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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당시 이 사건은 일간지 1면과 사회면을 연일 장식하며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핫도그를 유난히 좋아하던 꼬마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1975년 8월 20일 오후 8시경 부산시 서구 장림동에 사는 김은영 양(가명·7)은 이날도 ‘핫도그를 사먹으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핫도그를 파는 구멍가게는 김 양의 집에서 5~10분 정도의 지척거리에 있었다. 간식으로 핫도그를 즐겨먹던 김 양은 거의 매일같이 집 근처에 있는 가게에 가서 핫도그를 사먹고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한참이 지나도 김 양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김 양의 부모는 딸을 찾아 나섰다. 가게 주인에 따르면 이날도 김 양은 핫도그를 사들고 곧장 집을 향해 뛰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김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주민들과 인근 파출소 순경까지 나서서 김 양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김 양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쪽같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김 양은 다음날 새벽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당시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부산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부산 어린이 연쇄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이 유괴살해범을 빨리 검거하라’는 특별 지시까지 내렸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김 양은 다음날 새벽 5시 45분경 부산시 중구 동광동 용두산 공원 인근 숲 속에서 발견됐다. 김 양은 러닝셔츠와 나일론 혁대로 손발이 결박된 상태로 유기돼 있었다.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김 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공원 관리인이었는데 발견 당시는 사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체 상태로 보아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김 양이 집을 나선 시간과 살해추정 시간 등을 따져볼 때 김 양은 핫도그를 사먹고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범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김 양을 봤다는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범인이 해가 지지 않은 시각에 그것도 주택가에서 무모하게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주택가에서 강제로 김 양을 끌고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유괴에서 살해까지의 범행이 목격자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한 수사팀은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김 양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일차적인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또 채무나 치정 등 원한관계에 의한 보복범행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김 양의 부모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조사했다. 하지만 용의점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 양의 이마와 오른쪽 귀 밑에는 심한 타박상이 있었다. 당시 김 양은 팬티만 착용한 반 나신 상태였는데 상의와 신발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팀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김 양의 하복부에 청색 사인펜으로 ‘범천동 이○○(여자 이름)이 대신공원에서 죽여 이곳에 갖다 버린다’는 글씨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후 저지른 범인의 엽기행각에 수사팀은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인 아동 유괴살해사건의 경우 범행 목적은 돈이다. 하지만 김 양의 경우는 예외였다. 수사팀은 범인이 김 양을 살해한 뒤 김 양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금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범인의 목적은 돈이 아닌 여아의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팀은 아동 성추행 전력이 있는 동종수법 전과자 및 성도착증 환자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동시에 사체에 글씨를 써놓은 점으로 미뤄 정신병력이 있는 인물에 대한 탐문조사도 병행했다.
하지만 수사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또 한 건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김 양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 후인 24일 오후 7시경 부산 동구 좌천동에 사는 오민식 군(가명·5)이 사라진 것이다. 이날 집 앞 골목에서 놀던 오 군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 군은 다음날 새벽 6시경, 집에서 약 4km 떨어진 남부민동 방파제 매립지 인근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오 군이 발견된 곳은 사과상자 야적장이었는데 사과상자 사이에서 천으로 목이 졸리고 손발이 결박된 상태로 숨져 있었다. 확인결과 결박에 사용된 천 끈은 오 군의 티셔츠와 러닝셔츠를 찢어서 만든 것이었다. 사인은 역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번에도 소름끼치는 ‘낙서’가 오 군의 아랫배에 쓰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범인은 검정색 사인펜으로 ‘후하하하 죽였다’라고 써놨다.
범인의 엽기행각에 수사팀들은 또 한 번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두 사건은 △범행대상이 10세 미만의 아동이라는 점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 상의를 찢어 손발을 묶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점 △범행 시간이 해질녘이라는 점 등 유사한 점이 많아 동일인물의 소행으로 보였다.
