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2년 2월 7일에 도쿄의 동양문고(東洋文庫, 도요분코)에서 책을 열람하다가『습재집(習齋集)』 목판본의 마지막에 허균(許筠)이 ‘만력 무신 중추’에 작성한 후서(後序)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만력 무신은 1608년이다. 이 책은 권필의 부친 권벽(權擘)의 시집으로, 허균이 20여 편을 뽑아 보유로 붙였다. 허균은 이 후서에서 권벽의 ‘통가후생(通家後生)’을 자처했는데, 권필은 그의 막역한 친우였다.
그런데 허균은 1618년 8월에 역적의 죄목으로 능지처사되었으므로, 그 이후에는 이 후서가 서적에 인쇄될 수 없었다. 따라서 1653년 권집(權諿)이 중간한 『습재집』에는 앞에 이정귀(李廷龜)와 최립(崔岦)의 서문이 있고, 책의 뒤에는 권집의 발문이 있을 따름이다. 『습재집』의 중간본은 여러 곳에 남아 있으나, 초간본은 국내에는 후손 권순익 씨 댁에만 소장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번의 조사로 『습재집』 초간본의 또 다른 존재를 보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허균의 「습재집후서」는 허균의 문집으로서 현전하는 필사본 『성소부부고』에 들어 있지 않다. 이 글은 허균의 일문(佚文)이다. 허균은 1611년에 함열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이후로도 많은 시문을 작성했을 것이지만, 현전하는 『성소부부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원고들이 간혹 경매 시장에 나온다고 들었다. 하지만 「습재집후서」는 1608년의 글인데도 문집에 들어 있지 않으니,『성소부부고』가 매우 불완전함을 잘 알 수가 있다.
허균의 문학과 사상, 정치적 행동들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일문을 더 수집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고려대학교 제자들과 함께 옛 서적의 서문이나 발문을 조사하여 일서(佚書)의 존재를 추정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현전하는 서적에서 이러한 일문을 추출하는 작업은 병행하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연구조사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번에 내가 동양문고 소장의 한국 전적을 조사하게 된 것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 동양문고와 연구 협정을 맺어,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의 공동연구원으로서 한국 고전적(古典籍) 자료를 조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은 그 첫 조사로, 금년(2012년) 1월 30일부터 2월 10일까지 2주일간의 일정을 잡았다. 이 연구팀은 우리 대학 국문과의 정우봉 교수가 단장을 맡았고, 나는 그 공동연구원이다. 자문위원인 김영진 교수, 백진우 연구교수, 송호빈 연구원 등과 함께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2층의 별실에서 조사를 하여 500여종의 서지사항을 재정리했다. 1985년 여름에 동양문고의 한적을 열람하다가, 너무 날이 더워서 동양문고가 위치한 거리의 이름인 시노바즈 도리(不忍通)를 ‘참을 수 없는 길’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던 일이 생각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춥지 않은 겨울의 날씨인데다가, 별실의 조사 환경도 비교적 쾌적했다.
나는 정우봉 교수와 함께 2008년 1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 동아시아도서관 소장의 한국 고전적 자료를 조사해서 모두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접촉 끝에 민족문화연구원이 주체가 되어 동양문고와 협정을 맺어 2011년 7월부터 오는 2014년 6월까지 동양문고 소장의 한국 고전적 자료들을 디지털화하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개인이나 기관이 구입한 자료에 대해서는 반환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연구 사업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일본의 기관에서 소장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한국에 제공하는 것은 동양문고가 처음일 것이다. 동양문고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버클리대학과의 연구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검토 끝에 동양문고(이사장 마키하라 미노루)는 우리 민족문화연구원과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전적 자료 조사에 관한 연구 협정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1월 30일에 동양문고에서 연구 협정서(MOU)를 체결할 때는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최용철 교수가 협정서에 서명을 했다. 민족문화연구원은 앞으로 동양문고 소장의 한국 고전적 자료 전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서지목록을 작성하고, 그 가운데 주요 자료에 대해서는 디지털 원문이미지 제작과 자료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해제 작업을 함께 진행할 것이다.

