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술 》
시 8:1~9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저술은 대부분 소설이고, 시집은 딱 한 권이 있습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난해합니다.
저녁은 시간입니다. 해질녘 혹은 해가 진 후의 때입니다. 한 밤중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저녁이 어떻게 서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마는 시인은 이렇게 시를 씁니다.
독자에게 더 심오하고 깊이있으며 강하게 심어두기 위한 방책입니다.
저는 이 시집의 제목을 이해할 때 ‘저녁’을 괄호 안에 넣어봤습니다.
그리고 괄호 속에 ‘아침’과 ‘점심’을 대입해 봤습니다.
‘서랍에 아침을 넣어두었다’ 혹은 ‘서랍에 점심을 넣어두었다’가 됩니다.
아침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온 세상이 환하고 활기차며 희망으로 넘칩니다.
점심은 한참 땀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시간입니다. 뭔가 이루어내는 시간입니다.
저녁은요? 지는 해와 황혼으로 서글픕니다. 쓸쓸합니다. 파장입니다.
시인이 볼 때 사람들은 ‘아침’이나 ‘점심’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습니다.
외로워서, 차마 대면할 수 없어서 괴롭고 힘든 ‘저녁’을 서랍에 넣어둡니다.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고 시침을 뗍니다. 그리고 아침과 점심으로 한 평생 살아갑니다.
저녁-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서랍에 넣어둔 일은 위선이라는 겁니다.
작가 한강은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합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입니다.
☞ 시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성경의 시편입니다.
시편이 주는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면 시편의 싯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시편 8편입니다. 시편 8편에서는 2절이 무척 난해한 구절입니다.
2절을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시편 8편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2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첫째, “주의 대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원수들과 보복자들’이 누군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 합니다.
〈 첫째, 주의 대적 〉
첫째, “주의 대적”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에 맞서서 싸우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보여줘, 그럼 믿을테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대적, ‘주의 대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맞서는 자들은 무신론으로 견고한 진을 쌓아 올립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학문을 합니다.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킵니다.
이들이 “주의 대적”입니다.
☞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르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대략 3가지를 우리를 알리고자 하는 분입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내가 우주 만물의 창조주다!”
둘째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셋째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한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진정성”입니다.
“하나님의 진정성”과 흡사한 이 세상의 유비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향한 진정성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성에 대한 유비입니다.
부모도 자식을 향하여,
첫째 “내가 너를 낳았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유비입니다.
둘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유비입니다.
셋째 “착하게 살아라!”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유비입니다.
부모와 자식간, 자칫하면 틀어지고 맙니다.
어디서부턴지 모르지만, 자식이 장성하면서 부모 자식 사이가 점점 멀어집니다.
부모는 안타깝습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지?’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사람들과 내가 원수가 되었구나!’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까?
하나님은 고심하십니다. 부모들이 속앓이하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요?
부모와 자식간 누군가, 무엇인가가 이간질했음이 분명합니다.
부모도 자식도 그 실체를 뚜렷이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가 멀어진 이유를 아십니다.
그 실체를 “주의 대적”이라고 밝히십니다.
☞ 시편 8편 2절 자체에서 “주의 대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천명하십니다.
〈 둘째, 원수들과 보복자들 〉
2절 뒷부분입니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입니다.
‘주의 대적’과 ‘원수들과 보복자들’은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주의 대적, 원수들과 보복자들이 하나님의 진정성을 왜곡하여 세상에 퍼뜨립니다.
불신자들,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문, 사상과 철학입니다.
엊그제 초등학교 3학년 손녀가 “이런 경우 누구의 잘못이에요?”라고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떤 경우인지 들어봤습니다.
학교 복도에 피아노가 한 대 있답니다.
그 피아노를 치려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 대요!
손녀의 절친이 바로 앞 순서에서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피아노를 띵똥거리더랍니다.
다음 순서인 손녀는 친구가 피아노 칠 의사가 없는 줄 알고 자기가 의자에 앉았답니다.
그때 아마 친구가 비켜섰나봐요, 그래서 손녀는 피아노를 신나게 쳤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선생님께 말하기를, “내 순서인데 나를 밀치고 자기가 피아노를 쳤어요!”
☞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둘 사이에 금이 갈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 사람 사이는 이렇게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왜곡된 자기의 진정성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친구를 사랑했는데, 그가 나를 몰라줍니다.
