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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금요일 중복 더움. 돋보기와 확대경을 겹쳐 보면서 《퇴계시 풀이》 남은 3분의 1 부분을 교정하여 부치다.
사월沙月과 같이 30년 가깝게 공역하여 오던 《퇴계시 풀이》(2007, 영남대 출판부 발행, 6책)의 남은 3분의 1 부분(속집 1, 2귄, 외집 1권)을 교정하여 오늘 오후에 우체국에 가서 소포대금으로 5,400원을 지불하고 출판부로 보냈다.
A4용지로 800 쪽 가까운 분량인데, 앞서도 진작 내가 직접 종합적으로 한두 차례교정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늘 사월에게만 미루고 있다가, 아무래도 책이 나오기 전에 내가 한 차례 반드시 검색을 하여볼 필요를 느끼고, 또 8월 초부터는 한 달쯤 외국(미국)에 다시 가볼 일도 있어, 이번에는 출국하기전에 꼭 교정을 본다고 하고서 그 교정지를 모두 보내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다 받아놓고 나니 그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검은 색 이외에 딴 빛깔로 배색한 한시 원문글자는 글자가 더러는 희미하기도 하고, 또 원문의 한자 발음표시와 각주의 글자 같은 것은 글자 자체가 작아서 돋보기안경을 쓰고도 그 행태가 잘 보이지 않아서 다시 확대경을 손에 들고서 이중으로 드려다 보니 겨우 모두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수10년 동안 돋보기를 쓴 뒤에도 확대경은 몇 개나 사가지고 있었으나, 나는 늘 그것까지 들고 글자를 보면 눈이 빨리 피로하여 질 것으로 생각하여 차라리 읽는 것을 포기할망정,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窮則通”한다고 할까? 이 일은 피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줄창 들고서 교정을 보았는데, 일을 다 끝 낼 때까지 3,4주일 동안, 그래도 눈에는 별 고통이 없었으나, 오히려 확대경을 오래 든 손목도 아프고, 가끔 전고 같은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컴퓨터로 검색할 때 자주 쓴 엄지손자락도 매우 아팠다.
날씨는 몹시 더운데, 내 나이에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게 과연 어떨지, 병이나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으나, 늙어 갈수록 무엇이라도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더구나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이렇게라도 다시 한번 검토하여 보고 일단 마무리 짓는다는 게, 매우 즐거운 일로 생각되었다.
저녁에는 초당서실에 나가서 초당선생과 저녁을 같이 먹고서, 그 분이 지은 〈개축한 봉송정으로 돌아가면서 노래하다詠歸改築奉松亭〉이라는 7언 율시 1수를 좀 교정하여 전하여 주었다. 이 정자는 우리들 고향 고래불해수욕장 남쪽에 있었는데, 최근에 영덕군청에서 크게 개축을 하고서 그에게 현판 글씨를 다시 받아서 걸어 두었다고 한다.
원래 봉씨 선조들이 이 해변에 소나무를 심고서 그것을 기념하여 그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한 정자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듣거니와, “봉奉”씨라는 희귀한 성씨를 가진 분들이 일직이 이 고장에 살았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이야기이다. 언제 고향에 다시 가게 되면 그 정자를 꼭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진다.
7월 28일 토요일 덥다. 큰집의 불천위 제사에 참석하다.
저녁 때 평창동 큰 집에 가서 16대 선조의 불천위 제사에 참석하였다. 음력으로 6월 16일에 지내는 제사인데, 한참 더울 때 지내는 큰 제사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시골 집에서 많이 보아왔고 그 행사에 관련된 추억도 많다. 지금은 서울에 모두 옮겨와서 살고 있으니, 수10년 째 서울 큰 집에서 이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을 장만한다는 것도 큰일이지만 보통 6,70명, 어떤 때는 거의 100명 이상이 모이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복을 겸한 저녁상을 차란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종손인 형님이나, 차종손인 큰 조카가 다시 이 제사를 어느 주말을 택하여 고향에 가서 지내기로 하고 그 준비는 모두 지금 가을 산소제사 때처럼, 문중 일을 맡은 남자 유사들에게 맡기어, 어떤 음식점 같은 데 부탁하여 차려오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지니고 있지만, 90세가 넘으신 형수(19대 종부)가 반대하여, 그냥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참 땀나는 행사다.
