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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묵상글 들 ( 연중 제4간 금요일. - 참 부럽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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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참 부럽다.
우리 교회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열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공교롭게도 두 왕의 얘기를 하고,
두 왕은 공교롭게도 여자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왕들입니다.
사실 왕들치고 살인을 안 저지른 왕이 있고,
치정살인을 안 저지른 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죄 짓지 않은 인간이 없듯이
살인을 안 한 왕이 없다 정도로 이것을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것 또는 살인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뿐인 것이 문제이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적을 남길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다윗이 남긴 위대한 업적들을 찬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린 나이에 골리앗을 쳐죽였고,
왕이 된 다음에는 주위에 원수들을 다 물리친 것에 대한 겁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집회서의 진정한 찬양은 원수를 물리치고
나라를 강건하게 한 것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만이라면 비록 헤로데는 못했을지라도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같은 왕이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찬양받을 진정한 이유에 대해 집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진정 위대한 것은 원수를 다 무찌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하면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서는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라고 얘기합니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사랑을 한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웅 심리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은 많습니다.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백성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세운 왕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을 사랑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업적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만 하느님을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 찬미에 초대하고 그래서 성소가 찬미로 가득 차게 합니다.
"그는 제단 앞에 성가대를 자리 잡게 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노래하게 하였다.
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찬미가 이른 아침부터 성소에 울려퍼지게 하였다."
참 부럽습니다.
죄에 무너지지 않고
죄를 딛고 사랑으로 올라선 다윗입니다.
참 부럽습니다.
죄를 짓고 그 입으로 음울한 술타령이나 하지 않고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 전하오리다."라고 한 다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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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목을 밴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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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마라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 라고 만(야고 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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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역사의 심판으로 현재화되는 부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법천지인 것 같아 보여도 크게 또 길게 보면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올 일차적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겪으셨고 알고 계셨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힘도 없고 가난했던 군중에게 그들이 익숙한 온갖 소재를 동원하여 비유로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신 일은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요긴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느님께서 손수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에서 당신의 나라를 비유적으로 드러내심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행하신 모든 사랑의 실천 행동과, 이를 본받고자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사랑의 실천 행동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나고 있음도 알게 해 주고, 또한 그분이 적대자들에게 대하신 모든 심판 행동과 역시 이를 본받고자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자들에게 맞섰던 모든 심판 행동 또한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영주에 의해 참수되어 순교한 직후에 헤로데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며 군중으로부터 광범위한 명성을 얻게 되시고 그 소문이 자신의 귀에도 들려오자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하느님께서 의인을 부활시키시리라는 심판 섭리가 비록 악인이지만 헤로데를 통해서 현재화되고 있는 생생한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을 박해하고 죽인 악인이 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필귀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섭리는 악인에 의해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더라도 의인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리라는 부활의 심판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과 부활의 신앙은 후대 이스라엘의 현인들이 다윗의 삶과 신앙을 회고하는 집회서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집회서는 다윗 이후 8백여 년 후인 기원 전 2세기 경에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문화권의 디아스포라에서 살고 있는 히브리 젊은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앙과 지혜를 전수하고자 쓰여진 성서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며, 그리스 사상과 사유도 일부 반영하고는 있지만 핵심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와 신앙 그리고 전통과 문화 관습이고, 이를 전해 주고자 집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정제된 표현으로 쓰여진 지혜 문학입니다. 특히 오늘 독서인 집회서 47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왕이요 명군으로 알려진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반영하듯이 그의 삶과 신앙과 업적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처럼 후대의 역사가들은 다윗에 대해 매우 후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허물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에서 가장 점수를 딴 업적은 죄를 짓고 즉시 뉘우친 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이전에나 이후에 절대 군주들이 정실 왕비를 두고도 후궁을 들이는 일은 신앙의 잣대만 아니라면 결코 흠결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이를 위해 백성이나 신하 장수의 목숨을 앗아버리는 일조차도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다윗만이 지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죄가 묻혀버릴 수는 없지만, 신앙인으로서 다윗이 보여준 위대한 면모는 즉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허물을 거울삼아 두고두고 반성하면서 보속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데에 있다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집회 47,11).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심판은 그가 죽어 관뚜껑이 닫히자마자 진행됩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당대의 사람들이 재평가하기 시작하고, 중요한 인물인 경우에는 두고두고 후대의 사람들이 재평가에 재평가를 거듭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불완전하게나마 반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엄중하리라는 이치만이 아니라, 의인이 행한 의롭고 거룩한 선행은 그의 허물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서 다른 의인들의 삶으로 더군다나 더욱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으로 부활하리라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주보성인을 정하고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주보성인의 삶을 자신의 인생 역사 안에서 재현하고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를 심판하는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잣대로 현실 정치의 무게를 재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실과 정의가 드러나야 하고, 평등과 평화가 더 실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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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800년대 당시 평균 수명은 30~35세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1800년대, 1900년대 사람들이 50대의 저를 보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어이구, 장수하시네요.”