나는 이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나와 이웃 사이가 멀어져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애지중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소 닭보듯 하면서 삽니다.
친구가, 이웃이, 자식이 그리고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배신 당하고 사면초가에 빠졌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 원수가 되어있습니다.
☞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어떻게 자기의 진정성을 드러내십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 셋째, 어린 아이들과 젖먹들의 입으로 〉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하나님의 방법이 뜻밖입니다. 그렇지요?
왜 하필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우실까?
이 구절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백미입니다. 키워드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로 자기의 권능을 세우신다!”
이 구절을 이해하면 시편 8편에서 은혜가 쏟아집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시편 8편은 그냥, 수면제가 되고맙니다.
오늘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 여러분들에게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 가장 힘을 많이 썼습니까? 언제 가장 큰 힘을 쏟아냈습니까?
저는 30여년 직장생활을 접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엄청난 힘이 소요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직장 생활할 때는 내가 가진 역량의 15%정도 밖에 안 썼구나!
‘설교는 내가 가진 역량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하는구나’ 저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내십니까?
☞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가장 큰 힘을 쓴 때는 젖먹이 때였습니다!’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입니다. ‘젖 먹는 힘’으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그 힘이 없었더라면 그 누구에게도 ‘오늘’은 없습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큰 힘은 바로 ‘젖 먹는 힘’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젖 먹는 힘’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질문하지 않습니다. ‘젖 먹던 힘’ 누가 우리에게 주었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 그들은 ‘그것은 본능이다.’라고 말하고 끝입니다.
그 본능은 누가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젖을 힘차게 빨고, 생존했습니까?
그 힘 누가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젖먹던 입술의 힘’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권능이 내 안에 바로 섭니다.
시인 다윗이 외칩니다! ‘젖먹이들이 “젖먹는 힘”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평범한 사람들은 지나치지만, 시인이 끄집어냅니다.
“젖먹이의 입술이 가진 힘을 보라!” “그 힘을 주신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라!”
☞ 다음은 ‘어린아이들의 입’입니다.
여러분, 어른들의 입심이 더 큽니까, 어린아이들의 입심이 더 큽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목소리 큰 것으로 따지면 어른에게 당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입심의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 입심의 기준은 진실성입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진실이 있냐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어느 쪽입니까?
‘진실성’ 어른의 입에서 나옵니까?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옵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어른들의 입은 진실성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입에는 진실성이 있습니다. 진정성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 입으로 거짓을 쏟아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말, 교언영색을 쏟아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 입으로 거짓을 낼 줄 모릅니다. 오직 진실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입이 어른들의 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술의 힘을 무시합니다.
자기의 진정성을 우격다짐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의 입술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웁니다.
〈 예수님의 적용 〉
시편 8편이 쓰여지고, 1천년 쯤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하나님과 등등 됨을 내려놓고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누가 외칩니까?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여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사흘도 못 가서 말을 바꿉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참 치사하지요?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환전상,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들어 엎었습니다.
이때까지도 어린아이들이 따라다니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칩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너를 보고 어린아이들이 외치는데 왜 안 말리냐?
이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바로 시편 8편 2절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마 21:16b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 마무리 〉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를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8편을 했으니, 앞으로도 142편이나 남았습니다. 참 든든합니다.
시편 설교는 시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설교입니다.
제가 시를 잘 알지 못하니, 제 머리에 쥐가 납니다. 그래도 매달립니다. 왜요?
거기서 은혜가 콸콸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술에 있는 진실, 진정성이 어른들의 입술에는 없습니다.
젖먹이의 입술이 가진 젖 먹는 힘, 어른들은 상실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어른들은 착각 속에 삽니다.
자기들이 어린아이들보다 더 힘이 있다고, 자기들의 입에 더 진정성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 최소한 죽기 전에는 이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착각으로 자기 입술에 진실함과 더 큰 힘이 있는 줄 알고 죽으면요?
어찌 천국에 가겠습니까?
시편을 쓴 시인의 외침을 오늘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성을 선포하십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하십니다.
젖먹이는 아직 말을 못하지요, 그러나 젖을 빠는 힘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합니다.
말하는 어린아이들은 거짓없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합니다.
우리 어른들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회개하고 반성해야지요!
우리도 한때 젖먹이였고,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린 진실과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