7월 29일 일요일 더움. 퇴계선생의 20대의 거처 표현과 관련된 시.
이틀 전에 교정보아서 보낸 내용 중에는 퇴계선생의 20대의 거처 표현과 관련된 시 다음과 같은 시 2 수가, 그 교정 지의 마지막 부분인 《외집》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두 번째 시는 이전에 정리하여 둔 《내집》(권 1)에 “31세 작”으로 정리되어 있고, 내용도 자못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쓴 글들에서도 자주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보다가 5년 전에 썼다는 첫 번 째 시를 비록 각운자는 똑 같다고 하지만, 내용에서 풍기는 맛이 서로 다른 것 같은 데 어떻게 같은 제목으로 묶어 “연작시連作詩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이와 관련된 책을 좀 다시 조사를 하여 보았더니, 역시 이 2수를 다른 때 쓴 다른 시로 보는 견해가 두드러진다.
〈芝山蝸舍〉。二首。
영지산의 달팽이 집
1.
高齋瀟灑碧山傍
높은 서재는 산듯하게 짙푸른 산 곁에 섰는데,
祇有圖書萬軸藏
다만 도서 만 꾸러미만 감추어 두었구나.
東澗遶門西澗合
동쪽 시내물은 문 앞을 감돌면서 서쪽 시내물과 합하며,
南山接翠北山
남쪽 산의 비취색은 북쪽 산까지 이어 졌구나.
白雲夜宿留簷濕
흰 구름은 밤에 묵으면서 처마를 축축하게 만들며,
淸月時來滿室涼
맑은 달은 때맞추어 와서 온 밤을 서늘하게 하여 주네.
莫道山居無一事
말하지 말라! 산 속에 산다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平生志願更難量
일평생 뜻 세운 소원 다시 이루다 헤아리기 어렵구나.
2.
卜築芝山斷麓傍。
영지산의 끊어진 기슭 곁에 집자리 보아 세우니,
形如蝸角祇身藏。
모습은 달팽이 뿔만하여 다만 몸 겨우 숨길만 하네.
北臨墟落心非適。
북쪽으로는 낭떠러지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南挹烟霞趣自長。
남쪽으로는 안개나 노을 끌어안아 운치 스스로 넘치네.
但得朝昏宜遠近。
다만 아침저녁 어머님께 문안드리기 가까우니 좋을 뿐,
那因向背辨炎涼。
어떻게 방향에 따라 춥고 더움을 가리랴?
已成看月看山計。
이미 달 쳐다보고 산 쳐다보려던 꿈 이루어졌으니,
此外何須更較量。
이 밖에 어찌 반드시 잘잘못을 저울질하랴?
위의 제 1수는 “왕년 병술년[26세]에, 내가 [동복인 온계] 형님이 성균관에 유학하러 올라갔을 때 내가 형님의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서 일찍이 〈서재음西齋吟〉이라는 율시 ‘高齋瀟灑碧山傍’ 1수를 지어 형님께 부쳐드렸더니, 형님 또한 이 시에 화답하셨다”는 말씀을 딴 시[次金敦敍·所和李庇遠, 見和傍字韻律詩]를 지을 때 서문에서 적을 바가 있기 때문에, 이 시는 틀림없이 26세에 지은 것이며, 그 다음에 보이는 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중에서 “내가 [동복] 형님이 성균관에 유학하러 올라갔을 때 내가 형님의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서”란 말의 원문은 “家兄遊泮宮, 余侍親在兄舍”인데, 이 구절을 가지고서 이 퇴계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낸 고 권오봉 교수(포항공대) 같은 사람은 ‘이퇴계선생이 처가가 있는 영주에 가서 살지 않고 어머니를 모셨다“ 증거로 아주 금과옥조처럼 이 말을 아주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논어》 같은 책을 보면, 공자를 제자들이 잠잔 잠간씩 모시고 있을 때에도 ’모시고 서서있다侍立‘이니 ’모시고 앉아있다侍坐‘니 하고 ”잠간씩 모시고 있을“ 때에도 이 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侍‘자 한 글자가 보인다고 해서, 아주 그가 사뭇 어머니를 계속하여 모시고 살았다고 보기 데에는 아무래도 자못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하여본다.
