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감별사들에 의해서 왜곡된 것입니다. 소위 구원파라 불리는 교회는 오대양 사건과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인터넷에 떠도는 글 또한 전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사이비 무당 탁명환씨나 장로교단에서 같은 교단의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최삼경목사의 그 간의 행적이 얼마나 잘 못된 행동이였는가는 단적으로 증명됩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고 꾸며 말하는 사람들은 악한 세대의 아들들이며, 사단의 도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한국침례회 15년간을 다녔고, 장로교, 감리교회를 각각 1년 이상 다녔습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배경을 어느정도 알기에 아래와 같이 간추려 봅니다.
1. 배경
한국에는 1884년 알렌과 85년 언더우드 등에 의해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고 한국선교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가 감리교회가 아펜젤러에 의해 들어오자 장로교회는 예정론과 반대의 입장에 선, 감리교회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으며, 한국최초의 이단 논쟁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은 이단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도지역을 분할하는 "예양협정"을 체결한다. 간략히 설명하면 장로교회는 전라도 지역만 전도하고, 감리교회는 경기도 지역에만 전도하도록 선교지를 안분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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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이후 구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단체로 몰리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에 선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아래 독립침례교선교사들도 구호에 압장섰으며, 교회당은 초만원이며, 배고픈 국민을 위한 구호활동을 위해 총력하였으나, 문제는 신앙을 통한 선교가 되지 못하고 기복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구호활동은 초교파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었고 선교와 구호활동을 위해 자신이 속한 나라에 구호자금 및 구호품을 모금하여 한국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때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영국형제단, 미국형제단, 네덜란드 형제단 소속의 독립침례교선교사 였으며, 인물로는 피어선선교사, 리어터튼선교사 데릭얼선교사, 케이스글라스선교사, 딕욕선교사였다. 이들은 정통복음주의자들이다.
한국에 성령의 폭발적인 위력을 발하고 있다고 각국의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에 보고하였고, 선교사 파견 국가에 대대적인 한국의 선교활동을 홍보하였으며, 한국의 성력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 새문안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2. 선교사 딕욕이라는 인물,
한국에 먼저 파견된 피어선선교사가 이때 딕욕선교사를 한국으로 초청하게 되었고, 한국에 초청되어 들어온 딕욕선교사(믿음의 방패선교회)는 새문안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소문과 다르게 기복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충격을 받고 실망하여 돌아(1956년)가면서 한국에 올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 다시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라고 기도한다.
3. 웩선교부(영국정통복음주의선교단체)가 대구에 성경학교 설립
웩선교부소속의 데릭얼선교사 대구에 성경학교(신학교교육기간 2년)를 설립하였고 이때 한국에 남아 있던 케이스글라스 선교사(1956-1975)와 함께 딕욕선교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
4. 성경을 벗어난 한국교회의 외형적교회를 진단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함.
대구에 성경학교를 시작하면서 승리의 생활사라는 이름으로 전도지를 활용하기 시작하여 전도하였고 장로교회 목사였던 권신찬(성경학교 1기 생,1961년)목사가 거듭나서 침례를 받게 되자 장로교회에서 침례 받은 이유로 파문됨. 성경학교 1기 생 주축으로 현재의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교단이 형성됨.
. 복음침례교 형성 : 권신찬목사
. 대한예수교침례회 : 이요한목사(1983년 유병언씨의 헌금유용 사건으로 교회는 헌금을 사업을 위해 투자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35명 정도와 함께 갈라져 나와서 지금의 큰 교단으로 형성됨)
. 기쁜소식선교회 : 박옥수목사(처음부터 분리된 상태로 활동함)
5. 팀선교부와 협력하여 복음의 활발한 전파(1966-1974)
팀선교부로 운영된 미국의 1불 선교단체와 함께 문서선교를 시작하였고 지금의 생명의 말씀사가 되었음. 팀선교부는 극동방송선교에서 권신찬목사로 하여 은혜의 아침(1966-1974)이라는 방송프로를 운영하게 되면서 국내에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각 교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 방송을 통해 각 지역에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소속된 교회 목사에게 거듭난 체험을 말하기 시작하자 각 교단에서는 청취거부 및 불매운동으로 팀선교부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6. 팀선교부의 굴복
팀선교부는 한국의 교단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선교단체이므로 한국교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내부적인 진통을 겪으나 1974년 한국교회의 협박에 굴복하여 방송 설교를 금지하는 투표에 들어가 가결 됨.
팀선교부는 한국교회에 소위 구원파라 불리는 교단에는 이단성이 없음을 공식선언하였고, 한국개신교총회에서도 공식사과 하였으나, 사이비 이단이며 감별사 역활을 한 탁모씨, 최모씨 등에 의해 날조되어 지금까지 왜곡되고 있음.
7. 독자적인 교회로 활동
권신찬 목사는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와 교회를 시작한다. 후에 사위가 될 유병언(이 사람으로 인해 교회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됨)사장(1977년 사업을 시작)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과의 갈등을 시작으로 교회안에 표면적인 대립이 시작되었고, 유병언이 교회의 헌금을 유용하는 사건으로 1980년 이요한 목사가 교회가 사업을 할수 없다며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하게 되므로 설교를 금지 당하게 되고 3년간의 갈등으로 1983년 이요한 목사를 따르는 35명과 함께 권신찬목사와 갈라서게 됨
8. 유병언과 탁명환 소장과의 거래
유병언이 탁명환소장(이 사람은 돈을 위해 많은 사실을 날조한 자임)을 초청하여 이요한 목사를 이단으로 공격하기 시작함. 1983년 2월에 갈라진 4년 후에,
9. 1987년에 일어난 오대양 사건의 진실.
이 사건은 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였으나 국내 정치가들의 정권유지 차원에 의한 공작으로 휘말리게 됨(유병언씨도 이 사건으로 인해 공소된 사실이 없음- 개인적으로 이글을 쓰는 나는 교회사에 크게 오점을 남긴 유병언씨를 아주 나쁘게 생각하지만 진실을 가리고 정죄할 수는 없음).
이단감별사들에 의해서 오대양 사건은 크게 날조되어 소위 구원파 교회가 살인을 했다'라는 큰 누명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그 소문은 떠돌고 있다.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속칭 구원파교회의 지하실에는 살인 고문실이 있다고 거짓말하며 자기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개신교회단체와 목사들이 있음을 볼 때, 한국교회가 얼마나 썩은 곳인지 분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