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84)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63) – 고린도전서 강론(7)
고린도전서 강론(7) – 5장
지난 주는 어떤 경우에 판단을 하고 어떤 경우에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즉 푯대를 향한 대열 안에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며, 오직 큰 자들 만이 어린 자들을 양육할 때 판단하라는 것이며 대오에서 이탈할 때는 내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예수님은 죄(하마르티아)를 범하거든 세 번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세상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사탄이 관리하고 있는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다.(마18:15) 우리는 여기에서 죄란 하나됨을 향하여 나가는 대오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회개(메타노니아)는 푯대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인데 회개를 반성이나 참회로 해석하면 반성이나 참회는 그 사회의 윤리, 도덕을 기준으로, 또는 종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회개는 푯대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며 죄란 하나됨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됨을 향해 계속 가는 것이다. 즉 가나안 복지 만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따라서 4장과 5장은 판단의 주제가 다른 것이다.
했다. 오직 영을 쫓는 자는 판단을 하라는 것이다.
음행은 도덕적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남으로 본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그대들 가운데 음행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그 여자를 나를 위해 써먹는 대상으로 보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용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마5:28)
십계명에는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와 10계명인 네 동료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서구 기독교는 1에서 4계명을 제례법으로, 5에서 10계명을 시민법으로 여기고 있다. 즉 윤리 도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계명은 이처럼 종교적인 계명도 아니고 도덕적인 계명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즉 이웃집의 아내를 탐내는 순간 그것이 간음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면 그것이 살인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남으로 본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정상적인 인간의 시각인 것이다.
에피뒤미아(욕망)은 절제의 대상이 아니라 푯대를 향해 나가는 데 그 욕망과 에너지를 쓰라는 것이다
에피뒤미아는 탐심이 아니라 열정, 욕망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간절한 소원을 에피뒤미아로 표현하셨다.(눅22:15)
이처럼 욕망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며 절제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 악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시기와 질투, 경쟁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상대방을 남으로 보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유대인들의 613 가지 계명 중에 365 가지가 금지 명령인데 이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니까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은 하나됨이다. 즉 다른 사람을 남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타자인식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서를 보면 신과 거래하는 우상숭배 교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갈라디아 형제들처럼 알 거 다 아는 자들인 것이다. 욕망은 절제의 대상이 아니고 그 욕망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에 쓰라는 것이다. 즉 푯대를 향해 나가는 데 쓰라는 것이다. 욕망을 금욕하라는 것이 아니다. 금욕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최고의 탐욕이 금욕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음행하는 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죄를 범하는 형제들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심리는 자기들을 높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불가능하다. 전체가 불합리한 것이다. 두 아들이 비유에서 큰 아들도 자기가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영은 실제로 고린도에 가 있다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몸으로는(소마의 여격)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프뉴마의 여격) 함께 있어서 그곳에 있는 것과 같이 그 일을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으며, 그대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에 그대들과 나의 영이 함께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그의 육신(싸르크스)은 멸망을 당하고 그의 영(프뉴마)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도록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사도 바울은 나의 영이 고린도에 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일 수 있다는 전제를 우리가 고려해 봐야 한다. 새 언약은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신다는 것인데, 새 마음이 곧 새 영인지(이분설), 아니면 새 마음과는 별개인 새 영을 주신다는 것인지(삼분설), 그렇다면 그 영은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인지 우리가 아직은 확인할 수 없다. 14장에서 다시 영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해결되기를 소망해 본다.
무교병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출발의 모형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에게 묵은 누룩을 치우라고 권면하고 있다.
유월절은 구원 사건의 모형이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무교병을 먹으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무교병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출발의 모형이다. 그래서 누룩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묵은 누룩을 치우라는 것은 세상의 이치, 인간의 도리, 즉 인류의 정신 문명 전체를 다 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공멸을 피하기 위해 꾀를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됨이라는 복된 삶을 향해 나아가는 데 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 이치는 하나가 되지 않는 자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수신자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 왔기 때문에 세상의 이치가 무의미한 것이다.
묵은 누룩과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떡이 아닌 순수하고 진실된 누룩 없는 떡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이란 손에 피가 가득한 자들 또는 피 흘리기에 빠른 인간의 발, 즉 시기, 질투, 경쟁, 분노를 의미한다.
정상적인 인간의 길로 다시 돌아선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음행하는 자들이며, 탐욕스러운 자들이며, 약탈하는 자들이며,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이용의 대상이나 증오의 대상이나 무관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 중에 어떤 이가 이런 정상적인 길로 돌아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이 옳으네 그르네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지만 그대들은 악한 자들을 그대들 자신으로부터 내쳐서 그들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