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은 50대면 한창때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요. 분명한 것은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에게 늘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갑곶성지에서 봉안당을 운영하며 안치 예식을 하면 다양한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100년을 넘게 살다 들어오시는 분도 있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주 어린 아이도 들어옵니다. 언제 죽을지, 언제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다면서 허송세월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에 늘 깨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자리에 연연하고 있어서 로마와 결탁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로마에 알려지면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한 것으로 문제 제기를 세례자 요한이 했던 것이지요. 자기 부인을 내쫓고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면서 고발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군중이 동요되어 폭동으로 이어지면, 로마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마침 헤로디아의 농간으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 준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도 자기 잘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았구나.”(마르 6,16)라며 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윗왕을 꼽습니다. 그의 삶에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집회 47,8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은 올바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헤로데 임금은 정반대였습니다. 오로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살았고,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면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요? 주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며 언제 올지 모를 그날과 그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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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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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모두 신(神)을 부정하였고, 철학, 정치, 문학, 정신의 분야에게 종교를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자기 투사라고 하기도 했고, 신은 죽었다고 하기도 했고, 역사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라고 하기도 했고, 인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상가이며, 혁명가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 모두 독실한 종교적인 기반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학 전공 대학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다인으로 태어나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습니다. 니체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유다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이들이 예측한 대로 신은 죽고, 종교는 사라지고, 더 이상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신론을 주장하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는 해체되었고, 신앙이 회복되었습니다.
지식인, 신앙인,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많은 경우에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같은 이익을 추구하면서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현지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수탈은 물론 문화적인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서구인들의 침략에 맞서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테러를 자행하는 것도 종교의 이름이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들의 인권을 탄압하였고, 종교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율과 법의 이름으로 신앙인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윤리와 성윤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억압하기도 하였습니다. 극단적인 창조론 교육은 자명한 과학의 결과를 무시하였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원주민의 문화와 종교를 탄압하고,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고, 식민지에서 수탈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서 화려한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기에 지식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인들은 죄의식에 새로운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에 권한과 권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교리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성화상을 인정하는 주장과 성화상은 우상이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이기도 했고, 서로를 파문하기도 했습니다. 성지를 회복한다는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소리를 외면하였고, 교회는 분열하였습니다. 교회의 창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변화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선포되었고, 교회의 재산은 빼앗기고,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헤로데와 같은 어리석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교회는 오늘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께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습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막과 광야에 들어가서 깊은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은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고 수도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도와 건물로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관상과 묵상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썩어 고목이 될 수밖에 없는 교회는 새로운 순이 돋아나고, 여전히 외롭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21세기에도 다윗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던 마더 데레사, 아프리카에서 헌신하였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이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를 이끌어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늘 두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교만과 권력을 추구하는 헤로데의 깃발이 있습니다. 겸손과 회개 삶을 추구하는 다윗의 깃발이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선택의 책임 또한 우리의 몫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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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을 배웁시다
- 다윗과 세례자 요한 -
믿음 역시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믿음 역시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통해 날로 믿음 또한 성장해야 합니다. 참으로 소망할 바 반석같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도 믿음입니다. 가톨릭 성가 480장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사랑을 바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즐거이 바치리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는 단순소박한 성가가 고맙습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사자성어도 생각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며 이런 신뢰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일종의 다윗에 관한 추도사로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얼마나 다재다능한 믿음의 사람인 다윗인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주목할 바 다윗의 전례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그 시기를 완벽하게 정리하였으며, 주님의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다.’
