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 용경식 / 문학동네
삶은, 내가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성취를 이루었느냐보다는 나의 생에 진실로 충실했는가로 판단할 수 있을 성싶다. 여기서 생이란 응당 나의 생을 말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생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내 앞의 생과 땔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모모의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로사, 하밀, 롤라, 카츠, 모세, 나딘 그리고 유세프 카디르 등의 이야기이고 주변 모두의 이야기이다. 모모 앞에 펼쳐지는 생(들)이 모모의 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만의 이야기로만 펼쳐지는 생은 없다.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는, 내 앞에 있는 생(들)에 어떻게 반응했느냐로 판단되어야 하고, 뒤돌아볼 수 있다면 보이는 것은 사람들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뒤돌아보면 늘 사람이 보인다. 내가 했던 행동들, 돌이킬 수 없는 아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책감 ・ ・ ・ ・ ・ ・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모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왜일까?
한없이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그에게 울타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 살아야 하고 버텨야 한다. 열 살이지만 애 늙은이다. 열네 살이지만 열 살로 살아야 한다. 아니, 정확하게 그의 시작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인 생이 어떠했는지 흐리멍덩하다. 선명하다는 것은 그의 시작과 성장하는 과정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욘 포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애서 나오는 것처럼, 태어남이 명확하고 허파에 공기가 들어가기도 전에 그의 미래를 논하는 존재가 아니어도 좋다. 그가 속한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안식처는 로사였고, 로사의 동굴에서 그의 생은 막이 내리는 듯했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 환경은 체제가 인정하지 않는 환경이다. 힘으로 관계를 강제하는 복지의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불편하다. 아주 불편하다. 그래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 사랑해야 한다.
텔레비전에는 온갖 지저분한 상류층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이는 대리만족을 하거나 또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거기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권모술수와 황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최고급 향수로 채워진 공기와 적당하게 밝은 조명 그리고 그 조명이 비치는 곳은 고급스러운 가구와 누가 봐도 아름다운 물건들 그리고 머물고 싶은..... 거기에도 사랑은 존재한다.
두 세계는 공존할 수 없는가? 어깨동무가 가능한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작가에게 묻고 싶다. 왜 나딘이냐고, 왜 벗어나야 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다. 그렇게 해야 모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풀릴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의 환경은 헐벗고 냄새나는 외투인가?
오래전, 어린 모모의 생이, 로사의 앞에서 리셋(Reset)되었던 것처럼, 열네 살 모모의 삶은 좀 더 나아 보이는 다른 세상에서 다시 시작될 것처럼 보인다. 다행이다. 다행이나 왠지 슬프다.
성경에서 나오는 사마리아인 이야기처럼, 두 세계는 공존하지 못하고 따로 선을 그으며 살아야 하는가! 함께 하지 못하고 그저 도와주는 것에 만족해야 하고, 그런 삶을 선하다고 우리는 배운다. 그래서 나딘의 결정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결정을 넘어선 행동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상에는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행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삶에서 경계를 지운다. 경계를 지울 수 있는 사람은 경계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 위치에서 내려와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그 첫 번째다. 모든 기득을 버린다. 그들이 되려고 노력한다. 결코 그들이 될 수는 없다. 성인으로 추앙받지 못하면 미치광이가 된다. 두 번째는 내려오지 않고, 본인은 자신의 세계에 머물며, 다른 경계에 속한 자들을 측은지심으로 돕는 자들이다. 두 경계를 넘나들며 선을 요구하고 선을 실행한다.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성인은 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은 경계가 존재한다. 정형화된 카스트를 걷어내었다고 말하는 어떤 사회라도 끼리끼리는 존재한다. 담은 부지불식간에 높아진다.
그 담은 무너뜨릴 자를 우리는 기대하지 않는다. 거부한다. 그리고 조그마한 선을 배푼다. 그것이 나의 앞의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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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63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65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66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103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120
생이 자기에게서는 별 재미를 못 보았다고 우스갯 소리를 하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147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짖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152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178
"아랍인이건 유태인이건 여기에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정말로 아들을 원한다면 지금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들이세요. ·····' 227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232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256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272
그 세네갈 인이 나타나면 언제나 해가 뜨는 것 같다. 275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9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젤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280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 마지막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