특히 살해 후 피해 아동의 배에 사인펜으로 의문의 낙서를 해놓았으며 그 필적이 같다는 점은 범인이 동일범이라는 것에 무게를 실어줬다. 뿐만 아니라 범인은 김 양 때와 마찬가지로 오 군의 집에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동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범인은 ‘아동혐오론자’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나도 수사에 진전이 없자 8월 29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어린이 유괴살해범을 빨리 검거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극히 이례적으로 같은 날 경찰과의 공조수사를 위해 부산지방검찰청에도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하지만 범인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30일 또다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오전 11시 30분경 부산 영도구 영선동의 한 초등학교 화장실 내에서 여아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피살자는 이진희 양(가명·8)이었는데 사인은 질식사였다. 이 양은 목에 졸린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으며 자열창(칼에 베이거나 피부가 찢어져서 생긴 상처)도 목과 복부 등에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11시 30분경에는 서구 감천 2동에 소재한 까치고개 인근에서 장성혁 군(가명·13)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사건 당일 박 군은 노상에서 김밥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먼저 귀가한 후 실종된 상태였다. 박 군의 사인 역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는데 안면을 둔기로 심하게 구타당한 것이 달랐다.”
그런데 두 사건의 범인은 사건 발생 하루 만인 12월 1일 새벽 야간순찰을 하던 경찰에 의해 검거된다. 야간통행금지 위반으로 신병이 인도된 박재석 씨(가명·24)를 조사하던 경찰은 박 씨의 전날 행적에 의문을 갖고 추궁한 결과 이진희 양을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경찰은 박 씨가 이 양을 살해한 후 이 양의 친언니마저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쳤으며 같은 날 장 군도 살해했다는 것을 추가로 밝혀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두 어린이를 살해한 혐의로 박재석이 검거되자 수사팀은 난리가 났다. 수사력은 당연히 여름에 발생한 두 건의 아동살인사건과의 관련성을 찾는 데 모아졌다. 박재석은 살해된 이진희 양의 외삼촌이었다. 박재석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3년 전부터 누나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재석은 절도죄로 구속됐다가 그해 초 출소한 인물로 누나인 이진희 양 어머니에게 용돈을 요청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행패를 부리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박재석은 경찰조사에서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 ‘신의 계시를 받아 두 어린이를 죽였다’는 황당한 말을 했다. 하지만 박재석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은 없었다. 당시 수사팀은 박재석을 상대로 앞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과의 관련 여부를 집중 추궁했으나 다른 범행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개별사건으로 결론났고 수사는 그대로 종결됐다.”
박재석이 앞서의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나자 경찰은 수개월간 비상을 걸고 범인 찾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수사팀은 처음부터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김 양과 오 군이 살해된 직후 부산 곳곳에서 아동을 상대로 한 유사범행이 여러 건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범행이 대부분 미수에 그친 탓에 피해 아동들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아동을 상대로 범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김 양·오 군 살해사건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8월 24일 동구 좌천동에서는 집 앞에서 놀고 있던 한병수 군(가명·10)을 30세가량의 남자가 연필깎이 칼로 위협해 납치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25일 진구 가야동의 야산에서는 동생과 메뚜기를 잡고 있는 최지영 양(가명·10)을 30대 남자가 끌고가 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8월 26일에는 동구 수정동에서, 8월 27일에는 동래구 온천동에서 각각 9세, 13세 여아 납치미수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8월 28일 동래구 우2동에서는 7세 남아 유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이 중 온천동 사건의 범인을 검거, 연쇄살해사건 및 기타사건들과의 연관성을 추궁했으나 무관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해 12월 당시 치안본부는 용의자의 몽타주가 담긴 전단지 10만 장을 제작해 배포하는 동시에 ‘현상금 100만 원’을 내걸고 현상수배를 하고 검거경찰관에겐 1계급 특진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끝내 범인을 검거하는 데 실패했다. 그 무렵 유사한 수법으로 피해를 당한 어린이들의 진술을 분석해 좁혀진 범인의 윤곽은 ‘키 170cm가량의 왜소한 체형을 갖고 있는 20~30대의 남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