문무文武를 겸한 예인藝人으로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 찬미의 사람, 다윗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향한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 바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믿음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지요! 다윗의 믿음과 사랑에 감동하신 주님의 응답이 인상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이후의 우리 삶을 보십니다. 회개한 이들의 죄는 불문에 붙이시는 과거는 묻지 않는 주님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의 사랑과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믿는 것이 답임을 다윗을 통해 배웁니다. 나쁜 기억의 치유에도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치유의 처방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런 다윗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분발하며 믿음과 사랑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메시아 다윗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좋은 믿음의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기사 위치가 의미심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 죽음이 예수님은 물론 그 제자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습니다. 이 기사 앞에는 열두 제자의 파견 기사가 나오고 이 기사 뒤에는 바로 열두 제자의 귀환 보고에 이어 오천명을 먹이신 기사가 나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수도자들에게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순교의 죽음을 예감, 예견하면서 일일일생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늘 깨어 믿음의 삶에 온 힘을 다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이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 역시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 사랑을 두고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은 곳곳에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사람은 세례자 요한뿐이요 모두가 중심 부재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과한 소문을 듣고 전전긍긍하는 헤로데를 통해 그가 얼마나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중심 없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도대체 삶의 중심이 없습니다. 이어 헤로데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통해 하느님 중심 부재의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배웁니다. 정말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악행을 저질러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수차례 간언하다가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의 복수로 목숨을 잃은 정의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부재할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봅니다. 여하튼 이런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도 있듯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의기소침하거나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믿음을 새로이 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날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순교적 믿음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이자 배움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믿음도 배워가면서 날로 성장 성숙해 가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자발적 기쁨과 감사로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께서는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드높으시도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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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마르코 복음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의
헤로데와 조금 다르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헤로데가 헤로디아의 일로 자신에게 불편한
말들을 늘어놓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이미 품고 있었다고 전합니다(마태 14,3-5 참조).
반면에 마르코는, 헤로데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여기고 보호해 주며
그의 말을 기꺼이 경청하곤 하였다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요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헤로데에게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며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헤로데는 너무 기뻐 그녀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맹세까지 한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사람들 앞에서 호기롭게 약속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비판받아 마땅한 헤로데의 처신임에도,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의외로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또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염려 때문에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이나 가치를 저버리고,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의 눈에 괜찮고 무난해 보이면,
정말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일까요? 그런 모습만 좇다 보면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주도권을 남이 아닌 나 자신이
쥘 수 있도록, 사람들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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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절)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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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존중과
생명은
하나이다.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존중이다.
제대로된
만남이
존중이다.
존중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결과는 언제나
관계의
파괴이다.
사람은 얼마나
파괴적인가.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참으로
필요하다.
존중이
빠져버리면
생명은
죽음처럼
처참하게
가로막힌다.
생명은
모두가
평등하다.
정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막아서는
안된다.
생명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은
존중을 회복하는
길이다.
사람을
살리기로
결심하는
시간이다.
존중과
파괴 사이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있다.
복음은 다시금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허세와
두려움을
버리고
존중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린다.
존중이
생명이고
존중이
복음이다.
만남은
존중으로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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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마르 6,17-21).”
마르코복음의 표현만 보면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에게 호의적이었고,
요한을 죽일 마음도 없었고, 보호하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헤로데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표현이 아니라 표현 속에 들어 있는 뜻을 보아야 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것은
죽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마태 14,5).
19절을 보면 헤로디아만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보호한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을 뒤로 미룬 것입니다.
