 외국생활이요 나그네 생활인데, 한국 버스는 고향버스 즉 우리의 본향 천국 가는 버스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는 버스를 타려고 아우성치고 욕심은 부리는데, 정작 천국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소홀히 하는 모습 아닌가? 우리가 천국 가고자 하는 소망은 있으나 정작 하나님 말씀은 잃어버리고, 등한이 하고, 소홀히 하고,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요..내 모습임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거룩한 고집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예배에 대한 고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천국에서도 이것만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계4:8-11절의 말씀에 보면, 우리가 천국에서 하는 일은 오적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배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배를 최고로 삼고 살겠다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형편 따라 예배드리면, 상황 봐가면서 예배드리면, 결국 모든 예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애써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으면, 사단이 우리의 모든 예배를 빼앗아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고집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를 드리겠다는 거룩한 고집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 한인교회에서 시무하는 한국인 젊은 목님이 있었습니다. 20여명 정도의 교인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젊은 목사님에게는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 부친이 계셨는데 아직 신앙심은 얕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친은 주일이면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시간이면 항상 조시는 것이고 심하면 코까지 고시는 것입니다. 젊은 목사님은 이런 부친 때문에 교인들 보기가 민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신앙이 깊지 못하신 부친께 그러지 마시라고 섣불리 말씀을 드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는 교회에 잘 나오는 꼬마를 만나 부탁을 하였습니다.
"주일 낮 예배 때 맨 앞에 앉으시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설교시간에 조시면 흔들어 깨워드려라. 그러면 한주에 1달러씩 수고비를 주겠다."
이후로 몇 주일이 지나도록 부친은 조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설교시간에 부친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도 옆에 앉아있는 꼬마는 깨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후 젊은 목사님은 꼬마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마가 대답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3달러를 주신다고 했거든요."
미국의 빌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에 나서서 마침내 지명되어 지명수락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모르는 유복자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내 어머니는 네 살 때 재혼하였고 내 의붓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런데 내 할아버지는 무식했고 가난했지만, 남부 알칸소 작은 마을에서 잡화상을 했는데 내 할아버지는 인종을 초월하고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따지지 않고 덤으로 더 얹어주는 모습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국에 희망을 주려고 합니다.”
그 연설 후에 클린턴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고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미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흥하였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추잡한 소문을 낸 대통령도 클린턴 대통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 고아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애정결핍이 되고 그것이 병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클린턴 대통령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클린턴 대통령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워싱턴에 눈이 3 m나 내렸습니다. 웬만한 집은 눈 속에 파묻혔습니다. TV에서 방송이 되었습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 속에 묻히면 찾을 수가 없기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TV로 예배를 드리라는 보도였습니다. 모두가 예배를 안방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 때 클린턴 대통령은 이 교회 저 교회로 전화를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 때 워싱턴에 조그만 감리교회는 목사 주택과 교회와 붙어 있기에 목사님이 전화를 받고 “우리 교회는 나 혼자라도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드리러 나가 보니 그 많은 눈을 헤치고 클린턴 대통령이 예배드리러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런 거룩한 고집이 있으니 하나님께 그의 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시절 미국을 경제적으로 가장 성장하도록 축복 하셨다는 얘깁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예배를 생명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드리는 거룩한 고집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는 우상숭배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겠다는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고집입니다.
강화도 김선흥 군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강화 은혜교회 장로입니다. 그가 군수로 취임하고 나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강화도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는 광성제입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 함대와 싸우다가 전사한 관군들을 기리는 제사입니다.
이 행사는 그 후 계속 강화도 최고의 행사입니다. 그 동안 당시 수비 대장이었던 어재윤을 기리는 제사입니다. 지금부터 70년 전부터 군의 제일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기독교인 군수들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돼지 머리에 절하고, 지방을 써서 놓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참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수가 군을 무시한다는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 그는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라고 외치며 다음에 떨어지더라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원희룡 전 국토부장관=도지사 시절 한라산 산신제 집전 거부 불참)
어느 젊은 연인들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라고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여 키웠습니다.
근데 이놈이 초등학교 다니는데 영~ 세계적 인물은 못될 것 같아서 우유를 바꿨습니다. 서울대학이라도 가라고 “서울 우유” 로 바꾸었습니다.
근데 이놈이 중학교를 가니 서울대도 가기 힘들듯 합니다. 아쉽지만 한 단계 낮춰야 할 것 같아 우유를 바꿨습니다. 연세대는 가야해서 “연세우유”로요.
근데 아무리 봐도 실력이 택도 없어 마음을 더 비우고 더 낮춰서 건국대학이라도 가라고 "건국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고등학생이 되니 건국대 근처도 못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유를 바꿨습니다. 어떤 유유일까요? “저지방 우유” 랍니다. 저어~~쪽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도 붙어주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유머입니다만, 우리는 내 욕심에 따라서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서 교회도 나왔다가 절간에도 갔다가, 점쟁이한테도 갔다가...도대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고집이 없습니다. 한국교인들 중 30%이상이 한번쯤은 점쟁이를 찾아다닌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론이 무섭고, 표가 깍일까봐 절간에 가서 합장하고, 고사지내는데 가서 돼지 입에 만 원 짜리 돈 집어넣고, 절하고, 도대체 믿음의 고집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숭배하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서 폐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습니다. 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하루는 가족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담배를 피지 않겠다."
담배를 끊은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계속 머리속으로 파고드는 담배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딱 한 대만!"하고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다가 그만 아내에게 들켰습니다. 그때 아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남자가 약속을 며칠도 못 지켜요!"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내가 앞으로 담배를 안 핀다고 했지, 언제 옆으로 담배를 안 핀다고 했나?"고 중얼거리면서 담배를 옆으로 물고 피웠다고 합니다. 한 번 결단했으면 끝까지 지키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합시다. 과연 나는 거룩한 고집이 있는가? 적당히 타협하며, 자기 합리화하며 그것이 착한 모습으로 착각하며 신앙생활하지는 않는지요? 거룩한 고집을 가집시다. 말씀에 대한 고집, 예배에 대한 고집, 우상숭배하지 않겠다는 고집,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고집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아멘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