[그림 1] 동양문고 박물관 1층 전경
동양문고는 미쓰비시(三菱)기업의 제3대 총수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彌) 씨가 1924년에 설립한 일본 최대의 동양학 연구도서관이다. 국보 5점, 중요문화재 7점을 포함하여 약 95만 책을 소장하고 있다. 한적(漢籍) 이외에 양서와 화서(和書, 일본의 고서), 그리고 베트남어, 범어, 이란어, 투르크어, 아라비아어의 자료도 많다. 한국 고전적 자료는 약 2,000종에 이른다. 한국 고전적의 주된 자료는 1924년 3월 25일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씨가 수집했던 서적 423부 1,764책, 고지도ㆍ도판ㆍ탁본 30여점이다. 1942년에 마에마 교사쿠가 타계한 후 그 유족은 431부 714책을 추가로 기증했다. 따라서 마에마 기증의 한국본은 총 854부 2,478책에 이른다. 이후 1948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사를 전공했던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박사가 도서부원으로 부임해서, 1910년 이전 한국본을 보충하여 수집했다. 또한 동양문고에는 히데하라 다이라(幣原坦)가 수집한 한국본도 상당수 있다. 동양문고의 한국 고전적에 대해서는 1939년에 마아메 교사쿠 기증본과 동 기관의 수집본을 대상으로 작성한 『동양문고조선본분류목록』이 간행된 바 있다. 그리고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선생이 『일본현존조선본연구 집부(集部)』(교토대학학술출판회, 2006)에서 문집의 일부를 소개한 일이 있다.
동양문고는 수년 전까지 일본 국회도서관 지부였으나, 지금은 법인으로 독립했다. 2011년에 새 건물을 완공하여, 박물관 영역과 서고 및 열람실 영역, 관리부 영역의 세 부분으로 공간을 분할해 두었다. 옛날 건물은 고급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새 건물에서 옛 건물로는 정원과 소로를 통하게 해두었다. 한국 고전적은 서고 및 열람실 영역의 3층 서고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의 조사를 실질적으로 지원해 준 야마무라(山村) 사서의 안내로 3층 서고를 둘러보고 귀중서의 소장 상태도 살필 수 있었다.
2. 금번의 조사는 동양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적들 가운데 집부(集部)의 서적들을 중점 열람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귀중서는 사부(四部)의 분류에 관계없이 금번에 일별하기로 했다.
우리 연구팀에 소속된 젊은 연구자들은 동양문고 소장 집부의 목록을 기초로 일람표를 액셀로 작성하고, 기왕에 다른 연구자나 연구기관이 조사한 보고서가 있으면 그 보고를 토대로 형태서지 사항들을 일단 기록한 후, 국내외에 존재하는 이본이나 관련 자료의 서지에 관해 부기하는 등, 여러 달에 걸쳐 기본 조사표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나와 정 교수 등 연구자들은 그 조사표를 기초로 실물을 일일이 살펴서 형태서지의 사안이나 특기 사항을 확인하고, 인보(印譜)를 참조하거나 주인(朱印)을 판독하여 전존(傳存)의 유래를 밝혔으며, 내용서지를 작성하기 위한 기초 사실들을 첨가했다. 이번 동양문고 조사는 이러한 사전 준비와 연구자들의 상호 협조가 없었다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이번 조사에서 『연암집』, 『화동창수집』, 『삽교집』, 『낙하생고』 등 기왕에 일부 자료가 공개되어 있던 필사본들을 볼 수 있었다. 조윤형의 서첩인 『송하첩(松下帖)』이나 이광사가 『주역참동계』 원문을 붓으로 쓴 『원교서법(員嶠書法)』, 고려 판본 『사분률산보수기갈마(四分律刪補隨機羯磨)』 등 귀중한 자료도 하나하나 펼쳐 보았다. 그간에 학계에 알려져 있던, 세책본의 장부를 이면지로 사용한 고소설 『월왕전』의 필사본도 열람했다. 일본 목판본 『난설헌집』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1985년에 촬영 두 컷을 간신해 구했던 훈련도감자 목활자본 『두시배율』도 한참 동안 다시 살펴보았다. 대원군 이하응의 인보도 확인했다.