헤로데가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아직 군중의 여론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고, 아직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여론을 두려워하며” 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군중의 여론을 두려워한 것은,
여론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나중에 왕좌에서 쫓겨나서 헤로디아와 함께 귀양살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요한의 비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꺼이 들었다.’ 라는 말은, ‘경청했다.’는 뜻이 아니라,
요한이 말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 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 라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바로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헤로데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예언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고,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고, 헤로데를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그런 모습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진정한 예언자는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또 목숨을 잃어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라는 말은,
지킬 수 없는 ‘거짓 약속’입니다.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왕에게 ‘내 왕국’은 없습니다.
헤로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했다가 금방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손님들 가운데에는
헤로데의 말을 듣고 비웃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라는 말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 라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이 맹세도 비웃음을 살 ‘거짓 맹세’입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4-29).”
이 이야기의 내용만 보면, 세례자 요한은 왕의 사생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또 왕과 공주 사이의 흥정의 결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세속 권력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거짓 약속과 맹세를 손님들이 비웃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을 살리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도 헤로데는 자신의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면서
요한을 군중 앞으로 끌어내어 정식으로 처형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서
공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이는 모습이 되어버렸고,
왕권을 과시하기는커녕 비웃음만 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범죄도 생각해야 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그 살인의 주범이고, 공주는 공범입니다.
그러면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손님들과
헤로데의 명령을 집행한 경비병에게는 죄가 없을까?
그들 모두가 다 살인의 공범입니다.
눈앞에서 살인이 저질러지는데도 침묵을 지키면서 방관하는 것은
살인만큼이나 나쁜 범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그 살인을 반대했다.” 라고
변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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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성생활과 자존감 ♣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자존감은 인간적 성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의 태도를 통해 신앙인의 자존감에 대해 성찰해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그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하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6,18.20). 얼핏 보면 그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지닌 의로움과 거룩함을 인정은 하지만 깊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경청은 하지만 ‘몹시 당황스러워하였고’ 그 일로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두기도 합니다(6,17).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헤로데처럼 자신의 힘에 의지하고 정의 앞에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생일잔치에 온 손님들을 즐겁게 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며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합니다(6,21-23). 그 소녀가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의 뜻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청하자 그는 몹시 괴로웠으나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들의 청대로 요한의 목을 베어버립니다(6,24-28).
헤로데는 요한이 적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기 스스로를 속이며 요한을 처형해버린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활약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 하고 반응하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의 태도와 반응은 그의 자존감이 매우 낮았음을 말해줍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헤로데처럼 자신의 힘에 가치 기준을 두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지나친 의존과 열등감, 자기비하, 완벽주의, 과도한 죄책감과 수치심, 비합리적 사고는 자존감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결함이 있다고 느끼는 장애 의식, 그릇된 겸손, 현실 안주, 도덕적 착각에 따른 교만함, 타인과의 비교도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자존감을 높이려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귀한 존재로 여겨주시는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신을 올바로 평가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삶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최선을 다 하되 완벽주의적인 사고와 생활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선이요 의미이신 창조의 하느님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안의 건강한 소리를 강화시키고, 자신에 대한 비난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을 멈춰야 합니다. 자신을 개방하되 남과의 관계에서 건전한 경계선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도 자존감을 높이며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행복한 발걸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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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는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 동료 인간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의 제반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한 탁월한 역사가가 있었으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8~100)입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역사, 특히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시기 유다 역사를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는 제1차 유다 항쟁(66~70)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지역 사령관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로마 군대에 투항해서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가 됩니다.
그 후 요세푸스는 로마 황제들의 보호 아래 ‘유다 전쟁사’ ‘유다 고대사’들의 중요한 역사적 문헌을 남기게 되는데, 그의 저작들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헤로데 2세인 헤로데 안티파스는 합법적인 아내(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와 이혼을 합니다. 그리고 동생 헤로데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한 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수모를 안겨준 것입니다.