내가 다음에 이 둘 째 시와 관련하여 적었던 글[《퇴계시 이야기》( 서울, 서정시학사, 2014, 22-3쪽)의 내용 일부를 여기에 우선 조금 수정하여 인용하면서 20대 시절에 퇴계선생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사셨는지 좀 계속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영지산의 달팽이집(芝山蝸舍)」이라는 시이다. 31세 때에 영지(靈芝) 산록(온혜의 남쪽)의 양곡(暘谷)에 조그마한 집을 지었는데 이 집을 ‘양곡당(暘谷堂)’이라고도 한다. 선생은 원래 21세 때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당시의 관례대로 부인은 친정의 재산이 있는 영주의 초곡(草谷, 푸실)에 그대로 살다가 맏아들 준(寯)과 둘째 아들 채(寀)를 낳았으나, 둘째 아들을 낳자마자 산고로 퇴계 27세 때에 죽었다. 허씨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퇴계는 영주의 처가에 주로 살고, 예안의 친가는 가끔 내왕하며 살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30세 때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이 부인은 정신박약 증세가 심하여 16년을 퇴계선생과 함께 살았으나 주부로서의 구실은 거의 못한 것같이 보이며, 선생이 서울에 가서 벼슬할 때 살고 있던 서소문 집에서 해산을 하다가 역시 산고로 죽었는데, 그 사이에는 소생이 없다.
《퇴계연보》에 의하면 31세에 “서자 적(寂)이 났다”고 되어 있는데, 초취 부인인 허씨가 죽은 뒤부터는 이 집의 살림은 사실상 그 적의 어머니인 소실이 살림을 주로 맡아서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여 볼 수도 있다. 이 소실부인은 창원(昌原)의 관기 출신인데 한문까지 알았던 것 같다. 그가 언제부터 이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아마 퇴계가 처음 상처하고 난 뒤에는 본처의 어린 자식들까지 거두어 키워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퇴계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사실상 이 집의 주부로서 평생 동안 병약하였던 이퇴계를 성심껏 내조하고, 퇴계의 맏아드님 내외와 자주 편지도 하고 상의도 하여 가며, 그 큰 살림살이를 보살폈던 사람은 이 부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지산와사에서 이퇴계는 46세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이 집은 뒤에 맏아들 준이 기거하다가, 종손서이며 제자인 이국량(李國樑)에게 주었는데 그가 호를 ‘양곡’이라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그 유적지에 이 「와사」 시를 새긴 유적비가 서 있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말 중에서 “허씨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퇴계는 영주의 처가에 주로 살고, 예안의 친가는 가끔 내왕하며 살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한 말은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한 말이 없는데, 내가 처음으로 매우 과감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선생은 처음부터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그 분이 더욱 청렴하게 보이고, 또 홀어머니를 잘 모신 효자로 보이고, “만권서萬卷書를 갖추고 있는” 본가를 떠나지 못하는 학구파로 보이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고려시대 이래의 우리나라의 잘못된 풍습[陋習]을 과감하게 떨치고 나선 선각자같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의 아들, 손자도 다 처가살이를 하였고, 또 당신은 손녀들이 혼인한 뒤에도 데리고 살면서 작고하신 뒤에는 재산까지 그들에게 남자 손자들과 똑 같이 나누어 주도록 하셨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그 분만이 당초부터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사실과 벗어난 억지 주장과 같이 보인다.-이런 이야기를 나는 최근에 발표한 몇 편 글에서 몇 차례나 거듭 주장하고 있다,
