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만 둘 있는 어느 집 얘기다. 맏아들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더니 마침내 외교관이 되었고,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작은아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장삿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더니 삼십 대 중반이 되자 부모님 집 근처에 작은 슈퍼를 차렸다. 맏아들은 늘 해외 근무를 하다 보니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아들이었다. 그에 비해 작은아들은 수시로 본가를 드나들었다. 슈퍼에 시제품이나 공짜 샘플이 들어왔다며 들렀고, 형광등을 갈아주거나 고장 난 수도를 고치러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날은 슈퍼 문을 닫았다. 나는 그 집 작은아들을 볼 때마다 그의 슈퍼가 더욱 잘 되기를 빈다.
자식이 여럿 있어도 부모에 대한 책임을 절실하게 느끼는 자식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삼십 년 전의 일이다. 여동생이 겨우 돌이 지난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미용학원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락을 했더니 동생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이 친정을 돕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며, 앞으로 이 년만 더 언니가 친정을 도와주면 그다음은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동생이 그 말을 하게 된 경위가 짐작되었다.
그 무렵 나는 친정 일로 무척 힘들었다. 얼마 안 되는 아버지의 유족 연금이 수입의 전부였는데, 학생이 셋이었다. 쌀을 들여놔 주고 나면 연탄이 떨어졌고, 연탄을 들여놓고 나면 공납금 고지서가 나왔다. 내가 부지런히 과외수업을 하러 다녔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엄마도 제발 나만 바라보지 말고 무슨 일이든 좀 해보세요.”
사실 엄마는 돈벌이에 나설 용기도, 어떤 대책을 세울 요령도, 억척스런 면이라곤 조금도 없는 분이었다. 아마 내가 한 그 말이 바로 동생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미용사 자격증을 딴 동생은 시내 큰 미용실에 들어가 반년 동안 실습을 했다. 낮에는 미용실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밤이면 미용실에 홀로 남아 가발을 갖다 놓고 헤어컷과 ‘파마 롤’ 마는 연습을 했다. 나 때문에 대학 진학도 못 하고 이십 대의 대부분을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했던 동생이 다시 고생길을 택한 것이다.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
마침내 동생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상가에 네 평짜리 미용실을 차렸다.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는 미용실이었다. 파마머리를 말고 있는 동안 손님의 손톱 손질을 해주고 어깨 안마까지 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차츰 단골이 늘었다. 일 년 후에는 보조 직원을 써야 할 정도가 되었고, 엄마에게 송금하는 돈도 조금씩 늘어갔다. 돈이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들어오는 것. 자존심을 버려야 얻어지는 게 아니던가. 내 눈에 동생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마라톤을 뛰고 있는 선수였다.
동생은 다른 형제들보다 엄마를 더 애틋하게 생각했다. 나이 마흔둘에 자식이 여섯이나 딸린 미망인, 엄마의 고된 삶을 생각하며 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엄마는 건강 운도 나빴다. 일흔하나라는 나이에 폐가 조금씩 굳어지는 병이 왔다. 독한 약을 한 움큼씩 먹어야 했기에 늘 입이 썼다. 엄마를 보고 오면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친정이란 벽에 단단히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타일(tile) 같은 내 삶을 생각하며 우울해했다.
늘 파마약을 만져서인지 동생의 손은 얼굴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손님이 많은 날은 겨우 한 끼만 먹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거나 소문난 식당의 음식을 사갖고 포항에서 대구로 달려왔다. 동생은 엄마 앞에서 언제나 씩씩하고 명랑했다. 어쩌면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친정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 말은 너무 얕아서 내 미안함을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동생의 노력과 헌신은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해 가을, 동생은 미용실을 정리했다. 엄마에게 송금하는 게 일하는 재미였는데, 그 재미가 사라지니 더 이상 일하기 싫다고 했다. 인생의 두 가지 축을 이루는 것은 의미와 재미라고 한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야 재미도 있다는 뜻일 게다. 나는 동생의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동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엄마를 제 능력껏 보살폈다. 동생을 지켜보면서 나는 간간이 ‘한 사람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우리 집의 경우처럼 궂은일, 귀찮은 일, 부담스러운 일을 맡아 하는 ‘한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돌아보면 나는 엄마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자식도, 가까이에서 알뜰히 보살펴주는 자식도 아니었다. 게다가 동생의 삶을 힘들게 한 언니이기도 하다. 엄마가 밥맛을 잃고 힘들어할 때 맛있는 음식을 들고 자주 가보지 않은 게 가장 후회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목이 메는 벌이다.