금쪽같은 딸을 소박놓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만행 앞에 크게 분노한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는 안티파스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입니다. 그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게 되는데, 요세푸스는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성격은 서슬이 시퍼런 쌍날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강직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불의와 거짓을 죽어도 못 견뎌 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불같이 일어섰고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고 하고 싶은 말을 따박따박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투명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광야에서 초근목피의 생활을 계속했었기에, 여타 권세가들이나 인기인들이 일으키는 스캔들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재물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리 털어봐야 먼지 밖에 나올게 없었습니다.
솔직히 뒤가 구린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쓴 소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상대가 로마 총독이든 헤로데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다 싶을 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의 레이더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몹쓸 짓이 포착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임금이라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혼인에 대한 거룩한 계명을 폐기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사자에게도 여러 번 경고했지만, 효과가 없자, 광장 한 복판으로 나가 크게 외쳤습니다.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불의와 위선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목소리를 높이고, 깃발을 높이 들었던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 시대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돌아보면 사제로서, 천주교 신자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국가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절, 다들 두려워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우리 신부님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부양가족이 없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따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우리 모두는 필요한 상황에서 우리 동료 인간에게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선한 판단을 받을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동료 인간들이 그릇된 길을 걸어갈 때 꾸짖어야만 합니다. 그 일로 내가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형제를 꾸짖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냉정하게 대답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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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인 이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헤로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냥 진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현실을 왜곡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나 옛 예언자 중 하나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죄책감으로 장난을 칠까요? 양심일까요? 자아일까요? 양심은 그저 그것이 죄임을 알려주는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있어야만 자신이 자기 주인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대해 자주 제가 사용하는 예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죽은 오리를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이 있으면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모두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란다.”
여기서 오빠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동생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오빠를 부려먹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은 할머니입니다.
오빠가 할머니에게 용서를 받으면 자신은 오빠에 대한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동생은 일단 죄책감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무서운 분으로 여겨야 자신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빠가 할머니에게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 자체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이 죄짓게 하고 뱀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만드는 일이 ‘두렁이’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고 사용하는 위장막이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입니다.
방어기제는 무수히 많지만 대충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억압: 예전에 안 좋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압해서 결국엔 잊어버리게 되는 것
2. 부정: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병에 걸렸을 리가 없어’와 같은 상황입니다.
3. 투사: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싫어하면서 상대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4. 전치: 나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푸는 것입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5. 취소: 과거에 한 행동을 보상하는 행동입니다. 아이를 때려놓고 미안해서 안아주는 행동과 같습니다.
6. 합리화: 자신의 환경 등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7. 신체화: 감정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화병과 같은 예입니다.
8. 행동화: 감정을 바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하고 벽을 치는 돌발행동을 합니다.
9. 동일시: 닮아가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아가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10. 반동형성: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운 상사에게 대들기보다 오히려 아부를 하거나 지나치게 공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 ‘방어기제’, 유튜브, ‘정신과 말해주는 남자’]
더 세분화하면 방어기제는 50가지도 넘습니다.
자아는 우리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이러한 것들을 해야만 한다고 시킵니다.
그런데 결국 그런 것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행동 안에 위에 제시된 이 모든 방어기제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어기제는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죄책감을 감소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단절을 가져오고 더욱 큰 죄책감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더 양심과 같이 자신의 죄를 말해주는 요한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죽였습니다.
방어기제로 충분히 죄책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양심의 목소리는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탄의 기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부터 사랑하는 노력입니다.
모든 죄책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방어기제는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사랑하면 죄책감에서 해방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했다면 두렁이를 만들어 입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도 알몸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음란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두렁이가 필요했고 그렇게 사랑은 변질하였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입니다.
주인공 멜빈 유달은 뉴욕에서 가장 잘 팔리는 로맨스 소설가로 강박 장애에 사로잡혀서 도로의 금도 밟지 않고 피해서 걷고, 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는 인물입니다.
그를 유일하게 참아주는 여주인공이 있는데 레스토랑의 종업원 캐롤입니다.