『화동창수집』은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지만, 동양문고 소장본에는 누군가 붉은 글씨와 부전(附箋)을 이용해 교정을 보고 사실관계의 오류를 바로잡아 두었다. 앞으로 디지털 자료가 공개되면 중국과 한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중요 인물의 장서인(藏書印)과 내사기(內賜記)가 실려 있는 자료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중기의 차천로(車天輅)의 문집 『오산집(五山集)』은 1791년 평양에서 간행한 것으로, 건륭 57년(1792년) 4월 3일에 검교직각(檢校直閣)을 맡고 있던 서영보(徐榮輔)가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남공철(南公轍)에게 하사한 내사기가 적혀 있다. 남공철의 장서인으로 ‘낙필기연하(落筆起烟霞)’와 ‘공철장서(公轍藏書)’도 확인했다.
순종어제와 익종어제의 합본인 『양성어제(兩聖御製)』의 경우는 겉표지 오른쪽 위에 ‘내사(內賜)’의 표시가 있다. 책1 첫장에는 ‘규장지보(奎章之寶)’가 크게 찍혀 있는데, 그 오른쪽 아래에는 이 책을 하사 받았을 소장자의 인이 검게 지워져 있다. 조사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먹으로 지워진 원래의 글씨를 확인하려고 애를 쓰다가 제3책의 첫 장에서 ‘신이공익(臣李公翼)’이라는 주인(朱印)을 확인했다. 2월 7일(화요일) 오후 3시 30분의 일이다. 이 책을 먼저 조사했던 후지모토 유키오 선생은 주인을 읽어내지 못했으므로, 우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이공익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수(李時秀)의 손자로, 자(字)는 동로(東老)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이공익이 1834년(헌종 즉위년)부터 1836년(헌종 2년) 8월까지 관직 활동을 기록한 『일기』가 있다. 그 무렵에 그는 부수찬, 교리, 규장각 직각, 부교리 등의 당하(堂下)의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가 『양성어제』를 하사받은 것은 이때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림 2] 동양문고 소장 『정화선존』, 심의평 구장본
동양문고의 『정화선존(精華選存)』 1책은 청나라 초 왕사진(王士禛)의 시를 완당노인 김정희가 수정(手訂)한 것을 구한말의 장서가 심의평(沈宜平)이 베낀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마에마 교사쿠가 수집한 책이다. 그래서 내표지의 ‘길상실원본’이라는 글씨의 윗머리에 ‘재산루수서지일(在山樓蒐書之一)’이라고 적힌 둥근 도장이 눌러져 있다. 겉표지에는 제첨(題籤)을 따로 붙였는데, 제첨의 제목이 ‘정화선존(精華選存)’이고 제목 아래에 “부(附) 윤하칠절(綸霞七絶) 미인향초(美人香草)”라고 적었다. 내용은 「정화일선(精華一選)」, 「정화이선(精華二選)」, 「정화절구선존(精華絶句選存)」, 「정화절구이존(精華絶句二存)」, 「윤하칠절(綸霞七絶)」, 「미인향초집(美人香草集)」의 6부로 되어 있다.
