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길 (누가복음 24:13-35)
뜨레스 디아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훈련 프로그램입니다. 뜨레스 디아스는 3일 이라는 스페인 말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에 뜨레스 디아스는 2006년 ‘Walk to Emaos (워크 투 엠마오), 엠마오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감리교 연수원장 정용치 목사님이 미국연합감리교회의 워크 투 엠마오를 도입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글로바라는 사람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때 마지막까지 있었던 여인중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가 언급됩니다. 교회 역사에서 글로바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미처 알지 못 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님은 떡을 떼어 축사를 하시고 그들에게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낙심과 실망을 안고 가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1km쯤 거리에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가 낙심과 실망으로 황혼녘에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요 왕이요 메시야라고 따랐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위대한 왕으로 세계를 지배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어 그들의 비전과 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낙심과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했습니다. 딸이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을 한다고 가방과 신발을 샀습니다. 아이가 신발을 신어보고 좋아하고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는데 다음날 속회를 드리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갔더니 일곱 살 딸아이가 전신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세 들어 사는 주인집 아들, 17살 아이가 불량한 아이였습니다. 딸아이가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주인집 아들이 석유통에 불을 붙여서 발로 찬 것이 딸의 머리위에 떨어지고 아이가 불에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인천기독병원에서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 보라고.. 목사님이 보니 딸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 아이가 아빠.. 아빠...하며 비명을 지르는데 아버지 목사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왜요? 하나님, 왜요?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처절하게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한 달 후 동네 병원으로 데려왔는데 사모님이 아이의 시트, 병원복을 빨다가 머리를 벽에 찧으며 울었습니다. 피가 나도록 벽에 머리를 박고 또 박았습니다. 아이의 옷에 살점이 곳곳에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부둥켜 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요? 왜요?’ 목사님이 처절한 절규로 하나님께 하소연 할 때,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명아의 화상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니? 내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줄 때 내 마음이 그렇게 아팠단다. 내 마음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단다...’
여러분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까? 그것이 자식 때문입니까? 남편 때문에 아픕니까? 부모님 때문입니까?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엠마오 가는 길은 낙심의 길이며, 실의와 절망의 길입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낙심과 실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길이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낙심하는 사람들,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람은 엠마오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둘째, 엠마오로 가는 길에 주님이 동행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할 때, 슬픔에 있을 때, 주님은 슬그머니 우리 옆에 오시고 말을 걸어 주시고 동행,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를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가십니다. 병든 자를 찾아오시며 죄인의 집을 찾아오십니다. 실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제자는 자기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예수님인 줄 몰랐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혼란하고 감정이 불안하면 주님이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희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 볼 것도 못보고 보아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직접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주님의 분신, 바로 주님의 자녀를 통하여 나타나십니다.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고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사람, 마음이 슬픈 사람,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 대신에 보내십니다.
태어날 때 신체의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범죄로 감옥에 가고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3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고 3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지도 않았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원망과 증오를 가지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신을 저주하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린 아이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중2때 담임선생님이 이 아이를 돌봐주었습니다. 아이에게 시집을 선물로 주고 성구를 적어 아이를 케어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 종운이는 어려운 환경을 비관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깨어나 보니 어느 절간이었습니다. 암자에 살면서 중이 되려고 하니 스님이 막았습니다. 선생님이 그리워 엽서를 하나 보냈는데 지금 절에 있다고...절의 주소는 적지 않았습니다. ... 20일후 어느 새벽에 아이 종운이가 절간을 쓸고 있는데 아이 앞에 선생님이 나타났습니다. 선생님이 만삭의 몸으로 거기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종운아 하고 부르는데 아이가 산생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선생님이 종운이의 엽서를 받고 마음이 찢어져서 대전 근처의 절간은 다 뒤지고 우편 소인이 있는 주변 절을 다 뒤져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여선생님을 통해 종운이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종운이는 절에서 내려와 선생님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어느 수요일 날 종운이는 성령세례를 받고 울고 또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고3 어느 날 선생님이 종운이에게 어느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식사를 사주고 말했습니다. ‘종운아 나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단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목사님 한 사람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 목사님이 네가 되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종운이는 ‘싫어요’ 했지만 그길로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종운이는 목사님이 되어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제가 엠마오 가는 길이라는 트레스 디아스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마음을 만져 주시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선생님을 보내 종운이를 만져 주시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주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엠마오 마을에서 식사하는 중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식사할 때에 주님이 떡을 가지시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나 양이 먹는 구유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왜 구유에 누우셨습니까?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짐승과 같은 우리의 밥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예수님의 몸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실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죽었던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연어는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저 먼 바다로 나가 4년을 살다가 고향의 모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알을 낳고 수컷은 수정을 하고 그리고 죽어갑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연어는 엄마 아빠의 몸을 먹고 자랍니다. 내 몸을 먹어라 하면서 에미 애비가 죽고 새끼 연어는 부모 연어의 살을 머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그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 주님의 피를 먹고 마실 때, 비로소 우리 영안이 열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공포와 절망, 불안과 낙심에 쌓였던 사람이 다시 마음을 바꾸어, 희망과 용기, 기쁨과 감격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때때로 닫혀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해 괴롭고 답답하고 슬퍼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슬그머니 다가오시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깨우쳐 주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다시 희망을 주십니다.
엠마오 가는 길은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내려가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요 올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으로 갔습니다. 절망을 떠나 희망으로, 낙심을 떠나 기쁨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 고난 가운데 동행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었다면,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눈이 열리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이 그들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때때로 닫혀 있습니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슬퍼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해 한숨 쉬고 괴롭고 슬퍼합니다.
화상을 입었던 목사님의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이 윤상희 목사님인데요, 그 후에 목사님은 미국으로 갔습니다. 딸은 미국의 유타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목사님은 그 딸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딸의 화상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왔는데 서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남자친구를 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데이빗. 너 명아를 사랑하니?’ ‘예 사랑해요.’ ‘너 명아의 화상을 알고 있니?’ 데이빗이 울면서 ‘목사님, 제가 명아 화상 하나하나까지도 사랑하고 감싸 주겠습니다.’ 그 후에 명아와 데이빗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데이빗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낙심하고 실망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