하지만 유달은 표현력도 없고 그녀에게 고백할 자신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를 도와준 이웃이 등장하는데 유달의 아파트 이웃인 게이인 예술가 사이먼과 그의 개입니다.
사이먼은 강도 사건 중 폭행을 당해서 거의 죽을뻔합니다.
개 베르델을 돌봅니다.
처음에는 개 돌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아지에게 감정적으로 애착하게 됩니다.
동시에 캐롤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유달은 강아지 주인인 사이먼이 부모에게 돈을 청하러 데려가 달라고 할 때,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합니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표현력이 없는 유달에게 캐롤은 실망합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캐롤은 유달에게 더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달과 캐롤 사이는 여전히 서먹한데 사이먼이 유달이 캐롤에게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합니다.
캐롤은 망설이지만 자신도 노력하겠다면서 고백을 받아들이고 유달과 캐롤이 함께 걸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유달은 아침에 캐롤을 위해 페이스트리 가게 문을 여는데 도로의 금을 밟습니다.
그도 밟았다는 걸 알아차리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강박증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유달이 이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개를 받아들이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사이먼을 받아들이며, 결국에 가서는 캐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지금까지 사랑에 빠지지 못하게 만들었던 방어기제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방어기제를 만들어낸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압니다.
결국, 모든 죄는 사랑함으로써 씻겨지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에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양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유달에게는 강아지와 이웃, 그리고 캐롤입니다. 이렇게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면 결국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면 애초부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고 계셨음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나아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을 보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양심과 같은 이웃인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자아를 살리기 위해 양심을 죽인 것입니다.
자아는 자신의 정체가 뱀임이 드러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웃 사랑은 방어기제가 보이고 그 방어기제 속에 숨어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방어기제가 무너지면 죄책감도 줄어듭니다. 죄책감이 사라지면 자아의 힘도 약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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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4 주간 금요일-묵상과 기도
집회서 저자는 다윗의 용맹과 하느님의 경외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년 다윗은 돌팔매로 필리스티아 군대의 장수 골리앗을 꺾어 백성들의 사기를 높였으며, 임금이 된 이후에는 성전 예배를 위해서 하느님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가를 짓고 성가대를 통하여 노래를 불러 그분을 찬미하였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합니다. 요한이 의롭지 않은 동생 필리포스 아내 헤로디아와의 혼인을 책망하였는데, 그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는 하였지만, 거룩하고 의로윤 요한을 보호해 주었는데, 그러나 헤로데가 갈릴래아 유지들을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자신의 권위와 위신 때문에 헤로디아의 요구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넘겨주게 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친교 제물에서 굳기름을 따로 떼어 놓듯 다윗도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되었다.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양과 놀듯 곰과 놀았다.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거인을 죽여 백성의 수치를 씻어 주지 않았더냐? 그는 손을 쳐들어 돌팔매로 골리앗의 교만을 꺾었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호소하여 주님께서 그의 오른팔에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수를 쓰러뜨려 백성의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만 명을 물리친 다윗을 칭송하였고 그가 영화로운 왕관을 쓰게 되었을 때 주님의 복을 받은 그를 찬미하였다. 사실 그는 에워싼 원수들을 무찔렀고 필리스티아 군대를 없애 버렸으며 오늘까지 그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그는 제단 앞에 성가대를 자리 잡게 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가락을 노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의 노래로 찬미하였다. 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그 시기를 완벽하게 정리하였으며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고
그 찬미가 이른 아침부터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집회 .47,2-11
그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마르 6,14-29
실천
정의는 진실과 공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정의는 참됨의 항구함을 가집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디아의 혼인에 대해서 옳바르지 않은 바를 지적하자, 그를 격리 차원에서 옥에 가둡니다. 책망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도 세례자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알기 때문에 그들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권력의 위신과 지위 때문에 한쪽으로 가졌던 선한 지향을 놓아버렸습니다. 헤로디아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힘의 위신과 지위와 함께 자신이 가진 선한 지향을 눌러버리고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사실 힘과 지위는 선과 정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힘과 지위의 본질이고, 원천입니다. 누구든 언제 어디서도 정의의 길을 따라갑니다. 힘있던 없던 간에. 그것을 선과 진리를 세우고 모두를 살리는 데 사용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권위와 지위를 선과 정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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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집회서 47,2-11)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 양과 놀듯 곰과 놀았다.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거인을 죽여 백성의 수치를 씻어 주지 않았더냐? 그는 손을 쳐들어 돌팔매로 골리앗의 교만을 꺾었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호소하여, 주님께서 그의 오른 팔에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수를 쓰러뜨려, 백성의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만 명을 물리친 다윗을 칭송하였고, 그가 영화로운 왕관을 쓰게 되었을 때, 주님의 복을 받은 그를 찬미하였다. 사실 그는 에워싼 원수들을 무찔렀고, 필리스티아 군대를 없애 버렸으며, 오늘까지 그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집회47,4~7)
집회서의 마지막 제5부 (42,15-50,29)는 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리고 있다.