내표지를 보면 ‘정화선존’이라는 제목 오른쪽에 길상실원본(吉祥室原本)이라 적고 제목 왼쪽에는 고향서옥장(古香書屋藏)이라 했다. 그리고 내표지의 오른쪽 아래에는 ‘청송심씨연고당도적(靑松沈氏淵古堂圖籍)’의 방형 붉은 도장을 눌러두었다. 길상실, 고향서옥, 그리고 연고당은 모두 심의평의 서실 이름이다. 심의평은 자가 승여(昇如)로, 본관은 청송이다. 일생 동안 일만 사천 권이나 되는 책을 모았는데,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김정희를 숭모하여 김정희가 지니고 있던 인장을 여럿 자기 소장의 책에도 찍었다고 한다. 심의평이 소장하던 『정화선존』은 김정희가 왕사진의 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그의 감식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나는 마침‘왕사진의 신운(神韻)’에 대해 『유심』이란 시전문지에 보낼 글을 쓰고 있던 참이라서 이 자료를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신대우(申大羽)의 장서인을 찾아낸 것도 이번 조사의 큰 수확이다. 나는 하곡 정제두 이후 양명학을 받아들여 형성된 강화학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데, 신대우는 강화학파의 산문가로서 이미 20년 전에 연구한 인물이었다. 이번에 『서계집(西溪集)』을 살피다가 신대우가 인명인(人名印)과 함께 ‘옹일전수(翁逸田叟)’라는 호인(號印)을 사용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옹일은 신대우가 음보로 관직에 나가기 이전에 거처하던 강화도 옹일리의 지명이다.
3. 이번의 조사가 전부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계획했던 종수만큼 서적을 일일이 조사하지 못했다. 또 실물을 조사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다.
동양문고에는 『열성어제』가 여러 질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종류인 『정종어제(正宗御製)』는 묵서로 본문의 좌우에 점을 찍거나 글자에 테를 두르거나 글자의 다음에 횡선을 그어 두었다. 그리고 변란의 위쪽에는 본문에 점을 찍은 글자 수 만큼의 점을 찍어 두었다. 다른 책이나 『홍재전서』와 대조하여 교정의 사항을 표시한 것도 아니다. 점이 찍힌 글자는 조금 자형이 불안정하거나 비스듬하게 찍힌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누가 이러한 표시를 했는지, 어떤 이유에서 했는지, 책의 어디에도 기록해 둔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의 본문에 있는 묵서의 표시는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림 3] 동양문고 소장 『정종어제』
우리나라는 문헌지방(文獻之邦)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근대 이전의 자료가 많다. 많은 문헌들이 인간의 삶과 시대의 정신, 정치와 외교의 실상, 문화의 힘, 생활사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중요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문헌들 사이의 상관성을 명료하게 밝혀내지 못한 예가 많다. 더구나 각각의 문헌이 지닌 기록의 성격에 대해 연구하는 일은 아직 체계적인 방법론을 수립했다고 할 수가 없다. 문헌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기록의 특성을 밝히려면 기초학인 소학(음운학, 문자학, 훈고학)과 문헌학의 훈련을 쌓아야 하며, 문학과 사학 및 경학의 연찬이 깊어야한다. 서적의 소장 현황을 조사하고 문헌의 형태서지를 기록하는 작업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지만, 문헌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역사문화의 이해에 응용하는 일은 아직 시작 단계이다.

[그림 4] 동양문고 소장『돈암집』속에서 발견한 문서
기록 자료에 한정한다고 해도 연구해야 할 분야가 대단히 많아서, 각 분야의 기초 지식을 종합적으로 습득해야 한다. 금석문과 목간 및 죽간을 비롯해서 인쇄물, 필사본 등에 이르기까지 기록물의 성격에 따른 차이를 파악해야 하고, 정격한문과 이두식 변격한문, 한글서사문에 이르기까지 기록문체에 따라 각각의 문법을 익혀야 한다. 이를테면 금번 조사 때 『돈암집』 갈피에서 상전(上典)이 노비에게 준 문서가 한 장 발견되었다. 이 문서로 보아 동양문고 소장의 『돈암집』은 풍양 조씨의 인물이 소장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한문 해독 능력이 매우 낮아져서, 한문으로 작성된 기록물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고 들었다. 후진들로 하여금 어떠한 양식의 기록물이든 즉각적으로 이해할 능력을 갖출 수 있게 가르칠 수 있는 손쉬운 방식은 없다. 이번 일을 하면서, 앞으로 문헌의 조사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협동으로 행하여 문헌이나 금석문 등의 서사방식을 올바로 파악하고, 조사의 과정에서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첫댓글 동양문고는 춘향전도 이 곳에 보관본으로 교재로 보고 ... 글로만 보던 동양문고 ... 너무나 크고 의미 있는 일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