퇴계선생이 30세 이후부터 매우 부유한 처가 집 곁을 떠나 다시 고향마을 근처로 돌아와서 새 터전을 마련하고, 뒤로 갈수록 이 일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유학의 새 기운을 조성하여 낸 점을 생각하여 본다면, 역시 선생은 당시의 습속과는 다른 삶[남자 중심의 宗法]을 추구하고자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인데, 이렇게 그 분의 20대의 삶과 30대 이후의 삶은 좀 달랐던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게 된다. 그러니 그 분도 말하자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한 면도 있고 또 어떤 점에 있어서는 당시 습속을 벗어나려고 하였던 과감하고도 독특한 면이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선생이 46세 때 서울로 올라가다가 지은 시 중에 다음과같은 시가 있다. (이 시의 역주는 졸역 《퇴계시 풀이 1》 307 쪽 이하에서 인용한다)
〈일이 있어 서울로 돌아가야만 하나, 영주에 이르러 병이 나서 갈 길을 그만 두고 푸실에서 묵다〉(以事當還都, 至榮川病發輟行, 留草谷田舍)
少日書紳服訂頑
젊을 때에는 띠에다 글을 적어
「고루함을 뜯어 고친다」고 결심하였으나,
至今懵學但慙顔
아직까지 학문에 어두우니 다만 얼굴이 뜨겁구나.
狂奔幸脫千重險
미친듯이 벼슬길 달리다가 용하게 빠져 나왔구나
천만 겹의 위험한 곳을,
靜退纔嘗一味閒
고요히 물러나서 겨우 맛보누나,
한결같이 조용한 경지를
羈鳥有時依樹木
얽매인 새는 때때로
옛날 살던 나뭇가지를 찾아서 의지하고,
野僧隨處著雲山
떠돌아다니는 중들도 가는 곳마다
구름 깊은 산 속에만 머문다네.
後園花萼猶爭笑
뒷 뜰의 꽃봉오리들
오히려 다투어가며 웃는다네.
何必區區病始還
하필이면 구구하게
병든 뒤에야 비로소 돌아오느냐고?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초취 처가가 있는 영주의 초곡(푸실) 마을로 돌아온 것을 마치 새가 “옛날 깃들었던 나뭇가지로 가지로 되돌아가는 것” 같이 표현하였고, “뒷뜰의 꽃봉오리들조차도 오히려 다투어 가면서 웃으면서 하필이면 병든 뒤에야 돌아오느냐?”고 물을 정도로 정든 곳으로 표현되어 있다.
선생의 초취부인의 산소도 이 마을의 뒷산에 있는 그 부인의 외조부 문경동 공의 산소 아래 쓴 것이라고 하니, 그 당시로서는 정말 친가, 처가, 외가의 구분이 별로 뚜렷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다. (위의 시의 주석 1에서와 같이 권오봉 교수도 퇴계선생이 경제적으로는 처갓집의 유산을 많이 받은 것은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퇴계선생이 당시의 일반적인 습관에 따라서 젊을 때 잠시 처가살이를 좀 하였다고 한들, 그러한 사실이 그에게 무슨 큰 흠이 되겠는가?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하려고 하는 《퇴계선생언행록》이나, 그 책의 내용을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여건에 과연 부합하는지 한번쯤 의심도 하여보지 않고서,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는 묵수적인 태도는, 내가 보기에 역사적인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조작된 아주 부자연스러운 억지 주장으로만 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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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옮기고 보니 원래 달았던 시의 주석문이 다 날아가벼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