첫 대목 (42,15-25)에서 저자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업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업적, 곧 사건을 일으키신다. 본래 히브리어에서 <말씀>과 <사건>은 한 단어, <다바르(dabar)> 이다.
말씀으로 이루신 업적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자연의 창조이다. 43장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노래한다.
맑은 하늘, 끊임없이 열기를 뿜어내는 태양, 절기와 축제일을 알려주는 달, 궤도를 정확히 도는 별들, 하늘을 가로지르는 찬란한 무지개, 그밖에 번개, 구름, 우박, 눈, 이슬, 얼음, 안개, 바람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생물과 용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이 모두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낸다.
저자는 44-50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인물들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임금, 현인, 예언자, 사제들이다. 집회서 저자는 사제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특히 아론(모세보다 더 길게 다룬다)과 대사제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은 찬미의 권고와 기도로 마무리한다. (50,22-24)
이어서 저자는 세 민족, 곧 사마리아인들과 필리스티아인들과 에돔인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혐오를 드러낸다.
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복구 작업을 벌이는 유다인들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50장의 마지막 세 절(27-29절)은 집회서 전체의 결론이다.
"나는 지성과 지식에 대한 가르침을 이 책에 기록해 놓았다.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인 나 예수는 마음으로부터 지혜를 이 책에 쏟아 부었다.
이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행복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이는 지혜로워지리라. 사람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만사에 강해지리라.
주님을 경외함이 그의 인생 행로이고 주님께서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아멘. "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예루살렘 출신 엘아자르의 아들, 시라의 아들 예수라고 밝히고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이 책을 독자들이 주의 깊게 읽고 실천해 줄 것을 부탁한다.
오늘 독서는 47장 2-11절로, 역사의 인물중에 다윗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 2주 동안 사무엘 상권 16장으로부터 어제까지 매일 독서말씀을 통해 교회는 다윗을 조명했다. 그리고 오늘 집회서의 말씀으로 다윗의 업적을 칭송하며 종합 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톨릭 교회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치는 목동이 어떻게 기름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가? 사울로부터 떠난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줄곧 그의 삶에 함께 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의 과대한 칭송으로 인해 사울의 질투를 받아 쫓기는 다윗, 오히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 살려주는 다윗,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터에서 죽은 사울과 요나탄,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통일 왕국의 첫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 계약의 궤를 모시고 싶은 다윗, 주님의 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장부 우리야를 살해하는 다윗, 나탄 예언자의 말씀 앞에 참회하는 다윗,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쫓기는 다윗, 그리고 시므이의 저주,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다윗,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다가 가드 예언자를 통해 사흘동안의 흑사병을 받는 다윗,,,,
오늘 말씀을 읽고 지난 2주간 동안, 다윗을 <오늘 독서말씀>을 따라 묵상해 온 사람들은, 이제 주마등처럼 다윗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는가!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역사의 한 획을 긋고 가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니, 바로 이런 성경의 인물을 통해, 교회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게끔 도와 주고 주는 것이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많은 피를 흘린 용장으로 나오지만, 그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간음자요, 살인자이며, 자신의 궁중의 집안도 제대로 못 다스리는 무능한 자이고, 열왕기 상권 1장에 보면, 나이 늙어 수넴 여자 아비삭을 끼고 자야 몸이 유지되는 신체적으로 결함이 많은 자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왕으로 불리는 것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하느님 대전에 솔직히 시인하고, 하느님 대전에서 벌을 받고, 하느님의 절대적 자비를 비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집회47.8)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집회47.11)
[연중 제4 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죄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 죄의식과 두려움이 아닌 용서와 자유, 그 쉼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된다. 오늘 그 은총(은혜)의 복음을 기억하자.
(마르6,14-29)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 사람은 어떤 얘기를 듣거나 사건이 일어나면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오른다. 잘못한 죄일 때, 죄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때 하느님의 은총(은혜)을 아는 사람은 그 죄의식에서 빠져나와 그 죄를 용서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내 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게 되는데 그것이 곧 우리를 빚어 창조하신 하느님의 목적(뜻)이다. (이사43,7)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소문 등, 말로, 계명으로 들으면 계속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마르7,7-8)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티토1,10-14) 10 순종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며 남을 속이는 자들이, 특히 *할례 받은 자들 가운데에 많습니다. 11 그들이 입을 다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익을 얻으려고, 그르쳐서는 안 되는 것까지 가르치면서 여러 집안을 온통 *망쳐 놓고 있습니다. 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그들의 믿음이 건전해져서, 14 유다인들(사람)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사64,4-5)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똥걸레)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 인간의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해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로 고집한다면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 불의가 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인간의 말(계명)로 받아 스스로 죄를 해결하려고 온갖 행위에 열심을 부리게 되면 신앙이 짐이 되어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은총(은혜)의 말씀을 받으면 죄의식과 그로 인한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대속의 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히브10,15-16) 15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니,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그 시대(십자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새 계약)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계명)을 *새겨 주리라.”
= 그리스도의 피로 받는 구원, 그 새 계약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졌다.
(히브10,17-18)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이 하느님의 새 계약의 말씀을 믿기에 하늘의 쉼, 평화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계명으로 지켰던 그 자신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인정하는 그 自己否認, 버림이 있어야 한다. 오늘 헤로데처럼 양다리로 우유부단(優柔不斷)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하는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자신의 욕망이 더 좋아 버리지 못했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 인간의 허황된 맹세는 사함을 헛되게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모습이다. 육의 체면을 위해 영을 죽이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죄의 용서, 해방, 구원(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하늘의 생명에는 關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땅의 것을 위해 신앙까지 이용한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 명예, 기적까지 약속한 것은 사탄임을 놓치면 안 된다.
(루가4,6) 6 사탄이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 그러니 율법(제사와 윤리)의 나를 버리고, 내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로 돌아서야한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십자가의 용서는 영원하다.
(히브13,8)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환호송,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죄인들을 충만하게 하시어 양다리 신앙으로 우유부단한 저희를 주님의 은총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아멘!!!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6,14~29)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28~29)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살로메는 드디어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준다.
여기서 '그것을'로 번역된 '아우텐'(auten; it)은 3인칭 단수 대명사 여성 목적격이다. 이 대명사의 성(姓)이 여성인 것은 잘려나간 '머리'를 가리키는 명사 '케팔레' (kephale)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살로메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갖다 줌으로써 그렇게도 세례자 요한에게 분노하며 죽이고자 했던 헤로디아의 소원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쟁반에 담겨져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자마자 헤로디아는 그녀의 긴 머리핀(바늘)을 뽑아 세례자 요한의 혀를 수없이 찔러서 뽑아 버렸다고 한다. 사악한 여인은 자신의 비행을 고발하는 진리와 정의의 혀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義)를 말하다가 비록 참수당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그 정신은 복음에 그대로 기록되어 대대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모셨지만, 제자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려나가고 없는 몸뚱아리만 장사지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선구자이며 최후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루카7,28)은 30여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적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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